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Viktor von Scheuchenstuel | |
이름 | Viktor Graf von Scheuchenstuel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1] 백작 |
출생 | 1857년 5월 10일 |
모라비아 변경백국 오스트라바 비트코비츠 | |
사망 | 1938년 4월 17일 (향년 80세) |
나치 독일 빈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86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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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제1차 세계 대전 중 주요 전선의 군단장과 군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17년 백작 작위를 받았다.2. 생애
2.1. 출신과 가문
1857년 5월 10일 모라비아의 비트코비츠[2]에서 제철소 관리자 빅토어 쇼이헨슈투엘(Viktor Scheuchenstuel, 1824년 2월 28일생)과 마틸데 블라트(Mathilde Blatt)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쇼이헨슈투엘가문은 1576년에 귀족 작위를 받은 오래된 독일계 가문이었으나, 큰 재산이나 영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의 동생들 중 에드빈(Edwin, 1859년 5월 18일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교가 되었고, 아르투어(Artur, 1861년 11월 4일생)는 기술자가 되었다. 빅토어는 평생 미혼으로 지냈다.2.2. 군 경력
1874년 하인부르크안데어도나우의 공병 생도학교에 입학했다. 1878년 9월 1일 소위로 임관하여 제3공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83년 중위로 진급했고,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일반참모에 배치되어 10년간 복무하며 1889년 대위, 1895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 기간 중 브륀의 보병사단 참모장으로도 근무했다. 1897년 중령 진급과 함께 렘베르크의 군단 참모장을 지냈고, 이후 아라트의 제33보병연대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01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03년부터 1907년까지는 크론슈타트의 제50보병연대장을 맡았다. 1907년 11월 1일 소장 진급과 함께 알바 율리아(Karlsburg)의 제69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09년부터 1910년까지는 보스니아의 포차(Foča)에서 제8산악여단을 지휘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요제프슈타트(Josefstadt)[3]의 제10보병사단장을 역임했고, 1911년 11월 1일부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2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는 프라그의 제9보병사단장으로 재직했다.2.3. 제1차 세계 대전
쇼이헨슈투엘은 프라그의 제9보병사단을 이끌고 세르비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1914년 9월 아르투어 기슬(Arthur Giesl) 기병대장의 후임으로 제8군단장에 임명되어 세르비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같은 해 12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 세르비아군의 반격으로 철수해야 했다. 1915년에는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의 지휘 하에 세르비아 정복 작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알바니아 전선에서도 활약했다.1916년 5월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여 오이겐 대공 휘하에서 아시아고 전투에 참전했다. 러시아 제국의 브루실로프 공세로 동부전선으로 이동했으나, 제8군단이 괴멸되면서 최고사령부와의 갈등으로 해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중재로 1916년 9월 제1군단장으로 복귀하여 루마니아 전선의 카르파티아 산맥 전투에 참여했다.
1917년 봄 다시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했으며, 9월 13일 카를 1세에 의해 백작 작위를 받았다.[4] 같은 달 제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카포레토 전투의 성공으로 11월 16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1918년 피아베강 전투에서는 보급 부족과 병력 문제로 진격이 좌절되었으며,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트리엔트에서 철수했다.
1919년 1월 1일부로 퇴역한 후 빈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938년 4월 17일 같은 도시에서 사망했다. 빈 중앙묘지(Wiener Zentralfriedhof) 명예구역(15A구역)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쇼이헨슈투엘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여러 주요 전선을 지휘했다. 특히 세르비아 전선에서의 베오그라드 점령과 이탈리아 전선의 카포레토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겪던 심각한 보급 문제와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그는 최고사령부와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1916년 제8군단이 괴멸된 후 해임 위기에 처했을 때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직접 그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의 군사적 능력을 황제가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이후 제11군 사령관으로서 카포레토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이로 인해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하고 백작 작위도 받았다. 물론 1918년 피아베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지휘력의 한계를 보여주었지만,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전체가 겪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들에 기인한 바가 컸다.[5] 실제로 그는 병사들의 식량 문제에 대해 상부에 적극적으로 건의하는 등 부하들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고로 쇼이헨슈투엘은 전체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의 전형적인 고위 장교상을 보여준다. 뛰어난 전술적 능력을 가졌으나, 제국의 쇠퇴와 함께 찾아온 구조적인 군사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다수의 훈장과 작위는 그의 군사적 공헌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