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현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1] 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 | Osztrák–Magyar Monarchia[2] Austro-Hungarian Monarchy [3] | |||||
오스트리아 국기[A] | 헝가리 국기[A] | ||||
상선기[6] | 국장 | ||||
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7] 갈라질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 | |||||
상징 | |||||
국가 | Gott erhalte den Kaiser 하느님, 황제 폐하를 지켜주소서 | ||||
Himnusz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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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빈시스라이타니아 부다페스트트란스라이타니아 | ||||
면적 | 676,615km² (본토 면적)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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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 시스라이타니아: 없음(사실상 독일어) 트란스라이타니아: 헝가리어 | ||||
종교 | 가톨릭 76.6% 개신교 8.9% 동방 정교회 8.7% 유대교 4.4% 이슬람 1.3% | ||||
민족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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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반 | 수상[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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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총리 (트란스라이타니아) | 언드라시 줄러 비토 이슈트반 티서 칼만[12] 티서 이슈트반 허디크 야노시 | }}}}}}}}} | |||
경제 | |||||
통화 | <colbgcolor=#fff,#1f2023>굴덴, 크로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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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찬가[13] |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14]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하는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a)[15],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두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으로 이루어졌다. 복잡한 사회구조와 다양한 민족과 언어[16]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줄여서 오헝 제국이라고도 부르며, 독일어권에서는 k. u. k.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2. 나라 상징
2.1. 국호
독일어 | Österreich-Ungarn Monarchie |
헝가리어 | Osztrák-Magyar Monarchia |
라틴어 | Imperium Austro-Hungaricum |
체코어 | Rakousko-uherská monarchie |
슬로바키아어 | Rakúsko-uhorská monarchia |
세르보크로아트어 | Austro-Ugarska / Аустро-Угаpска |
우크라이나어 | Австро-уго́рська імпе́рія |
폴란드어 | Monarchia Austro-Węgierska |
루마니아어 | Monarhia austro-ungară |
슬로베니아어 | Avstro-Ogrsko cesarstvo |
이탈리아어 | Impero austro-ungarico |
독일어: 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17]
헝가리어: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18]
정식 국호의 뜻은 제국의회[19]에 대표되는 왕국들과 영토들 및 거룩한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다. 제국의회에 대표되는 왕국들과 영토들은 빈 제국의회의 의원을 뽑는 나라들이며, 성 이슈트반 왕관[20]은 헝가리 국왕이 대대로 써온 왕관으로 이 왕관의 영토는 헝가리 왕국을 뜻한다.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 제국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와 별도로 언급된 것은 헝가리 왕국이 이제는 제국의회의 일원이 아닌 독립적인 의회와 체제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헝가리어: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18]
독일어권에서는 제왕국(帝王國)이라는 의미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카이저리히 운트 쾨니크리히), 약칭 k. u. k.(카 운트 카)로 불리기도 했다.[21] 여기서 차용한 카카니아(Kakania)라는 명칭도 있다.
2.2. 국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주권국가의 이중 군주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통합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국기를 따로 사용하였으며[22] 합스부르크 가문 어기, 즉 오스트리아의 국기와 헝가리의 국기를 이어붙인 국기를 쓸 때도 있었다.상선기의 용도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국기와 헝가리 왕국의 국기를 합친 바리에이션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상선기는 게임,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널리 사용되어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 헝가리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나무위키에서 사용) | 트란스라이타니아 | 상선기 | 상선기(문장 단순화) | 오스트리아 상선기 | 오스트리아 상선기(문장 단순화) |
2.3. 국가
자세한 내용은 황제 찬가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인구 및 민족
[23]
전체[*] | 총 51,356,465명 (1910년) | ||
{{{#!wiki style="margin: -2px -10px -5px; font-size: 0.9em" {{{#!folding 민족별 인구 구성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7px -1px -11px" | <colbgcolor=#ffffff,#1f2023> [[독일인| 독일인 ]] | 12,006,521명 ,(23.36%), | |
[[헝가리인| 헝가리인 ]] | 10,056,315명 ,(19.57%), | ||
[[체코인| 체코인 ]] | 6,442,133명 ,(12.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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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인| 슬로바키아인 ]] | 1,967,970명 (3.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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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 28,571,934명 (≈57.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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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 이탈리아인 ]] | 768,442명 | ||
[[루마니아인| 루마니아인 ]] | 275,115명 | ||
기타 | 608,062명 | }}}}}}}}} | |
헝가리 | 20,886,487명 (≈42.2%) | ||
{{{#!wiki style="margin: -2px -10px -5px; font-size: 0.9em" {{{#!folding 민족별 인구 구성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7px -1px -11px" | <colbgcolor=#ffffff,#1f2023> [[헝가리인| 헝가리인 ]] | 10,050,575명 | |
[[루마니아인| 루마니아인 ]] | 2,949,032명 | ||
[[독일인| 독일인 ]] | 2,037,435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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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신인| 루테니아인 ]] | 472,587명 | ||
기타 | 469,255명 | }}}}}}}}} | |
보스니아 | 1,898,0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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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는 미국의 지리학자인 윌리엄 R. 셰퍼드 박사가 1911년에 작성한 지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략적인 인구분포를 표현하고 있다.[24]
이중제국의 마지막 인구통계인 1910년 자료에 따르면 이중제국 전체의 인구는 총 5139만 223명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시스라이타니아)에 2857만 1934명이, 크로아티아와 헝가리(트란스라이타니아)에 2088만 6487명이 거주했다. 공동통치령인 보스니아에는 189만 8천 44명[25]이 거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인구통계 조사에서 민족이 아닌 모어 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조사했다. 즉 통계자료는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 분포가 아닌 언어 분포인 셈. 따라서 인구통계에는 어느 정도 누락되는 정보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언어 사용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기간인 1910년 인구통계의 종교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중제국 인구의 약 4.4% 가량인 22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유대인(유대교 신자)이었다.[26] 제국내 유대인 대부분은 이디시어가 모어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대개 도회지에 거주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이나 헝가리인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또한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을 형성하고 있어 교육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때문에 유대인 중에는 당대 주류언어라 할 수 있는 독일어나 헝가리어 구사가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결론적으로 인구통계에서 '유대인'은 대부분 독일어나 헝가리어 화자로 집계되었다.
또다른 예시로 훗날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민족분쟁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지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 역시 위 지도에서는 단일한 세르보크로아트어 사용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종교조사 통계자료로 당대 인구조성을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27]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에 대한 인구조사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에 다소간 차이가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주로 달마티아 왕국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모두가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로 조사되었다. 반면 헝가리 왕국 및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인구조사에서는 남슬라브어 및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들을 상당히 세세하게 분류했다. 헝가리 내에서는 세르비아어 사용자와 크로아티아어 사용자를 구분했음은 물론, 왕국 내 거주하는 남슬라브의 군소 하위민족집단들도 별도로 집계되었다. 이런 민족집단들은 주로 당시 헝가리 왕국 남부지역, 오늘날의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등지에 주로 거주 중이었다. 헝가리 왕국이 조사한 기타 왕국내 남슬라브어 사용주민들로는 부녜브치인(Bunjevci)[28], 쇼크치인(Šokci)[29], 크라쇼바니인(Krashovani)[30], 바나트 불가리아인[31] 등이 있다.
4. 경제와 산업
4.1. 발전상
1873년 빈 만국 박람회(엑스포) 당시 모습.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과 러시아와 함께 유럽의 구 질서를 수호하는 주요 축이자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부터 유럽 세계의 주요 열강 중 하나였다. 오헝 제국은 필요한 물품의 대다수를 생산할 수 있는 공업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 수준도 매우 발전된 나라였다.
제국의 주요 수출품은 기계와 전자제품이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공업단지가 체코 필젠 스코다(Škoda) 사 공장에 있었다. 이곳에서 각종 철강 제품들과 건설자재들, 엔진, 증기기관, 군사 무기들을 비롯한 기계 제품들이 생산되었다. 스코다 사의 제품들은 공장이 있는 필젠의 필스너 맥주 양조장부터 미국의 나이아가라 수력발전소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오스만 제국의 설탕공장과 청나라 북양군의 병기창까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었다.
