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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OM FRS 프랜시스 해리 콤프턴 크릭 Francis Harry Compton Crick | |||
출생 | 1916년 6월 8일 | ||
영국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웨스턴 파벨 | |||
사망 | 2004년 7월 29일 (향년 88세) |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생물물리학자, 분자생물학자 | ||
분야 | 생물물리학 유전학 분자생물학 물리학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ddd> 학력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물리학 / B.Sc.) (193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곤빌 앤 키즈 컬리지 (생물학 / Ph.D.) (1954년)[1] | |
소속 | 케임브리지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캐번디시 연구소 MRC 분자생물학 연구소 솔크 생물학 연구소 | ||
지도교수 | 막스 페루츠 | ||
수상 | 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 (1960) 캐나다 가드너 국제상 (1962) 노벨생리학·의학상 (1962) EMBO 멤버십 (1964) NAS 준회원 (1969) 로열 메달 (1972) 코플리 메달 (1975) 핸스 크레브스 경 메달 (1977) 알버트 메달 (1987) 아카데미 오브 어치브먼트 골든 플레이트 상 (1987) | ||
종교 | 무종교(불가지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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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NA 구조를 밝혀내고 센트럴 도그마를 제창하고 유전 부호를 완성한 분자생물학의 거두. 1962년 DNA 구조를 함께 밝혀낸 제임스 왓슨,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과의 신경전, 암투가 있었기에 논란이 있지만 그 업적을 빼더라도 크릭은 분자생물학의 발전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세기의 대표 생물학자가 찰스 다윈이라면 20세기에는 크릭이 꼽힌다.2. 생애
1916년 영국 중부의 노스햄프턴 근교의 작은 마을 Weston Favell 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친 해리 크릭은 형제들과 함께 부츠와 신발 공장을 운영했다. 할아버지인 월터 드로브릿지 크릭(Walter Drawbridge Crick, 1857 - 1903)은 찰스 다윈과도 교류한 아마추어 박물학자였다. 그의 이름을 딴 고둥(gastropods) 2종도 존재한다.어린 크릭은 책을 좋아했고 과학에 끌렸다. 부모를 따라 어려서는 교회에 다녔는데, 12세에 종교적 믿음을 넘어 과학적 탐구를 하겠다고 부모에게 이야기하며 더 이상은 교회에 가지 않았다. 크릭은 삼촌인 월터 크릭과 친했는데 그에게 유리 부는 법, 화학 실험과 사진 프린팅을 배우기도 한다. 14세부터 런던의 Mill Hill School 에 다니며 수학, 물리, 화학을 공부했다. 훗날 크릭은 자신의 성공의 기반은 이곳에서 배웠던 양질의 수업이라고 회상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입학해서 1937년 이학사 학위를 받았고, 물리학 박사 과정에 입학한다. 그러나 박사 학위는 취득하지 못한 채 물의 점성 연구 같은 것을 하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크릭은 군에서 레이더 및 어뢰 연구 등을 진행했다. 크릭은 특정 대상에만 폭발하는 둔감한 지뢰를 설계하여 독일과의 해역에서 영국군의 우위를 가져오는데 기여한다. 크릭은 전쟁 중 정보부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이야기가 언론에 전달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이후 신문을 거의 읽지 않았다.참고
그런데 전쟁 중 하필이면 크릭의 연구실 천장으로 폭탄이 떨어져 연구실은 박살이 났고 그에 따라 전후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크릭은 군에서 만난 친구인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게오르그 크라이젤(Georg Kreisel)과 훗날의 노벨상 공동 수상자 모리스 윌킨스의 영향으로 관심사를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돌린다. 크릭의 연구 방법은 이 때부터 정립되었는데, 그의 작업은 깊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토론하며 그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스파링 파트너가 필요했다. 첫 번째 인물이 크라이젤이었으며, 2번째는 바로 제임스 왓슨 이다. 3번째는 유전암호 연구를 함께 한 시드니 브레너, 그리고 마지막 파트너는 크릭 인생의 마지막 연구인 인간의 의식 탐구에 함께 한 40살 연하의 미국의 신경생리학자이자 칼텍 교수인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다.[2]
전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에서 생물물리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고 이곳에서 왓슨을 만난다. 크릭은 왓슨과의 연구로 당시 불 붙었던 DNA 구조 발견 경쟁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는데, 당시 경쟁자는 이미 거장이었던 라이너스 폴링이었다. 초짜 연구자들이 승리한 것이다. 크릭은 물리학자 출신으로 사물의 물리적 관계를 시각화시키는데 매우 뛰어났는데, 윌킨스가 가져온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DNA의 엑스선 회절 사진을 흘깃 보고 2개의 체인이 이중 나선을 이루며 반대방향으로 평행하게 주행해야한다고 파악해 버렸다. 내내 그것만 봤음에도 프랭클린은 해내지 못한 발상이며, 그녀가 여성이고 성격이 독특해서 동료 연구자들에게 차별 받았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크릭과 왓슨은 언급했다시피 당시 전혀 거물이 아닌 이 연구에 뛰어든 초짜 중의 초짜였기 때문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951년에서 1953년까지의 3년간의 크릭과 왓슨의 공동 연구 이후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훗날 왓슨이 '이중나선'을 써서 당시의 가십을 폭로하며 여러 사람을 뒷담화 하자 매우 화낸 적도 있다. 그러나 곧 화해해서 다시 좋은 친구가 된다.
