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상급대장 안톤 하우스 Anton Haus | |
이름 | Anton Johann (Freiherr) Haus (von Hohenwart) 안톤 요한 하우스 (폰 호엔바르트 남작)[1] |
출생 | 1851년 6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카르니올라 공국 톨민 |
사망 | 1917년 2월 8일 (향년 66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풀라 |
최종 계급 | 제국 해군 대제독[2] (Großadmiral) |
주요 참전 |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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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2. 생애
카르니올라 공국의 톨민(Tolmin) 출생인 안톤 하우스는 요제프 마티아스 하우스와 슬로베니아인 화가 프란츠 발터의 딸인 어머니 마리야 발터(1817-1892)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9년 해군에서 복무한 후, 하우스는 피우메에 있는 황립 및 왕립 해군사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해양학과 해양 기상학에 관한 저서들을 출판했다.1901년, 장갑순양함 SMS 마리아 테레지아 함의 함장이 되어 의화단 운동에 참전하여 1902년까지 청나라 베이징에 머물렀다. 1907년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후, 하우스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표로서 헤이그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 1912년에 그는 비행대 조사관이 되었고, 그 후 24일에 함대 검사관이 되었다. 1913년 2월, 루돌프 몬테쿠콜리가 은퇴한 후, 함대사령관 및 전쟁성 해군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7월 7일 세르비아에 대한 과감한 행동이 결정된 중요한 제국의회에서 아마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던 하우스는 불참하였다. 대신 그의 부하인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참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하우스는 초대 함대 총사령관(Flottenkommandant)로 지명되었다. 그는 동맹이었으나 행보가 의심스러웠던 아드리아 해 너머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움직임을 경계하였고,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15년 이탈리아가 대오스트리아 선전포고를 하자 5월 23일 밤에 즉각적으로 안코나와 다른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 항구들을 폭격하기 위해 전 함대를 내보냈다. 이 포격은 아드리아 해안에 걸쳐있는 이탈리아 철도를 파괴했으며, 이탈리아군의 동원 능력을 저하시켰다.
이후 협상국 함대가 아드리아 해를 봉쇄하자, 하우스는 함대의 진정한 가치는 함대로서의 존재를 유지함에 있음을 인식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해 독일과 의견이 일치했던 그는 휘하의 잠수함대를 동원한 통상파괴작전에 집중했다. 다만 무조건 항구에 수상함대를 보존했던 것은 아니었고, 유보트 함대의 통상파괴작전과 지원하기 위해 간간히 함대를 내보내어 협상국의 봉쇄망을 뒤흔들었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1916년 5월 12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하우스를 황실 구성원을 제외한 해군 장성들중 최초이자 유일한 대제독으로 진급시켰다.
▲ 1917년, 그의 기함 비리부스 우니티스함에서 거행된 장례식.
그러던 1917년 2월 2일, 하우스는 풀라에 정박한 그의 기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에서 66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하우스 원수의 유해는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휘텔도르프 공동묘지(Hütteldorfer Friedhof)의 가족 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아들인 오토 막시밀리안 하우스(Otto Maximillian Haus)는 슬로베니아에서 의사로 일했으며, 손자인 헤르만 하우스 (Hermann Haus, 1925 ~ 2003) 는 MIT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3]. 그의 연구는 광통신 기술의 기반이 되었다.
3. 기타
- 의화단 전쟁 당시 장갑순양함 SMS 마리아 테레지아 함의 함장으로 참전하며 대한제국의 제물포(현 인천광역시)를 잠시 거쳐간 적이 있다. 당시 제물포는 국제항구였던데다 대한제국은 8개국 연합군에 온갖 물자를 팔아치우며 전쟁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함대도 중간 기착지로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