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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 |||
본명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 ||
출생 | 1889년 4월 26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사망 | 1951년 4월 29일 (향년 62세) | ||
영국 케임브리지셔주 케임브리지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1889~1939) [2] [[영국| ]][[틀:국기| ]][[틀:국기| ]] (1939~1951)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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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교수 | 프랭크 램지 [3][4] | ||
경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철학 교수 | ||
직업 | 철학자 | ||
주 분야 | 논리학, 형이상학, 언어철학, 수리철학, 심리철학, 인식론, 미학 | ||
종교 | 확인된 바 없음[5] | ||
링크 | 공식 사이트, 아카이브 사이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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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가 아는 천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완전히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예
버트런드 러셀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철학자.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7]이자 현대 영미분석철학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성을 갈망해 점점 일그러져 가는 지성계에 언어 사용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였다.[8] 또한 듀이, 하이데거와 함께 체계 철학에 대비되는 3대 교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9]버트런드 러셀
"표현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라고 그 스스로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삶을 그의 철학과 분리해 고찰하기는 어렵다. 그 누구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10] 동시에 가장 인간답기를 바랐던[11] 인간.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사상
언급한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입문은 수학과 논리학에 대한 관심에 따른 러셀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말로는 전기 철학시절을 대표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12]가 있다. 후기 철학 때는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13]가 있다. 흔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의 제자로 있던 시기부터 1차 세계 대전 이후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까지를 전기 철학으로(대표되는 책 「논리-철학 논고」),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끝마치고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온 후 사망할 때까지를 후기 철학으로 구분한다(대표되는 책 「철학적 탐구」).[14]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이론이 아닌 탐구로 여겼기 때문에 각 이론마다 이름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 뒤의 이론들은 필요에 의해 후대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3.1. 전기 철학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15]라고 밝힌 시기이다. 그의 전기 철학에 의하면 윤리와 아름다움은 하나이며 인간이 말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 드러난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대답은 말로써 물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물음이란 던져진 이상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윤리 명제는 있을 수 없다."[16] 철학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과학들이 증명 없이 참으로 가정하는 모든 원초적 명제"이다.3.1.1. 「논리-철학 논고」
자세한 내용은 논리-철학 논고 문서 참고하십시오.3.2. 후기 철학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한 마을 주민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후에 케임브리지에 돌아와 자신의 사상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 전환은 후에 '일상언어학파'라고 불리는 사상을 태동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러셀과 청년 시절의 자신의 사상인 '이상언어'에 대한 갈망을 거부하고 "일상언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철학에 대한 정의는 "사소한 것들의 종합"이다.3.2.1. 「철학적 탐구」
자세한 내용은 철학적 탐구 문서 참고하십시오.3.2.2. 「확실성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은 확실성에 관하여 문서 참고하십시오.3.2.3. 『문화와 가치』
자세한 내용은 문화와 가치 문서 참고하십시오.3.3. 개인적인 성향
그의 삶과 철학적 사상, 그리고 종교관의 독특함에서 그러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도덕적 신념과 정치적 성향 역시 다른 어떤 누구와도 다른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그는 폭넓은 의미에서 좌파에 해당했으나, 마르크스주의를 믿기에는 자존심이 너무나도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소련 인민의 삶을 위대한 삶으로 생각하며 교수 일을 관두고 비숙련 노동자로 소련에 취직하려고 하는 등 진지하게 소련으로 떠나려고 하기도 했다.또한 그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알고 있었으나, 오토 바이닝거의 영향으로 자기 자신의 '유대성'을 포함하여 유대인을 강하게 비난했으며, 자신이 속한 독일인(독일계 오스트리아인도 포함하여) 역시 영국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영국인들을 위대한 민족으로 종종 묘사했다.
