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카르파티아 전투 Battle of Carpathians Карпатская операция Schlacht in den Karpaten Winterschlacht in den Karpaten | |||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 전투 중 하나 | |||
카르파티아 전투를 묘사한 당시 엽서 | |||
날짜 | |||
1915년 1월 23일 ~ 1915년 4월 24일 | |||
장소 | |||
카르파티아산맥, 갈리치아, 부코비나 일대 | |||
동맹국 | 협상국 | ||
교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틀:깃발| ]][[틀:깃발|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더 폰 린징겐| ]] | ]][[틀:깃발|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 | ]][[틀:깃발| ]][[틀:깃발| ]]니콜라이 이바노프|
병력 |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 보병 389,204명 기병 23,384명 기관총 1,056문 야포 3,118문 | 러시아 제국: 보병 317,763명 기병 53,243명 기관총 919문 야포 1,480문 | |
피해 규모 | 800,000-900,000명 (포로 150,000명 포함) | 800,000-1,000,000명 (포로 59,000명 포함) | |
결과 | |||
러시아의 전술적 승리 프셰미실 요새 포위 유지 러시아군의 헝가리 평원 진출 | |||
영향 | |||
프셰미실 요새 함락(3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전투력 심각한 손실 독일의 동부전선 개입 확대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의 배경 |
[clearfix]
1. 개요
카르파티아 전투(러시아어: Карпат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Schlacht in den Karpaten 또는 Winterschlacht in den Karpaten)는 1915년 1월 23일부터 4월 24일까지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이 연합하여 프셰미실 요새를 구원하고자 시도한 공세전이었으나, 러시아 제국군의 방어와 반격으로 실패하였다.규모나 기간, 투입된 병력과 손실 면에서 동부전선의 가장 큰 작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혹독한 겨울철 카르파티아산맥에서 진행된 전투 특성상 전투 손실 외에도 동상, 질병 등으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 막대했다. 양측 합계 160-19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전투력의 핵심이었던 독일계·헝가리계 병사들의 대량 손실로 이후 전쟁 수행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2. 배경
2.1. 전략적 상황
1914년 9월 갈리치아 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카르파티아산맥까지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프셰미실 요새가 고립되어 포위되었다. 러시아군은 갈리치아 대부분을 점령했고, 카르파티아산맥의 주요 고개들을 통제하면서 헝가리 평원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이 때, 러시아 최고사령부 스타프카(Stavka)는 두 가지 전략적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1]2.2. 양측의 계획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은 다음과 같은 목표로 공세를 계획했다.- 프셰미실 요새 구원
- 갈리치아 수복
- 러시아군의 헝가리 진출 저지
-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명예 회복
러시아 남서부전선군 사령관 니콜라이 이바노프와 참모장 미하일 알렉세예프의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강제 항복 유도를 목표로 삼았다.
2.3. 지형과 기후
카르파티아 산맥은 해발 2,000m에 달하는 험준한 산악지형에 제한된 수의 통행로[2],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설 그리고 열악한 보급로 때문에 군사 작전에 매우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겨울 장비가 부족했고, 산악전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3. 전투
1915년 1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러시아 제국군은 거의 동시에 카르파티아산맥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콘라트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월 23일 먼저 공격을 개시했고, 러시아군은 1월 25일에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제1차 공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3군과 독일 남부군은 총 15개 보병사단과 4.5개 기병사단을 투입했고, 독일은 추가로 3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을 지원했다. 이들은 사노크(Sanok), 레스코(Lesko), 삼비르(Sambir)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을 장악하기 위해 두클라 고개와 우조크 고개 사이의 산악지대를 공격했다. 독일 남부군의 린징겐 장군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어 베레케 고개, 베스키드 고개, 비쉬코프 고개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3군 우익도 이에 합류해 투르카(Turka)를 점령하고 스타리삼비르(Stary Sambir)와 우스트리키돌네(Ustrzyki Dolne) 마을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이끄는 제8군이 강력하게 저항했다. 러시아군은 제24, 제12, 제7군단을 배치했고, 1월 말에는 제22군단으로 증원했다. 혹독한 겨울 날씨도 공격군에게 큰 시련이었다. 영하의 기온과 끊임없는 눈보라 속에서 제대로 된 방한장비도 없이 싸워야 했다.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렸고, 눈 속에서 길을 잃거나 눈사태에 휩쓸리기도 했다. 2월 5일 러시아군은 중요한 철도 연결점인 메죌라보르츠(Mezőlaborc)를 점령했다. 13만 5천 명이었던 보로예비치의 제3군은 2월 초까지 89,000명의 전투력을 잃었다. 러시아군 역시 비슷한 수준의 손실을 입었다.
