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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오스트리아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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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관계. 한국과 오스트리아 간 교류는 위의 사진에 '1892'라고 써 있듯이 1892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부터 시작되었으며 각각 조선·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오헝제국에서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국가승계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양국 모두에서 동의하고 있다.[1] 단 한국-헝가리 관계는 따로 친다. 헝가리의 공산국가 시절도 있었을 뿐더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헝가리라는 이름이 붙었을지언정 결국은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것이었고 헝가리는 따라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인 점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두 나라는 현재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9년 재외동포 현황(외교부)[2][3]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약 2,500명의 교민이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바 있다.두 나라 사이에 워킹홀리데이 협약이 맺어졌다.
2. 역사적 관계
2.1. 19세기
2.1.1. 수교 이전
오스트리아인과 한국인의 최초 접촉은 청나라 베이징에서 이루어졌다. 당대 베이징에 머물던 예수회 선교사들 중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령 출신자들도 일부 존재했는데, 그들이 조선이 파견한 연행사와 만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카르니올라 공국 출신의 청나라 흠천감정 페르디난트 아우구스틴 폰 할러슈타인(A. Von Hallerstein)으로, 그는 담헌 홍대용와도 만나 토론을 여러 차례 나누었다.[4] 그는 홍대용의 서양 천문학 이해에 도움을 준 인물 중 하나다.한편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가 파견한 노바라 탐험대는 각국의 서적을 구매해 빈으로 가져오는 임무 역시 맡고 있었는데, 그들의 목표 중 하나에는 한국어 서적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방문하지는 않았으나 홍콩에서 영국인 선교사 메드허스트가 쓴 한국어 단어사전인 '조선위국자휘'를 구해 본국으로 가져갔다.
오스트리아 선박으로서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제국 황립 해군의 포함인 SMS 나우틸루스 함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는 오늘날과 달리 중남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제국이었고, 해안선은 물론이고 견실한 해양력도 보유했다. 나우틸루스 함은 1884년부터 동방 국가들을 친선 방문하는 장거리 탐사 항해 중이었고, 1886년에 조선에 들렀다. 즉 제국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포함외교의 성격이 있었다. 나우틸루스 함은 조선 방문 후 러시아 제국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찍고 다시 돌아갔다.# 나우틸루스함의 아시아 탐사는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지난 2020년에야 독일에서 연구서가 출판되었다.
비슷한 시기 오스트리아인들이 조선에 알음알음 들어오고 있었다. 가령 1880년대 제물포에는 '요제프 슈타인벡(Joseph Steinbech)'이라는[5] 헝가리계 오스트리아인이 아내, 그리고 양녀와 함께 꼬레호텔(Hotel de Coree)이라는 호텔을 운영하기도 했다. 2층 건물이었던 꼬레호텔은 사교를 위한 살롱에서 다양한 종류의 주류를 취급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다 카운터에서 일하던 슈타인벡의 양녀 '한나'를 보기 위해 외국 해군 수병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한나는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튀르키예어를 포함해서 수많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인들은 양국 간 통상조약의 미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에 대한 업무 대행은 일찍이 조선과 수교를 맺은 독일 제국의 주한독일공사관이 대리해야 했다. 가령 상술한 슈타인벡의 경우 제물포에 억류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의 신원보장에 나서곤 조선 측에 그를 풀어줄 것을 요청했던 주체는 다름 아닌 독일공사관이었다.
