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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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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8da9c5>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
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독일어
Császári és Királyi Haditengerészet헝가리어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상선기(변형).svg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문장.png
깃발 문장
참전 의화단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2. 수뇌부3. 전력과 편제
3.1. 주력함대3.2. 순양함 분함대3.3. 기지 직속 해방함
3.3.1. 잠수함 기지
3.4. 강방함대3.5. 해군 항공대3.6. 해병대3.7. 기타 시설
3.7.1. 해군사관학교3.7.2. 해군도서관3.7.3. 풀라 해군공창
4. 민족 구성과 언어5. 역사
5.1. 창군과 1848년 혁명까지5.2. 19세기 중반의 위기5.3. 세기말의 발전5.4. 대양해군으로의 확장5.5. 대외 임무
5.5.1. 노바라 원정5.5.2. 북극 원정5.5.3. 의화단 전쟁5.5.4. 한국과의 관계
5.6. 제1차 세계 대전
5.6.1. 초중반의 선전5.6.2. 악화되는 전황5.6.3. 의의와 한계
5.7. 해체와 그 이후
6. 유산
6.1. 풀라 요새 복합체6.2. 오스트리아 해군 협회6.3. 남아있는 함선들6.4. 해군도서관 장서와 해군 카지노
7. 주요 인물8. 군가9. 계급10. 기타
10.1. 매체에서

[clearfix]
파일:1000002448.jpg
▲ 1917년의 풀라 항. 앞쪽으로 주력함대의 전함들이 정박해 있고, 그 뒤로는 카이저 프란츠 1세 요새와 울랴니크 섬의 해군공창, 그리고 저 너머에 풀라 시내가 보인다.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정식 명칭은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이며, 줄여서 제왕 전쟁해군(K.u.K Kriegsmarine)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간단히 오스트리아 해군(Österreichische Marine)이라 불린다. 세 갈래로 나눠진 육군과 달리, 단일 조직으로 제국 전쟁성에 속했다.

1786년에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요제프 2세에 의해 황제군 산하에 최초로 창설되었고, 1867년 대타협 이후 개편된 신제국의 해군이 되면서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황립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왕립은 헝가리 왕국을 뜻한다. 황립 해군이었으니 함선 명칭에도 SMS(Seiner Majestät Schiff: 황제 폐하의 함선)이 붙었다.

1차 대전 패전을 계기로 해체되었다. 주력함대의 유산은 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 흡수된다. 다뉴브 전대의 일부 함선들은 공화국이 된 오스트리아군에 남거나 헝가리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프랑스 해군그리스 해군,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에서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을 배상함으로 넘겨받아 편입하였다.

2. 수뇌부

파일:오스트리아 해군부.jpg파일:10583516.jpg
의 해군부 청사. 1908년부터 사용한 건물로, 포어데레 촐암트슈트라세 9번지(Vordere Zollamtsstraße 9)에 위치한다. 오늘날에는 오스트리아 대체복무청과 농림수자원부 소속 연구소 도서관이 함께 사용 중이다. 풀라 항의 함대사령부 청사. 현재는 세관으로 쓰고 있다.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달리 독립적인 해군성은 없던 대신, 제국 전쟁성(Kriegsministerium)의 산하에 해군부(k.u.k. Marinesektion)가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1860년대 초에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총독 프리드리히 폰 부르거의 주도로 해군성(Marineministerium)이 신설되었으나 고작 3년 후 도로 전쟁성 산하 조직으로 환원되었다. 대타협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4개의 합동 부서만 두기로 결정하면서 해군성을 폐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부는 전쟁성과 별도의 건물에서 업무를 보았다.
1914년 8월 시점 수뇌부
해군 감찰관 해군최고사령관
전쟁성 해군부장
함대사령관
[겸임.]
파일:Archduke_Charles_Stephen_of_Austria.jpg파일:Admiral_Anton_Haus,_Kommandant_der_k._und_k._Flotte.png
해군 상급대장 카를 슈테판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2] 해군 대장 안톤 하우스[3]

합스부르크 황실 인원들이 보임되는 명예직인 해군 감찰관(Marineinspekteur)과 실질적인 지도자인 해군최고사령관(Oberkommandant der Marine)이 가장 상위에 존재한다. 작전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함대사령관(Flottenkommandant)직은 1914년에 신설되었으며 실질적인 운용을 맡는다. 군정권은 전쟁성 해군부장(Chef der Marinesektion)이 가졌다. 1차대전 발발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테셴 분가의 카를 슈테판 폰 외스터라이히(Karl Stephan von Österreich) 대공이 상급대장으로서 감찰관직을 맡았고 나머지 세 요직은 전부 안톤 하우스(Anton Haus) 대장이 1917년에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겸직했다.

하우스 상급대장이 사망한 후, 전쟁성 해군부장직은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중장에게, 그리고 해군최고사령관직과 함대사령관직은 막시밀리안 녜고반(Maximilian Njegovan) 대장에게 돌아갔다. 곧 칼텐펠스 중장이 사임하고 녜고반 대장이 세 요직을 다시 전부 겸직했으나, 카를 1세와 빌헬름 2세 황제와 갈등을 빚던 도중 1918년 카타로에서 수병 반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그 결과 함대사령관직은 호르티 미클로시(Horthy Miklós) 중장에게, 전쟁성 해군부장직은 프란츠 폰 홀룹(Franz von Holub) 중장에게 넘어갔다. 최고사령관직은 공석으로 남았다.

이 중 전쟁성 해군부장직의 경우, 패전으로 제국 해군이 사라진 이후에도 뒷정리를 위해 몇 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1923년 최후의 해군부장 알프레트 주호멜 중령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3. 전력과 편제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제1차 세계 대전의 황립 및 왕립 해군 군함 파일:Austria-Hungary-flag-1869-1914-naval-1786-1869-merchant.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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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 구축함 <colbgcolor=#fff>후사르급, 타트라급, 에르자츠 트리글라우급
잠수함 U보트
경순양함 에르자츠 센타급
정찰순양함 아트미랄 슈파운, 노바라급
장갑순양함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왕비, 카를 6세 황제, 장크트 게오로크
방호순양함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급, 센타급
전함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전 드레드노트급 합스부르크급, 에르츠헤르초크 카를급, 라데츠키급
드레드노트급 테게토프급,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취소선: 계획만 되거나 건조 중 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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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NAust_Main_fleet_pic.jpg
▲ 항진하는 수상함대. 왼편은 구축함렬이며 중앙 열과 우측 열은 전함들이다.[4]

오스트리아 해군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모든 종류의 함선과 장비를 충실하게 갖춘데다, 최소 60년간의 운용 노하우를 가진 견실한 지역해군 함대였다. 보유한 해군 전력 자체는 대양해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아드리아해에 갇혀 있다는 지정학적인 한계로 인해 그 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장애 요소를 안고 있었다. 반대로 주 전장이 아드리아해라는 좁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숫적 열세를 일부 만회할 수 있기도 했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1914년 8월 시점에서는 드레드노트급 3척,[5] 준드레드노트급 3척과 전드레드노트급 6척의 전함들을 중심으로, 장갑순양함 2척, 방호순양함 3척 및 경순양함 2척이 존재했다. 그 외 보조함 전력으로 구축함 25척과 잠수함 5척, 그리고 약 70척에 달하는 어뢰정으로 구성되었다.
파일:1914년 8월 해군력.webp
1914년 8월 시점 세계 각국의 해군 전력. 왼쪽부터 순서대로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만, 그리스, 일본, 그리고 미국이다.[6]

전함 전력에 있어서는 1914년 8월을 기준으로 이탈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 해군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앞섰다. 특히 가장 유의미한 전력인 드레드노트와 준드레드노트, 그리고 순양전함의 숫자로만 한정할 경우에는 영독미프에 뒤이은 세계 5위의 전력을 자랑했다.[7] 그러나 함대의 허리 노릇을 하는 순양함구축함, 그리고 보조 전력인 잠수함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뢰정도 타국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넉넉하다고 하기 힘들었다. 이탈리아의 추격도 맹렬했다.[8] 순양함 전력은 결국 전쟁 끝까지 보충되지 못하지만 잠수함 전력의 경우 전쟁 발발 이후 대대적으로 확충되어 사실상 제국 해군의 주력으로 활동한다.

어뢰를 최초로 상용화한 해군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던 만큼 기술적으로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해군은 해군공창과 사설 조선소들을 통해 대다수의 함선들을 건조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건조 역량은 해군의 수요를 완전히 충족하기에는 빠듯했다. 해군 직속의 해군공창은 1개, 주요 사설 조선소는 STT와 건즈-다누비우스 2개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건즈-다누비우스가 조선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10년대가 되어서였다. 라이벌인 이탈리아만 하더라도 해군공창 3개,[9] 주요 사설 조선소는 2~3개였다.[10] 영국과 경쟁하던 이웃 국가 독일은 제국 해군청 직속의 해군공창만 3개였고,[11] 주력함 건조에 참여하던 사설 조선소는 그보다 두 배는 많았다.[12] 기술력 역시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대표적인 해군 선도국들에 비해서는 열세였다.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기술 혁신을 위해 해외의 설계를 라이센스하거나 아예 함선을 직도입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대다수의 오스트리아 잠수함들은 미국덴마크, 1914년 이후에는 독일의 설계를 넘겨받아 건조하거나 아예 완성품을 구매한 것이었다. 그 외 주력 구축함 중 하나인 후사르급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야로우 사가 만든 일본 해군 이카즈치급 구축함의 설계도를 이전받아 국산화한 것이다.[13] 카이만급 어뢰정과 같은 일부 소형 전투함들 역시 야로우 사의 설계에 기반한다. 그러나 그 외 대부분의 함선들, 특히 순양함들과 전함 등의 주력 수상함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자체 개발품이었다.

예하 전투함대는 주력함대와 순양함 분함대, 지역방어대들과 잠수함 전대들로 구성되었다. 하술할 편제 관련 정보는 주로 1914년 군 소책자에서 발췌하였다.

3.1. 주력함대

파일:테케토프급_드레드노트.jpg
K.u.K 해군의 주력인 제1전함전단의 제1중전대. 세 척 모두 테게토프급 전함이다.[14]

전열함대, 또는 주력함대[1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가장 핵심적인 주력함들이 모여 있는 함대로, 현대 대한민국 해군제7기동전단과 유사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2개 전단(Geschwader)에 분속된 5개 중(重)전대(Schwere Division)로 구성되었다. 풀라 항에 주둔하였다.

각 중전대는 대부분 같은 함급별로 묶여 있었다. 1914년 기준으로 가장 핵심적인 전력은 최신예 드레드노트급인 테게토프급 전함 4척이 전부 배속된 제1전함전단 소속 제1중전대였다. 그 다음인 준드레드노트급 라데츠키급 전함들은 1전단 제2중전대, 전드레드노트급인 에르츠헤르초그 카를급 전함들은 2전단에 속한 제3중전대, 그리고 가장 초기형 전드레드노트급인 합스부르크급 전함들은 2전단 제4중전대에 속했다. 여기까지가 실질적으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전력들이었다. 이외의 제5중전대는 모나르히급 해방전함들로 구성되었으나 이들은 가장 노후화된 함선들이었으므로 주로 항구 방위 임무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활약했던 것은 제5전대였다.

일각에서는 덴마크식 표현인 '황립 및 왕립 전단(K.u.k Eskadre)'이라고 호칭한다. '에스카드레(Eskadre)'는 전단을 호칭하는 덴마크어 단어로, 프랑스어 'Escadre'에서 기원한다.[16] 다만 이는 당대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단어는 맞으나, 이 표현이 널리 쓰였다거나 '주력함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가령 1900년 의화단 전쟁 참전을 위해 임시편성되어 출항한 동양함대는 순양함 4척으로 이루어진 소함대였음에도 역시 '에스카드레'라 불린 바 있다.

3.2. 순양함 분함대

파일:1435736116335.jpg
▲ 1917년의 카타로 항. 우측부터 후사르급 구축함 세 척이[17] 나란히 늘어서 있으며, 그 너머에 정박한 것은 어뢰정들이다.

순양함 분함대순양함 전대 2개와 어뢰정 전대 2개를 합쳐 총 4개 전대로 구성되었다.

제1 순양함 전대(1. Kreuzerdivision)는 모든 장갑순양함들과 비교적 신형인 젠타급 방호순양함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초기형 방호순양함들인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급들의 경우 서류상으로는 제2순양함전대(2. Kreuzerdivision)에 속하였으나, 실제로는 각 지역 지방대 또는 오스트리아령 톈진에 파견 형식으로 나가 있었다. 때문에 제2전대는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뢰정 전대(Torpedofahrzeugdivision) 역시 2개로, 재빠른 정찰순양함들과 구축함, 그리고 어뢰정들로 구성되어 뇌격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오트란토 해협 일대에서 협상국의 봉쇄에 맞서 가장 활약한 부대들이다.

3.3. 기지 직속 해방함


기지 함선(Stationsschiff)이란 주요 해군기지와 항구를 방위하는 함선들로, 일종의 해방함이다. 동시에 해외 식민지의 주요 거점에 소속된 함선들도 지칭한다. 이들 전체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개별 항구와 기지 방위대에 직접 속하는 식이었다.

주로 어뢰정들이나 노후화된 함선들로 구성되었다. 가령 전함들 중 가장 구식이었던 모나르크급 해방전함들은 서류상으로는 주력함대 소속 제5중전대에 배치되었으나 실제로는 여러 항구에 파견 형식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상술한 제2순양함대의 함선들도 마찬가지.

3.3.1. 잠수함 기지

파일:SM_U-14_(Austria-Hungary).jpg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소령의 유보트인 U-14함. 프랑스 해군의 브뤼메르급 잠수함 '퀴리' 함이었다.

잠수함들 역시 평시에는 개별 기지와 항구에 나뉘어 속하다 1차 대전 발발 이후 하나의 항구에 집중적으로 편성되면서 잠수함대의 형태로 발전한다. 중심지는 풀라 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공용어는 독일어였으므로, 제국 해군의 잠수함 역시 유보트라 불린다.

3.4. 강방함대

다뉴브 분함대(Donauflottille)와 가르다 호 분함대(Gardaseeflottille)로 나뉜다.

다뉴브 분함대는 제국의 중심을 관통하는 다뉴브 강을 경비하기 위한 함대이다. 제국 해군의 예하부대 중 가장 최초로 형성된 조직이자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조직이기도 하다. 16세기부터 이어지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당시 최초로 결성되었고,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오헝 제국의 멸망 후에는 동남유럽 각국의 다뉴브 소함대로 갈라졌고, 일부 함선들은 2차 대전까지 치렀다. 신생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독립된 강방함대를 가지지 못했던 대신, 육군이 경비정을 운영했다. 헝가리 왕국은 강안경비대(Magyar Királyi Honvéd Folyami Erők)를 두었다. 이들은 1945년에 해체되었다.

한편 가르다 호 분함대는 19세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인 가르다 호에 존재했던 분함대이다. 1866년 제국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상실하면서 가르다 호 일대가 이탈리아로 넘어감에 따라 폐지되었다.

3.5. 해군 항공대

  • 독일어: Kaiserliche und königliche Seefliegerkorps

해군 항공대는 1916년 테게토프급 전함의 수상 정찰기 부대로 시작하였다. 전쟁 말기까지 주로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 기지들에 배치되었다. 주력 항공기들은 독일제였고, 전투기와 정찰기, 일부의 폭격기들로 구성되었다. 협상국 해군의 접근을 경보하고 항구를 보호하는 역할이었다.

