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트렌티노 공세 아시아고 전투 Battle of Asiago Battaglia degli Altipiani Südtiroloffensive | |||
날짜 | |||
1916년 5월 14일 ~ 1916년 6월 10일 | |||
장소 | |||
이탈리아 왕국 아시아고 고원 |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의 승리 | |||
동맹국 | 협상국 | ||
교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루이지 카도르나|
전력 | 300개 대대 | 172개 대대 | |
피해규모 | 150,000명 | 147,000명 |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의 승리 | |||
영향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력 분산 |
[clearfix]
1. 개요
일명 아시아고 전투. 이손초 전투의 일부로 취급된다. 이번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공세를 가한 전투이다.2. 진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인 회첸도르프는 아시아고 방면의 이탈리아 왕국군 전력이 약하다고 분석한 후 해당 지역으로 4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로 했다. 기본적인 목표는 이손초 강 일대에 가해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만약 작전이 매우 잘 풀려서 베네치아와 베로나까지 점령에 성공한다면 아예 이손초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포위섬멸 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1]1916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트렌티노 공격이 시작되었다. 작전 초기 아시아고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 병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력의 1/4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단 일주일만에 8km를 전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새로이 단시간에 집중포화를 퍼붓는 전술을 사용하여 이탈리아 왕국군 참호선을 말 그대로 박살을 내놓았다. 비좁은 계곡지대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중포대의 포격 효과가 극대화되어 눈사태와 산사태를 일으킴으로써 계곡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군을 생매장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형이 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탈리아 왕국군의 정예 부대인 알피비 산악부대는 자신들의 앞마당과 같은 산악지대에서 필사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이탈리아 왕국군 본대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군 암호책을 노획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탈리아 왕국군의 무선통신을 방수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결국 알피니 부대의 눈물겨운 저항에도 불구하고 6월 4일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비센차와 이손초 전선에 보급품을 운반하는 핵심 철도로부터 채 2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목표지점을 코앞에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힘이 다하고 말았다. 결국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열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카도르나는 화들짝 놀라서 철도망을 가동하여 6월 초순까지 40만명의 대병력을 증원시켰다. 곧 이탈리아 왕국군의 반격이 이어졌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6월 16일, 카도르나는 반격에 나서 압박을 계속 가한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공격 개시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팔켄하인은 콘라트가 동부전선에서 병력과 중포를 빼돌려 이탈리아 전선에서 공세를 시작한 것도 모자라 공격에 실패한 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
이 공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병력들이 동부전선에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차출되면서 동부전선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감지한 러시아 제국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대장은 안 그래도 공세 준비중이었는데,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화된 시점을 찌를 수 있게 되었고 브루실로프 공세를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되었다.
3. 여담
[1] 이 정도로 작전이 확대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측에서는 독일 제국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독일 역시 베르됭 전투를 준비 중이었기에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