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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스트리아 합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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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국의 상황3. 개혁안4. 실현되지 못한 이유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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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Die Vereinigten Staaten von Großösterreich)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 의해 구상되었고 1906년 루마니아계 정치인 아우렐 포포비치(Aurel Constantin Popovici)가 세부 안건을 작성했던 개혁안이었다.

참고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은 임시 명칭이었다. 만약 개혁안이 원활히 시행되었다면 새 국호를 따로 논의해서 결정했을 것이며 그렇게 정해진 국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식 국호[2]처럼 길고 거창한 명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제국의 상황

파일:오헝 민족분포(발칸).web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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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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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각주 ]

[*] Charles W. Ingrao, The Germans and The East, (Purdue University Press, 2008); pp174


오스트리아 제국대타협을 통해 헝가리인들의 불만을 잠재웠지만[5]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모두 합해도 겨우 약 43%(독일계 약 23%, 헝가리계 약 20%) 정도였기에, 제국 내 반도 안되는 민족 세력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도 저 43%의 독일인과 헝가리인들도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유대인들과 대다수가 헝가리계였던 그 외 유대인 인구(전체 인구의 약 5%)를 합한 것이었다.

거기다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은 제한적으로나마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6]들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주권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다.[7]

또한 헝가리는 이전부터 자국 내 소수민족들과 관계가 나빴을 뿐더러[8] 1848년 봉기 이후 탄압당하는 동안 배타성이 매우 강해졌다. 이는 독일계와 동등한 지위를 얻고 나서 자신들의 권역인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의 소수민족들을 탄압하고 강경한 동화정책을 내세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때문에 헝가리 내의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민족 정체성 유지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고, 반헝가리 기조가 커졌다.[9]

3. 개혁안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제국 내의 언어적·문화적 정체성을 살리고 민족 갈등을 해소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 국토 내부 경계선을 민족과 언어권 위주로 재편한 다음 비록 제국의 지배민족은 계속 독일계일지언정 각 지역에 그 동안의 부분적 자치권 대신 전면적인 자치권, 다시 말해 동등한 주권을 부여해 제국을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개혁안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제위 계승자가 황실의, 독일계의 기득권도 선뜻 내놓겠다는 안건이었으며 슬라브계 민족,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파일:attachment/b0013361_4f6ea5607e478.png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에 따른 지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통치령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정식으로 병합되기 전이었기[10] 때문에 이 지도에서 제외되었다. 제국 안에 새로 설정할 지역들의 경계선이 있다. 초록색은 해당 지역의 주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그 지역 내에서 다시 주권을 부여받을 지역들인데, 대부분 독일어 사용 국민들이 사는 도시들이다.[11]
국가 수도 현재 지역
1. 도이치 외스터라이히독일계 지역[12]
2. 도이치 뵈멘헤프(에거)독일계 지역[13]
3. 도이치 메렌오파바(트로파우)독일계 지역[14]
4. 뵈멘프라하(프라크)체코계 지역[15]
5. 슬로바켄란트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슬로바키아계 지역
6. 베스트갈리치엔크라쿠프(크라카우)폴란드계 지역
7. 오스트갈리치엔르비우(렘베르크)우크라이나계 지역
8. 웅가른부다페스트헝가리계 지역[16]
9. 제클러란트트르구무레슈(노이마르크트암미에레슈)헝가리계 지역[17]
10. 지벤뷔르겐클루지(클라우젠부르크)루마니아계 지역
11. 트리엔트트렌토(트리엔트)이탈리아계 지역[18]
12. 트리에스트트리에스테(트리에스트)이탈리아계 지역[19]
13. 크라인류블랴나(라이바흐)슬로베니아계 지역
14. 크로아티엔자그레브(아그람)크로아티아계 지역[20]
15. 보이보디나노비사드(노이자츠)세르비아계 지역[21]

4. 실현되지 못한 이유

상당히 진보적인 개혁안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 황제의 성향
    당시 제국을 다스리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매우 전제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대타협을 이룬 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으며, 이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황제 자신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22] 황제는 제국 전체의 역량 저하와 민족주의의 발흥을 불러왔다.
  • 독일계와 헝가리계의 반대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은 국왕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모시는 대신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기능하였으며, 제국 내에서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의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헝가리슬로바키어+에르데이(Erdély)+버이더샤그 및 반샤그+외르비데크(Őrvidék)+카르파터이여(Kárpátalja)로 구성되어 있었고 산하에 호르바트-슬라본 왕국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페르디난트의 개혁을 위해서는 헝가리 왕국을 분해해야 했다. 무엇보다 헝가리인들은 자국 내 소수민족들을 자유로이 해주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고, 이 개혁안이 통과된다면 자국의 이권이 축소될 것이라 우려했다. 때문에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합중국 개혁안을 실행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23] 거기다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독일계 역시 이 안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신분에 비해 오스트리아 정계에서 아웃사이더 취급이었으며, 그가 구상한 예비 내각 인사들도 대부분 오스트리아 정계에서 소외된 슬라브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이었다.
  • 소수민족들의 영향력 부족
    제국 내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테니아, 루마니아인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이었기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없었으며 문해율도 낮았다. 무엇보다 상당수의 인구가 민족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헝가리, 체코 등과는 달리 이들은 역사적으로 민족 국가가 존재한 역사가 없거나 짧았고 합스부르크 황실의 핵심적인 세습지도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은 제국의 정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였다.