3.6. 해병대


해상대대, 즉 해병대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통합된 군사조직으로서의 해병대가 아니라, 기지를 경비하고 그때그때 무장하여 투입되는 정도의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 트리에스트풀라, 그리고 톈진 등의 일부 도시에 주둔했었다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3.7. 기타 시설

3.7.1. 해군사관학교

파일:HTE_1350.jpg
▲ 피우메의 해군사관학교 건물.

해군사관학교는 해군 창립과 같은 년도인 1797년에 베네치아에 설치되었다가 1848년 혁명으로 트리에스트로 옮겨갔다. 1850년대 초에는 알렉산더 폰 뮐베르터(Aleksander von Mühlwerther) 교장이 주도하여 커리큘럼을 개혁하고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와 동급의 지위를 얻어내면서 "해군사관학교(Marineakademie)" 명칭을 부여받았다. 1856년에는 트리에스트 중앙역 건설로 인해 헝가리의 피우메로 이동했다. 피우메로의 이전에는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과 크로아티아 총독 요시프 옐라치치 원수가 관여했다. 이후 막시밀리안 대공과 테게토프 중장의 주도로 실용적인 과목들이 대폭 늘어났다.

표어는 "의무가 목숨에 선행한다"였다. 학제는 4년이었고, 수업은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해군 전술조타법, 해양법과 각종 기술 등 해군 장교로서 필요한 과목들이 중심이 되었다. 물리학, 수학, 역학 등의 순수학문이나 여러 외국어와[18] 음악, 그리고 에티켓 등의 종합적인 교양 교육 역시 제공했다. 가령 트랍 소령은 사관생도 시절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 과목 수를 다 합치면 31개였다. 학교 앞에 전용 항구 역시 가지고 있었고, 연습함인 SMS 사이다 II(SMS Saida II) 함에서는 생도들의 항해 실습이 이뤄졌다.

교수진들의 수준도 높았다. 그들은 풀라 시에 위치한 해군 수로학 연구소(Hydrographisches Amt der k. u. k. Kriegsmarine)와 그 산하의 천문대, 그리고 하술할 해군도서관과도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또한 1892년 설립된 해군 기술위원회(K. u. k. Marine-technisches Komitee)에서도 핵심적인 연구집단을 구성했으며 빈의 과학 학술원에도 여러 연구결과를 투고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물리학 교수였던 페터 잘처(Peter Salcher)인데, 그는 에른스트 마흐의 충격파 가설을 실제로 실험하여 입증했다. 그 외에도 초음속 풍동을 최초로 개발하기도 하였다. 1차 대전 당시 함대사령관인 안톤 하우스 상장과 그의 후임인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 역시 한때 사관학교에서 해양학을 가르쳤다.

1903년 헝가리 해양청의 주도로 인근 벨베데르구에 왕립 헝가리 해양학교(R. U. Accademia Nautica)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1차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의 위협으로 인해 학교 전체가 수도 으로, 다시 브라우나우암인으로 이전했다가 제국이 멸망한 1918년에 폐교되었다. 피우메 해군사관학교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기술고등교육기관으로써 훗날 크로아티아의 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오늘날 리예카 대학교의 해양학부는 학과의 역사적 기원을 황립 해군사관학교로 여기고 있다.#[19]

원래 남아 있던 피우메의 해사 건물은 1914년부터 군 병원으로 쓰이다 종전 이후부터는 아예 민간 종합병원으로 거듭났다. 현재도 해사 건물은 리예카 종합병원(KBC Rijeka)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 외 왕립 헝가리 해양학교 건물은 리예카 대학교 종합인문대학의 신학과에서 2011년까지 사용하다가 현재는 일대의 가톨릭 교구 소속 초등학교로 쓰고 있다.#

3.7.2. 해군도서관

파일:HTE_0981.jpg
▲ 도서관이 위치했던 해군 기술위원회(K. u. k. Marine-technisches Comité) 청사. 현재는 벨리 요제(Veli Jože)라는 이름의[20] 호텔로 쓰인다.

파일:HTE_0979.jpg
▲ 도서관의 인장.

파일:IE_1421.jpg
▲ 장서들의 모습.

오스트리아 해군의 전문도서관으로, 제국 멸망 당시 기준으로 해군 기술위원회(K.u.k. Marine-technisches Komitee) 소속이었다. 1802년에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후원을 받아 베네치아에 세워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약탈당하였다. 1814년 빈 회의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수립되어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로 돌아올 때 기존의 장서각을 재발견했고, 이를 해군사관학교의 도서관으로 이관하였다.

1848년 혁명의 여파로 인해 해사와 함께 트리에스트로 이동하였다가 1859년에 새로 설립된 수로학 연구소(Hydrographische Anstalt)의 하위기관이 된다. 1865년에는 해군의 중심지가 된 풀라로 다시 이동했다. 이후 풀라로 넘어온 수로학 연구소 및 신설된 해군 천문대, 그리고 혼자 피우메로 이동한 해군사관학교와 함께 오스트리아 해군의 주요 학술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1892년부터는 새로 설치된 해군 기술위원회 소속으로 옮겨졌으며 모든 장서들 역시 기술위원회 건물로 이관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도중 오스트리아 내의 대부분의 군사기록물이 전쟁기록보관소(Kriegsarchiv)의[21] 하위 부서인 전쟁도서관(Kriegsbibliothek)의[22] 관할이 되었으나, 해군도서관은 황립 및 왕립 기술 군사위원회 도서관 및 군사기술대학 도서관과 함께 독립을 유지했다. 제국 멸망 이후 장서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내용이 길어져 밑에서 후술한다.

해군과 해양 관련 출판물들을 보관했다. 오스트리아의 해군 군사 전략해양학 연구, 해양 및 선박 기술 연구 자료는 물론이고, 탐사를 통해 획득한 인류학지리학 정보나 여행기 역시 전부 이곳에 보관되었다. 1904년 당시 장서량은 약 43,000권이었다. 풀라 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장서들을 기준으로 약 60% 가량은 독일어로 작성되었으며, 15% 가량은 프랑스어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19세기에 생산되었다. 이 자료들은 오스트리아 해군과 해양학의 핵심적인 근원이다. 해군 장교들과 그 가족들, 해군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민간인들만이 열람할 수 있었다. ##

3.7.3. 풀라 해군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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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라에 위치한 해군 소속 조선소이자 병기창으로, 사설 조선소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해군의 건함 사업에 핵심적인 시설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일종의 종합정비창으로써 손상된 함선들을 수리하는 임무 또한 맡았다. 해군최고사령관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신전(Augustov hram)[23] 바로 앞바다의 울랴니크 섬(Uljanik)에[24] 세웠다. 이후 구시가지 남쪽 해안으로도 시설을 확장했다. 두 구역은 다리를 통해 곧장 연결된다.

해군공창 설립 이전까지 풀라는 로마와 중세 유적이 있을 뿐 고작 1,000명이 거주하는 한적한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이전 세기에 계속 이어진 전쟁들로 인해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 그러나 1856년에 해군공창이 세워지면서 곧 60,000명 규모의 활기찬 해양도시로 성장했다. 1910년 기점으로 4000명의 근로자와 8000명의 군인이 일했다. 조선소의 핵심은 울랴니크 섬의 3개의 대형 드라이 독과 플로팅 독, 그리고 3개의 슬립웨이였다. 그 외에도 제련소 및 주조공장, 돛 공장, 정밀기계 공장, 화학공장과 마감재용 제재소 등이 있었다.

1858년 91문 증기 추진 전열함 SMS 카이저 함을 진수한 것을 시작으로 제국 멸망 때까지 총 80척의 함선을 건조했다. 해군 기술위원회가 풀라에 설립된 후에는 위원회를 통해 해군의 건함 사업에 더 효과적으로 조력할 수 있었다. 고급 인력과 기술을 흡수할 수 있던 것은 물론이다. 가령 당시 오스트리아 최고의 함선 설계자들인 지크프리트 포퍼(Siegfried Popper)와[25] 프란츠 피칭거(Franz Pitzinger)[26] 역시 해군 기술위원회에서 이곳으로 파견 나와 함선 건조를 감독했다.

다만 풀라 해군공창은 운영 초기를 제외하고는 건함 사업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모나르크급 해방전함들 이후로 주력함은 건조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차 대전 당시의 오스트리아 해군 함선 중 풀라 해군공창에서 건조한 장갑순양함 이상 체급의 함선은 만재배수량 8,200톤의 SMS 장크트 게오르크가 유일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보조함들을 건조했으나 그들 역시 그 수는 많지 않다. 오헝 제국 해군 건함 사업은 대부분 트리에스트의 사기업인 STT가 전담하다시피 했고, 여기에 피우메에 있는 건즈-다누비우스 등의 후발주자들이 뒷배를 봐주는 헝가리 정부의 지원으로 일부 참여하는 식이었다.

제국 멸망 이후에는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위한 조선소로 활용되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가 연합군의 폭격 피해를 입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에는 주로 이탈리아에 선박을 납품했으며, 현재는 울랴니크라는 이름의 조선업체로 민영화되었다. 여전히 크로아티아의 주요 조선 사업체이자 풀라 시의 경제를 지탱하는 회사다.## 주로 특수선박 제작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4. 민족 구성과 언어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과 언어 문제는 해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육군에서 동향 사람들을 연대별로 모았던 것처럼, 해군은 민족별로 주특기를 다르게 배정했다. 수병의 다수는 해안 출신의 크로아티아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채운 반면 장교나 기술자 또는 주포 운용요원들은 독일계와 체코인이, 부포의 포술장들은 헝가리인들이 맡는 식이었다. 그 중 이탈리아계는 건군 초기에 제국 해군 장교와 수병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1848년 혁명 이후의 숙군으로 쓸려나갔다.

크로아티아 전쟁박물관에 따르면 1910년 당시 제국 해군의 민족 구성은 크로아티아인 30%, 독일계 오스트리아인 24.5%, 이탈리아인 18.3%, 헝가리인 12.6%, 체코슬로바키아인 10%와 나머지 3.6%이었다. 나머지 중에서는 유대인들이 약 1%를 차지했다. 전반적으로 아드리아해와 접한 연해 지역의 출신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해군은 1918년 수병봉기 때를 제외하면 육군에 비해 민족 갈등이 일반적으로 상당히 적었던 편에 속한다. 미 해군대학에 따르면 절대다수의 사관과 수병들은 멸망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이기도 한 트라프 소령이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독일 해군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끝까지 독립 국가 오스트리아의 지지자로 남은 것에는 그가 몸담았던 오헝 제국 해군의 이런 근왕주의적 문화도 일부 영향을 끼쳤다.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4개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수병들의 경우, 제국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도 각 민족 언어의 피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 다음 피진은 헝가리인 선원이 체코인 선원와 대화할 때 사용한 피진이라고 한다. 독일어, 이탈리아어, 크로아티아어가 섞였다.
"Što radi brate, warum nichts arbeit? Mein lieber šogor, schlecht, ich muss post machen. Zu aus keine van diese. Zu aus, wiesen sie, du nichts nur puszta, kukuruc, a ima -no - diese prasae - porco, und dort ist meine kuča."

5. 역사

5.1. 창군과 1848년 혁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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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9년 모로코 원정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이 바르바리 해적들과 항구를 포격하는 모습. 우측의 함선은 오스트리아 20문급 코르벳 SMS 아드리아 함이다.

대타협 이전부터 오스트리아 해군의 주 타겟은 통일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던 이탈리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국 해군 역시 뿌리를 이탈리아에 두고 있었다.

제국 해군은 황제군 해군을 계승했으나, 실질적으로 18세기 이전 황제군의 해군이라 불릴 전력은 매우 미약했다. 본토인 오스트리아가 바다를 접하는 곳은 트리에스트 단 한 곳 뿐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개발된 곳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해상 세력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에 기반하고 있었고, 이마저도 해군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의 상선들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벨기에를 상실하며 미약한 오스트리아의 해양력은 완전히 파괴당한다.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해군의 기반이 된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 인프라였다.[27] 그래서 이 시기의 오스트리아 해군을 '오스트리아-베네치아 해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맺어 베네치아를 프랑스로부터 얻어내었다. 이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해안선을 잃고 내륙국이 되며 베네치아도 잠시 상실했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에 재점령하여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라는 이름의 구성국으로 편입하여 빈 회의에서 국제적으로 지배를 공언받았다. 이때 베네치아에 있던 5척의 전열함이 오스트리아가 가지게 된 최초의 제대로 된 해군 전력이었다. 대부분 프랑스의 74문급 테메레르급 전열함들이었다. 해군사관학교 또한 1802년에 베네치아에서 설립되었으며, 제국 해군의 모든 함선들 또한 그 유명한 베네치아 병기창(Arsenale di Venezia)[28]에서 건조되었다.

제국 해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1830년대부터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주로 지중해에서 활개치던 바르바리 해적들이나 그리스인 해적들을 진압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고, 1840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태수 메흐메드 알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영국과 함께 개입하여 이집트군 점령 하의 동지중해 해안을 타격했다. 그리고 1840년대가 되어 빈 체제가 점차 흔들림에 따라 유럽 방면으로도 전력을 투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 해군의 확장을 이끈 것은 황실 인사들이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초중반 해군의 건설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레오폴트 대공(Friedrich Ferdinand Leopold von Österreich)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세 번째 아들인 그는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 당시 십대의 어린 나이로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해군과 영국 해군, 오스만 제국 해군 육전대를 직접 이끌고 아크레의 이집트군 요새에 부하들과 함께 돌격했을 정도로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전쟁에서 세운 무공과 황가의 일원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로 무장했던 레오폴트 대공은 고작 23세의 나이로 해군 최고사령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구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의 잔당이나 다름없던 오스트리아 해군의 정체성을 합스부르크 황실에 충성하는 황립 해군으로 점차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레오폴트 대공은 1847년 황달에 걸려 고작 26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렸다. 그리고 그의 죽음 직후 불어닥친 자유주의자들의 1848년 혁명은 제국 해군에 엄청난 위기를 몰고 왔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해군의 뼈대를 구축하던 이탈리아인들 상당수가 혁명과 독립 열기에 영향을 받아 이탈해버린 것이다. 거기다 제국 동부에서 헝가리인들의 대대적인 독립운동까지 일어나 오스트리아 제국 자체가 해체 직전까지 몰린 마당에 제국 정부에서는 해군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제국 해군의 잔여 세력은 우세한 사르데냐 왕국 해군[29]에 쫓겨 독일 연방 영내인 트리에스트피우메로 탈출해야 했다. 독일 연방의 영역을 공격하는 것은 비단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여타 독일 국가들까지 얽힌 외교 문제로 불거질 수 있었기에 사르데냐는 추격을 단념해야 했다. 연방령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오스트리아가 독일 연방의회를 소집하여 가입국들의 연합군인 연방군(Bundesheer)을 조직할 빌미가 될 수 있었다.

5.2. 19세기 중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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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대표적인 해군 명장으로 꼽히는 빌헬름 폰 테게토프 중장(1827 ~ 1871)

1848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유능한 사관은 대부분 베네치아의 전통을 잇는 이탈리아인이었지만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인들을 다른 민족들로 교체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탈리아인들을 제외한 제국 내의 대부분의 민족들은 해양과는 동떨어진 생활 문화를 지녔다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아직 해양 진출에 미숙했고, 유럽 내륙 깊숙한 지역에 사는 헝가리인들이나 체코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충성심까지 갖춘 뱃사람들이었으나 해군을 조직하고 운영할 전문 지식에는 미숙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빙해오기로 결정했다. 여기 호응한 것은 북유럽의 해양 대국인 덴마크였다. 당시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 남부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을 놓고 프로이센과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치를 정도로 갈등을 빚고 있던 터였다. 그랬기에 독일 연방 내에서 우월한 위치를 가진 오스트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고, 이에 요청에 응한 것. 1849년 덴마크 정부는 덴마크 해군의 포술교관이었던 한스 비에크 달레루프(Hans Birch Dahlerup) 준장을 군사 고문으로 보내주었다.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중장 계급을 달아주고 해군 재건 업무를 맡겼다.