2.1.2. 수교와 속방조회 사건
1890년 1월, 오스트리아는 주일 공사 김가진을 통해 조선에 통상조약 체결 의향이 있음을 알려왔다.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정부 간 첫 접촉에서 오스트리아는 좀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동년 8월에는 블라디미르 폰 키텔 제독이 코르벳함 SMS 즈리니를 타고 와 인천 제물포에 정박해 독일 영사의 환대를 받았다.즈리니 함을 타고 온 대사들은 조선 독판교섭통상사무(외교부 장관) 민종묵과 만나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을 논의했는데, 이때의 분위기는 퍽 우호적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측의 사절단 대표는 상하이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총영사 요제프 폰 하스(Josef von Haas)였다. 하스 총영사는 앞선 1883년부터 1884년까지 한양에 체류하며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휘하의 해관에서 근무한 바 있었기에,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드문 한국통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동아시아에서 잘 알려진 국가가 아니었으며 그들 외교단의 등장은 꽤 갑작스러웠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와 우호 관계에 있던 독일 영사가 개입하여 군인인 키텔 사령관을 직접 민종묵에게 소개하자, 조선 외교 당국 측에서는 이를 독일의 내정 간섭 시도로 여겨 꽤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상대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조선 측에서는 우선 주한프랑스공사 콜랭 드 플랑시를 호출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고는 오해를 풀었다. 조선 외교 당국에서는 곧 수교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막상 오스트리아 사절단은 국교 체결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기에 조선 측의 의사만 확인한 후 훗날 돌아오겠다고 밝히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시점이 신정왕후 조씨의 장례 기간이었기에 오스트리아 사절단은 국왕 고종을 알현하지는 못했다.[6]
그리고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일본 주재 아시아 전권대사 뤼디거 폰 비겔레벤 남작(Rüdiger von Biegeleben)[7]을 통해 조선과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조선 측에서는 주일공사 김가진을 대신하여 권재형이 조약 체결의 전권을 가지고 파견되어 협상을 진행했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던 조선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의 외교수립 과정에서는 청나라가 모르게 비밀스럽게 처리하고자 했다.
협상 도중에 별 문제는 없었지만 오스트리아가 속방조회 수령을 거부하는 사태가 잠깐 있었다. 속방조회는 청나라의 압박으로 만들어진 문서인데, 타국과의 조약문에 조선이 청의 속방, 즉 보호국이라는 것을 명시한 조항이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부터 이어져 온 관례였다. 본래 청나라가 조약 전문에 넣으라고 압박했으나 미국이 거부했고, 때문에 조약의 부속 조항으로라도 삽입하게 된 것. 아직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8]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서 오스트리아와의 조약문에도 이를 집어넣어야 했다. 청나라 모르게 비밀스럽게 추진했으면서도 속방조회를 넣은 이유는, 안 넣었을 때의 뒷감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청나라가 알게 되면 이를 빌미로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할 것이 뻔했으며, 그럼 그동안 조선이 추진한 자주화 노력은 전부 헛수고가 된다. 또한 기존의 관례를 멋대로 깬 비밀조약이 되어 훗날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비겔레벤 남작이 속방조회를 거부한 이유는, 속방조회가 너무 사무적이어서 조약 체결이 다 끝나고 군주 간에 서로 교환하는 친서[9]의 관례를 깨는 부적절한 문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군주 산하의 정부 대 정부끼리 교환하는 문서로 격하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홍익대 역사교육과의 민회수 교수는 비겔레벤 남작이 속방조회의 내용을 오해했다고 본다. 그는 이 문서가 제3국의 간섭을 원천차단하는 선언이 일방적으로 담긴 문서라고 판단했다. 속방조회문은 청나라의 우위를 명시한 문서이지만, 그 영어번역본은 조선의 내치 및 외교의 자주성이 더 두드러지게 명시되었다. 즉 비겔레벤은 속방문서에 대해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외교적 관례를 깨고 집어넣은 문서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 입장에서는 여태껏 다른 서양 국가들과 수교 맺을 때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던 걸 오스트리아가 갑자기 걸고 넘어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항의하고 설득해도 오스트리아는 이 문서는 자신들의 황제에게 못 가져간다고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외교적 조언을 구했다. 위안스카이와 이홍장은 이 문제를 청나라 정부에 보고했고, 얼마 뒤 오스트리아는 속방조회를 받아들인다. 다만 이 중간 과정은 자료가 없어 청나라와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이 자신들을 사실상 패싱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던 것에 대해 위안스카이와 청나라가 매우 불쾌해하였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확실한 건 어찌되었건 얼마 후 오스트리아가 속방조회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893년에는 알로이스 폰 베커 함장이 지휘하는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10]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11]을 태우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던 와중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독일공사관에서 통상조약을 승인하는 제국의회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비준서를 조선 측에 전달하고 고종의 답을 받아갔다. 다만 페르디난트 대공이 조선에 오지는 않았는데, 당시 그는 이미 직전의 기항지인 일본에 내려 수행원들과 일본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준서 교환 후 조선 측은 연회를 열어 사신단을 배웅했고, 베커 제독은 선물로 소총 20자루와 탄약 3통을 전달했다.[12] 2022년 공개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 두정갑은 바로 이때 답례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베커 제독과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은 조선에서의 일정을 마지막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 # #[출처] 해당 갑옷은 현재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수교 130년만인 2022년에 잠시 국내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과 빈 미술사박물관의 콜라보 전시인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에서 23년 3월 1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이 오스트리아 사신단의 방한은 또다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때 베커와 조선 조정 사이에 차후 조선 국왕을 황제로 칭하는 것에 대하여 최초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황제를 칭하지는 못했으나, 실제로 조오수호통상조약과 그 부속 문서들에는 다수의 황제국 용어가 사용되었다.
