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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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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 1951 김용식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김용배 육군준장 |
1951 박노규 육군준장 | 1951 김백일 육군중장 | 1951 김홍일 육군중장 | 1951 함준호 육군중장 |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
1951 최용남 해병소장 | 1951 김성은 해병중장 |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 1952 이형근 육군대장 | 1951 권동찬 육군준장 |
1952 김종오 육군중장 |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 1953 장덕창 공군중장 | 1953 최용덕 공군중장 |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
1953 김교수 육군대위 | 1953 김한준 육군대위 | 1953 김용배 육군대장 | 1953 민기식 육군대장 | 1953 임충식 육군대장 |
1953 한신 육군대장 | 1953 김점곤 육군소장 | 1953 이성가 육군소장 | 1953 이용문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 1953 김동빈 육군중장 | 1953 김종갑 육군중장 | 1953 백인엽 육군중장 |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
1953 유재흥 육군중장 | 1953 최영희 육군중장 | 1953 함병선 육군중장 | 1953 최치환 총경 | 1954 김만술 육군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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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임선하 육군소장 |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 1954 김옥상 육군일병 | 1954 조재미 육군준장 |
1954 안낙규 육군중사 | 1954 박병권 육군중장 | 1954 이응준 육군중장 | 1954 이준식 육군중장 | 1954 장도영 육군중장 |
1954 최석 육군중장 | 1954 최창언 육군중장 | 1954 박옥규 해군중장 | 1954 김석범 해병중장 | 1955 김창룡 육군소장 |
1955 정긍모 해군중장 |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 1960 미군무명용사 -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 1961 국군무명용사 - |
1964 박정희 대통령 | 1966 이종세 육군상사 | 1966 강재구 육군소령 | 1966 이인호 해병소령 | 1967 송서규 육군대령 |
1967 채명신 육군중장 | 1967 지덕칠 해군중사 | 1967 정경진 해병대위 | 1967 신원배 해병소위 | 1968 최규식 경무관 |
1968 이익수 육군준장 | 1968 최범섭 육군중령 | 1970 이세호 육군중장 | 1972 이무표 육군대위 | 1972 임동춘 육군대위 |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 1980 육군대장 | 2002 장철부 육군중령 |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 2011 조달진 육군소위 |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김영옥 Young-Oak Kim | 金永玉 | |
출생 | 1919년 1월 29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사망 | 2005년 12월 29일 (향년 86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임관 | OCS(사관후보생)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1년 ~ 1946년 1950년 ~ 1972년 |
최종 계급 | 대령 |
주요보직 | 미 제7보병사단 제31보병연대 1대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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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한국계 미국인 군인. 한국 이름은 김영옥(金永玉)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참전영웅이자 3개국에서(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그런데 정작 미국에서는 수훈십자장(명예 훈장 다음으로 높은 육군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와 함께 싸운 동료와 그의 부하들은 "그는 명예 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라고 했지만 끝내 받지 못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6.25 전쟁에서 명예 훈장을 받은 히로시 미야무라 육군 하사, 장진호 전투의 중국계 미국인 커트 리 (중국명은 리추웬) 해병대 중위와 더불어 동아시아계 미국인 출신 3대 전쟁영웅으로 미국 사회에서 대우받고 있다.
2. 그의 일생
2.1. 입대하기까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 교포 2세이며[2], 고등학교 졸업후에 로스엔젤레스 시티 칼리지에 들어갔지만 1년 뒤에 자퇴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던 도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모병소로 갔으나 그 당시에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뒤 1941년에 법이 바뀌어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들어가 육군 병으로 입대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선발, 장교가 되고 나서 인사 실무자의 착오로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2세대로 이루어진 육군 제100 보병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에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이 제100 보병대대는 이른바 "니세이(Nisei) 부대"로도 불렸는데, 이는 교포 2세대를 뜻하는 일본어 '니세이(にせい)'에서 유래된 것이다. 부대 명칭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대대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내통할지 모른다는 의심 하에 일본계 미국인을 예방적으로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의 하와이 침공이 임박하자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침략군과 내통하여 정보를 제공하거나, 심지어 내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하와이 거주 일본계 미국인들 가운데는 주방위군 병사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심 때문에 이들은 모두 무장해제되어 격리되었고, 이어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이런 차별이 공식화되었다.[3] 그러나 상당수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조국 미국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기존 주방위군 병사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본토로 이동시켜 별도로 부대를 조직, 일본과 접촉할 일이 없는 유럽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산물이다.그러나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해도 균일한 집단은 아니어서 부대 편성시에 갈등도 있었다. 당시 일본계 미국인은 크게 샌프란시스코 중심으로 미 본토에 살던 집단과 하와이에 살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생김새만 비슷하지 정서가 꽤나 달랐다. 미 본토 출신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반해, 하와이 출신들은 일본과는 무관한 '하와이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다.[4] 그러다 보니 김영옥이 지휘하기에는 한국계에 대한 편견이 없던 하와이 출신 니세이들이 좀 더 수월했다고 한다.