당시는 아직 혁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달레루프 중장은 우선 베네치아와 이탈리아의 잔재들을 쓸어내고 황립 해군의 기틀을 잡는 데 중점을 맞추었다. 함명과 각종 용어들로 쓰이던 베네토어[30] 독일어로 바뀌었고, 베네치아식 조직문화도 제거되었다. 제국 해군의 중요 거점 중 하나인 트리에스트풀라가 군항으로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그리고 스웨덴 해군에서 에릭 아프 클린트(Erik af Klint) 중위와 노르웨이 해군[31] 의 페르디난트 베델야를스베르그(Ferdinand Julius Wedel-Jarlsberg) 중위를 초청하여 각각 베네치아 병기창 주임과 사관학교 교관을 맡겨 노하우를 전수하게끔 했다. 빌헬름 폰 테게토프,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 등 여러 인재들이 이들 북유럽 교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달레루프 중장의 발빠른 지휘로 잔존 해군 함선들도 수습되었다. 그리고 이 전력을 바탕으로 그는 육군의 요제프 라데츠키 원수의 군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베네치아를 포위했다.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혁명군이 베네치아 진입을 시도했으나 오스트리아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결국 혁명은 진압되었으며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인이 추진한 이 2년간의 격렬한 개혁은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많은 독일인들은 그가 오스트리아 해군을 덴마크화시킨다고 비난을 가했다. 결국 달레루프 중장은 오스트리아에 온 지 2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덴마크 해군에 복귀했다. 그가 초빙한 야를스베르그 중위도 이때 그를 따라 돌아가 노르웨이 해군에 복귀했다.

하지만 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몰아치던 신 절대주의 체제 속에서 제국 해군은 착실히 독일화되어 갔다. 그리고 달레루프의 제자이자 황제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Ferdinand Maximilian Josef Maria von Habsburg-Lothringen)은 1854년에 소장 계급으로 해군 감찰관직에 올라 해군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의 임기 중이었던 1856년에는 해군사관학교가 피우메에 자리를 잡았고, 풀라에 새로이 설립된 해군공창은 베네치아 병기창의 자리를 대신했다.[32] 여기서 만든 함체와 영국에서 수입한 엔진들을 가지고 제국 해군은 기선을 건조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풀라 해군공창은 건설 2년 후 91문급[33] 증기 전열함 SMS 카이저(SMS Kaiser) 함을 진수시키면서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계 민간조선사인 STT(Stabilimento Tecnico Triestino 트리에스테 기술 회사)사도 트리에스트에 두 번째 조선소인 산 로코 조선소를 설립하여 운영을 시작했다. 훗날 제국 해군 건함계획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되는 STT는 한동안 선박 엔진을 제작하거나 민간 선박만을 건조했으나, 1869년이 되자 오스트리아 최초의 철갑함인 SMS 쿠스토자(SMS Custoza)함을 건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국 해군의 건함 사업에 참여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선박 엔진 또한 1860년대가 되어서는 국산으로 조달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스트리아 해군의 전력은 미약했고 대부분이 목제 군함이었다. 이 때문에 1859년 제 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철갑함들로 구성된 프랑스 제국 해군과 사르데냐 해군 연합 함대가 오스트리아 해안선을 봉쇄하는 동안 제국 해군은 항구에서 손가락을 빨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861년에는 사르데냐와 주세페 가리발디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합병하여 새로이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오트란토 해협의 통제권이 사실상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가버림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은 아드리아해에 고립되었다.[34] 설상가상으로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즉위했다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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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년의 헬골란트 해전을 그린 유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 해군과 덴마크 해군의 전투 모습이다.[35]

그래도 제국 해군은 과거와 달리 빌헬름 폰 테게토프(Wilhelm von Tegetthoff) 제독과 같은 걸출한 지휘관의 지휘 하에 여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의 지원을 받았던 그는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에는 프로이센 해군과 연합해 북해로 나아가 헬골란트 해전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테게토프는 덴마크 해군의 포격으로 인해 자신의 기함에 불이 붙었음에도 전통적인 해군 열강 중 하나였던 덴마크 해군에 판정승을 거두었고, 독일 연방에 대한 덴마크의 해상봉쇄를 푸는 데 성공했다. 불과 몇 년 전 덴마크 해군이 제국 해군의 재건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전투는 사실상 스승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36]

곧바로 벌어진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벌어진 리사 해전은 오스트리아 해군사상 최고의 승리로 꼽힌다. 테게토프 중장은 목제 전열함 11척과 철갑함 7척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함대를 이끌고 양적, 질적으로 우세한 이탈리아 해군 철갑함대를 격파하면서 1859년의 굴욕을 갚았다. 그는 이탈리아 함대의 혼란을 틈타 빠르게 돌격하였고, 적의 함렬을 양단하여 충각과 근접 포격을 가했다. 이탈리아 해군 역시 격렬하게 반격하였으나[37] 오스트리아 함대의 능수능란한 대응으로 인해 각개격파당했다. 가령 목제 전함이었던 SMS 카이저 함은 이탈리아 해군 철갑함 4척에게 맹렬한 공격을 당했으나 오히려 역으로 2척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리사 해전은 목제 군함들로 구성된 해군이 철갑함들을 이긴 사실상 유일한 전투로 기록되었으며,[38] 지휘관 빌헬름 폰 테게토프 제독은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대표적인 해군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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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리사 해전 당시 모습. 테게토프 중장의 기함인 SMS 페르디난트 막스 함의 충각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이탈리아 왕립 해군 레디탈리아 함의 모습이다.

다만 이 승리는 전략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보오전쟁의 핵심적인 전장은 오스트리아 육군과 프로이센 육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던 독일체코 일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육전에서 오스트리아가 7주만에 처절하게 패배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완전히 상실했다.[39] 이로써 제국 해군은 군항 중 하나이자 탄생지였던 페네디히를 잃었으며, 통일을 거의 완수한 이탈리아 왕국은 아드리아해의 서쪽 절반을 장악했다.

함대의 질적인 열세도 여전했다. 1860~70년대 당시 신형 철갑함들을 다수 건조하며 한때나마 세계 3위의 강력한 해군 전력을 구축했던 라이벌 이탈리아와 달리, 오스트리아의 철갑함 건조 기술은 여전히 일천하다시피 했다. 1860년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산업화가 매우 미진했기 때문인데, 1860년대 초 오스트리아에서 강판을 생산할 수 있던 업체는 슈타이어마르크 지방의 첼트베크 철공소[40] 단 한 곳 뿐이었고 이마저도 대부분 육군의 수요를 감당하는 데 쓰였다. 신형 함포들 또한 조달이 불가능해 영국의 암스트롱사나 독일의 크루프 사의 제품을 수입해야 했다.

경제 위기도 닥쳤다. 1873년 4월 8일 에서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시작된 장기불황(Long Depression)은 발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이는 제국 해군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는데, 1875년에 STT사는 2호 조선소인 산 로코 조선소를 폐쇄했고 이로써 제국의 조선업체는 19세기 말까지 풀라 해군공창과 STT의 1호 조선소 단 둘만이 남게 된다. 그 외에도 다뉴브 강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제국 최초의 근대적 조선소인 오부다 조선소(Óbudai Hajógyár) 등의 잡다한 조선소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강안에 위치하였으므로 확장에 한계가 명확했다.

5.3. 세기말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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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최초의 철갑함인 SMS 쿠스토자 함.

다행히도, 18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제국 해군은 대대적인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제국 해군은 광활한 아드리아 해안선과 지중해로의 출구를 확보하는 것을 주 과제로 삼았기에 이탈리아와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1900년대 영독 해군경쟁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치열한 건함경쟁이 기범선 시대부터 드레드노트급 시대까지 40년 이상 펼쳐졌다.

장기불황 이후 허우적대던 제국의 중공업도 곧 급격하게 발전하며 해군의 국산화 수요를 맞춰주었다. 체코 오스트라바의 비코비체 제철소(Witkowitzer Bergbau- und Hüttengewerkschaft)는[41] 제국 해군의 철강 소요를 대부분 충당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폴디 제철소(Poldi Hütte)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체코 필젠의 중공업 재벌인 스코다(Škoda)는 독일 크루프 사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1890년대부터 각종 포신을 생산했다. 1차대전 발발 시점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초로 3연장 전함 주포를 개발하고 당대 미국 정도만이 보유했던 14인치급 3연장 함포도[42]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08년에는 트리에스트 해군 조선소(Cantiere Navale Triestino)가[43] 추가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렇게 관련 중공업이 발전하며 오스트리아는 자국 해군력을 국산으로 충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제국 해군은 최대한 자국 업체들에 일감을 몰아주어 후발주자인 그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국산 함선들이 인도받기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리거나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타국에서 직도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해군과 방위산업체들의 이런 밀월과 독과점 덕에 오스트리아의 건함 인프라는 빠르게 발전했다.

그리고 불황의 타격이 적었던 신생 헝가리 왕국이 산업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44] 해양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1870년대 말이다. 당시 피우메의 시장은 이탈리아계였던 조반니 디 시오타(Giovanni de Ciotta)였는데, 그는 티서 칼만(Tisza Kálmán)[45] 헝가리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피우메와 부다페스트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고 해운업과 항구를 정비했다. 영국인인 로버트 화이트헤드가 설립한 화이트헤드 어뢰공장(Whitehead Torpedo Works)이 자리잡은 곳도 피우메였다.[46] 다만 헝가리의 해양력이 제국 해군과 접목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외교적으로는 1880년대 삼국 동맹이 수립되면서 제국 해군의 부담이 잠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여전히 잠재적인 적이자 경쟁 대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동맹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모두 가입하면서 아군이 된 것이다. 1860년대부터 가열차게 벌어지던 양국 간의 철갑함 건함 경쟁은 이로써 끝이 났고, 양국은 합동하여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타격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구체화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 사후 삼국 동맹의 근간인 비스마르크 체제가 점차 해체되고 최종적으로는 1차 대전이 벌어지며 양국이 다시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5.4. 대양해군으로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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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리아해에서 항진하는 제1전함전단. 선두의 함선은 테게토프급 1번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다.

20세기가 되자 제국 해군은 전력을 더욱 급격하게 확장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것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대타협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주기적으로 국정운영의 세부 사항들을 합의해 왔는데, 해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건함 사업에 그럭저럭 만족하였던 반면 헝가리 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STT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업체들이 해군이 필요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업들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헝가리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헝가리는 합동 육군과 해군의 예산 중 약 31% ~ 36%를 부담하고 있었으나 해군이 진행하는 사업에 실제로 참가한 헝가리 업체들의 비율은 고작 12%에 불과했다. 피우메에 위치한 화이트헤드 어뢰공장 정도만이 해군과 관련된 헝가리 회사였고 나머지는 전부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었다. 때문에 헝가리 입장에서 해군의 확장은 자국 산업을 육성할 기회는 없으면서 막대한 예산만 들어가는 돈낭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해군최고사령관 헤르만 폰 슈파운(Hermann von Spaun) 대장이 1898년에 수립한 건함 계획 또한 헝가리 의회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슈파운 대장은 해군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헝가리를 설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헝가리 정치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유화책으로서 앞으로 있을 해군의 사업들에 헝가리 업체들을 대대적으로 참여시킬 것을 제시했다.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은 해군의 이런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으나 몇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그 중 비밀조항으로 협의한 내용은 너무 급진적이었다. 구축함 및 어뢰정 건조를 헝가리가 주도하고 해군용 탄약 생산의 자그마치 50%를 헝가리가 담당한다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헝가리의 중공업과 조선업이 성장했다고는 해도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듬해인 1905년 헝가리 선거에서 야당이었던 독립당이 승리하였다가 황제에 의해 해산당하는 헌정 위기가 발생하면서 헝가리는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06년 헝가리의 무리한 요구가 일부 철회되는 협의가 제국 해군과 헝가리 정부 간에 새로 맺어졌고, 제국 해군의 건함 계획은 양국의 이런 합의 이후에나 본궤도에 올랐다. # 이로써 1896년 야심차게 수립된 헝가리의 대표적인 조선소인 다누비우스(Danubius) 조선소는 제국 해군 주력함 건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대표적인 함선이 바로 헝가리의 국산 드레드노트로 유명한 테게토프급 전함 4번함 센트 이슈트반이다.

1907년부터 군제 개혁을 추진한 슈파운 대장의 후임자인 루돌프 몬테쿠콜리(Rudolf Graf Montecuccoli degli Erri) 대장[47] 역시 제국 의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함의 건조와 제국 해군의 현대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 덕에 오스트리아는 세계대전 발발 당시 현대화된 전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해군의 확장에는 해상에서의 실질적인 위협이 증가하는 것이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경험한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군의 봉쇄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상실을 기억했다. 점점 강해지는 이탈리아 해군의 봉쇄는 장차 제국의 존속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대두되면서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05년에는 HMS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인해 건함 경쟁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부가적으로 동쪽의 러시아 제국이 호시탐탐 지중해와 발칸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것도 고려해야 했다.

사상적인 근원과 황실의 지원도 있었다. 미합중국 해군 제독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이 발표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오스트리아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한다. 노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딱히 해군에 관심이 없었으나, 제국의 새 후계자이자 제국군 총감찰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머핸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아 제국 해군이 대양해군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몬테쿠콜리의 야심찬 건함 계획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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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 필젠 스코다 공장의 라데츠키급 전함 함포탑 제작 공정

몬테쿠콜리가 수립한 건함 계획은 열두 척의 전함과 4척의 장갑순양함, 8척의 정찰순양함과 18척의 구축함, 36척의 어뢰정과 6척의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20세기 초 제국의 산업은 19세기와 달리 이 거대한 건함 계획에 필요한 대부분의 수요를 자체적으로 충족할 수 있었다.

민간에서의 자금 지원도 있었다. 독일 제국 해군이 함대 협회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팽창했던 것처럼 오스트리아 해군도 그러했다. 1904년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함대 협회(Ӧstereichisches Flottenverein)'는 제국의회의 일부 의원들과 민간인들의 후원을 받아 제국 해군의 건함 계획을 보조했다. 이로써 제국 해군은 1차대전 발발 시점에서 전/준드레드노트급 도합 9척에 드레드노트급 3척을 보유했는데, 당시 주적인 이탈리아에는 전드레드노트급 8척과 드레드노트급 전함 세 척이 있었으므로 제국 해군의 전력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함대 협회에 대한 지원은 독일에서처럼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헝가리 왕국 의회는 건함계획에 불만이 있었고, 적이 많던 페르디난트 대공을 제외한 합스부르크 황실 역시 해군을 딱히 중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군의 확충 때문에 제국 육군 포병대의 개혁은 지지부진해졌다. 그들은 1차대전 초기까지 청동제 대포를 써야 했다. 제국 내의 강재 생산 물량 대부분이 해군 쪽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단지 해군뿐만이 아니라 오헝 제국 육군이 셋으로 나뉘어 있어 내부 예산 싸움이 매우 심각했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5.5. 대외 임무

제국 해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여느 열강의 해군이 그러하듯 탐험포함외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5.5.1. 노바라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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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 종료 3년 후인 1862년, 베네치아에 정박한 노바라 함.

Novara-Expedition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오스트리아 해군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원정이다. 기함인 SMS 노바라(Novara)의[48] 명칭을 땄다.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추진하였으며 연구 및 통상로 개척의 목적을 띄었다. 원정대의 일원은 345명이었으며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호흐슈테터(Ferdinand von Hochstetter)를 비롯한 7명의 과학자들이 동행했다.