2.1.3. 수교 이후
1897년에는 수도 빈에서 작곡가 요제프 바이어가 청일전쟁기의 조선을 무대로 한 발레극 《코레아의 신부》(Die Braut von Korea)를 선보이기도 했다. 조선 왕자와 양반가 딸 다서(원문은 Daisha 다이사)의 사랑을 주제로 한다. 이 발레극은 2003년 재발견되어 초연 125년 후인 2022년에야 한국에서 공연되었다.1901년에는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해군 함선 네 척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톈진 대고구 요새 공방전에 투입되었던 방호순양함 SMS 센타 함은 일본 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제물포에 잠깐 들렀는데, 훗날 제국 해군의 잠수함 에이스이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유명한 게오르크 폰 트라프 소령이 사관생도 신분으로 승선 중이었다.
이때 장갑순양함 SMS 마리아 테레지아 함도 같이 제물포를 찾았다. 당시 테레지아 함에는 훗날 제국 해군의 현대화를 주도하는 루돌프 몬테쿠콜리 소장이 오스트리아 원정함대 사령관으로써 승선 중이었고, 10년 뒤 제국 해군의 주요 요직을 겸직하며 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하는 안톤 하우스 원수 역시 대령 신분으로 함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함대 사령관 몬테쿠콜리 제독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상경하여 덕수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1902년 3월 31일, 대한제국 정부는 양국 수교에 가교 역할을 한 전권대사 비겔레벤 남작에게 태극장을 수여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에서는 제국 육군 후사르 기병대 대위이기도 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14] 레오폴트 클레멘트 필리프 아우구스트 마리아 공자에게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그 부관 로렌츠 미하엘에게 태극장을 수여하였다. 실록에는 수여 사실만 적혀 있어 레오폴트 공자가 어느 경위로 금척대수장을 받았는지는 불명이다. 그는 독일 제국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와 함께 단 둘뿐인 비아시아권 금척대수장 수상자이다.[15]
2.2. 20세기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단교했다가 1963년에 외교 관계를 복구했다. 주 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공식적인 수교 연도를 1892년으로 명시하고 있고, 2012년에는 수교 120주년 행사도 열었다. 그 이전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의 고향이 오스트리아였던지라 이미 간접적인 외교 관계는 맺고 있었다.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기도 해서 1974년에는 북한과도 수교했다. 1988 올림픽에도 참가했는데 가나다순으로 입장했기 때문에 ㅇ으로 시작하는 오스트리아는 중간 정도에 입장했다.2.3. 21세기
2012년 7월 31일 런던 올림픽 여자 펜싱 에페 개인전 준결승전에서 주심인 바바라 차르 심판이 신아람에게 오심을 내려 논란을 일으켰다. [16]2018년 10월 26일에 박종범 오스트리아영산그룹회장이 국회헌정회관에서 열린 '제3회21세기장보고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2019년 2월 15일에 이낙연총리는, 서울정부청사에서 오스트리아의 피셔 前 대통령을 맞이했고, "세계시민과 국제평화를 위해 더 많이 기여해달라"고 요청했다.# 2019년 6월 14일에 광주시는 박종범 오스트리아 영산그룹회장과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승효상 건축정책위원장은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학술예술 1급 십자훈장을 받았다.# 10월 31일에 한국-오스트리아 필하모닉이 빈에서 개최된다고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이 밝혔다.#
2019년 2월 14일에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가는 관광객도 많은 편이다. 역사적인 이유로 동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기 때문에 한국내의 여행사에선 오스트리아를 동유럽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독일어 어학연수를 받기 위해 독일외에도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받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한글과컴퓨터는 독일, 오스트리아에 한컴오피스를 출시했다고 밝혔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는 유럽 시장 공략 강화를 위해 오스트리아 법인을 신설했다고 밝혔다.#
2.3.1. 2020년대
LG전자의 차량전장 자회사 ZKW가 코로나19 여파로 오스트리아 공장 생산량 감축에 나섰다.#2020년 4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를 나눈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가 대한민국은 단호하고 빠른 대응을 통해 코로나19과의 싸움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호평했다.#