이후 카를 1세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그랬듯 제국을 재편하려 했지만[26] 내외부의 반대로 실패했고,[27]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에서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 매체에서

실현되지 못한 이상을 이룬다는 로망이 있어서 19세기~20세기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서 오스트리아가 배경일 경우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체제를 실현하려는 경우가 많다.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자체가 임시 명칭이기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Hearts of Iron IV의 모드에서 시작된 도나우 연방이 대표적이며 이 경우에는 원안보다도 더욱 진보된, 구성국들이 완전히 동등해지고 봉건적 색채에서도 탈피한 국가로 등장한다.
  • 동맹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한 세계관을 다루는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유명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927년에 갱신된 대타협에 의해 연방화가 달성된 시스라이타니아 지역과 달리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의 연방화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더러 이 연방화마저 민족주의의 광풍을 무마하기 위해 시스라이타니아를 4개 국가의 동군연합[28]으로 쪼개버려 사실상 국가연합 수준으로 퇴화한 상태라 오스트리아로 플레이할 때 제대로 된 연방국가인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수립하는 것이 초반의 주 목표가 된다. 이때 보수적인 기독사회당이 정권을 유지하면 포포비치의 원안에 별다른 수정을 가하지 않은 채 합중국이 세워지지만, 사민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노동자당으로 제국을 통합하면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Austromarxism)에 의거해 좀 더 급진적인 방식의 개혁이 실시되고 국호 또한 '도나우 연방(Danubian Federation/Der Donauverband)'이 된다. 당연히 호이4 버전 카라에서도 똑같이 등장한다.
  • Hearts of Iron IV의 모드인 The Great War Redux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주도로 오헝을 사실상 해체해 카이저라이히 세계관과 비슷한 형태의 국가연합을 수립하는 1차 개혁을 실시한 뒤, 1차대전에서 승리하면 2차 개혁을 통해 합중국을 수립할 수 있다. 이때 쥐트티롤, 피우메, 이스트리아 반도를 이탈리아에게 할양하고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한테 할양해 1차대전을 좀 더 쉽게 풀어나가거나, 이탈리아 및 루마니아가 1차대전에 참전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양쪽 다 밟아버리는 식으로 플레이하는 게 가능하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대전쟁의 책임을 지고 조기에 물러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중유럽 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됐다.
  • 대영제국 함장이 되었다에서는 원래 역사와 달리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지 않고 끝까지 중립을 지켰고, 덕분에 협상국이 독일을 끝장내지 못하고 1차 세계대전이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재편되었다.
  •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에서는 주인공 카를 대공(카를 1세)의 활약으로 오헝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국력을 뛰어넘은 대활약을 해서 전쟁을 동맹국의 압승으로 끝냈다. 덕분에 황가와 오스트리아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가며 프란츠 요제프 1세도 헝가리를 누르고 대타협을 제고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제위를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30] 양위하였다. 그리고 즉위한 페르디난트는 드높아진 황가의 위상에 힘입어 개혁안을 밀어붙이고 카를의 전략으로 개혁안에 모든 성인의 보통선거권을 포함시켜 이 싸움을 민족 간 대립이 아닌 계층 간 대립으로 확대시켜 헝가리인들의 여론마저 갈라치기하였다. 헝가리 의회는 오스트리아에서 행정 개편을 위해 파견한 관료들의 출입을 거부하며 저항했으나 제국군 총사령관인 카를 대공이 직접 나서 헝가리군을 장악하며 결국 헝가리 의회는 굴복하였고 개혁안은 실행되었다. 개혁안에는 원안과 달리 보스니아도 포함되어 독립된 주가 되었고, 트리엔트 대신 재합병한 롬바르디아-베네치아가 이탈리아계 주로 세워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긴 준비 끝에 카를 대공이 황제가 되었을 때[31] 개혁이 완료되었고, 그와 동시에 국명도 합스부르크 연방 제국으로 변경하였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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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_버전] 파일:대오스트리아2확대.webp[2] '제국의회에 대표되는 왕국들과 영토들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3]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들을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세르비아인으로 분리한 지도이다. 또한 이탈리아계에서 라딘어프리울리어 화자들 또한 분리하였다.[4] 위 지도는 미국의 지리학자인 윌리엄 R. 셰퍼드 박사가 1911년에 작성한 지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략적인 인구분포를 표현하고 있다. 실제 제국 내 언어사용자 분포는 위 지도보다 더 복잡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 남부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지역의 경우, 마을 단위로 서로 다른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5]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정복을 당한 게 아니라 혼인으로 왕관이 넘어가며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되었다. 