그들은 각자 해양학기상학 연구, 생물 표본 수집 등의 연구 목표를 띄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세계 각지의 인류학언어학 자료, 그 중에서도 을 수집하는 목적 역시 있었다. 원정대는 아프리카중국, 그리고 아직 문호를 닫고 있던 일본조선까지[49] 최대한 많은 국가들의 서적을 구매하기 위해 400길더의 예산을 특별히 받았다. 다만 원정대는 언어학자들을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업무 역시 졸지에 자연과학자들이 맡아야 했다.

당연히 관련 지식이 부족한 자연과학자들이 외국 인문서적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리 없었으므로, 빈의 언어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원정대를 위한 600쪽의 참고문헌 및 지침서들을 작성해 건네주었다. 가령 중국학 및 일본학자였던 아우구스트 피츠마이어(August Pfizmaier)는[50] 중국에서 구매할 서적들의 목록을 작성해서 원정대에게 건네주었다. 일본 서적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로 "책을 사고 싶습니다." 내지는 "서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는 문장을 적어주었다. 한국어 서적이나 당대 중국을 뒤집어놓고 있던 태평천국 반란군의 저작물 역시 될 수 있으면 구해오라는 요청사항 역시 잊지 않았다.

원정대는 2년의 탐험 기간 동안 트리에스트에서 출발하여 우선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후 다시 대서양을 횡단해 희망봉을 지나 인도와 스리랑카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동남아시아로 향했다. 싱가포르로 향하던 도중 원정대는 과거 18세기에 오스트리아가 영유권을 주장한 바 있던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재식민화하기 위해 섬들을 철저히 조사했다. 다만 노바라 함은 조사만 하고 본격적인 식민화는 훗날로 미룬 채 안다만 제도를 떠났는데, 그 사이에 버마를 점령한 영국이 제도를 선점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는 식민화에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다만 노바라 탐험대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에게서 따와 이름지었던 테레지아 섬은 영국 식민지 시기를 지나 오늘날까지도 오스트리아가 붙인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51]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에서 다시 중국으로 올라가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 도달한 원정대는 다시 남하하여 남태평양의 섬들과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이후 타히티를 지나 다시 남아메리카에 도달했으며, 그곳에서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 대서양으로 재진입,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후 마데이라 제도를 경유해 다시 트리에스트로 돌아왔다. 이때가 제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점이었기에 원정대는 오스트리아를 봉쇄 중이던 프랑스 해군과 접촉했으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특별 배려로 무사히 봉쇄를 통과하여 본국으로 금의환향했다.

원정대가 가져온 연구 자료들의 값어치는 적지 않았다. 해양학, 지질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작성되었다. 이들이 가져온 연구 표본은 자그마치 26,000점이나 됐다. 원정대의 보고서는 1876년까지 도합 21권까지 출판되었다. 오스트리아 학술원이 기쁜 비명을 질러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노바라 함이 가져온 연구자료와 표본들은 이후 오스트리아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 빈 자연사박물관의 소장품 중에도 이때 가져온 표본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현대까지 남아 있는 노바라 원정대의 가장 유명한 유산이자 영향은 바로 코카인의 발견이다. 노바라 함이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표본 중 하나가 바로 코카나무였던 것. 이듬해인 1860년에 이때 가져온 코카나무 표본에서 연구진들이 최초로 정제 코카인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코카인은 곧 고성능 각성제로 각광받아 전 유럽에 널리 퍼졌다가 20세기 들어서야 그 해악성이 인식되어 금지 약물로 분류된다.

학술원에서 원하던 서적들 역시 대거 획득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서적들을 여럿 얻었다. 홍콩에서는 영국인들의 협조를 받아 중국 책들을 선물받았다. 이 중에서는 일본어 소설도 한 권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어 서적으로는 영국인 선교사 월터 H. 매드허스트(Walter H. Medhurst)가 작성한 조선위국자휘(朝鮮偉國字彙)[52] 손에 넣었다. 홍콩에서 원하던 만큼의 책을 얻지 못한 원정대는 상하이로 올라가서야 비로소 목표로 했던 중국 서적들을 대거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이때 수집한 중국 서적들은 이후 오스트리아 중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원정대는 일본과 한국 서적은 더는 얻지 못했으며, 두 국가는 방문하지 않고 귀국했다.###

5.5.2. 북극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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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대장 파이아 대위가 1892년에 직접 그린 유화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Nie zurück!)>. 바이프레히트 중위가 성경을 든 채 지친 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53][54]

Nordpolexpedition[55]

제국 육군의 율리우스 폰 파이아 대위가 이끄는 탐험대는 제국 해군의 카를 바이프레이트 중위가 지휘하는 탐험선 테게토프호를 타고 1872년 북극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유빙에 갇혀 조난당하고 말았으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여 황제의 이름을 따 프란츠 요제프 군도라 명명했다. 결국 탐험 시작 2년 뒤인 1874년에 대부분이 생존하여 귀환했다. 현대 오스트리아 소설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56]

5.5.3. 의화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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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톈진의 대고구 요새로 돌격하는 오스트리아 수병들. 좌하단은 같이 돌격한 독일 제국군이다.

20세기 오헝 제국 해군의 대표적인 해외 군사 원정은 바로 의화단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8개국 연합군으로 중국에 개입하면서 제국 해군 전력을 중심으로 원정군을 꾸려 보냈다. SMS 젠타 함과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은 톈진 대고구 포위전에 참여하여 청나라 북양함대 요새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해외 원정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였다.

대고구 요새 포위전 당시 영상. 44초와 3분경에 함렬을 따라가는 2개 연돌이 달린 검은색 함선이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K.u.K 마리아 테레지아 함이다. 당시 함장은 훗날 제국 해군의 최고사령관이자 상장으로 진급하는 안톤 하우스 대령이었다. 그 외에도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역시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원정에 참여했다. 트랍 소령은 대고구 포위전에도 투입되었다. 말수가 적었던 그는 의화단 전쟁 참전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식들에게 중국의 시골에서 겪었던 흥미로운 일화들을 종종 들려 준 적은 있다고 전한다.

의화단 전쟁 이후 대부분의 함선들은 중국을 떠나 본국으로 금의환향했다. 다만 신축조약으로 획득한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의 경비를 위해 일부 해군 육전대와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이 중국에 주둔한다. 톈진 조계는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해외 식민지였다. 하지만 중국 및 이탈리아령 조계와의 국경분쟁, 오스트리아 산업체들의 무관심, 그리고 갈수록 감축되는 치안전력과 만연한 부패 등의 이유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5.5.4.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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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여러 차례 방문했던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57]
제8관

1. 양국 군함(軍艦)은 서로 피차의 각 항구에 갈 수 있으며 배의 수리 재료 및 각종 식료품, 일체 필요한 물건은 모두 피차 서로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상의 선박은 통상 및 항구 장정을 준수할 필요가 없으며 구매한 물품에 대해서는 모든 세금과 각종 소정 수수료를 모두 면제한다.

2. 오스트리아 군함이 조선의 통상하지 않는 항구에 갈 때에는 승선한 관원, 무관, 병역(兵役)은 상륙을 허가한다. 다만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내지에 가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

3. 오스트리아 군함에서 쓰는 군장(軍裝) 물자 및 일체의 군량과 군수품은 조선의 각 통상 항구에 보관할 수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위임하여 파견한 관원에게 넘겨주어 간수한다. 이런 군장 물자에 대해서는 모두 세금 징수를 면제하며 일로 인하여 전매(轉賣)할 경우에 산 사람은 납부해야 할 세금을 규례에 따라 더 지불하여야 한다.

4. 오스트리아 군함이 조선 연해에서 항로 상태를 조사할 경우에는 조선 정부에서도 힘껏 도와주어야 한다.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1892년) 5월 29일 병술 2번째 기사

위의 노바라 원정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 역시 조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1880년대부터 양국 간의 본격적인 만남과 수교가 이루어질 때에도 그 가교 역할은 제국 해군이 맡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국과의 관계에도 포함외교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령 최초로 한국을 찾은 오스트리아 선박은 1884년부터 2년간 동아시아 탐사 항해 중이던 포함 SMS 나우틸루스였다.[58] 한편 아우로라급 코르벳함 SMS 즈리니는 1890년에 상하이 주재 총영사 요제프 폰 하스와 함께 조선을 찾았다. 조선과 오스트리아 양국 간의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그리고 3년 뒤인 1893년에는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이 전권대사 뤼디거 폰 비겔레벤 남작을 태우고 조선으로 와서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조선 정부와 선물을 교환한 뒤 귀국했다.

양국 간의 외교 관계를 수립한 조오수호통상조약에도 제국 해군의 조선 기항에 관한 조항이 불평등 조약의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해군이 조선의 항구에 보관한 장비들은 오스트리아 사관들이 관할하며, 항구 이용에 세금을 면제한다는 조항 등은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오스트리아 함선이 조선의 해안선을 측량할 수 있도록 한 4번 조항 역시 조선의 해양 안보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67】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함대의 대한제국 방문
[발신] V. 콜랭 드 플랑시, 대한제국 주재 프랑스공화국 대표부 공사
[수신] 델카세, 프랑스 외무부 장관
[연월일] 서울, 1901년 5월 13일
[문서주제] 제물포의 □에서 □□□ 외국인들

장관님,

지난 몇 주간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함대가 차례로 제물포의 정박지를 방문했습니다.
□□□ 제독의 출현은 때마침 일본에 무성한 소문들과 맞아떨어졌고 마치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사령관은 전쟁위협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문제의 소문을 가라앉히라는 임무를 분명히 띠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정교회 부활절 축제를 위해 뤼순에 간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서울에서 연회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로시아Rossia’호 선상에서 연회를 베풀기까지 했습니다. 이 곳에 일본 공사가 초대되었고 주재 외교관들 대표에게 주는 상석과 건배 제안의 특혜가 그에게 돌아갔습니다. 제독은 하야시씨가 돌아갈 때 대포 15발을 쏘며 예의를 갖출 정도로 큰 배려를 베풀었습니다

영국 함대 함장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경은, 제9호 보고서로 각하께 보고 드린 바 있는 세관 감독관과 관련된 사건 때문에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도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 듯한 정황 속에서 사안의 최종적인 타결을 이끌어내지 못한 듯합니다. 대한제국인들은 여전히 맥리비 브라운Mac-Leavy Brown씨의 사퇴를 바라고 있지만 그를 물러나게 할 수단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의 오스트리아 제독 경우에는 그의 행보가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자국과 관련된 미해결 사안에 따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군함 3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대한제국인들에게 처음 선보이게 되어 만족했습니다.

제독 3인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같은 환대를 받았다는 점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독들은 군주를 알현했고 궁에서는 그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경구.

V. 콜랭 드 플랑시
- 주한프랑스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1901년 5월 13일자 보고 내역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프랑스 외무부 문서)
의화단 전쟁 와중에도 오스트리아 원정함대는 러시아 제국 해군, 그리고 영국 해군과 함께 잠시 대한제국 제물포에 기항하기도 했다. 해당 기록은 황성신문 기사, 그리고 주한프랑스공사관주한일본공사관이 각자의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 적혀 있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프랑스 공사의 전보에 따르면 러시아 해군은 당대 고조되고 있던 일본과의 전쟁 위협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부러 제물포에 방문하였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초대하여 함상 연회를 열었다. 제임스 브루스 소장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대한제국 정부 관료들과 많은 갈등을 빚고 있던 영국인 해관장인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과[59] 관련된 문제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방한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경우 별다른 목적을 띄고 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호를 위해 잠시 한국을 들렀다고 플랑시 공사는 밝히고 있다.

1901년 4월 30일에 장갑순양함 마리아 테레지아, 방호순양함 젠타와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 3척이 한꺼번에 입항했고 5월 1일에 어뢰순양함 레오파르트함이 입항했다. 프랑스공사관 문서와 일본공사관 문서에는 오스트리아 함대사령관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황성신문 1901년 5월 3일자 기사에는 '곳트쿠캐리' 라고 적혀 있다. 다른 자료들을 보면 당시 오스트리아 동방함대 사령관은 훗날 헤르만 폰 슈파운 대장의 뒤를 이어 해군최고사령관직을 역임하는 루돌프 몬테쿠콜리 백작(Rudolf Graf Montecuccoli degli Erri)이라 명시하고 있다.[60] 황성신문 기사의 '곳트쿠캐리'는 몬테쿠콜리의 음차로 보인다. 그 외에도 1차 대전 당시의 해군최고사령관인 안톤 하우스 상장,[61] 그리고 잠수함 함장이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인물로 잘 알려진 게오르크 폰 트라프 소령[62] 역시 함대와 함께 한국에 방문했다.

플랑시 공사에 따르면, 몬테쿠콜리 소장은 자국 함선 세 척의 위용을 한국인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상당히 만족해했다고 전한다. 5월 1일이 되자 몬테쿠콜리는 수행원 7명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덕수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했고, 한국 정부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다. 다만 이들은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일주일 후인 5월 6일에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은 영국령 웨이하이웨이로 떠났으며 나머지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했다.

중국에 남게 된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은 1901년 8월 30일에도 옌타이에서 한 차례 더 제물포를 찾았다. 그 외 1903년에도 한 오스트리아 함선이 입항했다는 기록이 일본 공사관 문서에 남아 있으나 함명이 남아 있지 않다.

5.6. 제1차 세계 대전

5.6.1. 초중반의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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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 이탈리아 중동부 해안의 안코나 시를 포격하는 오헝 제국 함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헝 제국 해군은 아드리아해에 고립되고 말았다. 협상국 해군 전부가 오스트리아를 잡겠다고 아드리아해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 알바니아를 잇는 오트란토 해협에는 협상국 해군 함대의 봉쇄망이 깔렸다.

전쟁 시작 직후 프랑스는 오헝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노출된 지중해 식민지들을 지키기 위해 전 함대를 지중해로 보냈다. 강대한 영국 해군 또한 지중해 함대를 보내어 이집트와 수에즈를 보호하고자 했다. 영국 지중해 함대에는 3척의 순양전함이 있었고, 프랑스 해군은 22척의 전드레드노트급과 3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전체를 지중해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오트란토 해협 안으로 대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1915년부터는 기존의 영국-프랑스 함대에 더해 새로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 왕국도 가세했다. 독일 해군은 북해에서 영국을 상대로, 오스만 제국 해군은 주로 흑해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활동했으므로 오스트리아는 협상국 연합함대와 사실상 홀로 맞서야 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 중에서도 주로 프랑스 해군이 주적이었다.

하지만 협상국 함대 또한 황립해군이 지키는 아드리아해 내부로 침투할 여력은 되지 않았다. 아드리아해는 매우 좁은 바다였고, 오헝 제국 해군의 근거지가 있는 달마티아 해안은 서부 이탈리아 연안과 달리 높은 디나르알프스 산맥과 굴곡진 리아스식 해안에 보호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영해에 접근한 협상국 해군 군함들은 이 미로 같은 해안선에 숨은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함대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거기다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오면 섬과 섬 사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어뢰를 쏘고 다시 사라지는 오헝 제국 해군 어뢰정유보트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 초에 협상국, 특히 프랑스 해군이 입었던 주요 함선 손실들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달마티아 해안에 근접하다 뇌격당한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최고사령관 안톤 하우스[63] 대장이 이끄는 제국 해군은 현존함대 전략을 기본 방침으로 세우되, 유보트 전력으로 협상국을 타격하는 전술로 전환하였다. 오헝 제국 해군 유보트 함대와 지원 나온 독일 제국 해군 풀라 잠수함 전단[64]은 오트란토 해협에 깔린 순찰선들과 대잠망들을 회피해 지중해로 나와 통상파괴전을 실시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해군 전력이 갈리폴리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향하자 해협의 경계도가 떨어졌고, 이는 동맹국 해군에 있어서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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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상국 수송선을 격침한 오헝 제국 해군 잠수함.

