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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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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 논고
파일:Tractatus_title_page_1922_Harcourt.png
▲ 영역본 초판의 『논리-철학 논고』.
주제 논리학, 언어철학, 형이상학
저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원제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원어 독일어
출판 연도 1921년
출판 국가 오스트리아
쪽수 75쪽

1. 개요2. 구성3. 해설
3.1. 그림 이론3.2. 유아론적 경향3.3. 논리학에 대한 견해3.4. 수학에 대한 견해3.5. 역설
4. 기타

[clearfix]

1. 개요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서이다.

1914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1918년에 최종 원고가 완성되었고, 1921년 독일에서 『자연철학 연보』에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러셀의 서론과 함께 처음으로 게재되어 이후 1922년 프랭크 램지찰스 오그던에 의해 보완된 영역본이 출간되었다.[1]

2. 구성

『논고』는 러셀의 서론, 모토,[2] 머리말[3]과와 본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본문은 제1번부터 제7번까지의 명제들과 각각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4] 그 부연 설명들을 포함한 전체 선언[개별] 명제는 모두 525개이다.

『논고』의 구조에서 주제들에 따른 분류는 대표적으로 글록과 랑게의 분류가 있다.
글록의 분류 랑게의 분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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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설

3.1. 그림 이론

진리란 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이론이다. 모사설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세계를 말로 옮긴다는 얘기다. 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잡지에서 교통사고에 관한 재판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인형과 모형으로 상황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논고」에서는 이에 대해 2.1~2.225에서 중점적으로 얘기한다.

전환기 하이데거는 명백히 이와 같은 사조를 인식하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며 대응론 내지는 모사설을 비판한다:
"ᆢ명제의 비진리(올바르지 못함)는 진술과 사태의 불합치다. 사태의 비진리(진정하지 못함)는 존재자와 그것의 본질의 불일치를 의미한다. 어떤 경우라도 비진리는 '꼭 들어맞지 않음'으로 개념 파악된다. '꼭 들어맞지 않음'은 진리의 본질로부터 밖으로 벗어난 것이다.ᆢ진리는 하나의 진술과 하나의 사태의 합치인 것이다. [그러나]ᆢ진술이 올바름의 성격을 갖는 까닭은 태도의 열린 자세 덕분이다. 왜냐하면 단지 이러한 열린 자세를 통해서만 여하튼 '드러나 있는 것'은 표-상적 동화를 위한 기준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 자세의 태도는 이러한 척도에 스스로를 맞추어야 한다. 즉 열린 자세의 태도는 모든 표상 활동을 위한 기준 척도를 앞서 내어주는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이러한 역할이 태도의 열린 자세에 속한다. 그런데 단지 태도의 이러한 열린 자세를 통해서만 진술의 올바름(진리)이 가능하다면, 올바름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그것이야말로 더 근원적으로 적법하게 진리의 본질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로써 진리를 그것의 유일한 본질 장소로 간주되던 진술에만 할당하던 재래의 배타적인 관례는 붕괴한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명제 안에 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기준 척도를 앞서 내어주는 열린 자세의 태도의 내적 가능성의 근거에 관한 물음이 제기된다. 단지 이러한 가능성으로 인해, 명제의 올바름은 여하튼 진리의 본질을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ᆢ진술의 올바름으로서 이해된 진리의 본질은 자유이다."[6]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방식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ᆢ하이데거는 구문론적 형식을 물상화(명사화)했다. 이 때문에 그는 틀렸다. 카르납 자신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런 물상화는 하이데거 철학적 언설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고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카르납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존재'를 명사(사고 대상=명제 변수)로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ᆢ하지만 카르납에 따르면, '존재'를 사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존재'라는 자연 언어의 기능(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은 논리적으로 구문론적 형식, 기호로서는 존재 양화사 ∃로 번역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문장을 뒷받침하는 형식이지 문장의 내용이 되지 않는다.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 언어문("존재란 P다")에 대응하는 명제 함수 P(∃)는 +나 -를 변수에 대입한 수식같이(예를 들어, 2++=5라고 하는 것처럼) 완전히 부조리한 것이다. 하이데거와 카르납, 즉 존재론과 논리 실증주의는 여기에서 '존재'의 이해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다. (후략)"[7]
비트겐슈타인의 하이데거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ᆢ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 직후 그런 기도가 '전부 아프리오리하게 그저 무의미'한 것을 지적하면서도, 그 심정에 공감을 표명했다고 전해진다."[8]