수도 빈은 기차를 포함한 각종 기계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은 전통적으로 철광석이 생산되었는데다 슈타이어-만리허로 대표되는 총기 생산의 중심지였다. 한편 트리에스트와 풀라는 해양 진출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이탈리아인들이 트리에스테 기술 회사(Stabilimento Tecnico Triestino)나 트리에스테 해군 조선소(Cantiere Navale Triestino) 같은 조선업체를 운영했다. 이 중 STT사는 제국 조선업에 있어서 가장 선도적인 회사였으며 기술의 총아인 드레드노트급 전함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32] 이들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조선사 핀칸티에리의 자회사로서 유명한 크루즈 여객선들을 다수 건조하고 있다.
오스트라우의 비코비체 제철소의 전경. |
중공업을 지탱하는 제철 및 제강 산업의 경우, 그 선두에는 오스트라우에 위치한 로스차일드의 비코비체 제철소(Witkowitzer Bergbau- und Hüttengewerkschaft)가 있었다. 비코비체 제철소는 자체적인 철광석 및 석탄 광산들과 수 개의 고로들을 가진 오헝 제국 최고의 철강 생산 업체였으며, 해군의 장갑재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공장이었다. 그럼에도 제국 땅의 철광석 수급량은 필요량에 비해 모자랐기 때문에, 비코비체는 스웨덴 라플란드의 철광석 광산에 투자하여 연간 철광석 사용량의 10퍼센트 가량인 4만 톤을 스웨덴에서 충당했다.[33]
비코비체는 1870년대에는 장기불황으로 인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으나 새 경영자로 들어온 파울 쿠펠비저(Paul Kupelwieser)의 지도 하에 경영을 쇄신하여 중동부 유럽의 가장 거대한 제철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미 여러 나라의 제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쿠펠비저는 벨기에의 신식 제철 설비를 들여와 생산 품질과 양을 일신했다. 제국 멸망 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도 중요한 제철소로 남았으며 공산정권 시절에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1998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현재는 체코의 주요 산업 유적으로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 외에도 스코다의 필젠 제철소,[34] 전통적인 철강 산업 지역인 슈타이어마르크 일대의 오스트리아 알프스 광업조합(ÖAMG)이 대표적인 제철업체였다. ÖAMG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인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세운 회사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운영 중인데, 현재는 포스코와 협력해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도 한 오스트리아 대표 제철업체인 푀스트알피네(Voestalpine) 사의 자회사다. 카를 비트겐슈타인 소유의 다른 주요 제철소로는 체코 프라하 근교에 위치한 폴디 제철(Poldi Hütte)이 있었으며 이곳 역시 오늘날까지 운영 중이다.[35]
헝가리 건즈 사에서 1885년에 출시한 변압기. 세계 최초의 변압기 중 하나다. 오늘날에도 변압기는 건즈 사의 주력 상품 중 하나이다. # |
식품 가공업이 주산업이던 부다페스트는 19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의 2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여 각종 기계 제품과 전자제품, 그리고 차량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자제품 분야에 있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출량은 주요국, 심지어 프랑스까지 제치고 한때 세계 3위에 달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부다페스트의 대기업인 건즈(Ganz) 사가 유명했다. 수력 발전 플랜트와 암모니아 냉매를 사용한 냉장고, 변압기, 발전기 그리고 전기철도 등을 생산했는데 부다페스트 지하철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깔린 도시철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의 발전된 전기 기술 덕분이었다. 그 외 건즈 사의 엔진 및 각종 기관 생산 부서도 부다페스트에 있었으며, 피우메에 거점을 둔 조선 부문인 건즈-다누비우스(Ganz-Danubius)는 오헝 제국 해군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센트 이슈트반함과[36] 주력 보조함인 타트라급 구축함들을 건조했다.
한편 헝가리 왕립 국영철도기계공장(MÁVAG)도 각종 강재와 철강 제품, 차량과 증기기관 등을 생산하며 건즈 사와 호각으로 경쟁했다. MÁVAG의 기관차들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성능을 보유한 기관차들로 유명했으며, 제국의 주요 장갑열차들도 여기서 생산했다. FÉG사는 소화기 생산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UFAG 사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항공기 업체들도 전부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헝가리 북부의 오즈드 일대의 리마무라니살고타르얀 제철소(Salgótarjáni Kohászati Üzemek)[37] 등에서도 강철을 생산했으나 그 비중은 체코와 오스트리아에 비해서는 미미한 편이었다.
그 외 폴란드의 바쿠라 불린 갈리치아에서는 철도가 연결되면서 석유 시추와 정제업이 성행했다. 갈리치아 덕에 19세기 말 오스트리아는 세계 4위의 산유국이었다.
4.2. 한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공업 발전상과 기술적 성취는 경이적인 것이었으나, 전체적인 경제 규모는 여전히 다른 열강들에 미치지 못했다. 1990년 달러화 기준으로 평가한 1913년 오스트리아의 실질적인 GDP 규모는 1005억 1500만 달러로, 2373억 3200만 달러인 독일 제국, 2544억 4800만 달러인 러시아 제국, 2246억 1800만 달러인 영국의 절반 이하였다. 프랑스 역시 1444억 8900만 달러로 오스트리아의 1.5배 규모였으며, 주요 라이벌인 이탈리아 왕국은 954억 8700만 달러로 오스트리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1인당 GDP를 계산해보면 이탈리아가 2564달러, 오스트리아가 1986달러로,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밀렸다.#1870년부터 1910년까지 20년 간격으로 측정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내총생산 중 산업별 비율. 오스트리아 제국의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에 불과하지만, 헝가리 왕국에서는 무려 약 50%에 달한다. 반대로 제조업 및 금융업이 각국의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의 2배에 달한다.# |
근본적 원인은 지역에 따라 발전이 매우 불균형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제국의 영토는 유럽 동남부의 험준하고 빈곤한 산악지대와 유럽의 주요 공업 지대, 그리고 지중해에 매우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UCL 슬라브 및 동유럽학대학의 체코인 교수 야쿠프 베네시(Jakub Beneš) 교수는 체코나 오스트리아 또는 연해 지대 등의 일부 지역들이 동시대의 다른 유럽 국가들의 평균적인 수준보다도 더 발전되었고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 역시 급격하게 발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경제 전반은 1918년 멸망 전까지 농업(agrarian) 위주였다고 설명한다.#
산업지대, 즉 석탄이 생산되는 체코와 철광석이 생산되는 슈타이어마르크, 빈과 부다페스트의 공장들, 트리에스트의 항구는 카이저 페르디난트 북부제국철도로 이어진 데다가, 인접한 독일의 경제권이나 바다의 국제 유통망을 통해 수출과 수입이 용이했기에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평균치보다도 훨씬 발전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보스니아 등 내륙 지역은 높은 디나르알프스산맥과 카르파티아산맥에 걸쳐 있거나 둘러싸였기 때문에 타지와 교류하기가 힘들었다. 이들 산맥 때문에 오헝 제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각 도시의 유통망을 연결하는 경제 대동맥인 운하를 건설하는 꿈도 못 꿨고, 수천 미터의 깎아지른 산봉우리를 뚫고 옆 마을로 갈 비포장 도로 건설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는 운하가 쓰이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의 산업혁명을 가로막고 그 이후로도 각 지역의 발전을 방해한 주 원인이었다.
게다가 넓은 달마티아 해안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깊고 험해지는 디나르알프스 산맥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서 있어서 제국의 주요 무역항은 북서부에 치우친 이스트리아반도의 트리에스트와 피우메, 풀라뿐이었으며 세 도시는 당연히 제국 동부와 내륙지역과는 너무나도 멀었다. 한때 중개무역으로 번영했던 달마티아 지역의 두브로브니크나 차라 등의 항구는 산맥 때문에 접근성이 나빴으며 이미 무역항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국제하천인 도나우강을 통해 남동쪽에 인접한 세르비아나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등과 연계된 무역망을 구축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잠재적 적국이자 분쟁지대에 위치한 경제적 후진국이었다.
▲ 1920년 갈리치아 스타니슬라비우의 농촌 초가집
빈곤 문제의 최고봉은 갈리치아였다. 갈리치아는 동북쪽 카르파티아산맥의 장벽 바깥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고립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테셴[38] 지방을 거쳐야만 제국 중심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지역들은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와 기존 지배층 간 타협으로 전통적인 지주제가 유지되었다.[39] 갈리치아는 항상 빈곤과 기근에 시달림에도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제때 지원을 받지 못해 매년 아사자가 수만 명씩 발생할 정도였다. 제국 면적의 30% 가량을 차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고작 6%밖에 안 되는 가난한 동네였다. 이 지역 내부의 산업 비중을 살펴보자면 1910년 기준으로 78.71%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고작 6.77%였다. 종합하자면, 제국 영토의 대부분은 극단적인 격오지였다.