그래서 헝가리인들은 대타협 이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에 순종적이지 않았고,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헝가리의 전통을 준수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6] 크로아티아인들은 1848년 헝가리 봉기 당시 봉기 진압에 찬성했기에 혁명 실패 후 헝가리에서 분리되어 제한적으로나마 동등한 주권을 부여받았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민족 영웅인 요시프 옐라치치가 바로 이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대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인들의 권역 중 크로아티아 왕국슬라보니아 왕국이 다시 헝가리 권역으로 이전당한데다 헝가리가 복수 차원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영토를 자국으로 편입시키려 하자 극심한 반발이 있었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헝가리-크로아티아 타협이 체결되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 수립되었다.[7] 체코인들의 경우 30년 전쟁 이전에는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30년 전쟁 무렵 체코인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을 폐위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옹립한 보복으로 주권을 박탈당했다. 그래도 보헤미아 왕국이 제국 내에서 가장 공업화가 잘 된 지역이라서 산업이 발달했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편이었으며 인구도 민족 중 3번째로 많았다. 그래서 동등한 주권은 없었어도 크로아티아인들을 제치고 제국 내 3인자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8] 헝가리 봉기 당시 요시프 옐라치치가 이끈 크로아티아군과 슬로바키아 농민 징집병들이 봉기 진압에 큰 역할을 했다.[9] 반대로 오스트리아령인 시스라이타니아에서는 소수민족에게 다문화적 관용책을 펼쳤기 때문에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합스부르크에 원한이 깊었던 폴란드인들조차도 말이다.[10] 보스니아는 1908년에 정식으로 병합되었다.[11] 부유한 지배민족이 주로 도시에 몰리는 다민족국가 특성상 독일계 비율이 높은 도시가 많았다. 때문에 계획된 자치지역들은 폴란드계가 다수인 제국 내 인구수 5위의 도시 르비우와 타 민족이 다수를 점하지는 않지만 자치지역에 포함된 제국 내 인구수 3위의 도시 프라하를 제외하면 전부 독일계 다수 지역이다.[12] 기존의 오버/니더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티롤, 포어아를베르크, 뵈멘 남부 독일계 지역 통합.[13] 기존의 뵈멘 북부 독일계 지역.[14] 기존의 메렌 북부, 슐레지엔 중 독일계 지역 통합.[15] 기존의 뵈멘, 메렌, 슐레지엔 중 체코계 지역 통합.[16] 헝가리 본토. 트리아농 조약 이후 헝가리의 국경과도 거의 비슷하다.[17] 트란실바니아 내 헝가리계 지역.[18]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잔존한 오스트리아령 영토.[19] 이스트리아반도와 그 주변의 이탈리아계 지역.[20]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달마티아 왕국, 이스트리아 반도의 크로아티아계 지역 통합.[21]보이보디나 공국세르비아계 지역.[22] 황제는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탐탁찮게 여겼으며, 반대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자기 자식들을 귀천상혼을 사유로 계승권에서 제외해 버린 데다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전제주의적인 큰아버지에게 반감이 심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던지 황제의 시종은 두 사람의 언쟁을 "천둥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사후 황제는 슬퍼하기는커녕 딸 마리 발레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죽음이) 내게는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였다.[23] 헝가리는 1914년 기준으로 51개의 연대로 구성된 방위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재현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고, 내전으로 번지면서 높은 확률로 제국이 해체되었을 것이다.[24] 당시 자국 내 슬라브계는 전체 제국민의 60퍼센트나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서서히 민족주의의 기운이 돌고 있었고, 이웃의 슬라브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남슬라브계 주민들 사이에서 분리주의를 선동하면서 해당 지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제국의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콘라트는 오랫동안 이러한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마침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25] 사실 둘의 사이는 상술했듯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지만 개인적 감정과는 별개로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한 것은 황실의 위엄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도 눈엣가시이던 세르비아를 손봐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며, 이후 날아온 독일 제국의 백지수표가 황제와 제국 정부의 전쟁 결심을 굳히는 쐐기를 박는다.[26] 다만 카를 1세는 합중국 방안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방안을 지지했다.[27] 독일계 보수파와 헝가리 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독일 제국도 반대했다.[28] 오스트리아 제국, 일리리아, 보헤미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29]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하였다.[30] 주인공의 개입으로 사라예보에서 부상을 입긴 했지만 살아남았다. 프란츠 요제프는 전쟁에서 대활약한 카를에게 건너뛰고 제위를 물려줄 것을 고려했으나, 본인이 거부하여 페르디난트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페르디난트의 자식들에게 이탈리아에 세워진 괴뢰 공국을 주고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하며 서로 화해하였다.[31]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암살 후유증과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일찍 은퇴하였다.[32] 원래 카를은 도나우 합중국, 아님 원안 그대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의회에 입성한 히틀러무솔리니가 각각 유럽 합중국로마를 국명으로 미는 뇌절을 하면서 국명 결정 회의의 분위기가 개판으로 흘러갔고, 카를이 타국의 심기를 위협하는 국명이라고 거절하고 물러나자 분위기 과열을 진정시키려는 총리 티서 이슈트반합스부르크를 국명으로 밀고 여론을 움직여 결국 그렇게 결정되었다. 도나우 합중국도 논의되었으나 도나우 강이 흐르지 않는 주도 많아서 결국 무산되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뭉친 것 외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결국 합스부르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