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 Erzherzog Joseph Ferdinand von Österreich-Toskana | |
이름 | Joseph Ferdinand Salvator Maria Franz Leopold Anton Albert Johann Baptist Karl Ludwig Rupert Maria Auxilatrix von Österreich-Toskana 요제프 페르디난트 잘바토어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안톤 알베르트 요한 밥티스트 카를 루트비히 루페르트 마리아 아욱시라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
출생 | 1872년 5월 24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잘츠부르크 공국 잘츠부르크 | |
사망 | 1942년 8월 26일 (향년 70세) |
나치 독일 빈 |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배우자 | 로자 칼텐브루너 (1921년 결혼 / 1928년 이혼) |
게르트루데 토마네크 폰 바이어펠스몬트제 (1929년 결혼) | |
자녀 | 클라우디아, 막시밀리안[1] |
아버지 | 토스카나 대공국 대공 페르디난도 4세 |
어머니 | 부르봉파르마의 알리시아 공녀[2] |
형제 | 레오폴트 페르디난트, 루이제, 페터 페르디난트, 하인리히 페르디난트, 아나, 마르가레타, 게르마나, 로베르트 페르디난트, 아그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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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황족, 제국상급대장. 토스카나 대공가의 일원으로, 군사 혁신가이자 항공 분야의 선구자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제14군단과 제4군을 지휘했으며, 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항공대 총감찰관을 역임했다. 페터 페르디난트 대공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동생이며 같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복무하였다.2. 생애
2.1. 출생과 교육
1872년 5월 24일 잘츠부르크에서 토스카나 대공국 마지막 대공 페르디난도 4세와 부르봉파르마의 알리시아 공녀사이의 넷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메렌의 바이스키르헨(Weißkirchen)[3]의 육군상급실과학교와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2.2. 군 경력
1892년 8월 18일 티롤산악군연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제93, 17, 59 보병연대와 제4티롤산악군연대에서 복무했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는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다. 1903년에는 제27연대의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05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93보병연대 연대장이 되었다. 1908년에는 제5보병여단 여단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군부에서 아직 항공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시기에 항공 분야에 큰 관심을 보이며 선구자로도 활동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구에 매료되어 1909년에는 린츠의 자신의 저택에서 프랑스 디에프까지 16시간 동안의 기구 비행을 성공시켰다.2.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8월, 제1군 사령관이 된 빅토어 단클의 후임으로 제14군단장이 되었다. 1914년 10월에는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보병대장의 후임으로 제4군 사령관이 되었다. 1916년 2월 26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나, 같은 해 6월 4일 개시된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알렉세이 칼레딘이 이끌고 있는 러시아 제8군이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제4군을 공격했는데, 강력하고 지속적인 러시아의 포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요새화된 진지와 방어 참호체계를 파괴했다. 러시아 보병은 증원 없이도 공격 첫날부터 올리카(Olika)에서 돌파에 성공하여 방어 깊숙이 침투했다. 전사자와 포로가 된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 제4군은 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하는 러시아군은 6월 10일 스트리(Stryj) 강도 건넜다. 85km 폭으로, 48km 깊이로 오헝 제국의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규율이 무너졌고, 슬라브계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거의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단 일주일 만에 제4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어 겨우 27,000명의 전투가능한 군인만이 남은 상태였다. 이로인해 알렉산더 폰 린징겐을 비롯한 독일 최고사령부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을 사령관 자리에서 교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그는 해임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장군의 해임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 발생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신에 타격을 주는 선례가 되었다. 1916년 11월 카를 1세가 즉위한 후, 1917년 7월 8일부터 1918년 9월 3일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항공대 총감찰관으로 복무했다. 다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에밀 우첼라크(Emil Uzelac) 소장이 가졌다. 따라서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은 왕족이라는 신분 덕분에 명예직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인사 조치가 이루어진 셈이었다.[4]2.4. 전후와 말년
전쟁 후에는 일반 시민으로서 빈에서 살았다. 1921년 5월 2일 평민 출신인 로자 칼텐브루너와 귀천상혼[5]했으나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고, 1928년에 이혼했다. 이후 1929년 1월 27일에는 게르트루데 토마네크와 재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6]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후, 나치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3개월간 수감되었다. 다행히 알베르트 괴링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나, 게슈타포의 지속적인 감시 하에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1942년 8월 28일 빈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빈의 카푸친 교회 지하묘지에 안치되었다.3. 평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부그 강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 자모시치 전투에서 성공적인 지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제4군 지휘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때문에 테오도어 폰 카르만은 그를 "무지하고 거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다만 군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항공력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을 일찍이 인식했다는 점에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1909년의 린츠-디에프 간 장거리 기구 비행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그러나 후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항공대 총감찰관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실질적이기보다는 명목상인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치 독일 시기에는 반나치 입장을 고수하여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는 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소신을 지켰음을 보여준다. 알베르트 괴링이 그를 돕기로 결심한 것도 이러한 그의 반나치적 태도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 두 명 모두 후처 소생이다. 황가의 성은 받았으나 황족 자격으로 받는 대공/여대공 작위는 받지 못했다. 클라우디아는 독신으로 사망했고 막시밀리안은 1녀를 두었으나, 막시밀리안의 딸도 독신이기 때문에 현재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가계는 단절될 예정이다.[2]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의 차녀.[3] 現 체코 흐라니체(Hranice)[4]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과 다르게 점진적인 후퇴를 통해 전선 유지 시도하며 급격한 붕괴를 피한 제1군 사령관 푸할로가 사령관의 자리에서 경질된 후 사실상 군 경력이 종료된 것과 대조된다.[5] 때문에 토스카나 대공가의 수장 자리는 동생인 페터 페르디난트 대공이 계승하게 되었고, 오늘날 토스카나 대공가는 페터 페르디난트의 가계로 이어지고 있다.[6] 이 2명은 황가의 성은 받았으나 황족 자격으로 받는 대공/여대공 작위는 받지 못했다. 클라우디아는 독신으로 사망했고 막시밀리안은 1녀를 두었으나, 막시밀리안의 딸도 독신이기 때문에 현재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가계는 단절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