오스트리아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항공기 착륙을 금지한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8월 28일, 쿠르츠 총리는 한국과 협력하고 싶다고 밝혔다.#
10월 29일, 오스트리아의 유력 일간지 비너 차이퉁[17]은 한국의 K-방역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2021년, 문재인 대통령이, G7의 초청을 받아 영국에 방문한 후의 일정으로서,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초로 오스트리아에 국빈 방문을 하게되었다.#
이번 방문은 2022년 양국 간의 수교 130년을 앞두고 이뤄진 것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첫 수교가 이뤄진 1892년 이후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는 한국은 혁신적인 국가로 양국 협력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2022년 10월 23일, 양국 외무장관이 회담을 가지며 북한의 핵개발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23년, 오스트리아에 세종학당이 들어섰다.#
3. 여담
소록도 수녀로 유명한 마리안느 수녀의 출신지기도 하다.축구 선수 서정원, 노병준, 홍순학, 황희찬, 이진현이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활약했던 바 있다.
4. 대사관
양국은 서로 대사관을 두고 있다. 한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가 교보생명빌딩 21층에 있으며, 오스트리아 주재 한국 대사관은 오스트리아 빈의 그레고어 멘델 거리에 있다. 오스트리아 주재 한국 대사관은 슬로베니아와 코소보의 외교 관계도 겸임한다.5. 관련 문서
- 대한민국/외교
- 오스트리아/외교
- 조오수호통상조약
- 주 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 겸 주 빈 국제기구대표부
- 대한민국/경제
- 오스트리아/경제
- 대한민국/문화
- 오스트리아/문화
- 한국인 / 오스트리아인
- 한국어 / 독일어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1] 공관연혁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2] ▷ 「재외동포현황(2019년)」 다운로드 후 243/352 page 참조[3] 오스트리아의 재외동포 현황 (외교부)[4] 당시 홍대용은 할러슈타인이 머물던 천주당 남당에 네 차례나 방문했다.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해 보았다는 일화 역시 이때의 일이다.[5] 이사악 슈타인벡(Issac Steinbech)이라고도 한다.[6] 출처: 주한프랑스공사관 문서[7] 조선왕조실록의 표기는 로제트 비르게본. 뤼디거 남작의 프랑스어/영어식 이름인 로저 드 비겔레벤(Roger de Biegeleben)을 한자로 표기하면 '洛蕊特畢格勒本'인데,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8] 정확히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나라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강했던 시기였다.[9] 보통은 서로 우호적인 덕담만 하고 끝난다.[10]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에 침몰한 그 함선 맞다.[11]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는 그 사람 맞다.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제국 추정상속인이었다.[12] 만리허 소총과 그 탄약일 가능성이 높으나, 확인되지 않았다.[출처] 민회수. (2009). 조선-오스트리아 수호통상조약(朝墺修好通商條約) 체결의 정치적 의의. 규장각, 35, 151-184.[14]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헝가리계 분가이다.[15] 여담으로 벨기에의 루이즈 공주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꽤나 험하게 죽었다. 평민인 카밀라 리비카와 결혼하려다가 귀천상혼으로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결혼을 취소했는데, 분노한 카밀라가 그의 얼굴에 황산을 뿌리고 리볼버를 난사했다. 끔찍하게도, 그는 바로 죽지 않고 6개월이나 더 고통받다가 사망했다.[16] 이 사람의 만행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분노하여 그녀의 SNS에 테러를 저지르는 동시에 마녀 취급을 하였다. 그리고 리우 올림픽부터 안 나오는 것 보면 차르가 올림픽에서 평생까임권을 받고 있는 셈이다.[17] 1703년 8월 8일부터 발행된 오스트리아 정부 소유의 일간지로, 소유만 정부고 편집은 독립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2023년 들어 EU 디지털 지침이 시행으로 수익이 급감하며 결국, 2023년 6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일간지 부분을 폐간했다. 이와 별개로 인터넷 신문은 계속 운영하고 있으며 월간지로 전환도 고려 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