당시 대대장을 맡은 패런트 터너(Farrant L. Turner) 중령도 하와이 주방위군 출신이어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영옥이 원한다면 다른 부대로 전출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김영옥은 "여기엔 일본인도 한국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서 그냥 붙어있었다고 한다. 추후 김영옥 선생의 패기와 솔선수범에 감복한 일본계 병사들은 그를 큰형처럼 따랐으며, 돌아가시기 전 행사 영상을 보면 일본계 노병들이 그를 극진히 에스코트하고 예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쨌건 다수를 차지하던 하와이 출신 니세이들은 특히 바다 수영과 험한 화산지대의 야외 생활로 단련되어 매우 강인하고 터프했으며, 김영옥이건 하와이 출신이건 본토 출신이건 미국인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매우 강렬하여 이들은 대단한 정예부대로 성장한다.[5]
제100 보병대대는 1943년 7월에 대대 깃발과 모토("Remember Pearl Harbor")를 받았으며, 8월에 유럽 전선으로 출정하여 미 육군 제5군에 배속된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 전선의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북진했고, 1944년 초부터 유명한 몬테카시노 전투에도 투입된다. 이들은 갖은 멸시와 차별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대단하여, 전선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용맹함으로 금세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1943년에만 병력의 60%가 사상자가 될 지경이었다. 김영옥도 산타 마리아 올리베토 일대의 야간 전투를 치르면서 2개 분대만을 데리고 독일군 기관총 진지 여러 개를 제압해 은성훈장을 받았으나, 허벅지에 총상도 입어 약 1달간 후송되어야 했다. 이후 치료받고 돌아온 병력을 합쳐 약 650명으로 1944년 초 몬테카시노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여기서도 독일군이 완강하게 방어하는 몬테카시노에서 2주 반만에 90%의 사상자가 나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제100 보병대대는 별칭으로 "퍼플 하트[6] 대대"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부대원들도 자신들처럼 과감하게 몸을 내던지지 않는 장교들은 멸시하고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7] 그러나 김영옥은 항상 솔선수범하며 자신보다 부하들의 안위를 신경썼기 때문에, 니세이 병사들도 그를 '사무라이 김'이라고 부르면서 철저히 신뢰하고 복종했다.
1944년 5월이 되자 미군 제5군은 로마 해방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때 독일군의 적정 파악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이때 야전군 사령부에서는 예하 부대들에게 독일군 포로들을 잡아오라고 닦달하였다. 이때 김영옥은 중위로 대대 정보참모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자원하여, 기어이 일병 한 명만 대동하고 독일군 2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한다.[8][9]
이로 인해 원하는 정보를 얻은 제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크게 기뻐하며, 직접 수훈십자장을 주기로 결정한다.[10] 이 훈장 수여식은 약 1달 뒤인 로마 해방 이후에 열렸는데, 이때 클라크 장군은 김영옥이 몇 달 전에도 은성훈장을 달아준 동양계 장교임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은성훈장에 이어 수훈십자장까지 받는 김영옥이 왜 아직도 중위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김영옥은 정기 진급심사에서 번번히 탈락했다고 대답했다. 클라크 장군은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 김영옥에게 꽂아주면서 대위 진급까지 즉석에서 시켜줬다. 이러한 클라크 장군과의 인연은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6.25 전쟁까지 이어진다. 김영옥이 후일 6.25 전쟁에 투입되기 전 도쿄에 잠시 머물 때 제국호텔에서 미군 고위 장교단의 리셉션이 열렸는데, 당시 UN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직전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은 김영옥을 금세 알아보고 한참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위의 리셉션에서의 일이 <아름다운 영웅>에서 나오는데, 당시 김영옥은 클라크 장군이 리셉션을 연다는 얘기를 듣고도 참여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으나, 그와 알고 지내던 장교들이 그를 반강제로 참여시켰다고 한다. 더불어 리셉션 당일 제국호텔에는 장군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수많은 장교들이 즐비하였는데, 정작 클라크 장군 본인은 옆에서 동행하는 휘하 장교로부터 각 장교의 성명 및 계급만을 간단히 들은 후 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근데 김영옥의 차례가 온 순간, 장교가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클라크 장군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영! 너 영 아니냐!' 라며 먼저 알아보았다고 한다. 거기에 방금 전까지 간단하게 넘어가던 모습과는 달리 김영옥과 한참 대화를 나누자, 같이 있던 장교가 슬슬 넘어갈 차례라고 넌지시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야, 아니야. 난 좀 더 이 젊은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의 유럽 전선에서 제100 보병대대는 본국에서 증원된 또 다른 니세이 부대인 제442연대전투단 소속으로 편입되어 보충을 받고 계속 격전을 치렀다. 이 연대전투단의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도 전의가 충만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연대 모토도 "Go for Broke!"