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루돌프 슈퇴거슈타이너 폰 슈타인슈테텐 Rudolf Stöger-Steiner von Steinstätten | |
이름 | Rudolf Stöger 루돌프 슈퇴거 ↓ Rudolf Stöger-Steiner Edler von Steinstätten 루돌프 슈퇴거슈타이너 에들러 폰 슈타인슈테텐[1] ↓ Rudolf Stöger-Steiner Freiherr von Steinstätten 루돌프 슈퇴거슈타이너 폰 슈타인슈테텐[2] 남작[3] ↓ Rudolf Stöger-Steiner 루돌프 슈퇴거슈타이너[4] |
출생 | 1861년 4월 26일 |
오스트리아 제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페어네크안데어무어 | |
사망 | 1921년 5월 12일 (향년 60세) |
오스트리아 공화국 슈타이어마르크 그라츠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8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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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제국의 마지막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장관을 지냈다.2. 생애
이후 슈퇴거는 1875년부터 1878년까지 그라츠 근교 리베나우의 보병 사관생도 학교에서 수학했다. 1878년 군에 입대했으며, 의붓아버지의 영향으로 제9야격대대에 배속되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전장에 자원병으로 파견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1880년 11월 1일 소위로 임관했다.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졸업 후 중위로 진급하여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슈퇴거슈타이너는 1887년 4월 28일 빈 제50보병여단 참모장교로 임명되었고, 1889년 10월 15일부터는 제8산악여단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에 세르비아 타코보 훈장 5등급(1887)과 페르시아 사자태양 훈장 4등급(1890)을 받았다.
1891년 의붓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 '슈퇴거슈타이너'가 되었다. 1892년 10월 25일, 의붓아버지의 귀족 작위 '폰 슈타인슈테텐'과 가문 문장까지 승계받아 '루돌프 슈퇴거슈타이너 폰 슈타인슈테텐'이 되었다. 같은 해 그라츠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폰 링크(Maria Magdalena von Link, 1869-1939)와 결혼하여 마르가레테(1893-1969)와 요한(1896-1897)이라는 두 자녀를 두었다. 다만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1890년 5월 1일 대위로 진급했으며, 모스타르 주둔 제18보병사단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1891년 10월 18일 크라쿠프 제1군단 참모장교가 되었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는 빈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전술 교관으로 근무했다. 1899년 11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우수한 교육 성과를 인정받아 같은 해 12월 2일 군공십자장 3등급을 수여받았다. 1901년부터 승진 심사 위원회에서 일하며 장교들의 승급 시험을 심사하는 업무를 보았고, 1903년 5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907년 3월 28일 제74보병연대장이 되었고, 1909년 3월 18일부터는 괴르츠 주둔 제56보병여단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0년 3월 24일 브루크 안 데어 라이타 육군사격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7월 22일 레오폴트 훈장 기사십자장을 받았고, 브륀 주둔 제4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4보병사단을 이끌고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루프 휘하 제4군의 일원으로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어 자모시치와 코마루프 전투에 참전했다. 아우펜베르크의 제4군은 러시아 제5군을 측면 공격하려 했으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일반참모총장의 명령으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3군을 지원하게 되었다.1914년 11월 제4사단은 빅토어 단클 휘하의 제1군으로 전속되어 크라쿠프로 이동했다. 1914년 말부터 1015년 초, 혹한의 날씨와 함께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벌어진 혈전에 참전했다. 1915년 4월 21일부터는 '슈퇴거슈타이너 전투단'을 지휘했고, 5월 11일부터는 슈퇴거슈타이너 혼성보병사단을 이끌었다. 1915년 5월 2일 시작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여해 비스와강을 건너 아노폴과 요제푸프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915년 7월 26일,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속되어 제15군단장이 되었다. 크른-톨민-산타루치아-아우차 방어선을 지켰으며, 1915년 11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제15군단을 이끌고 12번의 이손초 전투 중 8번에 참전해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전투 중에도 민간인 보호에 각별히 신경 썼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17년 8월 2일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마을로부터 명예시민권을 받았다.
2.2. 전쟁성 장관 시절
1917년 4월 12일 카를 1세에 의해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화려한 군인 경력과는 달리, 정치인 경력이 부족했던 슈퇴거슈타이너는 전쟁성 장관이라는 직책에 오른 후에 정치적 경험 부족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1917년 봄 3년만에 재소집된 제국의회에서 전문 정치인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고, 군대의 보급 문제도 심각했다.1918년 1월에는 산업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전선에서 7개 보병사단을 철수시켜야 했다. 1918년 5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며, 4월 28일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즈음 제국은 급속도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각 민족의 독립 선언이 이어지고 반군주제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1918년 10월 30일 빈에서 마지막 각료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반군주제 시위대와 조우했다. 시위대는 그의 차량을 에워싸고 창문을 깨뜨린 뒤 황제의 휘장(코카르데)을 떼어냈다. 이는 그를 개인적으로 겨냥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비슷한 일이 다른 친황제파 장교들에게도 발생했다.
1918년 11월 11일 카를 1세가 국정 참여를 포기하자, 12월 초까지 청산위원회 전쟁성 의장으로서 군대 해산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 퇴역하였다. 민간인의 신분이 된 슈퇴거슈타이너는 인스브루크를 거쳐 그라츠로 이주했으며, 전쟁 초기부터 앓아온 병이 악화되어 1921년 5월 12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라츠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에 안장되었다.
3. 평가
"뛰어난 리더십의 자질을 가졌고, 포괄적인 군사 교육을 받아 다재다능한 유용한 고위 장군이며 조용하고 단호하며 자신감이 넘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때문에 그는 지휘관 역할에 특히 적합하다"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의 평가.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의 평가.
1917년에는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도 이 평가에 동의하며 그의 승진을 추천했다.[5] 이탈리아 전선에서 8번의 이손초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이러한 평가를 입증했고, 여러 훈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16년부터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더 이상 전선 지휘가 어려워졌고, 이에 군사 행정직이 추천되어 전쟁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취임 후에는 중앙운송부, 전쟁감독청, 전쟁복지청, 중앙정보부, 포로송환 감찰청 등 새로운 부서들을 신설하며 전쟁성의 조직 개편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제국은 이미 심각한 물자 부족과 각 민족의 독립 요구에 직면해 있었고, 결국 1918년 제국의 붕괴와 함께 그의 개혁 시도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