한편으로 그는 양성애자였으며, 최소한 한 명 이상의 남성 및 여성과 성관계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종교적인 죄(sin)로 생각하였으며, 이를 카페에서 친구들에게 고백하는 등[17] 기행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버틀리와 같은 일부 작가가 주장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여러 동성 파트너와 수없는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애국주의자(프레게 같은)는 아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지만, 러셀의 평화주의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으며, 이는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4. 주요 저술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 <colbgcolor=#fff,#1f2023> 1921년[18] |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 1953년 |
청색 책 갈색 책 Blue and Brown Books | 1958년 |
확실성에 관하여 Über Gewißheit On Certainty | 1969년 |
문화와 가치 Vermischte Bemerkungen Culture and Value | 1977년 |
5. 명언
진지하고 훌륭한 철학 작품은 전적으로 농담만으로 구성해서 쓰여질 수 있다.[20]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21]
나는 나의 세계이다. [22]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23]
단어를 발음하는 것은 상상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과 같다. [24]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자를 이해할 수 없다. [25]
천재에게는 다른 정직한 사람보다 더 많은 빛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빛을 불타는 지점으로 집중시키는 특별한 종류의 렌즈를 가지고 있다. [26]
사람들이 때때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면, 지적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27]
누군가에게 진실을 납득시키려면 그것을 진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대신 오류에서 진실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28]
부분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 이 견해가 여전히 명확하지 않더라도, 항상 하나의 큰 전체 문제를 넘어서 자유로운 관점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라. [29]
6. 대중 매체에서
- 영국의 게이 영화 감독 데릭 저먼이 만든 영화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칼 존슨이 비트겐슈타인과 싱크로 일치. 그의 철학보다는 성 정체성과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주를 차지한다.
-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다른 사람의 몸의 아픔과 관련하여서 신생아의 이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30] 이에 영감을 받아 미국의 일렉트로닉 음악 그룹 Matmos가 「Roses and Teeth for Ludwig Wittgenstein」라는 제목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노래의 분위기는 굉장히 음산하고 기괴하다.
- 독일의 가수 Tilman Rossmy는 철학에 푹 빠져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여성에 대한 노래를 「Wittgenstein sagt」로, 노르웨이의 헤비메탈 밴드 Endolith는 「Ludwig Wittgenstein on Ethics」 라는 제목의 락음악을 만들었다.
- 신해철은 2000년 Wittgenstein이라는 밴드명으로 활동했다. 넥스트 해체 이후 영국 유학을 다녀온 신해철의 최종적인 프로젝트였다. 밴드명을 비트겐슈타인으로 지은 동기는 '~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쓰고 싶었는데 그중 가장 적합한 이름이 비트겐슈타인이어서 그 이름을 쓰게 됐다고 한다.
- 에두아르도 파울로치(Eduardo Paolozzi) 「뉴욕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in New York)」이라는 그림도 있다.
- 데이비드 마크슨(David Markson)은 「비트겐슈타인의 정부(Wittgenstein’s Mistress)」라는 책에서 지상에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 어떤 한 여성을 묘사한다. 그녀는 끝까지 독백으로 일관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Wittgenstein's Nephew)」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소재로 픽션을 가미하여 소설을 썼다.
- 『로지코믹스』라는 책에서 러셀의 제자로 등장한다.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민 채 러셀 교수를 찾는 모습이라든지, 러셀 앞에서 발광(...)하는 모습이나 휘파람을 부는 모습도 그렇고 평소 표정이 다소 귀엽다.