[11]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해방 후 북진하는 과정에서 도하 작전을 일부러 2번 실패한 뒤에 3번째에는 진짜로 밀고 들어가 버려서 전사자 단 한 명도 없이 피사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김영옥은 전선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독도술에 능하며 기상천외한 전술로 상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전황이 정체상태에 빠지자, 제442 연대전투단과 제100 보병대대는 프랑스 전선으로 전환 투입되는데, 여기서도 김영옥은 미군 초유의 '반자이 돌격'의 주인공이 된다. 비퐁텐(Biffontaine)에서 김영옥 소대장이 수류탄 들고 독일 육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다 총에 맞자, 이에 울컥한 소대원 전부가 "반자이~!"라고 소리 지르며 기관총 진지에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서 방어하던 독일군들을 충격에 몰아넣었고,[12] 김영옥 또한 사실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독일군 진지에 까 넣어 부대원을 엄호하기도 했다. 이는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돌격으로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13]
이후 제100 보병대대가 비퐁텐에서 포위당해 전투를 치르다 김영옥은 총탄 3발을 맞았으며, 숲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느라 무려 4일만에 응급치료소로 이송될 수 있었다. 그 동안 이미 출혈도 상당했고 염증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페니실린 덕택에 겨우 고비를 넘었다. 그리고 벌지 전투로 후방에 있던 부상병들이 다시 전방으로 소환될 때 제100 보병대대로 복귀하여 프랑스 남부 해안의 이탈리아 접경지대를 방어하였으나, 이 지역은 계속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본국으로의 장기 휴가를 신청하고 1945년 2월에 다시 부대를 떠나게 된다. 이 무렵에 김영옥이 휴가를 신청한 것은 당시 연대장이 교체되기 직전이었는데, 새 연대장이 김영옥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대대장이 김영옥에게 겸사겸사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했던 것이다. 김영옥은 이 충고를 받아들여 곧 예정된 소령 진급도 마다하고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나는데, 오히려 신임 연대장은 김영옥을 소령으로 진급시키고 제100 보병대대 대대장 지휘도 맡길 요량이었다고 전후 예편한 뒤에 직접 만나 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약 이대로 되었다면 미 육군 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야전 대대장 기록을 더 일찍 누릴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김영옥은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금의환향하여 가족 및 지역사회 한인들과 상봉하고 시간을 보낸 뒤, 원대복귀 준비를 하였으나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원대복귀가 취소된다. 이후 북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신병훈련소 작전참모로 발령되어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의 일본 상륙을 준비하던 제91 보병사단에 합류하라는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이어 8월에 일본마저 항복하자 전속이 취소되었으며, 계속 신병훈련소에 근무하다가 1946년에 전역을 신청한다.
2.3. 6.25 전쟁에서의 활약
전역 후에는 세탁소[14]를 열었는데, 이게 또 당시 미국에 흔치않던 코인 세탁소 방식이라 상당히 잘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이후 예비역 소집 형식으로 재입대를 하고 한반도 전선에 도착했다. 이때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를 밟아본 것이라 한다.투입되고 나서 실향민[15] 사이에서 뽑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맡다가 1951년 4월에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임명되었다. 이후 별 볼일 없던 31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는 계기를 만들었다. 엄청난 타격을 입어서 사기도 최악이었던 연대에서[16] 솔선수범하며 활약해 장병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5월 말부터는 적군이 공격을 해왔는데, 당시 김영옥의 상관은 샤워하러 후방에 간 것이 발각되어 해임된 대대장의 후임으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대대장을 의도적으로 보임하였다. 이는 이후 김영옥 대위를 승진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김영옥이 실질적인 지휘를 대신 맡게 한 것이다. 이후 김영옥은 10월에 소령 진급을 겸해서 정식으로 1대대 대대장에 보임함으로써 미 육군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되었다.
1951년 6월에 오인 포격을 받아서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뒤 8월 27일에 복귀했다.[17] 이때 오인 포격을 받은 이유가 걸작인데, 포병대대[18]의 판단에 따르면 아군치고는 너무 북쪽까지 진군해 있어서 적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1개 보병 대대로 전선을 돌파해서 겨우 20여일 만에 60km나 북진해 현재의 휴전선 형태를 만들어냈다.[19]
이후 52년 가을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이때의 부상이 군 경력에 있어서 큰 아쉬움을 남겼는데, 당시 미 육군에는 전쟁지역에서 대대장이 일정 개월 실전경험을 채우면 자동적으로 중령으로 진급시켜주는 제도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영옥 소령이 개월 수를 다 채우기도 전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있는 도중에 이 제도가 사라져버렸다. 여담으로 평전에 따르면 이때 입은 중상 때문에 얻은 후유증의 고통으로 무척 고생하였다 한다. 오죽하면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인사카드에 두꺼운 진료기록이 남아 있으면 장군 진급 물 건너 갈 거 각오해야한다."라는 말까지 남겼을까.