크릭은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MRC 분자생물학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나간다. DNA의 구조 발견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긴 후에도 무시무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현대 분자생물학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예를 들어 센트럴 도그마를 1957년에 발표했다. 또한 어댑터 가설을 제창하여 RNA에서 아미노산을 운반해 올 어댑터가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던진다. 어댑터는 후에 tRNA로 밝혀진다.김성호 교수 관련 기사 그리고 단백질 합성의 아이디어를 내고 유전 암호를 생각해낸다. 이는 '아미노산은 스무 개 가량이고, 염기 서열이 암호일 거 같은데 스무 개의 코드를 만들려면 염기는 4개니까 4*4*4=64니까 3개의 염기 정도면 될 거 같은데? 겹치는 거 몇 개 있을 거고 시작하고 끝내는 거 있겠지 뭐.' 이런 사고의 흐름으로 뚝딱 나온 아이디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조.클릭 크릭의 이러한 '저지르고 증명은 다음 세대로 미루기'는 DNA 구조 발견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는데, DNA의 반보존적 복제라던가, RNA 세계 가설 등이 크릭이 한참 전에 찍어놓은 것들이었고 결국 맞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 많다. 힉스 보손처럼 이론물리학자가 입자의 존재를 예측하고 실험물리학자가 확인해주는 것처럼 이런 생물학자도 있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에서 자신의 역할이 다했다고 느낀 크릭은 1977년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1976년에 안식년을 보낸 솔크 연구소에서 이후 자리를 잡았고 UCSD 의 겸임 교수로도 활동했다. 이후의 크릭은 신경해부학을 가르치고 '의식'에 대한 신경과학 연구에 투신한다.[3] 범종설 중에 외계인에 인해 생명체 탄생했다는 정향 범종설 혹은 의도적 범종설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이는 미토콘드리아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유전 부호가 같다는걸 알아내면서 혹시나 외계인에 인해 탄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건데, 이를 들은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SF적이지 않냐고 비판한적 있었다. 크릭도 역시 자신의 주장중에 SF적인 주장이 있다고 직설적으로 인정하기는 하나, 때론 그럴 수도 있는 경우가 있다고 그저 자기 추측했을뿐이라는 뉘앙스 의견을 조심스레 남겼었다고 한다.
2번 결혼했고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2004년 7월 28일에 라호야에 있는 UCSD 쏜튼 병원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한다. 코흐에 따르면 크릭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 논문 원고를 수정하는 뼛속까지 과학자였다.[4]
화장되어 유해는 태평양에 뿌려졌고 그를 기리는 행사가 같은 해 9월 27일 솔크 연구소에서 열렸다. 행사에는 제임스 왓슨, 시드니 브레너, 크리스토프 코흐 등 가까운 동료들이 참석했다.
3. 크릭을 기리는 곳
2003년에 시드니 브레너의 제창으로 영국 왕립 학회가 주관하는 '프랜시스 크릭 메달과 강의(The Francis Crick Medal and Lecture)'가 시작되었다. 40세 이하의 젊은 생물학자가 매년 선정되어 메달이 수여되고 강의가 열린다.링크'프랜시스 크릭 연구소(Francis Crick Institute)'가 런던 북부에 설립되어 2016년에 문을 열었다. 이 연구소는 1250명의 과학자가 있으며 연간 예산은 1억 파운드가 넘는 유럽에서 가장 큰 단일 생물학 연구소이다. 본디 2007년 고든 브라운 당시 영국 수상이 '영국 의학 연구 혁신 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으나 2011년에 건물 착공에 맞추어 크릭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링크
크릭이 1945년부터 47년까지 해군 동료였던 로버트 듀갈[5]과 함께 살았던 집인 '56 St George's Square, Pimlico, London SW1' 장소를 기념하여 웨스트민스터 시 의회가 인증한 녹색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링크구글 맵스
4. LSD
크릭은 생애 동안 많은 양의 LSD를 투약했고, 또 LSD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크릭의 사망 직후 크릭이 LSD를 빨고 환각 상태에서 이중나선 구조를 개발했다는 폭로가 있었으나링크 크게 주목은 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크릭이 'LSD 유저'인 것은 인정하지만 영국에 처음 LSD가 들어온 것이 1952년이며, 이후 몇 년 동안 영국에서 LSD에 접근할 수 있던건 극소수의 심리전문가와 MI6과 같은 특수기관뿐이라, 크릭이 이중나선을 개발한 1953년 당시에 LSD를 얻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링크2훗날 1993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받은 캐리 멀리스의 경우 크릭이 한 것과 똑같은 약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그 유명한 PCR 기법을 발명했다.
5. 망언 및 기행
아직까지 살아있는 제임스 왓슨에 많이 가려졌지만, 이 사람도 우생학 옹호론자로 수많은 망언을 남겼다. '유전자적으로 나쁜 부모는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 등등 그외에도 여러 종류의 망언과 험담으로 악명이 높다.분자 생물학자 낸시 홉킨스가 밝히길, 학부 시절 크릭의 연구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가슴에 손 대는 등 성추행을 했다고 한다. 링크
[1] 박사 학위 논문 : Polypeptides and Proteins : X-ray Studies = 폴리펩타이드와 단백질 : X선 연구(1954).[2] 1990년부터 크릭이 사망하는 2004년까지도 논문을 함께 쓴다.[3] 솔크 연구소는 연구소 자체의 높은 수준으로도 유명하지만, 더욱 유명한 것은 건축물 그 자체이다. 위대한 건축가 루이스 칸의 작품으로 중앙 정원에서 라호야 바다를 마주하는 경이로운 건축물이다.#[4] "he was editing a manuscript on his death bed, a scientist until the bitter end"[5] Robert Dougall, 조류학자이며 훗날 방송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