이들 지역들은 자연스럽게 국제, 국내 교통망에서 밀려나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제국 면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40], 갈리치아-로도메리아, 보스니아 지역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으며 여기서 생산되어 수출된 밀은 한때는 러시아 제국의 수출량보다도 많았을 정도였다. 심지어 당대 부다페스트 곡물거래소의 밀 거래량은 미국 미니애폴리스 곡물거래소의 거래량보다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 서부 지역도 모두 공업이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제국의 최서단인 오스트리아 서부 산악지대와 같은 지역들은 양 치고 젖 짜서 치즈나 만드는 농촌들이 다수였다. 티롤의 경우 공업 종사자는 고작 16.51%, 반대로 농업 종사자는 자그마치 56.71%에 달했다.
이러한 제국의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에너지 원료의 종류별 비율이다. 1910년 영국에서는 에너지 원료의 80%를 석탄으로 충당했으나, 오헝 제국은 고작 33%에 머물렀다.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바이오매스, 즉 목재였다. 이는 대다수의 지역의 근대화가 미비하여 주민들이 여전히 나무를 베어 난방에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제국의 석탄 생산량이 너무 적고[41], 유통도 주요 산업지대 외에는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기다 1873년 빈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발생한 전 세계적 규모의 장기불황은 이런 양극화를 고착시켰다. 오헝 제국이 공황을 제대로 얻어맞으면서, 철도 등의 각종 인프라와 산업화를 동쪽 내륙까지 확장하려던 시도가 한동안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 공황의 여파로 인해, 헝가리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리고 보스니아나 트란실바니아 등의 진짜 격오지들은 제국의 멸망 때까지 산업화를 사실상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낙후된 영토들이라도 주변 동유럽이나 남유럽 또는 비유럽 국가들에 비해 사정이 괜찮기는 했다. 1930년대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의 문해율 지도를 보면 오헝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곳의 문해율이 비교적 양호한 결과가 나왔고 오헝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대체로 잘 살았던 편이다. 보스니아는 열악한 결과가 나왔지만 이쪽은 겨우 30년간 지배받았고 정식 병합시기는 오헝 제국이 망하기 10년 전인 1908년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한때 서유럽 세계의 중심이기도 했을 정도로 핵심적인 열강이었던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신생국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상태였다. 발칸 국가들은 체급 자체가 작았고,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후 1차 대전 직전까지 발칸 전쟁을 여러 번 겪느라 내실을 다질 기회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내우외환과 열강의 경제 침탈 때문에 마찬가지 상태였다. 열강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제력은 이들보다는 당연하게도 확실히 앞섰으나, 다른 주요 열강들과 비교하면 명백히 열세였다.
4.3. 노동 계급의 생활
▲ 프란츠 카프카가 조사하여 보험공단에 제출한 산업재해 보고서. 목재 가공 중 벌어지는 손가락 절단 사고 양상에 대한 보고서이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산업감찰관직을 신설하고 독일 제국 못지않은 사회보장제도를 만드는 등 당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꽤나 우수한 노동자 복지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타협으로 인해 내정이 분리되어 있었던 고로 이 정책은 제국의 나머지 절반인 성 이슈트반 왕관령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시스라이타니아에서도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가까웠다. 산업혁명기의 다른 열강 국가들에서처럼 오스트리아의 많은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에 시달렸다.[42]
1888년 세워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노동자 대표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꾸준히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막상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1912년 합동으로 전시징발법(Kriegsleistungsgesetze)을 제정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전쟁 시 총력전을 위해 국가가 민간사업자들에 대한 제한 없는 동원이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발칸 전쟁으로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군대에 대한 효율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추진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1914년 7월 26일부로 실제로 발동되었다.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스 대학교의 포가니 아그네스(Pogány Ágnes) 교수에 따르면 전시동원법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제국의 총력전 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재정이 나누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잡음이 잦았던 기존과 달리, 전시동원법을 통해서는 효율적인 재정 운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제국이 러시아, 이탈리아, 세르비아와 동시에 3면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4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법안을 통해 국가가 제국 내의 경제력을 극한까지 짜내면서 반대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파업은 금지되었고 노동자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크게 제한받은 데다 농업 생산량까지 감소하였다. 이로 인해 제국 체제의 대들보나 다름없던 군대의 인기는 갈수록 하락했고 정부에 불만이 가중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1917년부터 정부는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억누르지 못했으며 1918년, 결국 제국 정부는 내부의 반란으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유증은 전후에도 길게 남았다. 제국의 나머지 영토들을 전부 독립시키고 생겨난 신생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대부분의 지역들에서는 우파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이 의회 의석을 쓸었다. 하지만 제국 시대 이래로 주요 공업지대였던 수도 빈만큼은 노동자층이 탄탄하게 자리잡았던데다 전쟁에 환멸을 느낀 채 돌아온 군인들이 모여들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몰표를 던져버렸다.
5. 영토
{{{#!wiki style="margin: 0 -10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시스라이타니아 | |||
보헤미아 왕국 | 달마티아 왕국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 크라쿠프 대공국 | |
상오스트리아 대공국 |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 잘츠부르크 공국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 |
케른텐 공국 | 카르니올라 공국 | 부코비나 공국 |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 |
모라비아 변경백국 |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 | 티롤 후백국 | |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 포어아를베르크 주 | 트리에스테 제국자유도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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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 |||
공동통치령 |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 ||||
오스트리아 제국의 행정 구역 | }}}}}}}}}}}} |
행정 구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과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이 구별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후기에 점령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둘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빈 근교에서 도나우강(Donau)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지천 라이타(Leitha)강을 기준으로 잡아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은 시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은 트란스라이타니아로 부르기도 한다.
지도에서는 시스라이타니아(1~15번), 트란스라이타니아(16~17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8번) 순으로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은 각 지역의 로마자 알파벳순으로 매겨져 있다.