7. 여담
- 대륙철학자 질 들뢰즈는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평했다.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에 대한 퇴행이다. 만약 그들이 이긴다면 철학이 암살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철학의 암살자이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추악하고 파괴적인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만다.질 들뢰즈의 A to Z, "W"의 "비트겐슈타인" 파트 中
[1] 핀란드의 철학자 예오리 헨리크 폰 브리크트(Georg Henrik von Wright)와 촬영한 사진. 원본에는 보는 사람 기준으로 오른편에 브리크트가 앉아 있다.[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1889~1918)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1918~1919)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1919~1934)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1934~1938)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1938~1939)[3] 그는 초창기 버트런드 러셀 밑에서 공부했으나, 이후에는 독학했다. 이후 그는 프랭크 램지의 학생 신분으로 박사학위를 얻지만, 실질적으로는 램지가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다. 지도교수는 학사,석사,박사 모두에 해당되나, 통상적으로 'doctoral advisor'가 강조되므로 러셀이 아닌 프랭크 램지가 지도교수라고 봄이 맞다.[4] 러셀은 이 과정이 우스웠는지 '평생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은 처음'이라며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에게 농담을 건넨다.[5] 비트겐슈타인이 기독교적 영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가 기독교를 믿었는지 아니면 무신론자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기독교를 믿었다는 입장에서는 그가 톨스토이나 오스틴 파러나 키에르케고르 등을 존경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반면에 무신론자였다는 입장에서는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신을 믿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1 #2[6] 수학자이자 과정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격언. 상술된 버트런드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며, 맨체스터 공대 박사과정 학생이던 비트겐슈타인이 크게 자극받았던 책인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라는 유명한 저작을 러셀과 함께 남겼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읽고 화이트헤드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직접 찾아갔지만 못 만나고 러셀만 만났다. 화이트헤드는 몇달전 런던대 교수가 되어 런던에 살고 있어서 없었기 때문. 이후에도 두사람은 죽을때까지 단 한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다.[7] Considered by some to be the greatest philosopher of the 20th century(몇몇 사람들에 의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된다.)#[8]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그 누구보다 '일반성'을 갈망했다는 것은 함정. 비록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부정하지만, 그가 젊은 시절 일반성을 갈망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논고」에서 수행했던 것 중의 하나는 명제의 일반 형식에 관한 연구라는 점(철학적 탐구 65)에서, 모두 '일반성에 대한 갈망'에 빠져있다." 홍진기. (연세대학교, 2011) 니힐리즘의 철학적 극복 :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니체의 형태학적 이해, 167.[9] 리차드 로티, 박지수 옮김. (까치글방, 1998)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395.[10] "대체 왜 그럽니까? 당신은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까?" 그러자 비트겐슈타인은 벽력같이 외쳤다. "물론이야! 나는 완전하게 되기를 원해!". 레이 몽크, 남기창 옮김. (필로소픽, 2012) 비트겐슈타인 평전, 527. 이하 평전[11] "우리를 인간답게 존재하도록 하시옵소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497.[1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114.[13] 같은 책, 150.[14]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것에 회의할 수 있다면 그가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어릴 때부터 쭉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실제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일관적이었다면 전기와 후기의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1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94.[16] 아주 대강 말하자면 당위는 사실의 한 종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명제가 사실만을 표현한다고 가정하면 당위는 명제를 통해 표현될 수 없다.[17] 비트겐슈타인의 친구인 파니아 파스칼은 고작 무슨 그런 일로 회개를 하고 반성을 하냐며 화를 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벽력과 같이 소리친다.[18] 1921년에 독일어판을 먼저 출간하고 1922년에 영어판 출간함.[19] 원문은 "Man könnte den ganzen Sinn des Buches etwa in die Worte fassen: Was sich überhaupt sagen lässt, lässt sich klar sagen; und wovon man nicht red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해석은 "이 책의 전체 의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명확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20] "A serious and good philosophical work could be written consisting entirely of jokes."으로 알려진 말로서, 원래는 『비트겐슈타인: 회고록』를 쓴 노만 말콤이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It is worth noting that Wittgenstein once said that a serious and good philosophical work could be written that would consist entirely of jokes (without being facetious)." (Ludwig Wittgenstein: A Memoir (1958), by Norman Malcolm)[21] Nothing is so difficult as not deceiving oneself. (Culture and Value (1980))[22] Ich bin meine welt.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23] 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24] Uttering a word is like striking a note on the keyboard of the imaginatio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3))[25] If a lion could talk, we could not understand him.