3.2. 유아론적 경향

보통 철학계에서 유아론이라 함은 조지 버클리의 극단적 경험주의를 일컫는 말로 정의되고는 한다.
"우리의 사상도 우리의 정욕도 그리고 상상에 의해 형성된 우리의 관념도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각자는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감각이나 감관에 각인된 관념들은, ……그것들을 지각하는 정신 이외에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만큼 더 분명하게 보인다. …… 나는 내가 받치고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것은 내가 그것을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서재 바깥에 있었다면 나는 그것이 존재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거기에 냄새가 있었다는 것은 냄새가 맡아졌다는 것이고, 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들렸다는 것이며, 색깔이나 모양은 시각이나 촉각을 통해서 지각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각됨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사유하지 않는 사물들의 절대적 현존에 대해서 언급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존재지각되는 것이다. 사물들은 바로 사물들을 지각하는 마음들 또는 사유하는 것들 외부에 어떤 현존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을, 그것을 실제로 감각하지 않고도 보거나 느끼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하며, 마찬가지로 감성적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감각이나 지각작용과 분리시켜서 나의 사유 속에서 생각하는 것도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서 언급된 것의 결과는, [신령한] 정신 또는 지각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9]
그러나 버클리의 유아론은 제대로 독해되지 않고 흔히 (오해된) 유아론으로 다음과 같이 잘못 이해되고는 한다:
"그럴싸한가? 상식적인 주장처럼 들리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당신이 사용하는 컴퓨터 속에는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뿐이다. 당신은 지금 마더보드를 보고 있지 않다.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자. 그럼 당신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니터뿐이다. 당신의 컴퓨터 속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 이상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른한 오후다.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잠이 쏟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 바로 앞자리에 고약한 부장이 앉아 있다. ……눈을 감으면 앞에 있는 고약한 부장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편하게 잠들면 된다."[10]
루이스 캐럴은 위와 같은 (오해된) 유아론적 사조를 「앨리스」 시리즈에서 다음과 같이 좀 더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썼다:
"그는 지금 꿈을 꾸고 있어. 그가 무슨 꿈을 꾸는 것 같니?"
트위들덤이 물었다.
"그걸 누가 알겠어."
앨리스가 대꾸했다.
"이런, 바로 너에 대한 꿈이야!"
트위들덤이 의기양양하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왕이 너에 대한 꿈을 다 꾸고 나면, 네가 어디에 있을 것 같니?"
"그야 물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지."
앨리스가 말했다.
"틀렸어!"
트위들디가 거만하게 말했다.
"너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너는 그의 꿈에 나오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왕이 잠에서 깨어나면."
트위들디도 거들었다.
"너는 사라질 거야. 휙! 촛불처럼 꺼져버리는 거지!"[11]
그러나 버클리는 이러한 오해를 이미 반박하고 있었으며
"위의 원리에서 제기되는 네 번째의 이의는, 사물들은 매 순간마다 소멸되고 새롭게 창조된다고 하는 것이다. 감각 기관의 대상들은 지각될 때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무와 의자는 누군가가 그것을 지각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정원이나 거실에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눈을 감아 버리면 방 안에 있는 모든 가구는 무(無)로 돌아가 버리며, 눈을 뜸과 더불어 그것은 다시 창조된다. 이 모든 것의 대답으로 독자들은 3절과 4절을 보기 바라며, 나는 독자들이 실제로 현존하는 관념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그 관념을 지각하는 것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즉, 물질주의자들에 따르면 물질과 물질의 각 부분은 무한하고 형체가 없으며, 정신은 가시적 세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모든 물체를 형성하고, 그 가운데 어떤 물체는 지각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제기된 이의가 우리가 위에서 제기한 원리에 대해서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어쨌든 우리의 생각에 대한 이의로서는 결코 타당할 수 없다는 점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실제로 감각 기관의 대상들을 지각되지 않은 채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관념으로만 간주한다고 할지라도, 이로부터 우리는 그 대상들은 우리들에 의해서 지각되는 동안에만 현존한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비록 우리가 실행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대상들을 지각하는 다른 정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12]
즉 내가 그걸 보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걸 볼수 있지 않겠느냔 소리다. 개개인의 주관적 정신이 아니라 버클리는 '하느님의 눈'[13]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영원의 관점에서'(논고, 6.45) 생각하려고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버클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버클리와 칸트는 매우 깊은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14]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5.61 ……사고할 수 없는 것을 사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5.62 이런 견해가 유아론은 어디까지 진리인가 하는 물음에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즉 유아론이 말하려는 바가 전적으로 옳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낼 뿐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하는 데서 드러난다.
5.621 세계와 삶은 하나이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후기에 이르러 장년이 된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통렬하게 반박된다.