잠수함들은 낡고 잔고장이 심한데다 고작 7척밖에 존재하지 않았다.[65][66]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분투하며 협상국에 피해를 강요했다. 미국 디자인을 바탕으로 헝가리의 피우메에서 건조된 U-5 함은 1915년 초 프랑스 해군 장갑순양함 레옹 강베타 함을 침몰시켰고, 동형함인 U-12함은 1914년 말에 쿠르베급 전함 3번함 장 바르를 대파시켰다. 일본 해군 카바급 구축함을 대파시키고 십수 척의 그리스 선박들을 뇌격한 독일제 U-27함의 활약도 돋보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보트 타격전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모델로 유명한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소령이었다. 그는 노획되어 U-14란 이름으로 개칭된 프랑스 해군 잠수함 '퀴리'의 함장이었는데, 1916년부터 그리스 연안과 동지중해에서 수 척의 협상국 수송선들과 민간 선박들을 침몰시켰다. 그의 함선인 U-14함이 본래 프랑스 선박이었던 고로 그는 프랑스 삼색기를 달아 협상국 함대를 속이고 유유히 봉쇄망을 넘어갔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한편 수상함대는 항구와 전력을 온존하여 협상국에 압박을 주는 것 외에도 아드리아해 봉쇄를 돌파하거나 발칸의 육군 작전을 지원하고, 이탈리아 연안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중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1915년에 있었다. 이탈리아삼국 동맹을 배신하고 협상국 측에 가담할 것이라는 정황이 명백해지자, 하우스 대장은 이탈리아가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이탈리아 동부 해안의 항구들을 기습하여 파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기 4시간 전 그는 가용한 전체 수상함대에 출항 명령을 내려 기계획된 내용에 따라 이탈리아 연안을 급습했다. 이 기습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안코나의 철도 시설에 대한 포격은 이탈리아군의 동원 능력을 성공적으로 저해했다. 다만 그들의 주요 목표가 민간 시설들이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제국 해군의 포격에 다수의 이탈리아 민간인들도 휘말려 살해되었다.

제국 해군은 해군 항공대 운영에 있어 선구적인 조직이기도 했다. 미 해군연구소에 따르면 제국 해군 항공대는 아드리아해의 해안선과 오트란토 해협 입구를 돌아다니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사령부에 실시간으로 적 함대의 위치를 보고했고, 이는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방어전략을 가능케 했다. 또는 몬테네그로 해안을 포격하던 제국 해군의 관측반 역할을 맡아 포격을 유도하거나 직접 적 함대를 폭격하기도 했다. 1916년에는 프랑스 해군 브뤼메르급 잠수함 푸코 함이 제국 해군의 로너 수상기들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는데 이는 최초로 항공기가 함선을 격침에 성공한 케이스다.[67] 이외에도 바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 해안을 폭격하기도 했다.

해협 봉쇄선에 대한 돌파 시도도 있었다. 여기서 가장 활약했던 것은 타트라급 구축함들과 노바라급/헬골란트급 정찰순양함들이었다. 협상국 해군은 주로 트롤어선들을 동원해 해협 입구에 기뢰와 대잠망을 깔았는데, 기민하고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했던 제국 해군 구축함대는 이 기뢰지대 근처를 오가며 협상국 어선단에 공격을 가했다. 동원된 민간인들이 다수였던 이 어선들은 이 때마다 격침당하거나 마구 도망쳤고, 목표를 달성한 제국 해군 구축함들은 빠른 속도를 살려 적 증원 함대가 오기 전에 퇴각했다. 그럼 이렇게 엉망이 된 봉쇄망의 틈으로 유보트들이 나가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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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해협 해전 당시 기록화. 호르티 미클로시 대령의 함선인 정찰순양함 SMS 노바라 함이 협상국 선단의 함렬을 돌파하는 모습이다.

1917년 하우스 상장이 폐렴으로 급사한 후에는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68]이 해군최고사령관직에 올랐고, 그의 지휘 하에 제국 해군은 1917년의 오트란토 해협 해전에서 협상국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오트란토 해협 역시 근본적으로는 상술한 구축함대의 기습 작전이었다. 이때 수상함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호르티 미클로시였다. 그는 여기서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훗날 헝가리의 섭정으로 군림하게 된다.

한편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톈진 조계 방위를 위해 남게 된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과 해군 육전대칭다오 전투에서 일본 해군영국 해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카이제린 엘리자베트는 최초로 함상 발진 항공기에 항공 폭격을 당한 함선이기도 했다. 이들은 같이 싸우다 포로가 된 독일 제국 해군 병사들과 함께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전후에 귀국한다. 한편 톈진 조계는 1917년 동맹국에 선전포고한 중화민국 북양정부안휘군벌 군대가 들어와 접수했다.

5.6.2. 악화되는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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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왕립 해군 어뢰정에 뇌격당해 침몰하는 테게토프급 전함 4번함 SMS 센트 이슈트반. 오른쪽의 함선은 동형함인 SMS 테게토프다. 센트 이슈트반의 침몰은 테게토프에서 촬영한 영상으로도 남아 있다.

제국 해군의 선전은 협상국의 일부 전력을 아드리아해 입구에 묶어 놓음으로써 제국의 해안을 보호하고 3면 전선의 압박을 중화시킨다는 의의가 있었다. 협상국 해군이 아드리아해에 진입하여 이탈리아 육군과 공조하거나 오스트리아의 해안선에 상륙한다면 이탈리아 전선의 추가 협상국 쪽으로 순식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의 현존함대 전략은 이 상황을 방지하는 것만으로 제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해군의 승전은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처럼 보다 큰 전략적 의미를 가지기는 힘들었다. 1917년부터는 일본 제국 해군 구축함대와 미국 해군, 그리고 ANZAC 해군까지 가세하면서 협상국 해군의 전력은 갈수록 늘어나는 반면, 제국 해군의 전력은 반대로 조금씩 줄어 갔다. 봉쇄는 그대로였다.

거기다 제국 해군 내부에서는 반란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으며 이 열기는 1918년 2월의 카타로[69] 해군 반란 사건으로 터져나오고 말았다.[70] 오스트리아 해군의 사관-수병 관계는 러시아 제국 해군처럼 매우 좋지 못해 수병들은 인종차별과 사관들의 가혹한 처벌, 부실한 식사와 고된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처우 개선과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수병들의 반란은 오트란토 해협 일대를 방위하는 주요 항구인 카타로 항에 정박해 있던 순양함 SMS 장크트 게오르크함에서 최초로 터졌다. 반란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이틀 사이에 항구 전체가 반란군에 점령당했고 사실상 순양함 전단 전체가 반란에 가담했다. 제국 해군은 곧바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들로 이루어진 진압군을 파견하여 카타로의 반란을 진압했고, 주동자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오스트리아판 포템킨 반란 사건이자 곧 일어날 제국 붕괴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었다. 해군최고사령관 녜고반 대장도 이 반란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당했고,[71] 사건 조사를 맡은 감찰관 카를 슈테판 대공은 오트란토 해협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던 호르티 미클로시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이로써 호르티는 오헝 제국 해군 최후의 함대사령관이 되었다.

악재도 겹쳤다. 호르티가 이끄는 제국 해군은 카타로 반란 직후 지난 1917년에 그랬듯 오트란토 해협을 재차 돌파하고자 수상함대를 다시 준비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동안 아껴 두었던 전 함대를 동원했다는 것이 차이였다. 핵심 전력인 테게토프급 4척 전부와 전드레드노트급 에르츠헤르초그 카를급 3척, 그리고 순양함대 다수를 동원하여 봉쇄선을 기습한 것. 구축함과 정찰순양함들로 구성된 소규모 타격대가 기존처럼 봉쇄망을 헤집는 동안, 주력함들이 달려드는 협상국 해군을 저지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대응이 더 영민했다. 아드리아해 내부로 주력함대를 진입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탈리아는 어뢰정특수부대를 통해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1917년에 모나르크급 해방전함 SMS 빈이 모항 트리에스테를 강습한 이탈리아 M,A,S 어뢰정의 뇌격을 받아 침몰했다. 호르티가 전 함대를 끌고 나온 1918년 6월 10일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탈리아 어뢰정들은 테게토프급 1번함 테게토프 함과 4번함 센트 이슈트반 함이 전속력으로 항진하며 내뿜는 매연을 포착하고 달려들어 센트 이슈트반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72][73] 작전은 중단되었고, 목표 달성은 커녕 주력 전함 1척을 잃어버린 제국 해군은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수행한 사실상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이후로도 소규모 타격대의 봉쇄선 기습과 유보트 작전은 계속되었지만 주력함대는 다시 항구에 틀어박혔다.

오스트리아의 패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1918년 10월 말, 황제 카를 1세는 협상국이 오헝 제국 해군의 전력을 전리품으로 노리고 있음을 깨닫고 제국 해군이 보유한 전력의 대부분을 제국의 남슬라브인들이 독립을 선언한 후 세운 신생국인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국[74]에 넘겨버렸다. 10월 31일 제국 해군 함선의 대부분의 소유권이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국으로 넘어가고 다음날인 11월 1일 새벽 인간어뢰를 타고 풀라항에 잠입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 소속 특수부대가 테게토프급 전함 1번함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함저를 폭파하여 침몰시켰다.[75] 당시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함장이었던 얀코 부코비치(Janko Vuković de Podkapelski)는 배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5.6.3. 의의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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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 - 1918년 사이 오트란토 해협 일대의 작전 지도. 곳곳에 봉쇄선과 기뢰 지대가 겹겹이 둘러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해군이 우세한 적을 맞아 지형지물과 유기적인 운용 능력을 바탕으로 이 정도 성과를 낸 것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존재로 인해 프랑스 해군이탈리아 왕립 해군 전체가 지중해에 발이 묶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국 해군 역시 대영제국 유지에 필수적인 수에즈를 보호하기 위해 지중해 함대를 항상 유지해야만 했다. 이는 다시 강대한 세계 2위의 해군인 독일 제국 해군과의 일전이 벌어지고 있는 북해 일대에서의 전력 감소로 이어졌다. 패전으로 인해 결실을 보지는 못했으나, 황립해군은 전반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대한 분투하며 오스트리아의 해안을 지켜내고 4년간 협상국의 해군력을 분산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보다 세부적으로는 주력함대 운용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이 존재했다. 오헝 제국 주력함대의 전함들은 1915년의 대습격 이후로는 이스트리아 반도의 항구에 대부분 조용히 머물렀다. 합스부르크급 전함 같은 전드레드노트급들의 경우 간간히 예비대로 모습을 비추기라도 했으나, 핵심인 테게토프급 전함들은 전혀 활동이 없었다. 가령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동맹국에 대패한 이탈리아가 수십 킬로미터를 후퇴할 때,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며 베네치아를 포격하는 임무에 동원된 함선 중에서 주력함대에 속하는 함선은 단 한 척도 없었다. 이때 투입된 것은 구식 해방전함인 모나르크급들이었고 그마저도 이탈리아 방어군의 저항에 쉽게 격퇴되고 말았다.

그리고 완전히 분쇄된 세르비아군 잔존세력 26만 명이 알바니아에 집결하여 협상국으로부터 해상 보급을 받으며 재정비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에도 전함들은, 하다못해 장갑순양함조차도 나서지 않았다. 소형 함정들의 화력으로는 알바니아 해안선에 대한 타격 효과가 적었음에도 그랬다. 결국 재정비를 마친 세르비아군 잔당들은 1918년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아 오스트리아 영내로 진군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를 해방하고 오헝 제국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면서 1915년의 복수에 성공한다.

이는 오헝 제국의 경제 사정 상 주력함 손실분의 보충이 극도로 어려워, 전함을 상실했을 때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도중 추가된 전함은 한 척도 없으며 차기 슈퍼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은 아예 취소되었다. 거기다 부차적이지만 주요 연료인 고품질 석탄의 산지인 영국과 적이 된 것도 가동률을 급락시키는 데 한몫했다. 주요 조선소 중 하나였던 CNT는 국경에 너무 가까워 전쟁 초반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그런 경제 상황과 제국 해군의 현존함대 전략을 감안해도 전함의 운용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령 테게토프급들은 함생의 90% 이상을 항구에서 보냈으며, 1918년의 출격에서 제국 해군이 센트 이슈트반을 어이없이 잃어버린 것은 누가 보아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미 해군연구소는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전반적인 운용과 전략적으로 이뤄낸 성과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렸다. 아드리아해를 보호한다는 목적을 달성했고, 잃은 함선보다 침몰시킨 함선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전함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필요성과 국가 체급에 비해 전함이 과하게 많았고, 구축함들과 달리 너무 졸렬하게 운용하여 있는 전력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게 미 해군연구소의 냉정한 평가다. # 특히 오트란토 봉쇄선을 타격하는 작전에서 대체 불가능(irreplacable)한 활약을 선보였던 정찰순양함들이 단 4척밖에 없었다는 건 심각했다.

미 해군대학의 스탠리 D.M. 카펜터 교수 역시 오헝 제국 해군이 열세한 상황에서 최대한 분투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강대한 해양전력과 우수한 인재들을 그냥 낭비(waste)했다고 비판했다. # 오헝 제국 수상함대가 전쟁 내내 벌인 주요 작전이라고는 1915년의 안코나 기습과 오트란토 해협 해전, 그리고 센트 이슈트반을 잃어버리는 재앙으로 끝난 1918년의 출격 단 셋 뿐이기 때문. 수상함대와 달리 잠수함대와 강방함대의 활약은 돋보였으나 전황을 바꿀 수준은 되지 못했다.

카펜터 교수는 압도적인 숫자의 협상국 전력을 맞닥뜨렸다는 외적인 문제 외에도 제국 해군이 가진 내적 문제를 두 가지 더 꼽았는데, 하나는 주요 항구풀라카타로 단 둘뿐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형 함정들의 작전반경이 매우 제한되었다. 하지만 그가 꼽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제국 해군 스스로 설정한 너무나도 제한적인 전투 목표들이었다. 주요 목표는 1. 해안 방어와 2. 아드리아해에서의 협상국 항로 공격, 3. 육군 작전 지원, 4. 오스트리아의 항로 보호, 5. 중립 국가들이 동맹국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영향을 끼치기의 다섯 가지로만 구성되었다. 그리고 최고사령관 안톤 하우스 상장이 "이탈리아 해군과 온전한 전력으로 상대할 수 있도록 함대를 보전해야 한다"고 전쟁 초에 설정한 이래 제국 해군은 상당히 위축되어 버렸다. 훗날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해군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 준 셈이다.

제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 전함 3척을 침몰시켰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전드레드노트급인 레지나 마르게리타함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이 부설한 기뢰에 폭침했다. 그 동형함 베네데토 브린 함과 드레드노트급인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4번함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파괴공작으로 폭침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원인불명의 사고로 탄약고가 유폭했다는 분석이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국 해군이 전함을 대상으로 올린 가장 큰 전과는 잠수함 U-12함이 프랑스 해군 쿠르베급 전함 장 바르를 대파시킨 것이다.

5.7. 해체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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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이탈리아 라스페치아 해군공창에서 해체되는 SMS 테게토프. 상부구조물들은 이미 대부분 철거되었고, 부두에는 포탑에서 제거한 12인치 함포들이 널브러져 있다.

