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벤젤 폰 부름 Wenzel von Wurm | |
이름 | Wenzel Wurm 벤젤 부름 ↓ Wenzel Freiherr von Wurm 벤젤 폰 부름[1] 남작[2] |
출생 | 1859년 2월 27일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관령 프라크 카를린 |
사망 | 1921년 3월 21일(향년 73세)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5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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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제1차 세계 대전 중 세르비아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2.1. 초기 생애와 군사 교육
1859년 2월 27일 프라그 근교 카롤리넨탈[3]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 중위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급 실과학교를 마친 후 1875년 빈 공과군사학교 공병과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79년 4월 24일 소위로 임관하여 제1공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수료했으며, 이후 중위로서 참모본부에 전속되었다.2.2. 군 경력
제58보병여단과 제24보병여단에서 복무하며 참모본부 대위로 승진했다. 1894년 11월 1일 소령 진급 후 제75보병연대에서 잠시 복무했으며, 프레스부르크의 제14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895년 3월 육군성 제5국으로 전속되어 2년간 근무했다. 1897년 5월 1일 중령으로 승진하여 제76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900년 프레스부르크의 제5군단 참모장으로 복귀했으며, 같은 해 11월 1일 대령으로 승진했다. 1906년 11월 1일 소장 진급과 함께 플젠의 제37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10년 2월 플젠의 제19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중장으로 승진했다. 1914년 2월 라구사의 제16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2.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8월 1일 포병대장으로 승진하여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제6군 예하 제16군단을 지휘했다. 세르비아 전선에서 산자크를 통해 우바츠까지 진군했으며, 9월에는 드리나 강을 건너 야고드나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세르비아군의 강력한 반격에도 이를 사수했다. 11월의 발예보 점령 작전에서는 유일하게 계속된 공세를 주장했으나, 결국 세르비아군의 반격으로 철수해야 했다.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의 참전 후, 시르미아에 있던 제16군단과 함께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고리치아 서쪽 이손초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여 4차례의 이탈리아군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1917년 8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했으며, 8월 23일 제1이손초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카포레토 전투에서 플리치-톨미노 돌파작전을 성공시켰고 피아베 강 하류까지 진격했다. 1918년 6월의 피아베강 전투에서는 초기에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으나, 홍수로 인한 보급선 두절과 이탈리아군의 반격으로 철수를 명령해야 했다. 같은 해 10월 24일 이탈리아군이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대공세를 개시했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많은 부대들이 붕괴되고 병사들이 탈영하는 상황에서도 부름이 지휘하는 제5이손초군(구 제1이손초군)은 전선에 있던 모든 대부대들 중 유일하게 질서정연한 후퇴를 수행했다. 다른 부대들이 혼란과 공황 상태에 빠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지휘 아래 부대는 마지막까지 군기를 유지했다. 이후 제국군이 해체되면서 1918년 12월 1일 은퇴 후 빈에서 살다가 1921년 3월 21일 사망했다. 빈 중앙묘지(제2문, 48B구역, 3열, 16번)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