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자무엘 폰 허저이 Samuel von Hazai | |
이름 | Samuel Hazai 자무엘 허저이독일어 Hazai Samu 허저이 서무헝가리어 ↓ Samuel Freiherr von Hazai 자무엘 폰 허저이 남작독일어 Báró Hazai Samu 허저이 서무 남작헝가리어 |
출생 | 1851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베스테르체바녀 리마솜바트 |
사망 | 1942년 2월 10일(향년 90세)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3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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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왕립 헝가리 국방성 장관을 지냈다. 원래 이름은 사무 콘(Kohn Sámuel)이었으며, 유대계 출신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에 오른 유대인 장교였다.2. 생애
1851년 12월 26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령이었던 리마솜바트(Rimaszombat)[1]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콘-허저이(Kohn-Hazai)라는 성을 사용하다가 1876년 허저이(Hazai)로 개성했다. 허저이 1873년에 군에 입대하여 루도비카 사관학교(Ludovika Akadémia)를 졸업했고, 1879년부터 1881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1886년부터 헝가리 국방성에서 근무했으며, 1889년부터 1904년까지 루도비카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마리어 유하스(Mária Juhász, 1866-1945)와 결혼해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부인 마리어는 전간기 헝가리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었던 언도르 유하스(Andor Juhász, 1864-1941)의 여동생이었다.페르디난트 대공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중심으로 군을 개편하고자 했을 때, 오스트리아의 유망한 인물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게오르기 중장과 함께 헝가리를 대표하여, 게오르기 중장이 오스트리아 황립-왕립 국방장관이 되었고, 허저이는 1910년 1월 왕립 헝가리 국방장관이 되었다. 1912년 남작(báró/Freiherr) 작위를 받았으며, 1914년 보병대장, 1917년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1917년 2월부터는 샨도르 수르머이가 후임 국방장관이 되었고, 자리에서 물러난 허저이는 전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보충업무 총책임자를 맡았다. 이 당시 허저이의 큰아들 벨러(Béla von Hazai, 1893-1918)도 종군한 상태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 말미인 1918년에 전사하였다.[2]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18년 12월 1일부로 퇴역했으며,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시기에 잠시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여러 은행과 기업의 이사직을 맡았고, 1927년부터는 상원 종신의원이 되었다. 1942년 2월 10일 부다페스트에서 90세로 사망했다.
3. 평가
허저이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낙후되어있던 헝가리 군사력의 현대화였다. 오랫동안 개정이 필요했던 군사 형사소송법을 현대적으로 정비하고 전시 비상조치에 관한 정부 권한을 체계화, 포괄적인 국방개혁을 법제화하고 의회 통과까지 성공했다. 한편, 평생의 업적을 봤을 때 군사 이론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특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헝가리어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허저이는 헝가리 군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 비해 군사력 발전이 더뎠다는 평가도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보다 5년이나 늦은 1913년에야 국토방위군에 포병 장비를 지급할 수 있었다. 이는 헝가리 정치인들이 군사비 지출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적된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전선의 수요와 국내 정치적 압박 사이에서 고충을 겪었지만, 1917년 전군 보충업무 총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초기의 어려움들을 잘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유대계 출신으로는 드물게 제국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
4. 여담
- 1917년 2월 카를 1세가 그를 전군 보충업무 총책임자로 임명했는데, 재미있는 점은 황제가 이전 담당자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아서 허저이가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고 한다.
- 11927년에는 호르티 정권 시기 상원 종신의원이 되었다.
[1] 현재 슬로바키아의 리마브스카소보타(Rimavská Sobota)[2] 당시 허저이 외에도 아들을 잃은 장군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원수, 카를 폰 플란처발틴 제국상급대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