3.3. 논리학에 대한 견해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 자체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 빈번히 일어나는 혼동으로 가득하고,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상징에 같은 기호가 사용되거나 표현 방법이 다른 기호가 겉으로 보기에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는, 오류를 배제한 기호언어, 즉 논리적 문법-논리적 구문론-을 충실히 반영한 기호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프레게와 러셀의 개념기호법은 모든 결함을 배제하고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언어의 하나이다.)(3.323, 3.324). 따라서 「논고」에서는 기본적으로 기호논리학을 사용한다. 사용되는 기호는 다음과 같다.[15]
기호
[math(p,\ q,\ r)] 명제(특히 요소 명제)를 나타내는 기호들.
[math(p \lor q)] p와 q의 선언. "p이거나 q이다."
[math(p\ .\ q)] p와 q의 연언. "p이고 q이다."
[math(p \supset q)] p가 q를 함축. "p이면 q이다."
[math(p \equiv q)] p와 q의 동치. "p이면 q이고, q이면 p이다."
[math(p \mid q)] p와 q의 동시 부정. "p도 아니고 q도 아니다."
프레게의 판단(또는 주장) 기호. 예컨대 "├ p"는 "나는 p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math(\textrm{T})]
[math(\textrm{F})] 거짓
(TFFT)(p,q) 진리표의 생략적 표현. (TFFT)(p,q)는 따라서 p≡q이다.
[math(K_n)] n개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 가능성의 수. 2^n. 예: p와 q, 2개의 사태는 4가지(TT)(FT)(TF)(FF). p와 q와 r, 3개의 사태는 8가지(TTT)(TTF)(TFT)(TFF)(FTT)(FTF)(FFT)(FFF)
[math(L_n)] 어떤 한 명제와 n개 요소 명제의 진리 가능성들과의 일치 및 불일치에 관한 가능성의 수. 2^(2^n).
[math(T_r)] 명제 "r"의 진리 근거들의 수. 명제 r이 p⊃q이면 Tr은 3이다.
[math(T_{rs})] 명제 "r"의 진리 근거들이면서 동시에 명제 "s"의 진리 근거들이기도 한 것들의 수.
a, b, c…… 대상들의 이름.
x, y, z…… 대상들의 변항. 또는 가변적 이름.
f, g, Φ, ψ 함수를 나타내는 기호들.
fa, ga 대상a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요소 명제들.
fx, Φ(x,y) 가변적 이름(들)의 함수. 요소 명제의 또 다른 표기 방법.
F(fx) 함수 fx의 함수.
(x) 보편 양화사. 예컨대 "(x).fx"는 "모든 것이 f이다."
[math((\exists\ x))] 존재 양화사. 예컨대 "(∃x).fx"는 "f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
[math(a \textrm{ R } b)] a가 b에 대해 R의 관계에 있음.
[math(\xi)] 명제 변항. 진위가 확정되지 않은 명제.
진리표
[math(p)] [math(q)] [math((p \supset p)\ .\ (q \supset q))] [math(\sim(p\ .\ q))] [math(q \supset p)] [math(p \supset q)] [math(p \lor q)] [math(\sim q)] [math(\sim p)] [math((p\ .\ \sim q) \lor (q\ .\ \sim p))] [math(p \equiv q)] [math(p \mid q)] [math((p\ .\ \sim q)] [math((q\ .\ \sim p)] [math((q\ .\ p))] [math((p\ .\ \sim p\ .\ q\ .\ \sim q))]
[math(\textrm{T})] [math(\textrm{T})] [math(\textrm{T})] [math(\textrm{F})] [math(\textrm{T})] [math(\textrm{T})] [math(\textrm{T})] [math(\textrm{F})] [math(\textrm{F})] [math(\textrm{F})] [math(\textrm{T})] [math(\textrm{F})] [math(\textrm{F})] [math(\textrm{F})] [math(\textrm{T})] [math(\textr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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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1)이며,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1.1)이다. 사실은 성립될 수 있는 사태(2)를 뜻한다. 원자적 사실을 주장하는 (참 또는 거짓인) 명제는 요소명제라고 불리며 이것은 이름(혹은 대상)으로 구성된다-그리고 이 이름(혹은 대상)은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4.1212). 요소명제는 가장 단순한 명제로 다른 요소명제를 함축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독립적이다).[16] 요소명제는 논리적 조작이 포함되어 있다(5.47).[17] 요소명제는 다른 요소명제와 관계하여 분자명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들은 사태의 성립과 불성립을 묘사하고(4.1), 참인 명제의 총체가 자연과학 전체(혹은 여러 과학의 총체)이다(4.11). 논리학의 명제는 항진명제(6.1)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고(5.142) 무의미하다(4.461). 논리는 선험적(6.13)이며(마치 빨간색 공과 파란색 공이 들어있는 상자 안에서 하나의 공을 꺼낸 것이 빨간색 또는 파란색 공인 것이 항상 참이며 빨간색 그리고 파란색 공인 것은 항상 거짓임이듯이) 명백히 뜻을 지닌 귀납법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학의 법칙이 될 수 없고 선천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6.31). 미래의 사건들은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고, 인과 연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5.1361) 세계의 의의는 세계 밖에 있어야 하며, 비우연적으로 일어나고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세계 속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테니, 그것은 세계의 밖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논리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고, 세계의 한계가 그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다이어그램을 그린다. (「논고」 6.120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ractatus-p161-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Tractatus-p159-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ractatus-p161-1.jpg
~(p.~q)의 다이어그램 p⊃q의 다이어그램 ξ.η의 다이어그램

