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요제프 로트 폰 리마노바와파누프 Josef Roth von Limanowa-Łapanów | |
이름 | Josef Roth 요제프 로트 ↓ Josef Ritter Roth von Limanowa-Łapanów[1] 요제프 리터 로트 폰 리마노바와파누프 ↓ Josef Freiherr Roth von Limanowa-Łapanów[2] 요제프 로트 폰 리마노바와파누프 남작 |
출생 | 1859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제국 트리에스트 |
사망 | 1927년 4월 9일(향년 68세)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84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세르비아 침공 이손초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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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명하다.뛰어난 전략가이자 지휘관이자 부하들에게 관대한 덕장으로 평가받았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도 알려졌다.
2. 생애
2.1. 군 경력 초기
군인 가문 출신으로 장교인 아버지의 근무지인 트리에스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 로트(Josef Roth, 1817-1862)는 오스트리아 제국군 중령이었고, 어머니 헨리에타 하이덴라이히(Henrietta Heidenreich, 1830-1888)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사였다. 로트는 장크트푈텐의 사관학교에서 기초 군사교육을 받은 후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79년 4월 4일 소위로 임관해 제21보병연대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린츠, 바냐루카, 사라예보 등지에서 복무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졸업한 뒤 1884년 중위로 진급과 함께 참모장교가 되었다. 장크트바이트암플라움와 에세크에서 근무했으며, 1889년 11월 대위 진급과 동시에 일반참모에 배속되었다.1895년 소령으로 진급해 크라쿠프의 제12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냈다. 1898년 중령 진급 후 프레스부르크의 제5군단으로 전보되었고 이듬해 중령이 되었다. 1900년에는 그라츠의 제76보병연대에서 실전 지휘 경험을 쌓았다. 1901년 대령 진급과 함께 신설된 참모본부 교육훈련국장을 맡아 군 교육체계 정비에 기여했다. 1908년 5월 소장 진급 후 같은 해에 톨민(Tolmin)의 제94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10년 4월부터는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장교 양성에 힘썼다. 이 자리에서 1912년 5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전쟁 발발 직후 8월 5일 제14군단 예하 제3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첫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10월 1일부터는 제14군단장을 맡았다. 로트 집단군(Armeegruppe Roth)이라 불린 그의 부대는 8개 보병사단, 3개 기병사단, 1개 독일 보병사단, 3개 폴란드 군단으로 구성된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했다. 특히 1914년 12월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제3군과 제4군 사이를 돌파하여 크라쿠프를 포위하려 했으나, 로트의 지휘 아래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3] 이어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와 루블린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1915년 9월 1일에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해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출되었다. 티롤 방위사령부 예하에서 제4구역인 티롤 동부구역과 제5구역인 돌로미티 전선을 지휘했다. 1916년 3월에는 티롤 방어사령관이 되었다. 남티롤 공세 이후에는 제20군단장으로서 여러 차례의 이손초 전투에 참가했다. 로트의 상급자인 오이겐 대공은 로트를 뛰어난 지휘관으로 평가했으나, 부하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신중한 성격 때문에 로트에게 군 사령관직은 맡기지 않았다. 참모총장인 콘라트도 로트에 대해 오이겐 대공과 같은 평가를 내렸는데, 그를 "고결하고 기사도적인 성품의 소유자이나, 적극적이기보다는 신중한 편"이라고 평했다.
1918년 2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며, 2월 15일부터는 군사교육기관 총감독관을 맡았다. 러시아와의 평화협정 체결 후에는 동부전선 포로 귀환 업무도 관장했다. 10월 2일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고, 훈장 규정에 따라 10월 10일 남작 작위를 받았다.
2.3. 말년
1918년 12월 31일 퇴역했으나, 빈에서 여러 재향군인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알트-노이슈타트 협회 회장, 장교협회 회장, 제국전우회 회장, 최고장교명예법정 의장 등을 역임했다. 1925년부터는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27년 4월 9일 빈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빈 중앙묘지 제81B구역 54번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영구 보존되고 있다.3. 평가
그는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양쪽에서 모두 지휘 경험을 가진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었다. 특히 1914년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 보여준 전략적 안목은 높이 평가받았다. 러시아군의 크라쿠프 포위 시도를 저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16년 기사작위와 함께 해당 전투의 이름을 딴 "리마노바와파누프" 귀족 칭호를 하사받았다.로트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그의 상관이었던 오이겐 대공과 콘라트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이겐 대공은 로트를 뛰어난 지휘관으로 평가했으나, 부하들을 대할 때 너무 관대하고 배려심이 깊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성격적 특성 때문에 더 높은 군 사령관직은 맡기지 않았다. 콘라트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품위 있고 기사도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나, 적극적으로 주도하기보다는 신중한 편이며, 비록 두려움 없고 용감하지만 군 사령관직을 맡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젊은이들을 향한 심성과 이해력이 있어 군사 교육 감독관으로서 더 적합하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1918년 2월 로트는 군사교육기관 총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4. 가족
형 아우구스트 로트(August Roth, 1853-1911)도 군인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1892년 빈의 히칭 지구 성모 탄생 성당에서 체코 귀족 야로슬라프 이그나츠 라잔스키 폰 부코바 백작(Graf Jaroslav Ignaz Lažanský von Bukowa, 1835-1913)의 딸 멜라니에 라잔스키 백작부인(Gräfin Malvine/Melanie Lažanský von Bukowa, 1873-1947)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요제프(Josef Roth, 1893-1969)는 오스트리아 공화국 육군 장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