번호 | 국가 | 수도 | 현재 지역 |
1 | <colbgcolor=white,black>보헤미아 왕국 독일어: 뵈멘 왕국(Königreich Böhmen) | <colbgcolor=white,black>프라하 독일어: 프라크(Prag) | <colbgcolor=white,black>체코 서부 |
2 | 부코비나 공국 독일어: 부코비나 공국(Herzogtum Bukowina) | 체르니우치 독일어: 체르노비츠(Czernowitz) | 우크라이나 서부, 루마니아 동북부[43] |
3 | 케른텐 공국(Herzogtum Kärnten) | 클라겐푸르트(Klagenfurt) | 오스트리아[44] |
4 | 카르니올라 공국 독일어: 크라인 공국(Herzogtum Krain) | 류블랴나 독일어: 라이바흐(Laibach) | 슬로베니아 중부 |
5 | 달마티아 왕국 독일어: 달마티엔 왕국(Königreich Dalmatien) | 자다르 독일어:차라(Zara) | 크로아티아 남부 |
6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독일어: 갈리치엔 운트 로도메리엔 왕국(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 르비우 독일어: 렘베르크(Lemberg) | 폴란드 남부, 우크라이나 서부 |
6-1 | 크라쿠프 대공국 독일어: 크라카우 대공국(Großherzogtum Krakau) | 크라쿠프 독일어: 크라카우(Krakau) | 폴란드 남부[45] |
7 |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독일어: 외스터라이히 연해국(Österreichisches Küstenland) | 트리에스테 독일어: 트리에스트(Triest) | 이탈리아 동부, 슬로베니아 남서부, 크로아티아 북부 |
7-1 | 트리에스테 제국자유도시 독일어: 트리에스트 제국직할 도시(Triest Reichsunmittelbare Stadt) | 이탈리아 동부 | |
7-2 |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 독일어: 괴르츠 운트 그라디스카 후백국(Gefürstete Grafschaft Görz und Gradisca) | 고리치아/노바고리차 독일어: 괴르츠(Görz) | 이탈리아 동부, 슬로베니아 서부 |
7-3 |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독일어: 이스트리엔 변경백국(Markgrafschaft Istrien) | 포레치 독일어: 파렌츠(Parenz) | 슬로베니아 남부, 크로아티아 북부 |
8 | 하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Niederösterreich) | 빈(Wien) | 오스트리아 |
9 | 모라비아 변경백국 독일어: 메렌 변경백국(Markgrafschaft Mähren) | 브르노 독일어: 브륀(Brünn) | 체코 동부 |
10 | 잘츠부르크 공국(Herzogtum Salzburg) | 잘츠부르크(Salzburg) | 오스트리아 |
11 |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독일어: 외스터라이히 슐레지엔 공국(Herzogtum Österreichisch Schlesien) | 오파바 독일어: 트로파우(Troppau) | 체코, 폴란드 |
12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Herzogtum Steiermark)[46] | 그라츠(Graz) |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동부 |
13 | 티롤 후백국(Gefürstete Grafschaft Tirol) | 인스브루크(Innsbruck) | 오스트리아, 이탈리아[47] |
14 | 상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Oberösterreich) | 린츠(Linz) | 오스트리아 |
15 | 포어아를베르크주(Land Vorarlberg) | 브레겐츠(Bregenz) | 오스트리아 |
16 | 헝가리 왕국 독일어: 웅가른 왕국(Königsreich Ungarn) | 부다페스트(Budapest) | [48] |
17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독일어: 크로아티엔 운트 슬라보니엔 왕국(Königreich Kroatien und Slawonien) | 자그레브 독일어: 아그람(Agram) | 크로아티아 북부, 세르비아 |
18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독일어: 보스니엔 운트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Kondominium Bosnien und Herzegowina) | 사라예보 (독일어: Sarajewo)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6. 역사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7. 사회
7.1. 시스라이타니아
오스트리아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사상을 강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의 역사와 소수민족 통치 경험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에 관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심각한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런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통제와 느슨한 집행 방침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Schlamperei, 엉터리)'적 관행이라고 불렀다.검열은 형식적이었고, 수많은 글에서 여러 사상가와 (심지어는 아나키스트도)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했다. 특히 스탈린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민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 자신이 조지아 출신이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처럼 다민족 국가였다.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의 밑에서 일할 때부터 소비에트 정권에서 소련 내부의 민족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07년 남성 보통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오스트리아 쪽 제국의회의 정당 구성을 보면 과격한 민족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까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온건 사회민주주의 성향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인, 빅토어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오스트리아 원내 제1당이었다.[49] 제국 내 소수민족인 체코인이나 이탈리아인 등도 의정활동에 참가했다. 체코계 의원들은 보헤미아 왕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분리하여 헝가리와 비슷한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1911년 제국의회에서는 이탈리아계 정당 소속 의원이 이탈리아계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였다.[50]
이런 자치권에 대한 의견관철과 논의는 당연하게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소수민족 의원들은 종종 보이콧으로 맞서곤 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회는 수시로 의정활동이 마비되었고, 의정활동보다는 황제가 직접 개입하여 칙령으로 통치와 행정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개인에게는 업무부담이 과중되었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황실의 비극적인 가정사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워커홀릭에 경직된 권위주의적, 가부장적적 인물이었음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슐람페라이적 관행 역시 그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 더 넓게 봤을 때, 당대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물론 이후의 중부유럽에서도 의회민주주의 정착이 지연된 것이기도 했다.[51]
또한 이런 상황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의회민주주의나 소수민족의 정치적 권리에 환멸을 느끼고 나치즘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느슨하고 관대한 통치에는 부작용이 뒤따랐지만 만약 소수민족에게 강압적인 통치를 한다면 대번에 문제가 생길 것이 명확했으니[52] 슐람페라이적 관행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슐람페라이적 관행은 이중제국 체제 및 그 현상유지의 태생적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 보장 제도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고 몇년 간 직업이 없어도 노숙자용 무료 숙소에서 잠을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밖에 공립 대학이나 고등 교육도 무료였는데, 재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남녀 간의 교제 또한 상당히 자유로웠다. 19세기 말엽부터 여성들 사이에선 미혼, 기혼 상관 없이 젊은 군인과 짧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폴란드인이나 아일랜드인 같은 '억눌린 민족들(submerged nations)'이 독립을 위해 이미 투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서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민족주의는 응집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전적으로 '억눌린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지배적인 독일계 엘리트 계층이 있었지만 심지어 이 독일인들에게도 이제는 북쪽에 새로운 독일 제국이라는 인접한 조국이 생겼다.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억눌린 민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마자르족에게 헝가리 왕국이라는 준 독립국 지위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이중 군주국'으로 재편했다. 헝가리 왕국은 독일인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오스트리아인들'과 군주(1848년 이래로 줄곧 통치한 프란츠-요제프 황제), 군대, 재정, 외교만을 공유했다. 독일인처럼 (그리고 사실 부다페스트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할 때 웨스터민스터 국회의사당을 본뜰 만큼 크게 찬탄한 영국인처럼) 마자르족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이라고 여겼고 헝가리 왕국 내 슬라브 소수 민족들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이중 군주국 서쪽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북부(체코인), 북동부(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 남부(슬로베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슬라브족뿐만 아니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이 탐내는 알프스 산맥 남사면의 이탈리아권(독일어권 쥐트티롤도 포함)을 다스렸다. 부다페스트의 거친 마자르족 소지주들과 달리 빈의 합리적 관료들은 피지배 소수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했고 독일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빈의 정부 기구는 마비되고 황제가 칙령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풍성한 문화 융합은 분명히 빈을 지적·예술적으로 활기 넘치는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지만 그곳의 지식인들은 우려와 함께 때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봤다.
-Michael Howard, <제1차 세계대전> 中
-Michael Howard, <제1차 세계대전> 中
수백 년간 제국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 왕조의 권위는 제국 내 국민들은 물론 다른 유럽인들에게까지도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구조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에 호의적일 수가 없었고, 소독일주의에도 반대했다.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 독일이 세워진다면 수가 적은 독일계로 소수민족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상 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 백작 등이 주창한 통일안은 '독일인들의 민족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토를 신생 독일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대(大)오스트리아주의에 가까웠다.
시스라이타니아의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웠다.[53] 체코의 경우는 조금 복잡했는데 독일화가 완료된 귀족 계층이나 주데텐란트의 독일계를 중심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긍정하였지만,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처음부터 완전한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체코 민족주의가 활발했던 상공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분리독립 움직임이 강해졌다. 물론 상공 시민계층이라고 모두 처음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하지는 않았고, 훗날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국부로 대접받는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조차도 1916년까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보호 안에서 자치를 추구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54] 체코인들의 분리독립이 전 계층에 받아들여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이 임박하면서였다.
그러나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는 사실상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체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55] 1917년 1월 말까지도, 체스키 스바즈(Českého svazu)의 최고 회의에서는 두 번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17년 1월 24일의 회의에서는 '우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체코 민족에게 속하는 모든 권리는 제국의 틀 내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성취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1917년 1월 31일 회의에서는 '체코 민족은 합스부르크의 군주국 이외에는 아무런 미래도 없으며, 발전의 조건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1917년 5월 30일 제국의회에 참여한 체코 의원들도 황제와 제국을 지지하면서 민족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56]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화적 자기 이해>, 김신규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화적 자기 이해>, 김신규
언어적으로도, 시스라이타니아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공용어가 없었고 1867년 기본법에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공식 인정했다. 물론 독일계 위주로 나라가 굴러갔던 건 부정하기 어렵지만[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이타니아의 다문화적 관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빈 제국 의회인데, 의도적으로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하여 필리버스터를 유도했고, 특히 체코인 의원들이 자주 이 방법을 써먹었다.
7.2. 트란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상황이 크게 달랐다. 헝가리 의회는 크게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과 대타협 반대파인 독립당[58] 두 세력으로 나뉘었는데 헝가리인은 총선에서 독립당을 주로 지지했으며, 소수민족들은 주로 자유당을 지지했다.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 성향 정당들 역시 존재했지만, 이들은 1~2석 정도로 큰 힘이 없었다.헝가리는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아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매우 적었는데, 상당수의 헝가리 대의원들은 3자리 수, 또는 4자리 수에 불과한 득표로 당선되었으며, 1910년 마지막 총선 기준 전체 헝가리 인구 1800만 명 중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110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이는 전체 인구의 6.4%에 불과했다.[59] 이는 보통 선거가 도입될 경우 헝가리인들의 몰표로 총선에서 패배가 확실한 자유당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보통 선거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으나 자유당의 필사적인 저지로 끝내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은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기를 집권 여당으로 존재했다. 독립당은 190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며 집권했지만, 이들 역시 대타협을 파기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독립당 정부는 1909년 헝가리 국립 은행 설립 문제로 분열해 무너졌고, 총선 참패 후 자진해산했던 자유당 세력이 국민노동당을 창당하여 1910년 총선에서 압도적 과반을 먹는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을 다시 되찾았다.
