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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와 튀르키예의 대외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역사적 관계
2.1. 근세
자세한 내용은 모하치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오스만 헝가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동헝가리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트란실바니아 공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1526년 헝가리 남부의 모하치(Mohács)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이끄는 헝가리 주축의 기독교 연합군은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거의 전 군대가 괴멸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헝가리 역사뿐만이 아니라 유럽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중부유럽의 세력판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전사함으로써, 지역에서 헝가리가 차지하던 강력한 입지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고, 헝가리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러요시 2세의 사후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다(Pálffy 2001: 109).3) 그러나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 왕국을 대신하여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와 직접적으로 투쟁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15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 지속적이며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 와중에서 헝가리는 가장 큰 피해를 받았다. 1541년 오스만 제국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후 1686년까지 약 150년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지배의 서부 헝가리, 오스만 제국 지배의 중-남부 헝가리, 헝가리의 통치하에 있었던 트란실바니아 지역 등 세부분으로 국토가 나뉘어졌다.
KCI 등재논문 : 헝가리의 오스만 문화 수용과 문화적 메타모포시스
KCI 등재논문 : 헝가리의 오스만 문화 수용과 문화적 메타모포시스
헝가리는 16-17세기 약 150여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헝가리의 감정은 꽤 미묘하다고 할 수 있다. 헝가리 교과서 등에서는 오스만의 침입에 맞서싸운 지도자와 헝가리 민중의 영웅적인 투쟁을 강조하는 반면 오스만 제국군의 잔혹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간접지배를 받았던 헝가리 동부 에르데이 지역의 역사를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에 맞선 독립투쟁으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에르데이 공작 보치커이 이슈트반(Bocskai Istvan 1557~1606)이나 퇴쾨이 임레(Thököly Imre 1657~1705), 라코치 페렌츠 2세(II. Rákóczi Ferenc 1676~1735) 등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민족의 독립 투쟁에 헌신한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고[1] 부더페슈트의 영웅광장에도 조각과 부조가 전시되어있다.
한편 오스만 헝가리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의 목욕/온천 문화[2]나 식문화가 헝가리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 요리의 영향은 헝가리 요리의 특색으로 이어졌다. 오스만 지배 시기 당시 헝가리 요리에는 버터와 요거트 사용이 늘어났으며, 만두와 면류도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모하치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합병된 헝가리 서부에서는 개신교가 탄압을 받고, 가톨릭의 교세가 강해졌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 종속되었던 트란실바니아 공국 그리고 오스만 헝가리에서는 가톨릭이 탄압을 받으면서[3] 반사적으로 개신교가 사멸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제2차 빈 공방전 이후 몰락한 이후에도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지주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며, 종교 탄압이나 가톨릭 강요 정책에서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헝가리 국민들은 대부분 명목상 가톨릭 신도인데 비해 헝가리계 루마니아인 상당수가 개신교 신도인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다.
2.2. 19세기
프랑스 대혁명 이후 19세기 중엽부터는 헝가리에 근대적인 국민국가 건설노력이 이어지면서 헝가리인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범투란주의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식자층 중에는 범투란주의에 영향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한 이들도 많았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는 유제프 벰과 코슈트 러요시를 포함한 폴란드와 헝가리 출신 혁명가들에게 망명지를 제공해주기도 했다.동양에 대한 우호적이고 친화적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기억과 그들에 대한 인식도 변화되었다. 특히 1848~1849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헝가리 독립혁명이 실패한 후, 상당수의 혁명 지도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거나 이민을 간 사실과 크림전쟁 이후의 반러시아 정서 또한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가 의식적으로 가까워지도록 일조 하였다. 특히 19세기 후반 헝가리 민족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 되었을 때 헝가리 민족이 아시아에서의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중략) 그 결과로 19세기 후반부터 헝가리에서 '친 투르크' 정서가 강하게 부상되었던 것이다. 한 예로 1877년 러시아 오스만 제국 전쟁 직전에 오스만 제국을 방문한 헝가리 학생들은 당시 술탄과의 강한 연대감을 표현하며 오스만 제국의 친구를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답례로 술탄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기 헝가리로부터 몰수한 35편의 중세 고문서를 헝가리에게 돌려주기도 하였다.
