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장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남작[1] Alexander Freiherr von Krobatin
이름
Alexander Krobatin/Hrovatin 알렉산더 크로바틴[2] ↓ Alexander Ritter von Krobatin 알렉산더 리터 폰 크로바틴[3] ↓ Alexander Freiherr von Krobatin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남작[4] ↓ Alexander Krobatin 알렉산더 크로바틴[5]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올뮈츠(Olmütz)에서 태어난 크로바틴은 슬로베니아계 군인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그레고어 알렉산더 크로바틴(Gregor Aleksander Krobatin)은 일반 사병에서 시작해 훈장을 받으며 중령까지 진급한 인물이었다. 크로바틴은 1861년에 사관후보생으로 1865년부터 1869년까지 포병사관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제3요새포병대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그는 고등포병과정과 포병사격학교를 수료했고, 1871년부터 1876년까지는 빈 공과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며 군사기술위원회의 화학실험실 책임자로 일했다. 특히 그는 1877년부터 1885년까지 황립 및 왕립 기술군사대학에서 화학 및 화학공학 교수로, 1878년까지는 포병·공병학교 교수로도 재직하면서 교육자와 군수 전문가로서 동시에 두가지 길을 걸었다. 1900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했다.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장관 시절 크로바틴은 군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화염방사기 같은 신무기를 도입했고, 보병부대의 기관총 수를 대폭 늘렸으며, 사단급 포병 전력도 크게 강화했다. 특히 그는 참모총장이었던 콘라트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세르비아나 이탈리아에 대한 예방전쟁을 주장하는 콘라트를 "전쟁 정당"의 핵심인물로서 군대의 공격적인 요소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로바틴은 산업화된 오스트리아와 농업이 발달한 헝가리의 경제를 활용하여 현재 동원된 군대를 보장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전쟁에 입대하여 더 이상 산업 및 식량 생산에 사용할 수없는 많은 산업 인구 집단이있는 국가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중요한 무기와 군수품이 공급되고 산업 효율성이 향상되었으나 전쟁의 첫 2년 동안 크로바틴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실제로 경제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단 수준에서 사용 가능한 포병 수준을 세 배로 늘리는 데는 성공했고, 이는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16년 2월 26일에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1917년 3월, 콘라트가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크로바틴도 전쟁장관직을 사임하고 제10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카포레토 전투에서 두 개의 이탈리아 사단을 항복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 공로로 1917년 11월 5일 원수로 진급했다. 하지만 1918년 6월의 피아베강 전투에서는 패배를 겪었고, 같은 해 10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도 실패를 맛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 크로바틴은 1918년 12월 1일 은퇴했으며, 빈 공과대학교 명예박사, 카를 1세 복지기금 명예회장 등을 지내다가 1933년 12월 27일 빈에서 생을 마감했다.
크로바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전쟁장관 시절 추진한 포병 전력 증강과 신무기 도입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력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시 동원체제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것도 그의 큰 업적으로 꼽힌다. 다만 콘라트 일반참모총장에 동조하여 세르비아와 이탈리아에 대한 강경책을 지지하며 전쟁을 부추긴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후기의 피아베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군사령관으로서의 능력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포병 전문가이자 군사행정가로서 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오스트리아 잔트요한 임 폰가우에 있는 크로바틴 병영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도 이러한 평가를 반영한다.
[1]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크로바틴'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Krobatin은 독일식 성이고 Hrovatin은 슬로베니아식 성이다.[3] 1881년 귀족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4] 1915년 남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5]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귀족 접두어가 철폐되면서 다시 초명으로 돌아왔다.[6]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