2.4. 화력중시
화력덕후라 지원화력을 꽤나 중시해서, 유사시 필요하다면 사단, 군단 포병까지 가리지 않고 지원 요청을 했다. 심지어는 독일군이 육군과 공군 방공포병의 대공포를 지상 지원에 쓰는 걸 보고, 루프트바페가 박살나서 놀고 있는 아군 대공포 부대를 끌어다가 포병 포격 이후 근접 제압 사격에 쓰기도 했다. 저 당시 "저 대공포 부대 좀 빌려주십시오." 하니까 상관이나 대공포 부대에게 "야, 지상군 작전에 대공포 가져다가 뭐 하게?"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평전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중대급 작전에 군단 포병을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자 장교들이 다들 "부탁해봐야 소용없을걸?"하며 반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중대급 작전이면 사단 포병대에서나 지원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때이다. 그러나 정작 군단에 포병지원을 요청하였더니, 군단 포병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아무래도 당시 포병들이 대포병 사격 대비 때문에 평상시엔 대포를 잘 쏘질 않아서 심심했던 모양. 김영옥의 설명을 요약하면 "군단 포병은 사단보다 대구경 야포를 쓰니까 화력도 세고, 자주 지원요청을 받지 못하니 사단 포병보다 더욱 신나게 쏠 거다."라고 한다. 당시 미 육군의 군단 포병에 배치된 야포들은 45구경장 155mm 평사포(롱 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8인치 곡사포는 기본이고, 이탈리아 전선이 산악지대에 구축된 요새지대를 공격/방어하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공성포인 36구경 240mm 중포까지 군단에 상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대로 군단 포병들은 포격을 갈겨댔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독도법이 뛰어나서 전투상황에서 포병 화력유도 할 적에는 포병 관측장교보다 명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국방일보에 일대기가 연재된 당시에 포병 관측장교와 내기를 했는데 포병 관측장교는 조정을 해도 맞지를 않았으나 본인은 조정사격 3발을 쏴서 명중을 시켰다고 한다.
이런 든든한 화력지원을 통해 김영옥이 지휘한 부대는 2차 대전 및 한국전 내내 훌륭한 전과를 쌓았으며, 이를 본 미 육군 역시 포병 운용에 대한 생각을 바꾼 덕분에 현대 미 육군 교리에 이런 부분이 들어가기도 했다.
위에서 바로 언급된 내용과는 좀 거리가 멀지만, 김영옥이 100대대에 막 배치받은 후에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기관총을 사격 시 나머지 분대원들로 하여금 적에게 접근시키는 방식으로 훈련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이 방식으로 실제 전장에서 활약하게 되자, 미군에서 해당하는 방식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전술 및 전략 교범에 추가시켰다고 한다.
2.5. 전쟁 이후
6.25 전쟁 종료 이후에 1972년까지 육군에 있었고, 최종 계급은 대령. 그동안 미 육군보병학교 교관, 독일 주둔 육군 대대장,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등을 역임했다.당시에 미 육군은 선배 장교들과 후배 장교들 간의 '스폰서' 관행이 만연해 있었고, 그의 인품과 능력을 마음에 들어 하는 장군들 또한 많았던 만큼 본래 동북아계 최초의 장성 진급도 가능했을지 모른다.[20] 하지만 본인이 전후 한국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에 전출을 신청해버리면서 진급길과 멀어져버렸다. 참고로 저서 《영웅 김영옥》에 따르면 거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은 미군장성 퇴물집합소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김영옥을 아끼던 당시 미8군 작전참모[21]는 뭐하는 거냐며 그를 말렸지만,[22] 결국 김영옥 중령의 결심을 꺾지 못하고 '거긴 퇴물들밖에 없어서 널 질투해 인사고과도 제대로 안 줄 건데.'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 생각도 있고 원래 뭔가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리 후회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군사고문관 시절 해밀턴 H. 하우스 사령관이 군사고문단장 시절 지시한 6.25 전쟁이 다시 일어날 때 전시동원 계획과 개선책을 브리핑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하우스가 한국을 떠나자 명령은 잊어졌고, 사령관이 되어 다시 돌아와 브리핑을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김영옥 중령의 하드캐리로 브리핑은 사소한 문제만 빼고[23] 무사 종료되었고, 브리핑이 마음에 들었던 하우스 사령관은 김영옥 중령을 특수임무로 비밀리에 특사로 쓰며[24] 몇 가지 지시를 한다. 첫 번째는 한국군 전시 병력동원계획 작성으로 예비군 치장물자 조사와 병력 이동계획이 병행되어 처리되어야 하는 작업이고,[25] 이 과정에서 항공력의 열세에 있었던 대한민국 공군을 커버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 방공포병 부대 창설[26]이 건의되어 호크와 나이키 유도탄이 대한민국 육군에 도입됐다.[27][28]
2.6. 전역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서 여러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쟁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가면 자기가 살던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다고. 실제로 6.25 전쟁 때부터 직접 고아원을 만들고 부하들과 같이 고아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 소식이 끊겼지만 죽기 몇 년 전에 자신이 돌본 고아 중 몇 명과 만났다.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을 만드는데 공헌했고,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이라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시아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도 설립.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조사 위원회에도 참가했고, 위안부 문제에도 활약했다.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위안부 관련 결의를 하려고 하자 일본계 미국인들이 반대 로비를 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유럽에서 싸운 게 뭘 위해서였습니까?라면서 일본계 미국인 중 2차 대전 참전자들을 설득해 반대 로비를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29] 미국의 일본계 내에서 2차 대전 참전자들은 '큰 어르신'이라서 이들의 발언권이 컸다고 한다.