종전 이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은 대부분 협상국에 넘겨졌고 내륙 해군인 다뉴브 전대의 일부 함선들만이 신생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헝가리 왕국에 남았다. 유고슬라비아는 카를 1세가 자신들에게 전력을 넘겼음을 근거로 주력함대를 비롯한 함선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다른 협상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제국 해군에 가장 크게 시달렸던 이탈리아는 오헝 제국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고슬라비아가 또다른 해군 열강이 되어 아드리아해를 장악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국 해군 함선들의 소유권은 각기 여러 나라로 갈라졌다. 그 중 오헝 제국 해군의 숙적인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 가장 중요한 함선인 테게토프급 2번함 테게토프를 비롯해 가장 중요한 함선들을 가져갔는데 테게토프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1924~5년에 걸쳐 해체되었고, 닻만이 현재 베네치아 해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국 해군의 주요 군항이었던 트리에스트풀라[76], 피우메 항구는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군항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유산으로 시작하여 오스트리아가 19세기 내내 트리에스트에 닦아 놓은 주요 인프라는 이때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더 강화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한때 제국 해군의 주력함들을 만들던 STT사는 이제 리토리오급 전함을 비롯한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함들을 건조했다.[77] 이탈리아는 그 외에도 해군도서관에 보관된 수 만 권의 장서들과 연구자료들 역시 가져갔다.

프랑스는 테게토프급 3번함 프린츠 오이겐을 비롯해 순양함이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같은 함선들을 넘겨받았는데 프린츠 오이겐은 1922년 표적함으로 침몰시켰고 전리품으로 넘겨받은 함선들 대부분은 워싱턴 군축 조약에 따라 해체했다. 한편 그리스 해군유고슬라비아 해군은 구축함급 이하의 함선들을 넘겨받았고, 해체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자국 해군에 편입하여 사용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사용되며 그리스 침공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해 분투하다 격침당하기도 했다.

헝가리 왕국은 다뉴브 강방함대의 일부 전력들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제국 붕괴 후 혼란기에 잠시 성립되었던 공산정부를 무너뜨리는 데에 가담했다. 트리아농 조약에서는 헝가리에게 고작 3척의 경비함을 허용하였으나, 헝가리 정부는 감시를 회피하며 7척의 함선을 보유했다. 함선들을 내무부 소속으로 이관하되 실질적인 운용은 군에서 맡는 식이었다.

한편 제국 해군의 마지막 함대사령관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 중장은 오트란토 해협 해전의 승리와 전후 혼란기를 수습하며 거머쥔 명성을 바탕으로 헝가리의 지도자 위치에 오른다. 그는 국왕이 없는 공위 상태에서 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4년까지 섭정 직위를 유지하며 수십 년간 헝가리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전후 오스트리아에는 전직 해군장병들이 모인 전우회들이 여럿 결성되었다. 그들은 실직하여 어려움을 겪는 전우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해군의 전통과 기억을 잇고자 했다. 1924년 잘츠부르크에서 설립된 잘츠부르크 해군 전우회(Marinekameradschaft Salzburg)가 대표적이다. 트랍 소령도 이 전우회의 창립 회원이었다.

5.7.1.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의 영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남아 있던 해군 인프라와 인사들을 독일 해군의 재건에 사용하고자 했다.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전직 오스트리아 사관들이 자의반 타의반 독일 해군에 재입대하여 나치 독일을 위해 싸웠다. 이를 거부한 용기있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일가족을 전부 끌고 스위스로 망명한 트랍 소령이고, 그의 이야기에 바탕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트랍 소령 정도 외에는 대부분 독일군에 복무했다. 상술한 잘츠부르크 전우회만 하더라도 절대다수가 2차 대전 간 재입대하는 바람에 대전기에는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제국 해군의 유산을 오스트리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도 사용했다. 그 역시 한때는 빈에 살던 오스트리아인이었으므로, 전성기의 강력했던 오스트리아 해군의 위상이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주 잘 알았다. 때문에 그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몇 달 뒤 진수된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에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해군 영웅인 테게토프 제독의 이름을 붙이려 했다. 이는 동시에 최후의 오스트리아 주력함인 테게토프급 전함의 계보를 잇는 것이기도 했다. 대독일주의에 기반한 노골적인 민족주의 프로파간다였던 셈이다.

그러나 테게토프라는 이름은 동맹이었던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자극할 수 있어 재검토되었다. 테게토프 제독이 이뤄냈던 리사 해전은 독일계 국가의 해전사상 가장 값진 승리로 꼽히지만, 반대로 이탈리아에게는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에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그 패배가 지닌 무게감 역시 적지 않았다. 특히 민족주의를 표방한 파시스트당 정권 하에서는 더했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이탈리아가 묵인했기에 가능했던 사건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인들의 민심을 얻겠답시고 이탈리아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만큼 멍청한 외교적 악수는 없었다.

결국 3번함의 함명으로는 보다 이전 시대의 인물인 사부아 공자 외젠(독어명 "프린츠 오이겐")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군사 영웅이었던데다 이는 테게토프급 3번함 SMS 프린츠 오이겐의 함명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기에, 오스트리아인들 역시 새 군함의 명칭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또한 외젠은 합스부르크를 섬겼을지언정 당시 이탈리아의 군주 가문이었던 사보이아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으므로 이탈리아가 함명을 문제삼을 이유도 없었다.[78]


▲ 프린츠 오이겐의 진수식 기록영상. 나치 독일의 국기와 헝가리의 국기가 나란히 걸린 가운데 호르티 섭정의 부인 푸르글리 머그돌너가 샴페인 병을 깨고 있다.

프린츠 오이겐은 또다른 동맹이었던 헝가리 왕국의 환심을 사는 데에도 쓰였다. 제국 해군 최후의 함대사령관이었던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가 마침 옛 SMS 프린츠 오이겐의 함장을 맡았던 적이 있던 것이다. 이 인연으로 호르티 섭정 내외는 히틀러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하여 새로운 프린츠 오이겐의 진수식에 참여했다. 와인병을 깬 것 역시 호르티의 부인이었던 푸르글리 머그돌너였다. 그리고 이때의 정상회담에서 히틀러는 호르티에게 자신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계획을 설명하며 헝가리의 동참을 요구했다. 호르티 역시 이에 호응하였고, 몇 달 뒤 벌어진 뮌헨 회담에서 헝가리는 슬로바키아 남부를 강탈한다.

물론 이들의 운명은 비참했다. 독일을 위해 싸우던 수많은 오스트리아인 수병들은 대서양 전투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음으로써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히틀러를 선택한 대가를 치렀다. 호르티 섭정이 이끄는 헝가리는 독일의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협조하다[79] 결국 소련군에게 점령당하고 공산화되는 운명을 맞았다. 제국 해군의 직접적인 후신인 헝가리 다뉴브 소함대는 독일의 석유 보급선을 지키다 영미 폭격기들의 집중적인 타격을 받았고, 결국 독일군과 함께 린츠까지 도망쳐 그곳에서 종전을 맞았다. 한때 전쟁영웅이었던 호르티 섭정은 결국 포르투갈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객사했다. 마지막으로, 제국 해군의 계보를 이은 나치 독일의 프린츠 오이겐 함은 전후 미군이 인수하여 일본의 나가토와 함께 나란히 비키니 섬 핵실험장으로 끌고 갔다. 프린츠 오이겐은 거기서 크로스로드 작전의 실험 대상이 되어 핵폭탄을 맞고 침몰했다.

반대로 히틀러를 거부하고 독립국 오스트리아에 대해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트랍 소령의 이야기는 현재도 여전히 사랑받으며,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제국 해군의 진정한 영웅이자 대표적인 오스트리아의 애국자로 기억되고 있다.

6. 유산

오스트리아 해군 관련 유물들은 구 제국령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시내 중심의 프라터슈테른역 앞에는 테게토프 제독의 거대한 동상이 여전히 서 있다. 군사사박물관(Heeresgeschichtliches Museum)에서는 상설 전시실 중 하나인 해군홀(Marinesaal)에서 오스트리아 해군 관련 소장품들을 전시한다.

하지만 가장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는 곳은 단연 제국의 해안을 통째로 차지하던 크로아티아다. 그 중에서도 해군의 명실상부한 중심지였던 풀라 시에는 함대사령부,[80] 해군공창, 해군 카지노, 그리고 시를 둘러싼 방어 요새들이나 해군묘지, 해군 천문대[81] 등의 유적들이 시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대부분 시 중심부 구시가지 일대에 모여 있다. 그 외 또다른 주요 항구인 트리에스테리예카에도 해군사관학교를 비롯한 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탈리아 베네치아 병기창 근처에 있는 해군박물관 등에서도 오스트리아 해군과 관련한 전시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STT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해군의 조선소 대부분을 물려받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연방 붕괴 직전인 1987년에 유럽 1위, 세계 3위의 수주물량을 자랑했다.#[82] 주로 민수용 선박들을 건조했고, 주 고객은 친밀한 서구권 국가들이었다. 현재도 조선업은 크로아티아의 주력 산업이지만 한국중국 등의 후발주자에 밀려 과거의 위상은 잃어버린 상태다.

막상 제국 해군의 사생아라 할 수 있는 유고 연방 해군은 이 거대한 조선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잠수함미사일 고속정 등으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해군을 보유했다. 오로지 함포만이 주무기였던 제국 시대와 달리 냉전 시대에는 미사일로 대표되는 군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그 정도 전력만으로도 오트란토 해협의 입구를 봉쇄하는 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유고는 1950년대부터 잠수함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이는 다시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함대에도 영향을 주었다.[83]

6.1. 풀라 요새 복합체

파일:Fort_Kaiser_Franz-9.jpg
▲ 풀라 앞바다의 스베티 안드리야 섬에 위치한 카이저 프란츠 1세 요새(Küstenfort Kaiser Franz I.)의 폐허.[84]

제국 시절 유럽에서 가장 고도로 요새화된 도시 중 하나였던 풀라 시의 해안포 진지들은 오늘날까지도 잘 남아 있다. 1830년대부터 몬테 그로소 요새(Küstenfort Monte Grosso)를 시작으로 제국이 망하는 그때까지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때문에 각 요새들의 건설 시기에 따라 건축 양식이 달라진다.[85] 90mm부터 최대 420mm의[86] 각종 해안포와 성채 및 지하 시설들로 구성되었던 이 방어 시스템은 도시 전체를 원형으로 겹겹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구성되며, 근교 지역까지 합쳐 16개 구획에 총 28개소가 존재한다. 이 요새들은 이탈리아 해군이 정면돌파를 회피하고 특수부대를 통한 타격 전술을 적극 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은 요새와 포대들이 존재했으나[87] 1930년대에 이탈리아가 대부분 해체했다. 이후 유고 연방의 군사시설로 쓰이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군이 점거하여 꽤나 근래인 2000년대 중반까지 사용했다. 용도를 전용하여 아직까지 쓰이는 곳도 있으나, 관리 자금 부족이나 여전히 군 관할 구역에 있다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은 방치 상태다. 가령 도시 서부의 해군항공대 본부 건물은 반쯤 무너진 채 숲에 묻혀 버렸고, 비행청소년들이 드나들며 낙서를 하는 폐허로 변했다. 일부 지역민들은 이 정도 대규모의 역사 유적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으나 딱히 뾰족한 수는 없다.

이 중 핵심은 구시가지 한가운데 고대 로마 극장의 바로 위에 위치한 베네치아 시대의 보방식 요새시타델(Kaštel)이다. 그 아래로는 십자 형태로 뻗은 제로슈트라세(Zerostrasse)라는 지하 터널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곳은 본래 1차 대전 당시 폭격 피해를 막기 위한 방공호로 건설되었고, 이탈리아 점령기에도 확충되었다. 냉전 시대에는 핵전쟁에 대비해 5만 명을 수용 가능한 방공호로 개조되기도 했다. 시타델은 현재 이스트리아 해양 역사박물관로 개조되어 제국 시절을 포함한 이스트리아 지방의 해양사 전반에 대해 전시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요새들에 대한 관리를 맡고 있기도 하다. 제로슈트라세 역시 해양박물관을 통해 방문할 수 있다. 이들은 풀라의 대표적인 관광 스폿 중 하나다.

또다른 요새들 몇 가지를 꼽자면 우선 도시 남쪽의 가장 거대한 요새였던 베루델라 요새(Küstenfort Verudela)를 들 수 있다. 가장 잘 보존된 요새로 손꼽히며, 현재 리조트와 풀라 아쿠아리움이 위치한다. 2023년부터는 노비그라드의 황립 및 왕립 해군 박물관(K.u.K. Marinemuseum)으로부터 상당수의 소장품들을 이전받아 지하 벙커에서 특별전을 진행한다. 한편 부르기뇽 요새(Küstenfort Bourguignon)는 1970년대 이래로 오랜 기간 동안 레이브 파티가 열리는 일렉트로니카 클럽으로 쓰였고,[88]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휴양지 중 하나인 말리 브리유니 섬에 있는 브리오니 미노르 요새(Küstenfort Brioni Minor)는 오늘날까지도 하계 극장으로 사용된다.

시 외곽 지역의 요새들은 대부분 버려졌다. 이런 곳들은 외부에서 둘러보는 정도는 제지하지 않지만, 내부는 아직도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거나[89] 미확인된 구역이 많아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지역 치안본부와 군에서 접근 자체를 봉쇄하거나 사유지에 들어가 있어 외부인이 접근하기 힘든 곳도 몇 군데 있다. 하지만 이런 장소들은 특히 폐허 동호인들에게 인기를 끈다. 몰락한 제국이 남긴 거대한 군사 시설의 폐허 유적이라는 점에서 구소련의 버려진 시설들처럼 탐험가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요소가 많기 때문. 무질 요새(Küstenfort Mussil)[90] 같이 해안에 접근한 곳들은 경치가 좋아서, 산 다니엘레 요새(Küstenfort San Daniele)와 같이 깊은 숲 속에 위치한 곳들은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91] 많은 이들이 종종 감시를 피해 내부를 탐험한다.

6.2. 오스트리아 해군 협회


해군 협회(Österreichische Marineverband)는 한때 오스트리아 해군 건함정책과 자금 조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함대 협회(Ӧstereichisches Flottenverein)의 직접적인 후신이다. 2024년 현재도 운영 중이다.

제국 멸망 후 오스트리아가 해안선을 상실하고 내륙국이 되면서 기존의 함대 협회 역시 존재 의의를 잃고 유명무실해졌다. 협회 이름 역시 함대 협회에서 해운 협회로, 그리고 다시 국제경제협회로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전직 오스트리아 해군 장병들을 중심으로 전우회들이 결성되면서 협회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된다. 상술한 잘츠부르크 전우회가 대표적인 예시다.

국제경제협회는 전우회들을 서서히 편입하면서[92] 오스트리아 해군 협회로 재탄생했다. 목적은 옛 해군의 기억과 전통을 잇고 해군 장병들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었다. 가령 1925년에 안톤 하우스 상장의 유해를 이탈리아가 점령한 풀라의 해군묘지에서 빈의 휘텔도르프 공동묘지로 이장한 것 역시 이들이다.[93]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나치 독일의 해군협회에 편입되어 잠시 사라졌다가 종전 후 재건되었다. 2001년부터는 오스트리아 연방군과 협력하는 우산조직의 지위를 얻어내었다. 약사

2007년 당시 회원은 약 850명이었다. 현재도 주로 구 제국 해군의 전통을 기억하는 행사를 주관하며 관련 유적과 정보들을 정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구자들 말고도 오스트리아 연방군이 다뉴브 강에서 운영하던 경비정에서 복무했던 장병들 역시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경비정 니더외스터라이히호가 2006년에 퇴역한 후에는 그 관리를 맡고 있기도 하다. 종종 연방군 인사들을 초대해 학술 세미나도 연다. 다만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대외적인 활동이 아주 뜸해진 상태다. 사무실은 오스트리아 에 있으며 현 회장은 클라우스 바익셀바움(Klaus Weichselbaum) 박사다.