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3))[26] There is no more light in a genius than in any other honest man—but he has a particular kind of lens to concentrate this light into a burning point. (Culture and Value (1980))[27] If people did not sometimes do silly things, nothing intelligent would ever get done. (Culture and Value (1980))[28] To convince someone of the truth, it is not enough to state it, but rather one must find the path from error to truth. (Philosophical Occasions 1912-1951 (1993))[29] Don't get involved in partial problems, but always take flight to where there is a free view over the whole single great problem, even if this view is still not a clear one. (Notebooks 1914-1916, Journal entry (1 November 1914))[3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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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1919~1934)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1934~1938)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1938~1939)[3] 그는 초창기 버트런드 러셀 밑에서 공부했으나, 이후에는 독학했다. 이후 그는 프랭크 램지의 학생 신분으로 박사학위를 얻지만, 실질적으로는 램지가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다. 지도교수는 학사,석사,박사 모두에 해당되나, 통상적으로 'doctoral advisor'가 강조되므로 러셀이 아닌 프랭크 램지가 지도교수라고 봄이 맞다.[4] 러셀은 이 과정이 우스웠는지 '평생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은 처음'이라며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에게 농담을 건넨다.[5] 비트겐슈타인이 기독교적 영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가 기독교를 믿었는지 아니면 무신론자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기독교를 믿었다는 입장에서는 그가 톨스토이나 오스틴 파러나 키에르케고르 등을 존경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반면에 무신론자였다는 입장에서는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신을 믿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1 #2[6] 수학자이자 과정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격언. 상술된 버트런드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며, 맨체스터 공대 박사과정 학생이던 비트겐슈타인이 크게 자극받았던 책인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라는 유명한 저작을 러셀과 함께 남겼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읽고 화이트헤드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직접 찾아갔지만 못 만나고 러셀만 만났다. 화이트헤드는 몇달전 런던대 교수가 되어 런던에 살고 있어서 없었기 때문. 이후에도 두사람은 죽을때까지 단 한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다.[7] Considered by some to be the greatest philosopher of the 20th century(몇몇 사람들에 의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된다.)#[8]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그 누구보다 '일반성'을 갈망했다는 것은 함정. 비록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부정하지만, 그가 젊은 시절 일반성을 갈망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논고」에서 수행했던 것 중의 하나는 명제의 일반 형식에 관한 연구라는 점(철학적 탐구 65)에서, 모두 '일반성에 대한 갈망'에 빠져있다." 홍진기. (연세대학교, 2011) 니힐리즘의 철학적 극복 :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니체의 형태학적 이해, 167.[9] 리차드 로티, 박지수 옮김. (까치글방, 1998)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395.[10] "대체 왜 그럽니까? 당신은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까?" 그러자 비트겐슈타인은 벽력같이 외쳤다. "물론이야! 나는 완전하게 되기를 원해!". 레이 몽크, 남기창 옮김. (필로소픽, 2012) 비트겐슈타인 평전, 527. 이하 평전[11] "우리를 인간답게 존재하도록 하시옵소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497.[1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114.[13] 같은 책, 150.[14]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것에 회의할 수 있다면 그가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어릴 때부터 쭉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실제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일관적이었다면 전기와 후기의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1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94.[16] 아주 대강 말하자면 당위는 사실의 한 종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명제가 사실만을 표현한다고 가정하면 당위는 명제를 통해 표현될 수 없다.[17] 비트겐슈타인의 친구인 파니아 파스칼은 고작 무슨 그런 일로 회개를 하고 반성을 하냐며 화를 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벽력과 같이 소리친다.[18] 1921년에 독일어판을 먼저 출간하고 1922년에 영어판 출간함.[19] 원문은 "Man könnte den ganzen Sinn des Buches etwa in die Worte fassen: Was sich überhaupt sagen lässt, lässt sich klar sagen; und wovon man nicht red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해석은 "이 책의 전체 의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명확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20] "A serious and good philosophical work could be written consisting entirely of jokes."으로 알려진 말로서, 원래는 『비트겐슈타인: 회고록』를 쓴 노만 말콤이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It is worth noting that Wittgenstein once said that a serious and good philosophical work could be written that would consist entirely of jokes (without being facetious)." (Ludwig Wittgenstein: A Memoir (1958), by Norman Malcolm)[21] Nothing is so difficult as not deceiving oneself. (Culture and Value (1980))[22] Ich bin meine welt.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23] 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24] Uttering a word is like striking a note on the keyboard of the imaginatio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3))[25] If a lion could talk, we could not understand him.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3))[26] There is no more light in a genius than in any other honest man—but he has a particular kind of lens to concentrate this light into a burning point. (Culture and Value (1980))[27] If people did not sometimes do silly things, nothing intelligent would ever get done. (Culture and Value (1980))[28] To convince someone of the truth, it is not enough to state it, but rather one must find the path from error to truth. (Philosophical Occasions 1912-1951 (1993))[29] Don't get involved in partial problems, but always take flight to where there is a free view over the whole single great problem, even if this view is still not a clear one. (Notebooks 1914-1916, Journal entry (1 November 1914))[3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