전쟁 당시 입은 많은 상처 때문에 평생 동안 불편했다고 하며,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으나 암투병 끝에 12월 29일 86세로 사망했다. 87세 생일을 정확히 1달 앞둔 시점이었다.
김영옥 대령과 운명을 공유한 노병들. 이들은 모두 일본계 미국인들이다.
생전에 김영옥 대령과 절친한 사이였던 1948년, 1952년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김 대령과 죽마고우였던 그는 이날 조사를 통해 독립운동가의 아들들인 고인과 나는 5살 때부터 희노애락을 같이했다며, 지난 가을에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서 만났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말했다.
추도예배 전경.
2005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투병 중인 김영옥 대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는데 원래 전쟁 이후의 훈포상이 끝나 오랫동안 받지 못하다가 정부에서 군을 설득한 끝에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일이 국내에 점차 알려지면서 2011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그의 삶이 수록되었다.
3. 기타
그의 활약상은 재미언론인 한우성에 의해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동명의 만화로도 출판되었다. 또한 2011년 1월부터 6개월 동안 국방일보에 책 내용을 연재한 뒤, 장병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독후감을 모집하기도 했다.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교재에 수록되어 있는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나머지 둘은 충무공 이순신과 권율)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일본계 부대인 100대대의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인근에는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붙인 공립중학교 Young Oak Kim Academy(약칭 YOKA)가 있다. 2009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한국계 미국인 이름이 붙은 미국 최초의 학교이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유일하게 단성교육을 실시[30]하고 있는 중학교라고 한다.
미 서부를 남북으로 잇는 5번 고속도로 오렌지카운티 일부 구간을 그의 이름을 따서 도로명으로 등록했다고 한다. 시큐리티팩트 기사
누나 김월나(Willa Kim, 1917.07.03. ~ 2016.12.23.)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1950년대 이전부터 무대의상을 제작해왔으며 토니상 에서 의상부문을 2회 수상하였다. 2013년 토니 상 리셉션장
2011년 MSN 선정 미국의 전쟁 영웅 16인 | |
1 | 조지 워싱턴 (1732 ~ 1799) |
2 | 너새니얼 그린 (1742 ~ 1786) |
3 | 율리시스 S. 그랜트 (1822 ~ 1885) |
4 | 로버트 E. 리 (1807 ~ 1870) |
5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890 ~ 1969) |
6 | 조지 S. 패튼 (1885 ~ 1945) |
7 | 필립 카니 (1815 ~ 1862) |
8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1839 ~ 1876) |
9 | P. G. T. 보우리가드 (1818 ~ 1893) |
10 | 더글러스 맥아더 (1880 ~ 1964 ) |
11 | 오디 머피 (1925 ~ 1971) |
12 | 윌리엄 F. 딘 (1899 ~ 1981) |
13 | 김영옥 (1919 ~ 2005) |
14 | 존 매케인 (1936 ~ 2018) |
15 | 존 케리 (1943~) |
16 | 노먼 슈워츠코프 (1934 ~ 2012 ) |
2011년 6월 20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포털 msn.com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영옥이 뽑힌 포털 사이트에서 선정된 전쟁영웅 16인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 조지 워싱턴 -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군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 너새니얼 그린 - 워싱턴의 친구이자 오른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키고 직접 전선에 나갔으며 그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가 멜 깁슨 주연의 '패트리어트: 늪속의 여우'다. 또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나다니엘 블랙'이란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율리시스 S. 그랜트 - 남북전쟁 당시 미합중국 육군 장군으로 이후 미합중국 제18대 대통령에 취임. 리 장군을 물리치고 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끌었다.
