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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계.헝가리는 약 30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와 한 나라를 이루어왔는데, 이 관계를 단순한 지배-피지배국 관계로 볼 수만은 없다. 아래에서도 다루듯 가장 큰 변수는 오스만 제국으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도 달갑지는 않지만 오스만 치하에 놓이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입장이었다.[1] 정복이 아닌 혈연을 통한 선출로 헝가리를 지배한 오스트리아는 안그래도 왕권이 약한데 전란까지 잦아 헝가리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왕만 같은 다른 나라였다.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서 대타협을 통해 이중제국으로 거듭난 것도 동군연합을 근대화한 것에 가깝다.
이후 이중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는 소국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전간기, 제2차 세계 대전, 동서 냉전 등의 풍파를 겪으면서 한 나라였던 시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양국은 현재 유럽연합의 회원국으로 정치적으로도, 시민 인식으로도 매우 사이가 좋은 편이고 교류와 협력도 활발하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게르만족이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게르만족들이 떠난 지역에 고대 슬라브족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바르인이 동유럽을 압박하자 슬라브인 상당수가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일대에 정착하고 후에 대 모라비아 왕국을 세웠지만, 프랑크 왕국이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모라비아 왕국은 몰락하고 분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볼가강 유역에서 서진해온 마자르인이 모라비아 왕국 동부의 슬라브인을 정복하고 푸스타 평원에 정착했다.푸스타에 정착한 마자르족들이 유럽 각지를 침공, 약탈하자 오토 1세가 이끈 독일 제후 연합군은 현재 오스트리아의 레히펠트 평원에서 마자르 대군을 격파하고 푸스타 평원으로 몰아냈다. 이후 마자르인은 유목생활을 접고, 1000년에 가톨릭으로 개종, 헝가리 왕국으로 거듭났다.[2]
레히펠트 전투에서 승리한 오토 1세는 독일, 더 나아가 중부 유럽 일대의 구원자로 이름을 날리며 962년에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그에게 수여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를 만들게 되었다.
2.2. 근세
오스만 제국이 유럽 동남부로 진입하면서, 이 지역에 있던 과거의 독립 국가들 - 특히 대헝가리와 그 주변부의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 은 이제 자투리 영토만 남은 국가에 대해 합스부르크에 보호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근본적으로 독일계 국가였던 신성 로마 제국은 중-동부 유럽의 다종족, 다민족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변모했고, 이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1806년 이후로도 지속되어 1918년까지 존재했다.[3]
합스부르크 제국의 특수성은 그 다종족적, 다민족적 특성이 아니라 이 다민족 제국을 유지시킨 요인에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독일인들은 특별히 인구가 많거나 군사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즉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이들 기독교 영토에 가하는 더 큰 위협이 없었다면, 합스부르크는 결코 유럽 동남부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거나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합스부르크는 방어 세력으로 생겨난 제국이었다. 동남부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중 차악으로 어쩔 수 없이 합스부르크를 택했다.
민족 / 아자 가트, 알렉산더 야콥슨
합스부르크 제국의 특수성은 그 다종족적, 다민족적 특성이 아니라 이 다민족 제국을 유지시킨 요인에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독일인들은 특별히 인구가 많거나 군사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즉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이들 기독교 영토에 가하는 더 큰 위협이 없었다면, 합스부르크는 결코 유럽 동남부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거나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합스부르크는 방어 세력으로 생겨난 제국이었다. 동남부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중 차악으로 어쩔 수 없이 합스부르크를 택했다.
민족 / 아자 가트, 알렉산더 야콥슨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은 1526년 모하치 전투의 패배 이후 영토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으며, 잔류한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서부 일부가 합스부르크 헝가리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일대는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제1차 빈 공방전을 벌인 이후 영토를 두고 대치를 계속하였다. 이후 한동안 헝가리 대부분 지역은 오스만 헝가리란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83년 퇴쾨이 임레의 상 헝가리 봉기로 인해 촉발된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승리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 헝가리, 에르데이 공국을 정복하면서 헝가리 영토 대부분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동부 에르데이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들은 퇴쾨이 임레의 양아들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군 대부분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빠져나간 틈을 타 쿠루츠 봉기를 일으켰으나,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인 귀족들이 이끌고 온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농민병에게 막히며 헝가리 독립시도는 좌절되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절대군주제가 강화되고 이 과정에서 헝가리 마그나트(대귀족)들과 합스부르크 헝가리 국왕 사이에 갈등이 빈번해졌다. 당시는 헝가리인 상당수가 개신교 신도이던 상황이었고 합스부르크 내 독일인들은 상당수가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이는 종교적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약해지는 것과 비례하여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헝가리인들의 봉기와 소요가 증가하였다.
오 헝가리여! 그대들의 제국은 12개 주로 이루어졌었으나 이제는 그 열두째 주에서도 (독일인 이주민들 때문에) 일부분으로 밀려났다. 진정한 헝가리인이라면 독일인들이 구교, 신교의 구분 없이 모든 헝가리 민족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헝가리의 가톨릭 주교들과 개신교 성직자들은 자산을 빼앗겼고, 궁궐의 시종들은 자리를 보전했지만 독일인들에게 굴종하게 되었다. 국경 지대의 성을 수비하는 헝가리인 병사들은 급료도 존중받지 못한다. 합스부르크 위정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기상천외한 신종 세금을 매겨 가난해진 헝가리 민족의 영혼과 육신을 도마에 올려 토막낸다. 그대 헝가리인의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있다면 깨어나 내 형제들을 사랑하고 맞서 싸워라!