콘라트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2월 25일 제2차 공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칸 전선에서 빼온 병력으로 제3군을 보강하고,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까지 투입했다. 한창 방어전을 치르고 있지만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프셰미실 요새의 사령관 쿠스마네크가 긴급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2차 공세의 주력은 웁쿠프 고개와 우조크 고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이미 방어선을 강화한 상태였다. 러시아군 수뇌부는 헝가리 진출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위해 이 지역 방어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3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점령했던 지역 대부분을 다시 빼앗겼다.
3월이 되자 날씨가 더욱 악화되었다. 봄을 앞둔 해빙기에 진흙탕이 된 전장에서 양측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프셰미실 요새는 3월 19일 마지막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제2군이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마지막 구원 작전을 벌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3월 22일, 식량과 탄약이 바닥난 프셰미실 요새는 12만 명의 수비대와 함께 항복했다. 포로들 중 44,000명만이 전투능력이 있었고, 28,000명은 이미 질병에 걸린 상태였다.
프셰미실 함락 후 러시아군은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했다. 브루실로프의 제8군이 방어선을 돌파했고, 3월 30일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 평원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위기에 처한 동맹국을 돕기 위해 독일은 마르비츠의 제38예비군단[3]을 파견했다. 이 부대는 제25, 35예비사단과 함께 라보르차(Laborczatal ) 계곡에 투입되어 겨우 러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4월에 접어들며 전투는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로 인해 대규모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프셰미실 구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러시아군은 헝가리 평원으로의 결정적인 돌파에는 실패했지만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5월의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4. 결과
카르파티아 전투는 양측에 전례 없는 수준의 피해를 남겼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 연합군은 800,000-900,000명[4], 러시아군은 800,000-1,000,000명[5]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는 대략적인 추산일 뿐이며, 실제 피해는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카르파티아 전투에서 대거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 슬라브계, 루마니아계, 이탈리아계 등 非독일계 병사들의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민족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사력을 질적으로 크게 약화시켰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6년 남티롤 공세를 제외하면 독일의 지원 없이는 대규모 독자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전략적으로도 이 전투의 영향은 컸다. 프셰미실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12만 명의 포로를 잡았을 뿐 아니라, 요새 포위에 투입되었던 병력을 다른 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약화는 이탈리아의 참전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4월부터 이탈리아는 협상국 측에 가담할 준비를 본격화했고,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새로운 전선의 부담을 안겼다.
독일 입장에서도 동맹국의 심각한 전력 약화는 큰 문제였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이를 위해 서부전선에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차출해 동부로 이동시켜야 했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새로운 제11군을 편성했고, 이 부대는 5월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의 지휘 하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러시아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민간인들도 큰 고통을 겪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부코비나를 재점령한 후 엄격한 계엄령을 실시했다. 주민들은 재등록 절차를 거쳐야 했고,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으며, 식량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러시아와 협력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러시아군도 마찬가지로 현지 주민,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와 재산 몰수 등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군사사적으로 카르파티아 전투는 혹독한 겨울철 산악전의 교훈을 남겼다. 적절한 장비와 훈련 없이는 산악전이 불가능하다는 것, 보급선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입증되었다. 또한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사용한 '카르파티아 전술'[6]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술이 되었다. 이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수반했지만, 참호전이 지배하는 전장에서 돌파구를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카르파티아 전투는 러시아의 전술적 승리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만 남긴 소모전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동부전선의 주도권은 독일로 완전히 넘어갔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더 이상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5. 기타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이 전투의 무대 중 하나인 웁쿠프 고개를 배경으로 한 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