러셀은 수를 논리적 개념들만을 써서 정의하던 중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그런 모든 집합들로만 이루어진 집합이 어떤 경우이든 모순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흔히 이발사의 역설로 불리는데 대강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마을 사람의 머리만을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다면 이발사 스스로 머리를 깎는 경우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얘기될 수 있다.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으면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으니 깎을 수 없고, 스스로 머리를 깎지 못하면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사람이 되니 깎아야 한다.뱅글뱅글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3.332에서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 기호는 자기 자신 속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형이론'의 전부이다.)"
라고 말한 뒤 3.333에서
"……요컨대 함수 F(fx)가 자기자신의 독립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F(F(fx))'라는 명제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외부 함수 F와 내부 함수 F는 상이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부 함수는 Φ(fx)의 형식을 지니고, 외부 함수는 Ψ(Φ(fx))의 형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두 함수에는 단지 'F'라는 문자만이 공통적인데, 그러나 그 문자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유형 이론은 말할 수 없는(오직 보여질 수만 있는) 것을 말하려 했고, 올바른 표기법에서 러셀의 역설은 아예 생길 수 없으며 따라서 유형 이론은 불필요하다고 한다.[18] 분명 이발사 비유에서 "이발사는 마을 사람이다." 그러나 언표 내에서의 주체 '이발사'는 언표 행위의 주체로서의 '이발사'와 다르다. 살아 움직이는 마을 사람 '이발사'는 오직 보여질 수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은 표기만 같을 뿐 언표 내에서의 '이발사'는 실은 아무것도 지칭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거짓말쟁이 역설도 풀릴 수 있는데 내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거짓말쟁이인 나'와 '거짓말쟁이가 아닌 나' 두 개가 있을 뿐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실상 무의미한 말이 된다.

'='에 대해 러셀은 차이를 식별할 수 없는 두 존재자는 동일하다는 정의를 내린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5.5303 두 사물에 대해 그 둘이 동일하다는 말은 난센스이며, 하나의 사물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래서 그는 러셀이 'a=a'나 'p는 명제이다'를 일부러 기호화하여 'p⊃p'로 쓰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f(a,b).a=b'라고 쓰지 않고 'f(a,a)' 또는 'f(b,b)'라고 쓰며, '(∃x,y).f(x,y).~x=y'라고 쓰지 않고 '(∃x,y).f(x,y)'라고 쓴다. 이러한 입장은 제거주의적으로 오컴의 면도날과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사용되지 않는 기호는 의미가 없다."며 이것이 "오컴의 격언이 말하는 바이다."라고 한다(3.328)