헝가리인 봉기 지도자 페트로치 이슈트반
헝가리인 봉기 지도자 페트로치 이슈트반
2.3. 19세기
자세한 내용은 대타협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성 이슈트반 왕관령 문서 참고하십시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위협에 맞서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제국을 선포하건 말건 이는 헝가리와 상관이 없었다. 이후 1848년 헝가리인들의 봉기를 간신히 진압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에게 연달아 패전하며 이탈리아 반도와 독일 연방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국제적으로도 엄청나게 위신이 실추되었고,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건넨 제안을 헝가리인들이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대타협이 이루어지고, "이중제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고, 과거 헝가리 왕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주장 하에 당시 골골거리던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면서 발칸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일대를 점령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여 진압군까지 파견해주었으나, 얄궂게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반도로 확장하면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이해관계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웠던 반면 독일계 오스트리아와 우랄계 헝가리 모두 슬라브인이 아니었고 오헝 제국은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면서 범슬라브주의와 충돌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중제국은 언뜻 보기엔 피지배인인 헝가리인에게 이름뿐인 자치를 준 것처럼도 보일수도 있다. 실제로 몇몇 부분에서 헝가리인이 양보해야 할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헝가리인은 이중제국 체제 내에서 지배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독일어권인 서부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주변부 산악 지대인 보헤미아 왕국(체코)을 포함했고, 동쪽 헝가리 왕국에서는 헝가리어를 쓰는 지주 계층이 법원 정치가 가능한 군 조직을 통해 시골의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이 지주들은 남아메리카의 플렌테이션 농장 소유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헝가리인 지주들은 흑인 노예 대신 현지인(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 자카르파탸의 우크라이나인 및 루신인, 슬로바키아 산악 지역의 슬로바키아인 및 헝가리 남부의 세르비아어를 사용하는 세르비아인 등등의) 농업 노동자들에게 의존했다. 1848년부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농노제를 폐지하였으나, 대타협 이후 헝가리인들은 영내 슬라브인과 루마니아인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일이 없도록 선거 제도를 조정하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대타협 문서에서도 보듯 기존 지배층인 오스트리아도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오스트리아가 그냥 선심 써준 것이 아니라 당장에 제일 큰 피지배 민족인 헝가리인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내주지 않았다간 제국이라는 체제가 위험했기 때문에 이러한 폭넓은 자치권의 성립이 가능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를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 지역의 국민 감정은 우호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헝가리인들은 헝가리의 독립 내각 구성을 강력히 지지해 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를 오스트리아인 못지않게 사랑한다. 빈 시내의 황실묘지(Kaisergruft)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관과 나란히 엘리자베트 황후의 관이 놓여 있는데, 이 관 앞은 수많은 헝가리인들이 놓고 간 헝가리 국기 색깔의 리본, 화환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부다페스트에선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와 정교한 동상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2.4.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각 구성국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도 분해되어 독립국이 되고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헝가리는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서 다스리는 왕 없는 왕국이 되었다. 30년대에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고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이후 두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패배했다.냉전당시에 헝가리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소련, 영국, 프랑스, 미국이 오스트리아를 중립국으로 삼는다고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달리 분단되는 일을 피했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80년대에 동구권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동독주민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독으로 대거 망명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측에서도 냉전이 끝나자 국경지역의 철조망을 제거했고 헝가리도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2.5. 21세기
현대에는 양국은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기도 했고 2004년에 헝가리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양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었다. 양국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된 이후에도 교류, 협력이 활발하다. 경제적인 교류도 활발한 편이고 양국의 정치인들은 교류도 많이 있다.독일어와 헝가리어는 유럽연합의 공식 언어에 속해 있다. 경제적인 교류도 활발하기 때문에 헝가리인들 중에는 오스트리아로 일하러 가는 경우가 많다.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많이 받은 상황에서 냉전 시기를 거치며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경제적으로 격차가 커진 결과 헝가리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동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3. 문화 교류
역사적으로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문화교류도 활발한 편이다. 헝가리는 독일외에도 오스트리아와 교류가 많기 때문에 독일어는 헝가리의 주요 외국어이다.[4] 헝가리어는 헝가리의 공용어이지만, 오스트리아의 지역 공식어로도 지정되어 있는데, 부르겐란트에서 헝가리어가 지역 공식어로 지정되어 있다. 양국은 가톨릭 신자의 비중이 높다.요제프 하이든 등 여러 유명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유명한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 역시 원래 헝가리 귀족이다.
4. 교통 교류
양국은 철도, 도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양국간 교류가 활발하다. 냉전 시절에는 철의 장막이 양국 사이를 지나감에 따라 국경이 폐쇄되었지만, 80년대 말에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5. 관련 문서
- 오스트리아/외교
- 헝가리/외교
- 유럽연합
- 오스트리아/역사
-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 헝가리/역사
- 오스트리아/문화
- 헝가리/문화
- 오스트리아/경제
- 헝가리/경제
- 오스트리아인 / 헝가리인
- 독일어 / 헝가리어
- 가톨릭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6. 외부 링크
[1] 비슷하지만 차이를 보이는 것이 오스트리아-체코 관계로, 체코를 이루는 보헤미아 왕국 역시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오스트리아와 오랜 연이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이라는 외적의 위협은 헝가리에 비해 확연히 약했고, 오스트리아의 체코에 대한 태도는 서서히 억압적으로 바뀌었다. 그런 연유로 양국 관계는 오늘날에도 썩 좋지 못한 편이다.[2] 푸스타 초원에 정착한 마자르인은 유목 문화를 버리고 현지 슬라브인과 동화되면서 오늘날의 헝가리인이 되었다.[3]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양쪽에서 겹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 뿐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 작센 선제후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등 영방국가에 간섭할 황권조차 없었다. 동군연합의 개념이 없는 동양사의 시각으로 서양사를 바라보았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오류이다.[4] 독일어 구사자들은 헝가리 가서 독일어로 소통해도 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