또한 헝가리인은 근본적으로 부족한 헝가리인 숫자를 늘리고자 마자르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오스트리아와는 정반대로 민족 억압책을 폈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의 강압적인 마자르화 정책으로 헝가리 내의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민족 정체성의 붕괴를 걱정해야 했다.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인 민족주의 세력과 힘을 합쳐 분리 독립을 추구했으며,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은 자신들의 민족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으로 합류하려 했다.
8. 군대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9. 재편성 계획
9.1.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자세한 내용은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문서 참고하십시오.기본적으로 이중제국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안되는 독일계와 헝가리계가 국가운영을 주도했다. 때문에 주로 슬라브계인 다른 민족들 역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반독립국가와도 같은 지위나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지위를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약 반세기에 이르는 이중제국의 존속 기간 내내 체제 모순 극복을 위한 여러 재편성안이 제기되었다. 이런 재편성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이다.
합중국 계획은 기존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구성된 제국을 민족별로 동등한 주권을 부여받은 주로 구성된 연방 체제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안하고 루마니아계 정치가 아우렐 포포비치(Aurel Constantin Popovici)가 1906년 세부 안건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실권을 지닌 황제와 독일계, 헝가리계가 반대하였고 결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뒤이어 벌어진 1차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면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은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
9.2. 삼중제국
위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과 별개로 1880년대에 태동하여 루돌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제 카를 1세의 지지도 받았던 재편성 계획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일명 삼중제국 재편성 안이 있었다. 삼중제국은 과거 헝가리인에게 동등한 주권을 주었듯이 동등하지만 제한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에게 완전히 동등한 주권을 줘서 제국의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이었다.크로아티아의 영토에 슬로베니아와 보스니아, 이스트리아반도 전역을 포함시키자는 제안안
당시 크로아티아의 영토에 이스트리아반도의 일부와 보스니아만 포함시키자는 제안안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개인의 이상이었던데 반해 삼중제국 안은 1880년대부터 존재하여 오스트로-슬라비즘 세력들의 지지와 추후에는 황제의 지지까지 받았던 안이었지만 제국 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헝가리 왕국의 반대로[60] 번번히 미뤄지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망이 다다른 1918년, 크로아티아인들이 지지 의사를 철회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어떻게 보면 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안의 선배이자 실현에 더 가까웠던 안이지만 비슷하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산된 개편안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만약에 승전하여 제국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삼중제국은 실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면 삼중제국 개혁안 역시 대타협과 다를 바 없이 지배자가 하나 더 늘어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제국에는 크로아티아인 외에도 여러 피지배민족들이 있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민족주의 세력 역시 강해질 것을 생각하면 삼중제국이 실현되었어도 계속 안정적으로 굴러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크로아티아인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훨씬 강하였던 체코인은 자신들에게도 크로아티아와 동등한 지위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보호 속에서 자치를 요구하는 것을 긍정했던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가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3가지였다. 자신들의 청원이 황제가 보기도 전에 폐기되었다는 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헝제국이 어떤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헝제국이 패전한다면 체코인도 똑같이 패전국의 전범 신세로 전락한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김지영-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이후 동유럽 민족 국가의 성립)
다만 합스부르크 왕가 입장에서도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들어주면 제국 내 타 슬라브 민족들이 자치를 요구할 것을 우려하여 무턱대고 보헤미아 왕국의 자치를 허용하기 난감했다. 무엇보다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들어주면 헝가리 왕국 내 타 슬라브 민족이 궐기할까 우려한 헝가리인이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점도 있었다.(동유럽사-존 코넬리) 실제로 합스부르크 왕조 내에서 굳이 체코인을 콕 집지는 않았더라도 슬라브 민족의 자치와 주권을 존중하고 허용하려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슬라브인에 대한 자치 문제로 헝가리 왕국은 물론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도 배척당했다. 문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하필 슬라브 극단주의자에게 사라예보 사건으로 허망하고 갑작스럽게 암살당하고 그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체코(보헤미아 왕국)의 공존 가능성은 사라졌다.
때문에 삼중제국 개혁안은 실현되었어도 유고슬라비아 왕국 형성 직전의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왕국'처럼 다음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0. 황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11423 50%, #337D45 5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프란츠 요제프 1세 | 카를 1세 | }}} }}}}}} |
대수 | 이름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1대 | 프란츠 요제프 1세 / 페렌츠 요제프 1세 | 1848.12.2 | 1916.11.21 |
2대 | 카를 1세 / 카로이 4세 | 1916.11.21 | 1918.11.12 |
11. 출신 및 주요 인물
황실 인물은 합스부르크 가문 문서로.- 정치인, 군인 및 공무원
-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 독일계 정치인[61]
-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 독일계 정치인[62]
- 카를 폰 슈튀르크 - 독일계 정치인[63]
- 티서 이슈트반 - 헝가리계 정치인[64]
- 레온 폰 빌린스키 - 폴란드계 정치인[65]
- 카를 레너 - 독일계 정치인[66]
- 엥겔베르트 돌푸스 - 독일계 정치인[67]
- 쿠르트 슈슈니크 - 독일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68]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독일계, 체코계 정치인[69]
- 아돌프 히틀러 - 독일계 정치인[70]
- 알치데 데 가스페리 - 이탈리아계 정치인[71]
- 에드바르트 베네시 - 체코계 정치인[72]
- 에밀 하하 - 체코계 정치인[73]
- 밀란 호자 - 슬로바키아계 정치인[74]
- 요제프 티소 - 슬로바키아계 사제, 정치인[75]
- 살러시 페렌츠 - 헝가리, 아르메니아, 독일, 루신, 슬로바키아계 정치인[76]
- 너지 임레 - 헝가리계 정치인[77]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 폴란드계 정치인[78]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폴란드계 정치인[79]
- 유제프 할레르 폰 할렌부르크 - 폴란드계 군인, 정치인
- 스타니스와프 할레르 - 폴란드계 군인
- 스테판 반데라 - 우크라이나계 정치인[80]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81]
- 안테 파벨리치 - 크로아티아계 정치인[82]
- 프란체스카 도너(이부란) - 유대계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 시몬 비젠탈 - 유대계 나치 사냥꾼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독일계 군인[83]
-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 독일, 헝가리계 군인[84]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크로아티아계[85] 군인[86]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독일계 군인[87]
-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 슬로베니아계[88] 군인[89]
- 프란츠 로어 폰 덴타 - 독일, 헝가리계[90] 군인[91]
-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 독일, 헝가리계 군인[92]
- 호르티 미클로시 - 헝가리계 군인, 정치인[93]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 독일계 군인[94]
- 에르하르트 라우스 - 독일계 군인[95]
- 로타르 렌둘릭 - 크로아티아계 군인[96]
- 프란츠 뵈메 - 독일계 군인[97]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98]
- 오딜로 글로보츠닉 - 독일, 체코, 슬로베니아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99]
- 아돌프 아이히만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100][101]
- 오토 스코르체니 - 폴란드계 나치 친위대원, 군인[102]
- 아몬 괴트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103]
- 바소 추브릴로비치 - 세르비아계 암살[104]자, 교수, 정치인
- 알로이스 히틀러 - 독일계 공무원[105]
- 알프레트 얀자 - 독일계 군인
- 작가
- 프란츠 카프카 - 유대 및 체코계 작가
- 카렐 차펙 - 체코계 작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독일계 작가
- 로베르트 무질 - 독일계 작가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 독일 및 우크라이나계 작가
- 슈테판 츠바이크 - 유대계 작가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유대계 작가
- 학자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유대 및 독일계 심리학자
- 알프레트 아들러 - 독일계 심리학자
- 빅토르 프랑클 - 유대계 심리학자
- 알렉시우스 마이농 - 이탈리아계 심리학자, 철학자
- 에른스트 마흐 - 독일계 철학자
- 오토 바이닝거 - 유대계 철학자
- 에드문트 후설 - 유대계 철학자
- 카를 포퍼 - 유대계 철학자
- 카를 카우츠키 - 체코계 철학자
- 테오도르 헤르츨 - 유대계 언론인, 시오니즘 운동가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유대 및 독일계 철학자
- 쿠르트 괴델 - 독일계 수학자, 철학자
- 에르되시 팔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존 폰 노이만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조지프 슘페터 - 독일 및 체코계[106] 경제학자, 철학자
- 오토 노이라트 - 독일계 경제학자
- 카를 폴라니 - 헝가리, 유대계 경제학자
- 루트비히 볼츠만 - 독일계 물리학자
-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 - 유대 및 독일계 물리학자
- 에르빈 슈뢰딩거 - 독일 및 영국계 물리학자
- 그레고어 멘델 - 독일계 사제, 유전학자
- 카를 란트슈타이너 - 유대계 병리학자
- 헤르만 오베르트 - 독일계 로켓 공학자.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이다.
