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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독일공사관 駐韓德國公使館 Gesandtschaft der Deutsches Reich in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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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colbgcolor=#dd0000><colcolor=#fff> 상급기관 | 독일 제국 외무청 | |
영사관 설립 | 1885년 | |
공사관 승격 | 1903년 | |
공사관 폐쇄 | 19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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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독일 공사관. 회동에 있던 시기에 찍은 것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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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중구에 있었던 독일 제국의 옛 공사관이다.2. 역사
1883년(고종 20년)에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독일 정부는 한성에 영사관을 설치했다.처음에는 지금의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뒤편인 낙동에 영사관을 두었다. 그러나 건물이 좁고 낡아서 근처의 빈집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조선 측에 여러 번 요청했으나 계속 거절당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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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박동 시절 독일 영사관. 원래 민겸호와 묄렌도르프가 살았던 집이었다. |
그러다 1886년(고종 23년) 11월에 지금의 수송동인 박동으로 옮겼다. 박동 영사관 건물은 원래 왕실의 별궁인 용동궁으로, 한 때 민겸호가 살았던 집이었다. 민겸호는 부정부패를 일삼아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 집에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아 비어있던 곳을 조선 정부에서 청나라의 파견으로 온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했다. 그러다 묄렌도르프가 1885년(고종 22년)에 청나라로 돌아가 다시 비어있던 상태에서 독일영사관이 입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독일 회사 세창양행[3]에서 독일영사관 땅이 자신들 소유라고 주장했던 것. 묄렌도르프가 조선을 떠나면서 세창양행에 땅을 팔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1890년(고종 27년)에서 1891년(고종 28년) 사이에 서소문동에 있던 왕립 학교 육영공원 자리로 영사관을 다시 옮겼다.[4]#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일대이다. 1892년(고종 29년)에 조오 수호 통상 조약[5]이 체결된 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교 및 통상 업무를 대신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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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서소문동 시절 독일 영사관[6] |
그런데 독일영사관은 다시 자리를 옮겨야했다. 1897년(건양 2년) 이후 고종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면서 그 일대에 관청을 지으려 했는데 독일영사관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00년(광무 3년) 3월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독일영사관 땅을 5만 5천원에 매입했고, 회동에 있는 국가 소유의 땅을 함께 주었다. 이에 독일영사관은 회동으로 이전했다. 다만 새로 건물을 짓느라 바로 이전하지 못했고 1902년(광무 6년)에 공사를 끝낸 후에야 옮겼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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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회동 시절 독일 공사관[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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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 독일공사관에서 촬영한 북문과 뒷뜰의 모습. 뒤에 숭례문이 보인다.[9] |
1년 뒤인 1903년(광무 7년) 5월에 공사관으로 승격했으나 불과 2년 뒤인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가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독일의 국교는 끊겼다. 독일공사관은 다시 영사관이 되었고 1906년(광무 10년)에 또 다시 돈의문 밖 평동 26번지로 이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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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평동 시절 독일 영사관[10] |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영사관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독일이 일본의 적국이 되면서 영사관은 문을 닫았다. 서울[11]의 독일영사관은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인 1928년에 다시 생겼으나 예전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광화문통[12], 서소문정[13]을 전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폐쇄했다. 이후 조선 관련 업무는 중국 다롄에 있는 영사관에서 담당했다. 한국 - 독일 외교관계는 8.15 광복 이후 10년 뒤인 1955년에야 다시 재개되었으며 현재 주한독일대사관은 서울특별시 중구 한강대로에 있는 서울스퀘어 빌딩에 입주해있다.
회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다시 사들여 탁지부 관리들의 구락부로 활용했고, 이후 경성구락부와 남대문세무서에서 사용하다가 1970년 경에 민간 소유로 넘어간 후 헐렸다. 평동에 있던 영사관 건물은 1920년 6월에 조선식산은행에서 6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3. 건물
4. 여담
5. 같이보기
[1] 사진 출처 - 서울스토리.[2] 이미 프랑스 정부에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3] 묄렌도르프의 후원으로 제물포에 진출했고, 이후 각종 근대 문물(군함도!)을 수입하는 창구 역할을 한 회사이다.[4] 육영공원은 전동으로 이전했다.[5] 조선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통상 조약.[6]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7]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8] 왼쪽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오른쪽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9] 사진 출처 - 《문화일보》[10]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11] 당시 이름은 경성.[12] 지금의 세종대로.[13] 지금의 서소문로.
오른쪽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9] 사진 출처 - 《문화일보》[10]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11] 당시 이름은 경성.[12] 지금의 세종대로.[13] 지금의 서소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