- 로버트 E. 리 -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합 육군 장군. 남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사람이다. 미국 역사 전후 위대한 장군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 이례적으로 미국 입장에선 반역자인데 포함되었다.[31]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전쟁 이후 제34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 조지 S. 패튼 - 육군. 그 유명한 패튼 장군. "이제 제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들어가면 한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뒤에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고 '응, 할아버지는 루이지애나에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대신 제군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해주어라. '아가, 이 할애비는 위대한 3군과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와 함께 용감하게 진군했단다!'"[32]라는 연설로 대단히 유명하다.
- 필립 카니(Philip Kearny) – 육군.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활약.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육군 기병중령. 리틀 빅혼 전투의 바로 그 인물이다.[33]
- 피에르 G.T. 보러가드(Pierre G.T. Beauregard) -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합 육군 장군
- 더글러스 맥아더 - 육군 원수.
- 오디 머피 - 육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크게 활약하여 2년 동안에 7계급이나 승진했다. 이등병으로 참전해 6대의 전차를 파괴하고 240명의 독일군을 사살(부상을 입히거나 항복시킨 병사는 제외하고)해 리얼 콜 오브 듀티를 찍은 걸로 유명. 나중에는 영화배우로 성공했다.
- 윌리엄 F. 딘 - 육군. 6.25 전쟁에 사단장으로 참전. 전황이 급박해지자 직접 M9 바주카를 들고 북한군의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이후 후퇴 중 포로로 잡혔으나 포로교환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단 하나의 기밀도 발설하지 않았다.
- 김영옥
- 존 매케인 - 미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었고, 나중에는 미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집안 자체가 미국 해군 집안으로, 아버지 존 매케인 2세는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현역 해군대장이었으며, 북베트남이 당시 소령이던 그를 붙잡은 뒤 제독의 아들을 잡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 존 케리 - 베트남 전쟁에 해군 강상경비정대(Brown Water Navy) 장교로 참전, 최종 계급 중위. 2004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제68대 미국 국무장관.
- 노먼 슈워츠코프 - 육군 대장.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사령관을 맡았다. 베트남 전쟁의 재판을 우려하던 언론과 군사전문가들의 예상을 속시원히 깨고 60만 이라크군을 순식간에 털어버렸다.
김영옥 대령과 비슷하게 2차 대전 중 미군으로 복무하여 전공을 세운 한인 인사들 중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도 있고 6기 격추기록의 에이스도 있다. 상세는 한국계 미국인 문서를 참고하자.
국가보훈처에서 2019년 1월의 한국전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채명신 장군과 친구였다고 한다. 고지전이 슬슬 시작되던 무렵 채명신이 몸 담고 있던 제7보병사단 칠성부대 옆에 미 7사단 31연대가 이전왔는데, 그때 31연대 1대대 작전참모가 바로 김영옥 대령(당시 대위)이었던 것.[34] 명장은 명장을 알아본다는 말이 실제인 건지, 이 둘은 이때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보통 김영옥 대령이 채명신 장군이 있던 칠성부대 쪽으로 와서 맥주를 즐겼다고 한다.[35][36] 이 둘의 인연은 이후 꽤나 큰 활약을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방위사령부 관련으로 UN사와 마찰을 빚자[37] 한국 측 특사로 채명신 장군이, 미국 측 특사로 김영옥 대령이 다시 만나게 된 것. 쉽진 않았지만 '1공수 및 2개 보병대대 원대복귀, 다만 그 2개의 보병대대는 수방사로 행정 배속'[38]의 형태로 결국 잘 마무리 되었다.
김영옥 대령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출동! 김영옥 대령!'에서 인터뷰하기를, 어린시절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았다보니 노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할 줄 아는 한국어가 없다고 한다.