- 화가 및 음악가
- 구스타프 클림트 - 독일계 화가
- 에곤 실레 - 독일계 화가
- 구스타프 말러 - 유대계 음악가
- 안톤 브루크너 - 독일계 음악가
- 프란츠 폰 주페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로트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독일계 음악가
- 슈트라우스 가문 - 독일계 음악가 가문
- 칼 미하엘 치러 - 독일계 음악가
- 안톤 베베른 - 독일계 음악가
- 알반 베르크 - 독일계 음악가
- 아르놀트 쇤베르크 - 유대계 음악가
- 한스 아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108]
- 프리츠 크라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
- 에리히 클라이버 - 독일계 음악가
- 카를 뵘 - 독일계 음악가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리스, 슬로베니아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헝가리계 음악가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유대계 음악가
- 프란츠 리스트 - 헝가리계 음악가
- 코다이 졸탄 - 헝가리계 음악가
- 버르토크 벨러 - 헝가리계 음악가
- 도라 페야체비치 -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계 음악가
- 에르뇌 도흐나니 - 헝가리계 음악가
-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 체코계 음악가
- 안토닌 드보르자크 - 체코계 음악가
- 레오시 야나체크 - 체코계 음악가
- 요제프 호프만 - 폴란드계 음악가, 발명가
- 연예 및 스포츠계 인물
12. 기타
- 올림픽이나 국제 축구 경기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3개 팀이 출전했다. 1901년에는 헝가리 축구 연맹이, 1904년에는 오스트리아 축구 연맹이 설립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두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경기가 이 시절이던 1902년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서로를 상대로 하면서 이루어졌으며, 보헤미아 대표팀 역시 190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첫 경기를 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1920년대 당시 유럽 축구의 주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했던 중부 유럽 국가들이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스위스, 루마니아등 이들 나라의 축구단들이 모여서 만든 최초의 국제 축구 대회가 바로 미트로파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중단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제일 위상이 높은 대회였다.
전쟁이 끝나고 1951년에 대회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미트로파컵을 말고도 또다른 국제대회들이 있었기 때문에 흥행이 안 되어서 다시 중단되었다가 1955년에 재개되어 대회가 진행되었지만 이 무렵에는 유러피언컵이 창설되어 대회 인기를 모두 유러피언컵에게 빼앗기고 마이너 대회로 전락했다. 1934년 월드컵에서 양 국가가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했는데, 기묘하게도 8강에서 이 둘이 맞붙었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게 2:1 승리를 거두었지만 준결승전에서 하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원수였던 이탈리아를 만나 0:1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의 우승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 후, 1954년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같은 조에 묶여 헝가리는 준결승전에서, 오스트리아는 3위 결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인 우루과이를 꺾고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 인물이자 모델인 트랍 대령은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잠수함장이자 사령관 출신이다.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것이다.
- 2017년 연립정부에 참여한 오스트리아 자유당 대표는 TV토론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지역협력체인 비셰그라드 그룹에 오스트리아가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까지 비셰그라드 그룹에 가입하면 이들 나라의 지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비슷해진다. # 물론 비셰그라드 그룹의 창설 목적인 구 공산권 국가들의 경제 발전을 위한 교류 및 협력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하기 위한 폴란드, 헝가리-크로아티아, 보헤미아 국왕들의 모임에서 유래한 이름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의 가입 가능성은 희박하다.
- 조선과는 1892년에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수교했다. 당시 다른 통상조약들이 그랬듯이 이 조약도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체결 과정 역시 군함을 이용한 군사적 위협이 수반된 포함외교의 성격이 있었다. #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시기에 독일 분할안을 논할 때 윈스턴 처칠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처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합치려고 했다.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와 친근했던 바이에른 지방까지 묶어 남독일로 만들려 했다.
12.1. 매체에서
-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소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북극 탐험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 패러독스가 제작하고 유통하는 게임이며 19세기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빅토리아 2에선, 게임 시작 시점에는 아직 대타협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헝가리 민족국가 형성 반란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물리치고 나면 대타협을 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통일을 위해 독일계 소국들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권에서 빼앗으려는 프로이센 왕국과 역시 통일을 위해 롬바르디아를 되찾으려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영 좋지 않은 꼴이 되기 마련이다. 플레이어가 잡으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본문에 언급되었던 재편성을 통해 도나우 연방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 Hearts of Iron IV에 등장한 최초의 국가 형성 디시전의 주인공.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일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를 무찌르고 본래의 영토까지 획득해내고 나면 디시전이 열려 오헝의 땅을 모조리 핵심 주로 편입시키고 오헝의 부활을 천명할 수 있다. 특히 헝가리는 아예 오스트리아-헝가리 부활을 목표로 하는 루트(균형 잡힌 예산안>합스부르크 대공 초청>오스트리아와의 국민투표>체코슬로바키아 보호국화 요구)가 따로 있다.[109]
다만 멀티에서는 오헝 형성에 오스트리아가 필수이기 때문에 안슐루스가 원천봉쇄, 덤으로 체코의 주데텐란트까지 다 먹어버리고 유고와 루마니아와 루마니아에 딸려온 불가리아까지 몽땅 뜯어가기에 안슐루스&뮌헨협정 트롤이 필연적이라 추축국의 앞길을 막기 때문에 독일유저가 독일연방~유럽연합/2제국 복원 루트를 가거나 독일과 상의해 동맹을 맺지 않으면 트롤픽이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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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
1936년 오스트리아의 상황 벨트크리크의 승전국 반열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제국 내 문화,계급 및 이념의 분열을 분명하게 드러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내부의 불안은 계속되었습니다
카를 황제는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20세기에도 생존할 수 있도록 개혁을 시도하다가 암살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발자취를 따라 일련의 대규모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제국의 헝가리계 귀족들에 의해 크게 방해받았고 이로 인해 그의 연방화 계획들은 제국의 시스라이타니아에서만 천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국은 힘들었지만 그 노력은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연방국이 된 시스라이타니아 오스트리아는 진정되었지만, 트란스라이타니아(제국의 헝가리 영토)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헝가리에 속한 민족들 역시 라이타 강 너머 자유를 바라보며 자신들도 그러한 자치를 누리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카르파티아 분지가 계속해서 마자르의 손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개혁이 정말로 헝가리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오직 황제만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대전쟁중의 기아나 총파업등의 '사소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므로써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제국의 햐체를 당장은 모면하면서 한 숨 돌릴수 있었고, 이를 말미암아 당장은 제국 전역에 안정을 되찾으며 추가적인 영토 확장과 경제적 부흥까지 얻으며 찬란한 20년대를 보낼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당시 제국 최대의 은행이던 크레덴슈탈트 은행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이 호황은 끝나게 되고, 이후 1936년 게임 시작 지점에서는 독일발 경제위기까지 닥치면서 제국의 경제와 이탈리아, 발칸에 뻗치던 외교적 영향력은 붕괴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개혁 성향에 가까운 카를 1세가 황제가 되면서 총리에게 실권을 맡기는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국가가 되었으며 대전쟁 당시 약속한 더욱 더 광범위한 자치권의 결과로 큰 틀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그리고 보헤미아, 일리리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로 분열 된 상태로 시작한다. 이후 7차 대타협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군대로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는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으며 대타협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면 집권 정당이 사회보수주의 기독사회당인지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노동자당인지에 따라 각각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도나우 연방으로 제국을 통합시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실현시킬 수도 있다.