6.3. 남아있는 함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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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되어 항해하는 SMS 라이타 함. 함미에 오헝 제국의 해군기를 달고 있다. #

2023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오헝 제국 해군 함선은 단 세 척이다. 우선 모니터함 SMS 라이타(SMS Leitha/Lajta) 함은 1872년 건조되었으며 다뉴브 전단 소속으로 쓰였다. 제국 멸망 후에는 헝가리 적군에 편입되어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전쟁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군을 저지했으나 곧 수병반란을 일으켜 헝가리 보수파의 부다페스트 탈환에 기여했다. 이후 무장을 탈거하고 70년 가까이 광물운반선으로 쓰이다 공산정권 붕괴 후인 1992년에 스위스에 팔렸다. 하지만 이 배의 역사성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반환되어, 복원을 거쳐 박물관함으로 재탄생했다.

라이타 함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모니터함이자 오늘날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기를 달고 있는 유일한 함선이기도 하다. 내부 역시 제국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헝가리 소유이며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 언털 요제프 부두(Antall József Quay)에 정박해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17시 사이에 관람 가능하다.공식 홈페이지

한편 테메스급 모니터함 SMS 보드로그(SMS Bodrog)함은 1904년 건조되어 다뉴브 전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베오그라드를 포격하며 1차 대전의 첫 포성을 울린 함선이기도 한데, 제국 멸망 후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에 편입되어 사바(Sava) 함으로 개칭되어 1952년까지 쓰였다. 세르비아 소유이며, 한동안 폐선으로 방치되다가 수리되었다. 2021년 수리가 완료되었고, 베오그라드 해방 기념 행사에서 대중에 공개되었다. 현재는 베오그라드의 브랑코 다리 근처 사바 강변에 정박해 있다. 세르비아의 적으로서 끔찍했던 1차 대전의 포문을 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드로그 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일원이었던 사바 함이라는 상반된 행적에서 비롯된 역사성을 인정받아 박물관함으로 쓰이고 있다.

황실 요트였던 SMS 달마트(SMS Dalmat)는 크로아티아에 남아 있다. 1896년에 원수이자 해군 감찰관이었던 카를 슈테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이 주문해 건조했다. 이후 황실 소유가 되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태우고 사라예보로 향했던 함선 역시 이 배다. 오헝 제국 멸망 이후에는 이탈리아로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2차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소유가 되었다. 유고 연방의 멸망 후에는 개인 소유가 되었지만 관리 부실로 인해 한동안 뻘밭에 처박혀 있었다. 크로아티아 국립 해양박물관이 복원을 시도하고 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다. 현재는 녹이 슬 대로 슬고 반쯤 침몰한 처참한 몰골로 카슈텔라 일대에 계류된 상태다.

6.4. 해군도서관 장서와 해군 카지노


▲ 풀라 해군 카지노에서 소장 중인 오스트리아 해군도서관 장서들의 현재 모습

1차 대전 종전 이후, 오스트리아 해군도서관은 풀라를 점령한 이탈리아 왕국의 소유가 되어 이탈리아 왕립 해군 도서관(Biblioteca del Comando Militare Marittimo)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에 북이탈리아를 점령한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해군의 도서관을 통째로 약탈할 때 오스트리아 해군의 장서들 역시 체코로 가져갔다. 이들은 종전 후인 1950년에야 다시 오스트리아로 반환된다. 한동안 에 있는 국가기록보관소(Österreichisches Staatsarchiv)의 전쟁기록보관소(Kriegsarchiv)에 보관되던 이 서적들 중 약 2만 권은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협의 끝에 1975년에 다시 풀라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가 해군 장서를 내어준 데에는 양국 친선 도모의 목적이 있었다.

현재는 크로아티아의 풀라 대학교 도서관이 관리하며,[94] 대부분의 장서들은 1913년에 지어진 풀라 해군 카지노(Mornarički kasino u Puli)[95] 1층에 소장되어 있다. 해군 카지노는 오스트리아 해군 장교들의 사교와 오락, 각종 학술 회의와 연회 등의 행사가 열리는 일종의 회관이자 클럽이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는 이스트리아 지방 행정부 건물로 쓰였고, 오늘날에는 도서 박람회 등이 열린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자체가 매우 아름다워 풀라의 주요 관광 명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96] 그 외 크로아티아로 가지 않은 약 1만 권의 장서들은 여전히 오스트리아 빈의 국가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다. 풀라 대학교 도서관 바로가기

7. 주요 인물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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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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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 윗 첨자 * : 지휘권을 동반하지 않음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장군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


더 자세한 정보는 1918년 군적부 참조: #

8. 군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해군의 군악대 역시 베네치아의 군악대에서 시작한다. 1850년대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사령관이던 시절 많은 지원을 받았고, 체코인 작곡가이자 제국군 군악대장이던 바츨라프 자베르탈(Václav Hugo Zavrtal)의 지도 하에 성장했다. # 그 외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는 육군 군악대 소속이었으나 해군 시설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 제독기 아래에서(Unter der Admiralsflagge)

    체코 작곡가 율리우스 푸치크가 작곡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제자이기도 한 푸치크는 제국 육군 연대들의 군악대 지휘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제국군을 위한 많은 군가와 행진곡들을 만들었다.

9. 계급

육군과 달리, 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은 없었다. 원수에 해당하는 독일의 대제독(Großadmiral)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대제독(Großadmiral)은 육군의 상급대장(Generaloberst)에 상응한다. 준장 계급 역시 없었다.

한편 준사관과 부사관 및 병의 경우 병과에 따라서 계급의 명칭과 체계가 매우 상이하다.

10. 기타

  •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풀라에 머무르며 벌리츠 어학원에서 오스트리아 해군 장교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다만 조이스는 풀라 시를 "바다의 시베리아"라고 부르며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일했던 곳은 풀라 해군공창 근처로 주변이 칙칙한 공장과 해군 장교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풀라 시는 조이스의 흔적을 관광상품으로 잘 이용하고 있다.
  • 수병들에 대한 처우는 타국 대비 좀 열악한 편이었는지, 전함 내에 가혹한 환경의 영창과 교수대 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918년 카타로 수병 봉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1912년에는 신생 중화민국 북양정부에서 청일전쟁과 뒤이은 혼란기로 인해 무너진 중국 해군의 재건을 위해 오스트리아 측에 12척의 구축함을 주문했다. 후사르급 구축함의 설계를 따른 첫번째 함선은 1913년에 완성되어 룽퇀(龍湍) 이라는 함명을 부여받았으나, 이듬해 벌어진 전쟁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압류하여 SMS 바라스디너(Waradiner)란 이름으로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 오스트리아 조폐국은 때때로 구 제국 해군과 관련된 기념주화를 제작한다. 2005년에는 장갑순양함 장크트 게오르크함과 풀라 해군공창을, 이듬해인 2006년에는 전함 비리부스 우니티스함이 새겨진 20유로 은화를 판매했다.
  • 오스트리아 해군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인디애나폴리스 대학교의 로렌스 손다우스(Lawrence Sondhaus) 교수가 있다. 그는 199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양정책 1867-1918(The naval policy of Austria-Hungary, 1867-1918)>를, 그리고 1989년에 <합스부르크 제국과 바다: 1797년에서 1866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해양정책(The Habsburg Empire and the Sea: Austrian Naval Policy, 1797-1866)>를 저술한 바 있다.

10.1. 매체에서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시대적 배경이 나치 병합을 앞둔 1930년대이므로 해군이 등장하진 않으나, 전직 오헝 제국 해군 유보트 함장 출신의 트라프 소령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서 트라프 소령이 가진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심과 해군 유보트 함장이었던 그의 재능을 탐내는 나치의 대립이 영화 내부의 주요 갈등 요소 중 하나다.
  • 소설 '빙하와 어둠의 공포'
    상술한 북극 탐험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각색한 소설이다.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작.