[1] 2005년 02월 04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리틀 도쿄에서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프랑스 총영사에게서 전달받은 뒤의 모습.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영옥과 죽마고우이자 한국계 피가 섞인,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새미 리, 그리고 김영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미국 내에서 유명한 동성애자이자 일본계 배우인 조지 타케이. 조지 타케이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시민들을 위한 민권운동에 적극 투신했는데 그 인연으로 같이 참석한 것.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니얼 이노우에 상원의원이 명예훈장을 받을 때도 동석했다.[2] 아버지인 김순권은 독립운동가였으며, 이승만 계열 지지자였다.[3] 이는 미국 행정명령 역사상 최악의 1,2위를 다투는 조치이며, 멀쩡한 일본계 미국인들은 갑자기 돌변한 백인 이웃의 냉대, 조롱, 린치를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4] 실례로 본토 출신 상병이 일본어로 군인답게 행동하라고 지시하자 하와이 후임들이 하와이 슬랭을 쓰며 대들고 린치하는 하극상이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5] 일본계라는 차별과 멸시를 떨쳐내는게 컴플렉스이다 보니, 이런 니세이들은 모국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이들 니세이 부대원들에 대한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JAP'이었으며, 1960년대에 미국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그제야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6] 전상장. 일정 수준 이상의 적 공격에 의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한 미군 장병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7] 일부 백인 장교들이 후방에서 돌격 명령만 내리면 피진 잉글리시로 '네가 가면 나도 간다'고 말대꾸하기 일쑤였다고 한다.[8] 본인 스스로 "밤에 오히려 경계가 심하니까 경계가 심하지 않은 아침에 가면 되잖아?"라고 했다. 실제로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간이 아침 직전의 새벽녘이다. 해뜨기 직전이라 긴장도 풀리고,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직전이라 매우 깜깜하다. 때문에 침투작전도 주로 이 시간대에 시도한다.[9] 자서전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당시에 서로의 방어선에 있던 독일군, 미군 모두 야간에 집중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밤을 새서 그런지 곯아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김영옥은 이를 노리고 평소에 자기를 잘 따른 병사들 중 한명을 데리고 지뢰밭을 기어서 독일군 참호로 들어갔다. 김영옥에게 붙잡혀온 독일 육군은 김영옥과 같이 간 병사가 자기 입에 총을 집어넣을 때까지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10] 마음 같아서야 최고 훈격인 명예훈장까지 주고 싶었으나, 이는 본국에 상신하여 미국 대통령 재가까지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 재량으로 줄 수 있는 수훈십자장 수여를 결정했다고 한다.[11] 하와이 도박장 속어다. 뜻은 올인, 한마디로 박살날 각오로 덤빈다는 뜻이다.[12] 그러나 회고록에는 이 돌격이 그닥 성공적이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병들이 찌른 것은 나무 울타리여서 찰과상 때문에 다친 보병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진짜 기관총 진지를 침묵시킨 것은 뒤에 서술한 김영옥 소위 자신이 까넣은 수류탄이라 한다.[13] 지금도 비퐁텐에 있는 교회 벽에는 그와 제100 보병대대의 무훈를 기리는 명패가 걸려있다(구글맵).[14] 지금도 미국 사회의 세탁업은 한국계 미국인 및 재미 한국인들이 주름잡고 있다.[15] 북한에서 탈출한 의사, 교수, 교사 등등 상위계층이었다.[16] 미 7사단 31연대는 이전 장진호 전투에서 동편 방면을 방어하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여 전멸에 가까운 대피해를 입었고 철수과정에서 부대가 와해되었으며 연대장을 포함한 대다수 전사자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데다 부상자들은 트럭에 방치된 상태로 중공군에게 수백 명씩 사살당하기까지 했다. 역시 중공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부대편제를 보존하면서 몇 배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철수한 해병 1사단과 비교될 수 밖에 없어 이후 미 해병대가 미 육군 부대를 멸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31연대의 참혹한 패주에 대해서는 로이 애플맨이 1987년 ‘장진호 동쪽(East of Chosin)’에서 다루었으며 2013년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1500명 묻은 31연대 전투단 장진호전투의 5일[17] 국방부 정훈서적으로 있는 영웅 김영옥에선 행군하다 대낮에 전폭기의 폭격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묘사했다. 이후 미 육군 항공대가 무조건 김영옥은 살리라며 한국엔 김영옥을 수술할 기반이 없으니 오사카까지 헬기로 수송시킨다.[18] 이 포병대대는 미 육군에서도 사격실력이 가장 형편없기로 유명한 대대였는데 이상하게도 이 날에는 사격이 정확했다. 