- 리버스 1999 에서는 1914년의 오스트리아 빈이 6장 "별은 빛나건만"과 7장 "고독의 노래"의 배경으로 나온다. 곁 으로는 다른 나라와 달리 마도학자도 자유롭게 생활할수 있는 자유의 국가로 선전되지만 실제로는 암묵적인 차별이 진행되는, 다른 국가들과 다를바 없는 국가로 묘사된다, 사람들의 인식도 비슷해서, 6장의 주요인물인 이졸데 에게 검증되지 읺은 정신과 치료방식을 시험하지 않나, 아직 트라우마가 남아있음에도 자신의 오빠에 대한 추도문을 읽게 하지 않나 전반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 외에도 제국 특유의 비효율적인 관료체계 때문에 마도학자들이 피해를 본다던지, 마도술로 진료를 보는 무면허 정신과 의사를 잡아내지 못 하다던지 좋은 모습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이후 카카니아(리버스: 1999)의 "마도학자도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는 세상"를 함께 만들자는 사상을 평생동안 받던 억압에서 피워난 광기와 재건의 손 소속 인물들의 선동에 휩쓸려 "마도학자만 사는 세상"으로 해석한 이졸데의 자기딴에는 연모하는 선생님을 위한 활약과 제국의 주요인사들에 대한 재건의 손의 동시다발적인 암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폭풍우가 예정보다 더 앞당겨 지면서 빈은 대혼란에 빠진다, 이후 카카니아와 그의 지인들이 라플라스 과학 연구소에서 발견한 폭풍우 면역 술식을 빈 전역에 전파하고 사용하지만 카카니아 본인만이 살아남으면서 7장에서 오헝제국의 출연은 끝이 난다.
- SCP 세계관에선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지원해 전쟁 억지를 위한 여러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들고 보니 사용하는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고, 협상국도 비슷한 무기를 가지고 반격하는 바람에 제국이 사라진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전사자가 나오고 있다.
- 유럽전쟁 6:1914에서는 개별 시나리오도 있고 1914 정복과 1917 정복에서도 3성국인데다가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로 나오는 등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다.
[1] 정식 명칭은 2.1 문단 국호 항목 참조.[2] 왼쪽은 독일어, 오른쪽은 헝가리어[3] 영어[A] 제국기로 알려진 깃발은 사실 상선기였고, 국외 영사관에서 쓰였다. 공사관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2개 국기를 동시 게양했으며 대사관에서는 2개 국기에 황실기까지 추가로 게양했다. 당장 독일 제국에서 제작한 동맹국 선전 포스터만 보더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는 2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명세 때문인지, 깃발이 멋져서 그런지 상선기가 유명하다. 물론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체펠린 문서의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어느 정도 국기처럼 사용된 경우도 없잖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A] [6] 제국기로 알려진 이 깃발은 사실 상선기였고, 국외 영사관에서 쓰였다. 공사관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2개 국기를 동시 게양했으며 대사관에서는 2개 국기에 황실기까지 추가로 게양했다. 당장 독일 제국에서 제작한 동맹국 선전 포스터만 보더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는 2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명세 때문인지, 깃발이 멋져서 그런지 상선기가 유명하다. 물론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체펠린 문서의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어느 정도 국기처럼 사용된 경우도 없잖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기는 이 문서의 2.2 문단 참조.[7] 라틴어[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적 계승국은 오직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헝가리 제1공화국 뿐이었다.[9] 이는 영국(영국령 인도 포함), 청나라, 러시아, 미국, 프랑스(식민지 포함), 독일, 네덜란드 다음의 세계 인구 수 8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포르투갈 보다도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식민지를 제외하면 당대 열강 중 러시아, 미국, 독일 다음의 4위였다.[10] 오스트리아, 헝가리 각각 1명.[11]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총리이자 시스라이타니아의 초대 총리.[12] 티서 이슈트반의 아버지.[13] 기수가 흔들고 있는 군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깃발로, 신성 로마 제국 문장(Coat of Arms)의 검은 쌍두독수리와 황금색 깃발에서 비롯되었다.[14] 이는 영어 명칭이며, 독일어로는 치스라이타니엔(Cisleithanien)이다. 다만 이는 약칭으로 공식 명칭은 제국의회에 대표되는 왕국들과 영토들(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이다.[15] 이는 영어 명칭이며, 독일어로는 트란스라이타니엔(Transleithanien)이라고 한다. 다만 이는 약칭으로 공식 명칭은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이다.[16]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참전을 명령하는 징집 선전문이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루신어, 이디시어 등의 12개 언어로 작성되기도 했다.[17] 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18] 어 비로덜미 터나치번 케프비셸트 키라이샤고크 에시 오르사고크 에시 어 머저르 센트 코로너 오르사거이[19] 라이히스라트(Reichsrat)[20] 헝가리 왕국의 첫 왕조인 아르파드 왕조의 개창자이자 실질적인 시조 이슈트반 1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슈트반 1세는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된 성인이다.[21] 여기서 말하는 왕국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en)의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통틀어서 kaiserlich und königlich라고 하며,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의미한다. 원래 k. u. k.는 전자만을 의미했는데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반독점하던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선제후국인 보헤미아 왕국을 의미했다.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은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만 동일하게 국가원수로 모시는 동군연합이었을 뿐, 그 외에는 완전 남남이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세습령과는 별개로 신성 로마 제국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패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반쯤 포기하고 세습령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약해져간 보헤미아 왕국의 입지,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선제후 폐지로 인한 보헤미아 왕국 정치적 위상 상실과 헝가리 왕국의 입지 상승과 더불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에는 k. u. k.가 보헤미아 왕국이 아니라 헝가리 왕국으로 대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22] 영사관에서는 헝가리 왕국 국기와 오스트리아 제국 두 국기를 모두 게양하였으며, 대사관에서는 황실기까지 더해 세 국기를 모두 게양하였다.[23] 갈리치아에서 루테니아어가 루테시아어로 오타가 나 있다.[24] 실제 제국 내 언어사용자 분포는 위 지도보다 더 복잡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 남부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마을 단위로 서로 다른 민족이 뒤섞였다.[25] 보스니아 인구의 96%는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였다.[26] 참고로 이웃한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은 인구의 1.2% 정도 되었다.[27]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들을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세르비아인으로 분리한 지도이다. 또한 이탈리아계에서 라딘어와 프리울리어 화자들 또한 분리하였다.[28] 대부분이 오늘날 세르비아 공화국 보이보디나 자치주 북부지역, 수보티차 시와 그 인근에 분포하고 일부는 헝가리에도 거주 중이다. 오스만의 침공을 피해 헤르체고비나와 달마티아 지역에서부터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 왕국의 조사에서 이들은 '가톨릭 세르비아인', '달마티아인', '일리리아인' 등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녜브치보다는 크로아티아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29] 오늘날 크로아티아 동부 및 헝가리 남부 버러녀주, 보이보디나 일대에 거주. 부녜브치인과 마찬가지로 원래 보스니아에 거주했다가 오스만의 침공을 피해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과 그 일대에 이주했다고 추정한다.[30] 오늘날 루마니아 서부 바나트 지역에 거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접경지대에서 사용하는 토를라크(Torlak)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고 주로 가톨릭 신도들이다. 오늘날 대부분은 역시 대부분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간주하고 크라쇼바니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루마니아 크로아티아계 연합이라는 정당을 통해 루마니아 내 다른 소수민족 정치집단들과 연대하여 루마니아 국회에 참여하고 있다.[31] 오늘날 루마니아 서부 바나트 지역에 거주.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언어는 불가리아어 하위분파인 바나트 불가리어를 사용한다. 독특하게도 대부분이 불가리아 정교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32] SST사는 제국 해군 주력전함들은 물론이거니와, 훗날 이탈리아로 넘어간 후에는 리토리오급 전함들도 건조했다.[33] 스웨덴산 철광석은 슈타이어마르크 산 철광석보다 쌌다고 한다.[34] 스코다는 강철을 이용한 제품 생산에는 독보적이었으나 제강업 자체에 있어서는 비코비체에 못 미쳤다.[35] 다만 경영악화로 인해 지난 2017년 파산 신청을 한 바 있다.[36] 테게토프급 3척이 STT사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4번함 센트 이슈트반함은 이름대로 헝가리의 건즈 사에 의해 건조되었다.[37] 1993년에 파산했다.[38] 독일어 명칭. 체코어로는 테신, 폴란드어로는 치에신으로 표기한다.[39] 특히 동갈리치아는 폴란드계 지주와 우크라이나계 소작농 간의 갈등이 심하였다.[40]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서부 헝가리는 제외.[41] 이마저도 대부분이 저품위 석탄인 갈탄이었다. 산업에 핵심적인 역청탄은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에서만 생산되었다.[42] 이런 상황을 개선하는 데 미약하게나마 노력을 기울였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작가 프란츠 카프카다. 