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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18f><colcolor=white> 이름 | 에밀 카폰 |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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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 1951 김용식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김용배 육군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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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 1953 김동빈 육군중장 | 1953 김종갑 육군중장 | 1953 백인엽 육군중장 |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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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정긍모 해군중장 |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 1960 미군무명용사 -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 1961 국군무명용사 - |
1964 박정희 대통령 | 1966 이종세 육군상사 | 1966 강재구 육군소령 | 1966 이인호 해병소령 | 1967 송서규 육군대령 |
1967 채명신 육군중장 | 1967 지덕칠 해군중사 | 1967 정경진 해병대위 | 1967 신원배 해병소위 | 1968 최규식 경무관 |
1968 이익수 육군준장 | 1968 최범섭 육군중령 | 1970 이세호 육군중장 | 1972 이무표 육군대위 | 1972 임동춘 육군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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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에밀 조셉 카폰 Emil Joseph Kapaun | |
출생 | 1916년 4월 20일 |
캔자스 주 필슨 | |
사망 | 1951년 5월 23일 (향년 35세) |
평양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가톨릭 |
복무 | 미국 육군 (군종장교) |
1944 ~ 1946년 / 1948 ~ 1951년 | |
최종 계급 | 대위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쟁 6.25 전쟁 └ 운산 전투 |
주요 서훈 | 명예 훈장 리전 오브 메리트 퍼플하트 전쟁포로기장 태극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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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천주교 사제, 미국 육군 군종장교.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 미 육군의 군종 사제로 활동하던 중에 병사했다. 흔히 '한국전쟁의 성인', '전장의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2. 생애
1916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의 필슨(Pilsen)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4월 20일은 그해의 주님 만찬 성목요일, 즉 예수가 12사도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행함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필슨은 체코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도시 플젠(Plzeň)의 독일어식 이름인데, 그 유래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령 체코에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마을이었다. 카폰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이민을 온 오스트리아 독일계 아버지와 체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성장했다.
1940년, 24세의 나이에 세인트루이스의 켄리크 신학교(Kenr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고, 캔사스주 위치타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1944년 동부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미 육군 군종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군종 신부로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군종사제 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였던 1945년, 인도로 발령을 받아 버마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1948년에는 미국에 항복한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주일미군으로 발령받아 군종사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그는 줄곧 아시아에서 군종사제 활동을 하였다.
6.25 전쟁 당시, 야전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지프에 담요를 덮어 간이 제대를 만들었다. |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그 역시 한반도 이북으로의 북진에 동참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졌고, 운산 전투에서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가 고립되었다. 당시 카폰 신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병사들의 후퇴를 돕던 도중인 11월 2일, 중국 인민지원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질병을 앓고 각종 가혹행위를 강요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함께 붙잡힌 포로들을 격려하면서 사제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수용소 생활 도중에 폐렴, 이질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수용소 생활 6개월만인 1951년 5월 23일, 향년 35세로 사망하였다.
3. 유해 신원 확인
(에밀 카폰 신부의 6.25 당시 행적, 유해 확인 및 안장 과정을 다룬 영상)
사후 70년 만인 2021년 3월, 미 국방부 산하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의 무명용사 묘지에 묻힌 유해들 가운데 카폰 신부의 유해를 확인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런데 1953년 휴전 후 북한에서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들을 넘겨주었을 당시, 미군 측 기록에는 카폰 신부가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이 아닌 운산 전투에서 실종된 것으로만 기록한 상태였다. 때문에 해당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기록이 남아있는 미군들 위주로만 신원확인을 하였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카폰 신부의 유해가 1950년대부터 하와이의 무명용사 묘지에 있었으면서도 수십년 동안이나 신원 확인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관련 기사
그의 유해는 9월 29일 캔자스주의 고향으로 이장되었고, 장례 미사와 함께 고향땅에 묻혔다. 관련 기사.
4. 사후의 기념
"6.25 전쟁 당시 저는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때마다 죽음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이후 미군 통역관으로 복무하면서 카폰 신부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오시어 군종 신부로 6·25 전쟁에 참여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 곁으로 가신 에밀 카폰 신부님. 저는 이 책을 번역하던 신학생 때부터 카폰 신부님의 몫까지 2배로 충실한 사제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오늘도, 병상에서 카폰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번역한 카폰 신부의 전기(2021년 개정판) 서문 중에서 #
―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번역한 카폰 신부의 전기(2021년 개정판) 서문 중에서 #
카폰 신부의 영웅적인 행적, 신앙심은 6.25 전쟁 당시 전장, 포로수용소 등에서 함께 생활했던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으며, 사후 3년 만인 1954년에 <종군 신부 카폰>(원제: Chaplain Emil Kapaun)이라는 전기가 출간되었다. 카폰 신부의 전기를 쓴 아서 톤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제이고, 카폰 신부의 고향이자 사제서품을 받은 캔자스주 위치타 교구에서 사목활동의 대부분을 수행하였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면서 만년에는 몬시뇰에도 서임되었으며, 2003년 9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한국에서는 1956년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번역, 출간했고, 이후 몇 차례의 개정판이 나왔다. 가장 최근의 것은 정 추기경이 2021년 4월 죽기 직전까지 작업에 몰두하였고, 결국 그의 유작이 되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젊은 시절 6.25 전쟁을 겪으면서 사제의 삶을 선택했고, 그러한 점에서 같은 시기에 종군 사제로 헌신했던 카폰 신부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정 추기경은 생전에 "카폰 신부의 몫까지 해내고 싶다"는 뜻을 자주 피력하였고, 자신의 사망을 불과 1달 앞두고 카폰 신부의 유해가 확인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했다. 관련기사
이보다 앞선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 의해 미군 최고 수훈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받았으며, 휴전협정 체결 68주년이자 그의 유해가 확인된 후인 2021년 7월 27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태극무공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그의 조카가 그를 대신하여 미국과 한국의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였으며,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수여식에는 한국천주교회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등이 동석하였다.
2022년 5월에는 경기도 평택시의 주한미군 사령부(캠프 험프리스) 영내에 카폰 신부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휴전 및 한미동맹 성립 70주년인 2023년, 국가보훈처에서 매달 선정하는 6.25 전쟁 영웅(5월)으로 발표되었다.
바티칸에서도 1993년에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교황에 의해 가경자(복자의 전 단계인 하느님의 종)로 선포되는 등, 시복 및 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2021년 카폰 신부의 시성 절차가 탄력을 받고 있다. 그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이후 절차가 빠르게 이행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고향 캔자스주의 위치토 천주교구가 앞장서 성인 추대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실제 유해의 발견으로 향후 절차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미국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계에서도 카폰 신부의 성인 추대에 대해 관심과 기대를 갖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마티아 신부는 RFA 인터뷰에서 “유해가 있다는 것은 성인이나 복자를 공경할 때는 중요한 부분”이라며 “현재 유해 발굴이 확인됐고, 카폰 신부님임을 확인됐다는 것은, 천주교에서는 시복, 시성, 복자와 성인이 되는 데 중요한 탄력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