문제는 그게 아군이었던 게 문제였었다. 추후 원인분석단계에서 이 포병대에게 정보를 준 정찰기는 포판(반사판 같은 물건이다) 남쪽에 1대대 지휘소가 있는 것을 봤지만 후술했듯, 너무 북쪽에 차려진 것으로 판단하여 포판을 옮겨서 아군으로 위장된 적의 지휘소라고 보고했고, 실제 보고 위치도 추후 확인된 결과 실제 위치보다 훨씬 북쪽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만일 원인분석 말마따나 사격단계에서 훨씬 북쪽을 노리고 쏘았다고 했을 때 제대로 쐈더라면 안 다쳤을텐데 역시 궤멸적인 실력이다. 그리고 확실히 죽여 버리겠다면서 VT신관을 쓴 것이 결정타이다.[19] 만약 이 북진이 없는 상태에서 휴전되었다면 서울은 아마 예루살렘과 비슷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고, 부산은 한국의 텔아비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전까지의 전선 모양은 서울만 돌출된 형태에서 감싸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즉, 서울과 그 주변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전선이 서울보다 남쪽에 있었다.[20] 실제로 그는 중령 때 이미 장성 코스를 전부 밟았다. 실전경험이 있는 대대장, 주요 사령부의 작전장교, 보병학교 교관 중 하나라도 역임하지 못하면 장성을 달 수 없었다. 오인 사격으로 인한 부상이 없었다면 6.25 때 중령으로 진급했을 것이며, 이 시점엔 대령도 달았을 실적이었다. 그 놈의 멍청한 아군 포병대의 궤멸적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때 발목 부상을 입어 평생 고통스러워하셨다. 육체적으로도, 경력적으로도 제대로 발목이 잡힌 셈.[21] 멜 휴스턴 준장(당시 계급).[22] 당시 멜 휴스턴 작전참모는 입이 매우 험하기로 소문났는데 김영옥 중령이 군사고문단으로 한국에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김영옥 중령의 사무실에 전화해 "야 이 미친놈아, 니가 있을 곳은 군사고문단이 아니고 길 건너에 있는 군단사령부 작전부서야 이 미친놈아!"라며 날뛰었다.[23] 브리핑 차트 하나가 잘못되었다. 김영옥 중령의 자료 요구량이 많아 군사고문단에서 잘못 주었다고.[24] 실제로 당시 군사고문단 소장인 얜시 소장에게 "김 중령은 비밀리에 특수임무가 있어 특사로 나에게 직접 지시를 받았으며, 김 중령이 필요할 경우 군사고문단 사무실을 떠날 수 있도록 하라" 라고 한다.[25] 국군 내에 무기와 탄약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성해야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군사고문단 차원에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26] 육군의 방공포병사령부로 이어지다가 공군으로 전환된 뒤, 대공미사일 전력이 주가 됨에 따라 공군방공유도탄사령부 명칭이 변경되었다.[27] 이는 대한민국 육군에 최초로 도입된 미사일이며 훗날 육군은 미사일의 국산화를 꾀하고 미사일을 따로 담당할 부대가 필요함을 느껴 80년대 중반에 유도탄사령부를 창설하게 된다. 이래저래 국군의 현대화에 이바지한 셈[28] 나이키/호크 미사일은 육군 방공포병사령부가 공군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다, 2000년도 중반부터 교체가 시작되어 현재는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천궁로 전면 교체가 완료되었다.[29] 캘리포니아 출신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과 하와이 출신 대니얼 이노우에 연방상원의원이 같은 민주당 소속 임에도 위안부 사안에서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을 김 대령이 캘리포니아에서 가졌던 영향력에서 찾기도 한다.[30] 학교 내에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이 따로 편성되어 있다.[31] 남북전쟁 이후 정식으로 시민권 회복이 이뤄진 때가 사후 100여년이 지난 1974년이다.[32] 영문: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출처[33] 리틀 빅혼 전투의 삽질이 임팩트가 너무 커서 저평가되긴 하지만 남북 전쟁 당시엔 남부연합군 최고의 기병 전문가 젭 스튜어트가 이끄는 기병대를 저지해 게티즈버그 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공훈도 많았다.[34] 그 당시 사실상 1대대장은 김영옥이었는데, 전임 1대대장이 워낙 막장이어서(작전 시작 직후에 전선에서 30km 후방에 있는 샤워실에서 샤워하기도 했다.) 연대장이 그 대대장을 자르고 얼굴마담으로 새 대대장을 세운 뒤 김영옥 대령이 실질적으로 대대장 역할을 맡게 한 것이다. 그때 김영옥 대령이 대위였는데, 당시 미군 규정이 대위는 대대장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이런 요상한 지휘계통을 갖게 되었다고.[35] 당시 미군 배급품 중에 맥주가 있었다고 한다.[36] 의외로 고대부터 전투현장에 식수를 보급하는 것이 현대에 페트병 생수가 나오기전까지 상당히 어려웠는데 냉장시설의 미비와 페트병의 부재로 이송중에 물이 썩어버려서 식수로는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체품이 고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는 술이 식수 역할을 대신했었다.[37] 같은 명칭의 부대를 2개 만들어(정확히는 수방사로 파견 후 동명의 대대를 재창설하여) 이중지원을 받고 있었다. 더해서 1공수(제1공수특전여단 '독수리' 부대)를 사실상 청와대로 상설 파견시켰다.[38] 실질적으로는 수방사의 지휘계통에 배속되게 한 것이다. 군을 동원해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의 의중(2개 보병대대를 자신을 방어하는 방패로 쓰려고 했었다는 것이 이런 기묘한 행각의 원인이었다.)을 잘 파악한 타협안이라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