3.4. 수학에 대한 견해

19세기 말 유럽수학계의 주요 떡밥이었던 '집합론은 과연 수학의 토대로 적절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논고」에서도 '수학에서 집합론은 전혀 쓸데없다.[19] '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그가 고안한 진리 함수의 일반 형식으로부터 정수와 연산을 논리적으로, 그러니까 집합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도 논리적 연산만을 사용하여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 집합론을 옹호한 스승 러셀과 또 다시 대비되는 부분. 그가 집합론이 가장 앞에 나오는 오늘날의 수학 교과서들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3.5. 역설

「논고」를 읽다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동료 학자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령, 시인 줄리언 벨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러니한 태도를 풍자하며 시를 지었다.
그는 넌센스한 말을 하고, 수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침묵하라는 자신의 맹세를 깬다.
윤리학, 미학에 대해 밤이나 낮이나 얘기하고,
이것저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고 한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건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
루트비히가 법칙을 세우는 일을 피했던 것을.
사람들과 있을 때마다 우리들을 소리쳐 막고,
우리 말을 멈추게 한다. 그 자신은 더듬거리면서.
논쟁은 끝이 없다. 몰아붙이듯이, 열이 나서, 큰 소리로.
그런 잘못은 흔하며, 부분적으로 우리 모두 그렇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예술에 대해서 거만을 떠는 모습이란.[21]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6.54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명제를 통하여-그 위에 서서-그것을 뛰어넘을 때 결국 그것이 난센스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내 명제는 해명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내 명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볼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해명하였고, 또 줄리언 벨이 시를 지었을 당시는 이미 후기 철학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적절치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도 이에 대해 경멸적으로 "줄리언 벨"(독창성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고 6.54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으며 분란을 만들어 왔다. 로저 화이트는 논고 6.54의 해석에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의 노선이 있다고 설명한다.[22]

1. 귀류 논증 해석: 논고의 결론이 논고의 주장을 부정하므로 논고 자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바 없는 소극적인 비판문이라는 해석이다. 즉, 논고란 논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고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주장의 배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들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어떠한 피상적인 반론도 무시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 상위 언어로 올라가는 해석: 러셀의 해석이다.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구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언어로 향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즉, 기존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다른 명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하기 방식을 언어에 관하여 명료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지 요점을 놓친 채 얼버무려 넘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주장되는 것은 두 번째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해석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이야기와 오해뿐"이라며 비난했다.영원히 고통받는 러셀

3. 논고 6.54를 무시하는 해석: 램지의 해석이다. 6.54를 수사학적 장식 문장으로 간주하고 논고에서 의도적으로 추방시키는 해석이다. 명제 6에서 멈추는 1916년 판 논고를 진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6.5 이하의 문단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전체에 걸쳐 주장했던 핵심 입장의 마지막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것 외에는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4. 치료적 해석: 논고는 독자를 속여서 그 책의 내용이 마치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그러한 이론은 제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독자가 심사숙고해온 명제들은 스스로를 헛소리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 일을 통해서 독자는 그러한 이론을 구성하려는 충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제와 논리학의 본성을 명료하게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강렬한 열정과 부합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기묘한 치료 활동이란 이름을 빌어 그 모든 것을 내버리기 위한 초대를 했다는 점은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치료되었으면 당연히 내버려야 했을 그런 종류의 탐구를 1929년에 철학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 치료 활동이 매우 하찮은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는 점도 확실하다.

5. 전통적 해석: 귀류 논증 해석과 달리 헛소리 문장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과 '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가'를 둘 다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난점은 추가되는 사실을 만들지 않으면서, 보여지기만 하는 사실들 속의 유형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 해석은 러셀이 썼던 것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4. 기타

