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보병대장 빅토어 베버 폰 베베나우 Viktor Weber von Webenau | |
이름 | Viktor Maria Willibald Weber Edler von Webenau 빅토어 마리아 빌리발트 베버 에들러 폰 베베나우 |
출생 | 1861년 11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케른텐 공국 노이하우스 |
사망 | 1932년 5월 6일(향년 70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인스브루크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
최종 계급 | 육군 보병대장 (General der Infanterie) |
주요 지휘 | 제27보병사단 제47보병사단 제10군단 몬테네그로 총독 제18군단 제6군단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몬테네그로 전역 - 로브첸 산 전투 |
주요 훈장 | 군사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프란츠 요제프 훈장 철왕관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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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보병대장.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제47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몬테네그로 전역에서 로브첸(Lovćen) 산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전쟁 말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휴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2. 생애
2.1. 출생과 초기 경력
1861년 11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케른텐 공국 라바뮌트(Lavamünd) 근처의 노이하우스(Neuhaus) 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그라츠에서 보냈다. 그라츠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후 근처 리베나우의 보병생도학교에 입학했다. 1878년 11월 12일 제27야전사단에 배속되어 1879년 8월 18일 상급생도사냥병으로 진급했다.2.2. 군 경력
1880년 11월 1일 소위로 임관하여 1893년 10월까지 제27대대에서 복무했다. 그 사이 1886년 5월 1일 중위로, 1892년 11월 1일 대위로 진급했다. 1893년 10월 1일 제27야전사단이 티롤 황제연대의 제16대대로 편입되면서 베버도 황제연대 장교가 되었다. 1895년 1월 10일 당시 타르비시오(Tarvisio)에 주둔하던 제20야전사단으로 전속되었다. 1898년 5월 2일 참모부로 전출되어 소령 시험을 통과한 뒤 1898년 11월 1일 소령으로 진급, 동시에 카샤우의 제27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3년 후인 1901년 11월 1일 빈의 제2군단 본부 2급 참모장교가 되었고 1902년 5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사라예보에 주둔하던 제68보병연대 대대장이 되었다가 1905년 5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군사공로십자장을 받았다. 1907년 4월 18일에는 페치의 제69보병연대장이 되었다. 이전 지휘관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 때도 거의 전원이 헝가리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했으며, 성공적인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1911년 5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2.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8월 1일 베버는 중장으로 진급한 후 프리드리히 노바크(Friedrich Novak) 중장의 후임으로 카타로에 주둔하고 있던 제47보병사단장이 되었다. 사단과 함께 몬테네그로 국경 근처에 있는 이 중요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기지를 육상 및 해상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16년 1월 슈테판 사르코티치 보병대장의 전반적인 지휘 아래 이그나츠 트롤만(Ignaz Trollmann) 중장의 제19군단 예하에서 제47보병사단을 지휘해 몬테네그로를 상대로 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코토르 만을 내려다보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로브첸 산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1916년 1월 8일 아침, 지원 포병(함포 포함)의 개전포격과 동시에 그의 증강된 제47보병사단의 4개 산악여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사단장 베버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짧은 시간 내에 중요한 지형지물들을 점령했다.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공격이 중단되고 진격이 지원 포격을 추월했을 때, 베버는 직접 산악포대를 배치해 몬테네그로의 포대를 파괴했다. 진격은 계속되어 48시간 내에 크르스타츠 고개(Krstač Pass)와 로브첸 산 정상을 점령했다. 로브첸 작전 중 제47보병사단을 지휘한 공로로 베버는 1922년 6월 27일 제189차 수여식에서 군사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장을 받았다.
2.4. 몬테네그로 총독과 전후 활동
1916년 1월 25일 몬테네그로와의 휴전 서명 이후에 휴전협상을 주도했던 베버는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의 후임으로 1916년 2월 26일, 점령지 몬테네그로의 군사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1917년 7월 10일까지 수행했다. 제47보병사단장으로는 1916년 2월 루돌프 브라운(Rudolf Braun) 중장이 그의 뒤를 이었다. 몬테네그로 군사총독으로서의 그의 후임자는 황제에 의해 갓 해임된 시스라이타니아 수상 하인리히 클람-마르티니츠(Heinrich Clam-Martinic) 백작이었다.베버는 야전임무로 돌아와 카를 크르지테크 제국상급대장의 후임으로 동부전선의 제10군단장이 되었다.[1] 이후 베버는 1917년 11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제10군단은 제4사령부로 개칭되었고 베버는 1918년 4월 몇 주 동안 다시 지휘권을 맡았다가 5월에 하인리히 고이긴거(Heinrich Goiginger) 야전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후 베버는 1918년 5월 페르디난트 코사크(Ferdinand Kosak) 중장의 후임으로 제18군단장이 되었다가, 1918년 7월에는 제6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에른스트 클레터 폰 그롬니크(Ernst Kletter Edler von Gromnik) 보병대장을 대신했고 1918년 10월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전쟁 마지막 2년 동안의 잦은 단기 전보는 당시 황제 카를 1세가 직접 이끌던 군최고사령부의 지휘상의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2.5. 휴전위원회 위원장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도중 베버는 이탈리아와 휴전을 체결하기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휴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제국은 군사적으로나 보급면에서 지쳐있었고, 제국의 민족들은 분열을 추구했으며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해 보였다. 제12차 이손초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이탈리아 북동부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은 더 이상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0월 초에 구성된 위원회는 1918년 10월 28일 당시 트렌토에 본부를 설치했다. 1918년 11월 3일 파도바 근처 빌라주스티에서 휴전협정이 서명되고 11월 4일 발효된 휴전은 적들의 강경한 조건으로 인해 무조건 항복에 가까웠다. 적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약점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조건에 대한 협상을 거부했다. 앙탕트(Entente) 대표단은 후일 무솔리니의 후계자가 되는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끌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은 티롤을 브레너 고개(Brenner Pass)와 레시아 고개(Reschen Pass) 경계선까지 철수하고, 카날 계곡(Val Canale),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에서도 철수하는데 동의했다. 베버 장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앙탕트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 내 자유로운 이동도 허용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오스트리아 군대의 일부는 이탈리아군보다 최대 36시간 먼저 즉시 무기를 내려놓았다. 이는 한편으로는 제국 군대의 엄청난 피로가 희망적 사고로 이어진 결과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최고사령부로부터 부대로의 명령 전달체계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군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전투 없이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고, 이런 방식으로 휴전 발효 전에 약 35만 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는 다음 몇 달 동안 보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직 이손초 군대만이 성공적으로 철수하여 대부분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베버는 군최고사령부의 승인이 도착하기 전에 휴전에 서명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버는 1919년 1월에 퇴역했다. 그는 헝가리 국적을 선택했지만[2], 주로 메라노(Merano), 비스바덴, 스위스에서 생활했다. 1932년 5월 6일 인스브루크에서 사망했다.
2.6. 평가
그의 로브첸 산 전투에서의 활약은 1922년 군사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수여로 인정받았다. 베버는 휴전협정 체결 후 자신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황제 폐하께서 1918년 10월의 칙서에서 군주국의 연방화를 결정하셨지만, 전쟁 종식까지 공동 행동을 위한 지도 개념을 결정하지 않으셨다. 군주국 군대 내의 군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공동의 목표를 위한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새로 독립한 일부 국가들은 그들의 병력을 전선에서 철수시켰다. 지연되는 매 시간이 희생자 수를 늘리는 상황에서, 국가평의회는 책임을 거부했다. 조국의 위기 앞에서, 그리고 새로운 지시 없이, 나는 휴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