[겸임.] [2] 카를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4남. 형인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은 육군원수로서 전군 최고사령관 겸 제국군 총감찰관이었으며 동생 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역시 훗날 제국 육군 원수가 된다. 자식으로는 폴란드 독립운동가 카를 알브레히트 대공과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 빌헬름 프란츠 대공이 있다.[3] 최종 계급 상급대장[4] 구축함들은 전부 후사르급들이고, 중앙 열은 선두의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 함을 필두로 라데츠키급과 에르츠헤르초그 카를급 전함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우열은 합스부르크급 전함들과 모나르크급 해방전함들이다.[5] 건조 중이었던 테게토프급 4번함 센트 이슈트반함 제외.[6] 출처는 P.G. 할펀의 "제1차 세계대전의 해군사"[7] 일본의 경우 1914년 8월 시점에서 드레드노트급 보유 숫자는 오스트리아와 같았다. 하지만 설계상의 문제가 많은 카와치급 전함 2척, 반대로 오스트리아가 가지지 못한 최신형 14인치급의 공고급 순양전함 1척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전력의 단순 우열 비교가 힘들다. 다만 1915년이 되면서부터 일본이 오스트리아를 역전해버린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스트리아가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을 취소해버린 반면 일본은 공고급 순양전함들을 포함한 차기 전함들을 속속 내놓았기 때문이다.[8] 사실 1910년대 제국 해군의 대확장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항상 이탈리아가 보다 우세한 전력을 갖춘 편이었다. 이는 반도의 해양국가였던 이탈리아의 해군 예산과 함선 건조 역량이 육군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그것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9] 라스페치아 해군공창과 타란토 해군공창, 그리고 아우구스타 해군공창.[10] 안살도 조선소, 오데로 조선소, 오를란도 조선소 등.[11] 빌헬름스하펜, 킬, 그리고 단치히 해군공창. 다만 이 중 주력함을 건조하던 곳은 빌헬름스하펜 뿐이다.[12] 의 게르마니아 베르프트 사 조선소와 호발츠베르케 사, 슈테틴의 불칸 사 조선소, 단치히와 엘블롱크의 쉬샤우 베르케 사 조선소, 브레멘의 AG 베저 사, 함부르크의 블룸 운트 포스 사 등. 이들 모두 주력함 건조 능력이 있었다.[13] 다만 1번함 SMS 후사르만이 스코틀랜드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자매함들은 전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제작했다.[14] 1917년 풀라 항에서 촬영되었다.[15] 독일어 단어 Linienschiff는 전열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며 전열함이 철갑함으로, 다시 전함으로 진화함에 따라 그들을 전부 포괄하는 '주력함'이라는 의미도 내포한다.[16] 전단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Geschwader' 내지는 'Eskader'이다. 이마저도 Eskader는 사어에 가깝다.[17] 우측부터 순서대로 SMS 투룰, SMS 바라스디너, SMS 빌트팡 함이다.[18]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당시에는 일리리아어라 불리던 세르보크로아트어 4개를 가르쳤다.[19] 리예카 대학교 해양학부는 제국 멸망 후 30년 가까이 지난 1949년에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부의 주도로 세워졌기에, 제국 해군사관학교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다만 해군사관학교는 현 크로아티아 땅의 첫 해양학 연구기관인데다 여기서 길러낸 이들이 리예카 해양학과 교수진들을 구성했으므로 역사적인 계승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20] 크로아티아의 대문호인 블라디미르 나조르의 1908년 작 소설 '벨리 요제(Veli Jože)'에서 따왔다. 본래 벨리 요제는 이스트리아 지방 일대에서 전승되던 민담 속 거인의 이름인데, 나조르는 이를 자유를 위해 외세의 지배에 맞서 투쟁하는 크로아티아인들을 빗댄 존재로 각색했다. 대표적인 크로아티아 문학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21] 전쟁기록보관소는 18세기 말에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원수가 주도해서 세웠다. 당시에는 황립 전쟁위원회(Hofkriegsrat)의 산하였다가 제국 전쟁성의 하위 기관이 된다. 1984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국가기록보관소의 산하기관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전쟁사 자료들을 전부 관리하고 있다.[22] 전쟁도서관은 1808년에 전쟁기록보관소의 하위 기관으로 독립했다. 요제프 라데츠키 원수가 설립을 지원했다.[23] 기원전 2년 경에 지어진,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콜로세움인 풀라 아레나(Pulska Arena), 그리고 악티움 해전의 기념물인 세르기우스 개선문(Slavoluk Sergijevaca)과 함께 풀라에 남아 있는 주요 로마 유적 중 하나이자 관광 스팟이다. 셋 다 구시가지에 있다.[24] 원래 양치기가 소유하고 있던 목장 섬이었다. 당시에는 독일어로 올리벤 섬(Oliveninsel)이라 불렸는데, 지역 방언인 울랴니크나 독일어 올리벤이나 둘 다 올리브라는 뜻이다. 섬 안에 올리브 나무가 자란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에도 단 한 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기념수로 남아있고, 여전히 열매를 맺고 있다.[25] 당대 오스트리아 최고의 함선 설계자로, 모나르크급부터 테게토프급까지 모든 종류의 전함을 설계했다. 장갑순양함 장크트 게오르크와 젠타 함 역시 그의 작품이다. 1907년 예편 후에는 STT에 입사하여 그곳에서 커리어를 쌓았다.[26] 함선 건조에 아크 용접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 크론프린츠 에르츠헤르초그 루돌프함 등의 순양함을 디자인했고, 라데츠키급 전함의 건조에도 관여했다.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 역시 그의 설계다.[27] 다만 멸망 당시 베네치아 해군은 이미 과거의 영광을 잃고 유명무실한 상황이기는 했다.[28]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 1104년 수립되어 거의 1천 년간 운영했던 조선소이자 조병창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패권 장악을 가능하게 했던 대표적인 시설이다. 운하를 이용한 조립식 대량 생산 공정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근대에 컨베이어 벨트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여기서만 가능했던 생산 방식이다. 현대 들어서는 그 자체가 역사 유적으로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해군 박물관도 이곳에 있으며 동시에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전시장으로도 쓰인다.[29] 얄궂게도 사르데냐 왕국 해군은 빈 회의로 사르데냐 왕국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라이벌이었던 옛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를 병합한 후 제네바 공화국 해군 인프라를 이용해 구축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베네치아-제노바의 라이벌리가 오스트리아-사르데냐로 계속 이어진 셈이다.[30] 베네치아 일대에서 쓰이는 이탈리아어 방언.[31]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스웨덴이 주도하는 연합왕국을 구성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노르웨이군 역시 스웨덴군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고 존속했다.[32] 풀라 해군공창은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 풀라 시와 함께 넘어간다. 2차 대전 이후에는 공산 유고슬라비아의 회사가 되었다가 1990년대의 유고 내전 이후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가져갔다. 현재는 민영화되어 울랴니크(Uljanik)라는 이름의 주식회사로 운영 중이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조선업체 중 하나다.[33] 영국 기준 2급함[34] 오트란토 해협에서의 우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남이탈리아가 필수적이었다. 과거 동로마 제국의 봉신국이던 시절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례가 그 지정학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 동로마가 남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한 베네치아의 해양 출구는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고, 때문에 아무리 베네치아가 동로마 본토와 거리가 멀다 한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위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의 독립은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이 남이탈리아의 통제권을 상실한 후에야 이루어졌다.[35] 왼쪽의 불타는 함선은 오스트리아 기함 SMS 슈바르첸베르크다.[36] 얄궂게도 달레루프 중장 역시 이 전쟁을 겪었다. 그것도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말이다. 원래 그는 군사고문 임무를 마치고 덴마크 해군에 복귀하면 소장 자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돌아가자 덴마크 정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연금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연금수령 자격조차 박탈해버렸다. 격노한 달레루프는 곧 퇴역했고 덴마크 해군에서 받은 훈장들을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1861년에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스승이었던 그를 기술고문으로 다시 초청하자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고작 3년 뒤인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졸지에 조국과 싸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불만은 있을지언정 반역자는 아니었던 그는 이로 인해 심리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이도 오스트리아는 그를 일선에 세우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 시력까지 잃어버린 그는 이듬해인 1865년에 오스트리아군에서도 퇴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1872년에 사망했다.[37] 이 반격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 중에는 달레루프를 따라왔던 스웨덴 해군 출신 장교인 에릭 아프 클린트 대령도 있었다. 클린트 대령은 달레루프가 떠나고 나서도 오스트리아에 남아 커리어를 쌓았는데, 이 전투에서 SMS 노바라 함의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사망했다.[38] 동시에 이탈리아에 대한 조롱으로도 자주 언급된다.[39]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보오전쟁 당시 이미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의 영토였다.[40] 19세기 중반 후고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백작이 첼트베크 지역에 세운 제철소다. 1881년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의 다른 군소 제철업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알프스 광업조합(ÖAMG)을 결성했다. ÖAMG는 오늘날에도 운영 중인데, 현재는 오스트리아 대표 제철업체이자 포스코와 협력해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도 한 푀스트알피네(Voestalpine) 사의 자회사이다.[41] 비코비체 제철소는 유대계 대부호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1828년 설립했다. 1870년대에는 장기불황으로 인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으나 새 경영자로 들어온 파울 쿠펠비저(Paul Kupelwieser)의 지도 하에 경영을 쇄신하여 중동부 유럽의 가장 거대한 제철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미 여러 국가의 제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쿠펠비저는 벨기에의 신식 제철 설비를 들여와 생산 품질과 양을 일신했다. 제국 멸망 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도 중요한 제철소로 남았으며 공산정권 시절에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1998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현재는 체코의 주요 산업 유적으로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42] 정확히는 350mm.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에 사용될 예정이었고 실제로도 제작되었으나 해당 함급이 건조가 취소되며 탑재되지는 못했다.[43] 이름은 국영 기업 같지만 민간 업체였다. 패전 이후 이탈리아로 넘어갔고 1929년에 STT사에 합병되었다. 현재는 STT가 핀칸티에리에 합병되면서 그 산하 자회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에는 군함을 건조하지는 않고, 여객용 크루즈선이 주력 상품이다. 지금도 항해 중인 영국 큐나드 라인의 크루즈선 MS 퀸 엘리자베스가 대표적인 배다. #[44] 부다 시와 페스트 시가 합쳐져 부다페스트가 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45] 1차 대전 발발 당시 헝가리 총리인 티서 이슈트반의 아버지다.[46] 현대적인 어뢰의 개발자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제국 해군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의 손녀사위가 바로 잠수함 에이스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소령이다.[47]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이탈리아계였다. 17세기 황제군의 기반을 다진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원수의 먼 후손이다.[48] 32문 프리깃으로, 1850년에 베네치아 병기창에서 건조되었다. 건조 당시에는 그저 범선형 목제 프리깃이었으나 훗날 증기 기관을 달아 자체 추진이 가능하도록 개조되었다. 다만 노바라 원정 당시에는 엔진이 없었다. 막시밀리아노 1세와 인연이 깊은 함선이었는데, 당장 그가 적극 추진한 노바라 원정대의 기함이었다. 또한 그가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멕시코로 타고 간 함선이자 처형된 그의 유해가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때 타고 온 함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노바라 함이 1899년 해체된 후 남은 목재 부품들 중 일부는 황실 묘지가 있는 카푸친 교회로 보내져, 막시밀리아노 1세의 무덤 앞 기도실의 의자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외 1866년의 리사 해전에도 참전한 함선이기도 하다. 상술한 노르웨이군 출신의 에릭 아프 클린트 대령이 함장을 맡다가 전사한 바로 그 함선이다.[49] 조선의 존재는 당대 독일어권에도 당연히 알려져 있었다. 하멜 표류기는 독일어권에서도 널리 읽혔고, 대표적인 독일 바로크 문학인 그림멜스하우젠의 소설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에서도 조선과 조선 왕이 잠시 등장한다. 다만 존재한다는 것만 인식했을 뿐 그 외의 많은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50] 체코계로, 대표적인 오스트리아 중국학자이자 유럽 내 일본학의 시조격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유럽에서의 일본 만요슈 연구는 피츠마이어가 최초로 시작했다. 한국 관련해서는 정유재란을 연구한 "1597년 일본의 한국 원정(Der Feldzug der Japaner gegen Corea im Jahre 1597)"을 1875년에 출판했는데, 당대 일본의 한국 관련 개괄서인 조선물어(朝鮮物語)에 실린 내용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서양에 한국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윌리엄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조선"의 임진왜란 부분을 서술할 때 참고한 서적이기도 하다.[51] 다만 영국 식민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테레사 섬이라고 부른다.[52] 1835년에 메드허스트가 출판한 구미권 최초의 한국어 어휘사전이다. 천자문(千字文)과 조선 정부의 외국어 교육기관인 사역원에서 제작한 일본어 교습서인 왜어유해(倭語類解)를 기본 텍스트로 한다. 다만 메드허스트 본인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 그래도 구한말 서양인들의 한국어 학습과 연구의 시초가 된 책이라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53] 당시 원정대는 테게토프호가 좌초한 이래로 이미 2번의 겨울을 보낸 상태였다. 1874년 5월, 세 번째 겨울이 오기 전에 보급품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 파이아와 바이프레히트는 배를 버리기로 결정했고, 원정대를 이끌고 유럽을 향한 도보 행군을 시작했다. 이때 대원들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절대 다시는 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이다.[54] 파이아 대위는 원정에서 돌아오고 몇 년 지난 1870년대 후반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해 말년에는 화가로도 활동했다. 유화를 그릴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작품은 현재 빈의 군사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55] 북극 원정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다. 정확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원정(Österreichisch-Ungarische Nordpolarexpedition)이라고 부르거나, 원정대장 두 명의 이름에서 따온 '파이아-바이프레히트 원정(Payer-Weyprecht-Expedition)'이라고도 부른다.[56] 한국에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57]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급 방호순양함 2번함으로, 풀라 해군공창에서 건조했다. 약 4,000톤에 달하며 9.4인치 단장포 2문을 주력으로 무장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방호순양함들이었던데다 청년학파 사상을 따라 건조된 함급이었기에 건조 직후부터 빠르게 구식화되었다. 이 때문에 수병들과 사관들이 붙여준 별명은 도입을 추진한 최고사령관 슈테르네크 제독의 이름에서 따온 "슈테르네크의 정어리 깡통" 이었다. 동아시아로 보내진 것도 실용성을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칭다오 전투에서 변변찮은 전과 하나 올리지 못한 채 침몰했다. 함명은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에게서 따왔다.[58] 나우틸루스함의 아시아 탐사는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지난 2020년에야 연구서가 출판되었다.[59] 한자 이름은 백탁안(柏卓安).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1893년부터 1905년까지 조선 해관 총세무사 및 대한제국 탁지부 재정고문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당대 조선을 속국화하려던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위안스카이의 반강제적인 추천으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독단적인 재정운용 및 일본과의 결탁으로 한국의 재정 건전성을 완전히 파탄냈다. 당연히 고종 황제 및 대한제국 관료들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브라운을 해고하려 했고, 러시아는 키릴 알렉세예프를 새로 고문직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는 위 프랑스 공사의 보고서에서 드러나는 영국 함대의 무력시위로 실패했다. 당시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 정부는 맥리비 브라운이 해고되면 한국 내의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에 니시-로젠 협정이 맺어진다.[60] 당시 몬테쿠콜리는 소장이었다. 그가 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쟁성 해군부장직과 해군최고사령관직에 오르는 것은, 의화단 전쟁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04년의 일이다.[61] 당시 대령으로, 순양함 SMS 마리아 테레지아의 함장이었다.[62] 당시 사관생도.[63] 슬로베니아인이다.[64] 잠수함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기차에 실어 지중해까지 옮길 수 있었다.[65] 트랍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함장으로 부임할 당시 U-5 함은 정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관과 수병들이 사실상 알아서 관리하는 상황이었다고 전한다. 덱건은 없었고, 내부 공간은 지나치게 좁았으며 곳곳에서 엔진의 배기 가스가 샜다. 때문에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병들은 '다 먹은 정어리 깡통으로도 카뷰레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정비에 도가 터 있었다.[66] 훗날 그는 지중해로 파견 온 독일 제국 해군 U-21함과 만나 서로의 배를 둘러볼 기회를 얻었는데, 잘 관리되고 거대한 독일 해군의 잠수함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반대로 트랍의 초대로 U-5함을 방문한 U-21함 함장 오토 헤르싱(Otto Hersing) 중위는 함선을 둘러보고는 그 열악한 환경에 경악하여 "저라면 이 관짝을 타는 것은 거부하겠습니다"라는 소감을 남겼다.[67] 최초로 항공기가 함선을 '공격'한 케이스는 아니다. 이건 일본 해군이 최초이며 2년 전인 칭다오 전투에서 시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공격받은 함선 역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선이었던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다.[68] 크로아티아계였다.[69] 현 몬테네그로 코토르.[70] 오랜 기간 총력전이 유지되며 피로가 누적되고 있음에도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제국의 인종 문제는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러시아 혁명의 소식과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내세운 14개조 요구의 소식이 오스트리아로도 날아들어오자 오헝 제국의 국민들은 1918년 1월에 종전과 더 나은 삶의 보장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카타로 해군 봉기도 이 영향을 받았다.[71] 그럼에도 오트란토 해협 해전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녜고반은 능력 자체는 인정받은 인물이다. 해임 이후 퇴역하였으나 제국 멸망 직전 예비역 상장으로 진급했다.[72] SMS 빈과 SMS 센트 이슈트반 모두 루이지 리조(Luigi Rizzo) 중위가 지휘하는 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전함 두 척을 격침한 리조 중위는 이로 인해 '격침자'라는 별명과 함께 온갖 훈장과 귀족 작위를 포함한 영예를 수여받았다. 훗날 해군 소장까지 진급하여 2차 대전 당시에도 복무했고, 도중에 독일군에 잡혀 수용소에서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해군사상 대표적인 영웅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해군은 그를 기리고 있으며, 카를로 베르가미니급 호위함 6번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73] 센트 이슈트반은 헝가리 업체인 건즈 다누비우스가 건조했는데, 건즈 다누비우스가 전함 건조에 미숙했기에 자매함들에 비해 잔고장이 많았고 엔진 또한 그랬다. 선두함들을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 항진을 시작하자 엔진이 버티지 못하고 평소보다 더 많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이것이 이탈리아군에 포착된 것이다.[74] 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 / Држава Словенаца, Хрвата и Срба(세르보크로아트어) Država Slovencev, Hrvatov in Srbov(슬로베니아어). 1918년 10월 29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국제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수립 33일 후인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 왕국에 합류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수립되면서 멸망했다.[75] 다만 당시 이탈리아는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소유권이 신생국 측으로 넘어갔음을 모르고 있었다.[76] 이탈리아어로는 폴라[77] 이들은 여전히 이탈리아 소유이며 그 중 STT는 현재 핀칸티에리 산하에서 크루즈 여객선들을 만들고 있다.[78] 당장 이탈리아 왕립 해군마저도 외젠의 이름을 딴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함을 진수하고 있었다.[79] 호르티는 본격적인 학살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유대인들의 권리를 다수 박탈하는 반유대주의적 정책을 다수 추진했다.[80] 성모 승천 성당의 바로 옆에 바다를 마주보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크로아티아 해군이 사용하다 현재는 세관으로 쓰고 있다.[81] 수로 연구소의 부속건물로, 연구소 건물 자체는 1944년의 연합군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천문대 건물만이 몬테자로 공원에 남아 있다.[82] 풀라의 해군공창은 울랴니크 사로, 리예카의 건즈-다누비우스 조선소는 티토의 유고 해방을 기념하여 5월 3일 조선소로 개칭되었다. 이들은 제국 멸망 후인 1922년에 세워진 스플리트의 브로도스플리트 조선소와 함께 유고 연방의 조선업을 견인했다.[83] 가령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은 브로도스플리트 조선소에서 만든 유고 연방해군의 우나급 잠수정 설계도를 바탕으로 건조한 것이다. 지난 2010년 천안함을 폭침시켰던 연어급 잠수정도 유고급의 개량형이다. 이들은 북한 잠수함대의 숫적 주력이다.[84] 베네치아 시기 최초로 건설되었고, 나폴레옹의 점령기에 한 차례 확장했다. 현재의 요새는 1836년 건설되어 1868년까지 군용으로 사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1945년까지 해군공창의 창고로 쓰였다. 현재는 섬 자체가 버려졌기에 별도로 배를 몰고 들어가지 않는 이상 접근할 수 없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낚시꾼들이 자주 몰려들던 섬이었으나 현재는 안전을 이유로 해양경찰이 출입을 통제한다.# 섬 서쪽의 수면 아래에는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회수되지 못한 잔해가 남아 있다.[85] 초기에는 높게 쌓아올린 포루 형태의 요새들이 세워졌으나 작열탄이 발명된 19세기 중반부터는 원형 구조의 요새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점차 낮아지고 지하화된 요새들이 건설되었다. 몬테 그로소 요새가 가장 이른 형식이라면 부르기뇽과 카이저 프란츠 1세 요새는 19세기 중반의 과도기, 그리고 베루델라와 산 다니엘레 요새는 가장 최신의 양식을 따른다. #[86] 스코다제 42mm 해안 곡사포로, 풀라 남부 근교의 고밀라 포대(Baterija Gomila)에 위치했다. 포대는 1930년대에 이탈리아인들이 거의 해체하여 오늘날에는 포탑이 있던 자리에 구덩이밖에 남아있지 않고, 포 자체는 훗날 나치 독일이 가져가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투입했다.[87] 정확히 설명하자면 요새는 27곳, 포대는 60곳이 넘었다.[88] 유고 연방 시절 부르기뇽 요새는 아드리아 해안에서 가장 거대한 레이브 파티장 중 하나였다. 현재도 종종 간이 클럽과 파티가 열린다.[89] 오랜 방치로 곳곳이 무너지는 등 구조 자체가 약해진 곳이 상당수이며, 깊은 터널의 경우 안에서 길을 잃을 위험도 있다. 일부 버려진 요새들에서는 세계대전 당시의 불발탄과 무기들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폐허가 늘상 그렇듯 치안 문제는 덤이다. 대부분의 요새들에서 그래피티와 마약 주사기가 발견되어, 한량들과 범죄자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90] 풀라 시 서쪽 무질 반도의 최서단에 위치한다. 2008년까지 크로아티아군이 사용하다가 현재는 버려졌다.[91] 산 다니엘레 요새는 도시 외곽 지역의 숲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는데다, 내부 구조 역시 19세기 말의 양식을 따른 지하화 구조이기에 매우 복잡하고 어둡다.[92] 잘츠부르크 전우회의 경우, 2차 대전 종전 이후인 1956년에 해군협회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된다. 이때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뿐만 아닌 나치 독일 시절 해군으로 복무한 오스트리아인 장병들까지도 회원으로 가입했다.[93] 정확한 이장일은 하우스 원수가 주도한 안코나 포격이 10주년을 맞았던 1925년 5월 23일이었다. 오스트리아 해군장병들의 하우스 원수에 대한 존경심과 이탈리아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 날짜 선정이다.[94] 풀라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들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해군도서관 컬렉션이며, 나머지 하나는 이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을 비롯한 지역 도서관들에서 이관된 장서들이다. 어느 쪽이든 매우 역사적 가치가 높다.[95] 제국 시절에는 독일어로 해군 카지노(Marine-Kasino)라고 칭했으며, 현대에는 크로아티아 방어자들의 집(Dom hrvatskih branitelja)이라고도 불린다.[96] 특히 도리아식 기둥으로 장식된 "겨울 정원(Zimski vrt)"이라는 중앙홀이 유명하다.[97] Vizeadmiral이라 표기하는 독일과 달리 로망스어권의 표기법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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