당시 그는 프라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산업재해보험공단(Arbeiter-Unfallversicherungs-Anstalt für das Königreich Böhmen in Prag)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산업재해로 피해를 본 노동자들을 도왔다. 산재 개선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다수 작성했으며 각 지방 정부기관에 법률고문으로 출장을 다니기도 하면서 실적을 인정받았다. 1915년 군에서 징집영장을 발부하자 공단에서 그를 필수 인력이라며 징병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했을 정도다.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는 이때 마주했던 경험 역시 일부 녹아 있다. 다만 카프카가 당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처럼 전투적인 사회 변혁 의지를 가지고 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험 공단 일에 많은 보람을 느끼기는 하였으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그저 "밥벌이(Brotberuf)"였다. 카프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문학이었다.[43] 원래는 몰다비아 공국과 그 후신인 루마니아 왕국 영토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소련이 베사라비아(현재의 몰도바, 오데사주 일부(부자크), 체르니우치주 북부 일부)와 함께 부코비나 북부 지역을 강탈했다. 현재 북부는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주, 남부는 루마니아 수체아바주에 속해있다.[44] 남쪽 10% 정도의 아주 작은 영토는 현재 슬로베니아에 속한다.[45] 원래 크라쿠프 자유시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관리하는 독립 국가였으나, 1830년 러시아 내 폴란드인이 봉기를 일으키자 이에 대응해 곧바로 진압, 대공국 지위로 합병되었다.[46] 영어로는 스티리아(Styria)로 불린다. 부르크뮐러의 에튀드 Op. 100 중 하나인 '스티리아의 여인'의 그 스타리아.[47] 트렌토 지역은 이탈리아인이 많은 지역이 맞으나 쥐트티롤은 오스트리아인 다수 거주지역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 포함되어 현재의 트렌티노알토아디제가 되었다. 나머지 티롤 지역은 오스트리아에 잔류.[48]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헝가리 전체, 슬로바키아 전체, 우크라이나 서부의 자카르파탸, 루마니아 서부의 트란실바니아, 세르비아 북부의 보이보디나가 합쳐져 있다. 두 지역을 구별하는 지도도 있고, 같이 묶어놓는 지도도 있다.[49] 이웃한 독일 제국에서도 빌헬름 2세가 합법화시킨 이후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으로 등극하고 1912년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유럽 전반에서 사회주의가 유력하기는 했다.[50]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이 많이 사는 곳은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트리에스트 인근, 달마티엔 지역, 쥐트티롤의 트렌토 일대였다.[51]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 지연이었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은 2차대전과 냉전 등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다른 동구권 국가들 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서구로 편입되었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시민사회의 조직화와 정치참여의 전통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 즉각적으로 재활성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나 헝가리는 법과 정의당과 피데스의 막장 행각으로 민주주의가 확고히 자리잡은 게 맞느냐는 견해가 많긴 하다만 옛 유고연방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구 소련권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성공적으로 서구사회에 편입되었다.[52] 실제로 오헝 제국을 해체시키고 건국된 다민족 국가 유고슬라비아는 왕국 시절부터 세르비아인이 우월 의식을 드러내며 다른 민족을 차별하였다. 크로아티아인은 아예 추축국의 편을 들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에 일조했을 정도였다. 이후 재건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가 민족주의를 억압하며 유고 내 모든 민족을 동등하게 만들려 했지만 국가 요직은 여전히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열흘 전쟁(슬로베니아 독립 전쟁)부터 시작해 코소보 전쟁으로 끝나는 피비린내나는 전쟁 끝에 해체되었다.[53] 심지어 폴란드 분할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싫어하던 폴란드인도 여기에는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적어도 숨도 못 쉬게 탄압하는 독일 제국의 포젠, 서프로이센이나 러시아 제국의 러시아령 폴란드보다는 나았으니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크라쿠프를 방문할 때마다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을 정도였다.[54] 다만 이건 합스부르크 왕조가 좋아서가 아니라 보헤미아 왕국이 재독립하면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우는 러시아 제국과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는 독일 제국 사이에서 체코인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때문에 차악을 선택한 것이었다. 실제로 슬로바키아인과 연대하여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음에도 나치 독일에게 뮌헨 협정을 강요당했고, 소련에게 프라하의 봄으로 제압당했음을 고려한다면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55] Bartoš, J. et als. (1995) 267.[56] Bakke, Elisabeth (1999) 185.[57] 19세기 말엽부터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체코어와 독일어 사용 문제로 사사건건 치고 박고 싸웠다.[58] 정식 명칭은 독립과 48년당.[59]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27%가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60]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인에게 원한이 깊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인이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싫어했다. 칼만 왕 이래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동군연합이었으나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독립하려 할 때마다 크로아티아인이 선봉으로 나서 헝가리의 독립 시도를 진압했기 때문이다. 당장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크로아티아인 총독 요시프 옐라치치였다.[61] 제국 외무부 장관[62] 제국 외무부 장관[63] 오스트리아 제국 총리[64] 헝가리 왕국 총리[65] 제국 재무부 장관[66] 오스트리아 공화국 초대 총리[67] 오스트리아 연방국 초대 총리[68] 오스트리아 연방국 2대 총리[69] 오스트리아 연방국 3대 총리, 나치 독일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국가판무관[70] 나치 독일 총통[71] 이탈리아 공화국 초대 총리[72] 체코슬로바키아 2대 대통령[73] 체코슬로바키아 3대 대통령[74] 체코슬로바키아 2대 총리[75] 슬로바키아 제 1공화국 초대 대통령[76] 헝가리 왕국 국민단결정부 수장[77] 헝가리 인민 공화국 3대 수상[78] 폴란드 망명정부 총리[79] 폴란드 인민 공화국 3대 서기장[80]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수장[81]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초대 대통령[82]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수장[8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8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85] 실제로는 세르비아계라는 말도 있으나 본인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겼다.[8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8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나치 독일 명예원수[88] 출생지는 체코의 올로모우츠.[8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90] 출생지는 루마니아의 아라드.[9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92]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93]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중장, 헝가리 왕국 섭정[94]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대령[95] 나치 독일 육군 상급대장. 오스트리아 제국군 복무 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이어 나치 독일군까지 복무하며 상급대장까지 진급.[96] 나치 독일 육군 상급대장. 오스트리아 제국군 복무 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이어 나치 독일군까지 복무하며 상급대장까지 진급.[97] 나치 독일 육군 산악대장. 오스트리아 제국군 복무 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이어 나치 독일군까지 복무하며 대장까지 진급.[98] 나치당 친위대 대장, 3대 국가본안본부장[99] 나치당 친위대 중장, 루블린 SS및 경찰 지휘관[100] 나치당 친위대 대령[101] 출생은 독일이나,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주하여 병합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지냈다.[102] 나치당 무장친위대 대령[103] 나치당 친위대 소령[104] 사라예보 사건 당시 암살 가담자[105] 아돌프 히틀러의 부친이다.[106] 슘페터의 두 할머니 모두 체코계다. 그러나 슘페터 본인은 스스로를 독일계로 여겼다.[107] 우크라이나계 유대인과 헝가리계 유대인의 혼혈[108] 태어난 곳은 독일 제국의 라이프치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인이고, 아이슬러 본인도 1차 대전 당시 오헝 제국군으로 복무했다.[109] 은근히 사람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활 플레이를 많이 한다. 사실 이 게임 자체가 특성상 역사 그중에서도 서양사에 관심 및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하기 마련인데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러가지 요소로 볼때 매우 매력적인 국가이다. 명망높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는 입헌군주국이고, 현대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존립되었다면 막 나가는 러시아와 독일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줄수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유고-루마니아의 유럽 상위권의 거대한 영토와 영향력을 가졌던 국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