  • 「논고」는 난해한 내용 때문에 출판사가 출판하기를 꺼렸는데,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의 명성에 힘입어 그의 서문으로 가까스로 출판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서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그는 러셀이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출판을 진지하게 보류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가운데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비로 출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러셀은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 사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나의 해설을 싫어했다는 것, 출판업자들이 나의 해설이 들어가야만 「논고」를 출판하겠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이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이 서문을 「논고」에서 뺄 작정이었으나 알프레드 에이어가 서문이 「논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생전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 관해 글을 쓰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늘 불평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도 그의 말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 그대로 두게 된다.[23] 그러나 저자 본인이 서문에 불만을 표시했는데 후대의 편집자들이 이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점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 체계적으로 보이는 본서의 서술 방식에 대해 일본의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준엄하기 짝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 적이 있다.[24]
  • 일반적인 약자는 '논고'이나,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논철논'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어 약자는 영역본 서명의 두문자어인 'TLP'이다.
  • 한국어 번역본은 정음사에서 출간된 박영식, 최세만 공역본과 책세상에서 출간된[25] 이영철 역본이 있다. 정음사판은 현재 절판되어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찾을 수 있는데, 독일어로 된 원문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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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역본의 제목이 라틴어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인데, 이는 무어스피노자의 저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1670)에 대한 경의로 제안한 것이다.[2] "……그리고 웅성대거나 시끌시끌한 소리 말고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세 단어로 말할 수 있다."라는 퀴른베르거의 말을 「논고」의 모토로 삼았다. 거추장스러운 형이상학적 사변들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로 팽창주의적 진리론 보다는 축소주의적 진리론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3] 모토에 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은 머리글에서 "사고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고 천명하고, 그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건너편에 있는 것은 그저 난센스라고 밝힌다.[4] (저자 주) 개별 명제들의 번호인 십진법 수들은 그 명제들의 논리적 무게, 즉 나의 서술 속에서 그 명제들에 놓인 역점을 암시한다. n.1, n.2, n.3 등의 명제들은 n번 명제에 대한 소견들이다. n.ml, n.m2 등의 명제들은 n.m 번 명제에 대한 소견들이다. 그리고 나머지도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2020. 19p.)[5]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UTB-Schöning, Paderborn, 1996.[6] 마르틴 하이데거,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이정표2, 99, 103, 104. 강조는 원문 및 나무위키 편집자.[7] 아즈마 히로키,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5) 존재론적 우편적, 271~272. 강조는 원문. 젊은 시절의 아즈마 히로키는 둘 중 하이데거 편에 기울어져 있다.[8] 같은 책, 278.[9] 조지 버클리, 문성화 옮김.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인간 지식의 원리론, 69~71, 75.[10] 박일호. (네이버 캐스트, 2010)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11] 루이스 캐럴, 마틴 가드너 주석, 최인자 옮김. (북플리오, 2010) Alice, 269. 러셀은 루이스 캐럴의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철학적인 견해로 보면 대단히 교훈적인 논쟁이기는 하지만, 만약 웃기게 쓰이지 않았더라면 사실 읽기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12] 조지 버클리, 문성화 옮김.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인간 지식의 원리론, 135~141.[13] 같은 책, 325. "……전능한 정신의 편재와 성스러움 그리고 정의의 철저한 감각에 의해 관통되고 계몽된 영혼이 자기 법칙의 무자비한 훼손을 고집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 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눈이 도처에서 선과 악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이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현재하고 우리의 가장 내적인 사상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절대적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하느님에 의존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중요한 점들에 대해서 완전하고 의심할 바 없는 확신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지하고도 끈기 있게 심사숙고해야만 한다."[1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674.[1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144~145. 부록 참고.[16] 이와 같은 생각은 과도기(「청색책·갈색책」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부정된다.[17] 이에 대해서 박정일 씨는 "사실상, p라는 요소 명제는 p ∨ p, p & (~p ∨ p), p ∨ (p ⊃ p) 등과 동치이므로, 그 요소 명제에는 ~, ∨, & 등과 같은 논리적 상항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며, 김양순 씨는 "요소명제-부정 '~', 논리합 '∨', 논리곱 '·' 또는 '(x)'나 '(∃x)'등의 논리기호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 형태로, 이름의 배열로서 나타낼 수 있는 명령을 '요소명제'라고 부른다. 요소명제를 부정하거나 논리정항에서 접속함으로써 복합적인 명제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1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36. 옮긴이 주.[1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97.[20] 그러나 러셀은, 그의 기획은 아주 독창적이나 초한수를 다루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고 언급했다.[21] (평전, 372~373). 원문은 다음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줄리언 벨은 이 풍자가 비트겐슈타인 개인을 공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와 철학적 업적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비트겐슈타인의 도덕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22] 로저 화이트, 곽강제 옮김. (서광사, 201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 한다, 268~291.[23]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하, 405, 406.>[24] 아사다 아키라, 이정우 옮김. (새길, 1995)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184. "ᆢ준엄하기 짝이 없는 체계를 구축해 보인 비트겐슈타인ᆢ" 아사다 아키라는 이 책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나 논리실증주의나 모두 상품화되어 자본주의의 소비 회로에 갇혀버린다며 '유희의 시대'의 무차별적ᆞ무자비한 소비구조의 강력한 파괴력을 역설했다.[25] 이전에 '천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책세상 비트겐슈타인 선집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