Ibid.
Ibid.
2.3. 현대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포함한 미묘한 관점을 가진것에 비해 오스만의 후신으로 볼수 있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공화국에는 나름 좋게 보는 편이다. 피데스나 요빅같은 우익정당의 경우에는 친 튀르키예 성향으로 에르도안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선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에 대한 인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날 헝가리-튀르키예 관계의 특이점으로 꼽히고 있다.[4] 그 외에도 헝가리와 튀르키예는 훈족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어서, 양국의 범투란주의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캅카스,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몽골계, 퉁구스계, 튀르크계, 우랄계, 드물게는 한국인과 일본인까지 이러한 교류에 끌어들이기도 한다.3. 문화적 관계
헝가리에서 ‘터키식 자수’라고 하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기인 16세기 이후부터 발전하였는데, (중략) ‘터키식 자수’의 특징인 ‘톱니 잎 무늬’, ‘석류무늬’, ‘카네이션 무늬’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기인 16세기 이후 헝가리 자수에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문화적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민속 의상에서 오스만 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치프러쉬르(cifraszűr, 남자용 털망토)이다. 이것은 양치기들의 대표적인 옷인데, ‘터키식 장식’ 영향을 보여준다. 이 옷의 명칭에 사용된 쉬르(szűr)에 대한 언급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인 1570년경 헝가리에서 발간된 고문서에 최초로 발견되었다. 쉬르의 기본적인 형태는 전형적인 ‘오스만 양식’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금속공예제품에서 오스만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놋쇠(réz)로 만들어진 제품이 헝가리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부다에서 ‘오스만의 놋쇠 장인’들만이 사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Gerő1980: 214).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헝가리에서도 ‘터키식 금속 제품’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시기 ‘터키식 카페트’도 상당수 제작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카펫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니트로 된 러그와 매듭(csomózott)으로 만든 것이 있다. 헝가리로 들어오거나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대부분의 제품들은 후자의 것이다. 이 제품들은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점령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부터 특히 트란실바니아를 중심으로 많이 수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트란실바니아 교회에서는 소위 ‘터키식 기도 카페트’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터키식 기도 카페트’는 오늘 국제적으로도 ‘트란실바니아식 카페트’라고 불린다. 이 당시 수입되었던 카페트의 대부분은 아나톨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이 문화적 영향은 20세기 초반 헝가리 민족의식이 각성되고,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헝가리 적으로 변형된 ‘분리파형식’(szecesszionizmus, művészeti irányzat)의 한 갈래가 되어, 헝가리 예술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재해석되고, 재탄생되었다. 당시 헝가리의 예술가들은 헝가리 적인 것의 뿌리를 ‘헝가리에서 뿌리를 내린 동양식 방식’에서 찾고자 했고, 그것이 유럽인과 헝가리인을 구분 짓는 헝가리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Ibid.
전통 민속 의상에서 오스만 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치프러쉬르(cifraszűr, 남자용 털망토)이다. 이것은 양치기들의 대표적인 옷인데, ‘터키식 장식’ 영향을 보여준다. 이 옷의 명칭에 사용된 쉬르(szűr)에 대한 언급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인 1570년경 헝가리에서 발간된 고문서에 최초로 발견되었다. 쉬르의 기본적인 형태는 전형적인 ‘오스만 양식’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금속공예제품에서 오스만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놋쇠(réz)로 만들어진 제품이 헝가리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부다에서 ‘오스만의 놋쇠 장인’들만이 사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Gerő1980: 214).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헝가리에서도 ‘터키식 금속 제품’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시기 ‘터키식 카페트’도 상당수 제작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카펫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니트로 된 러그와 매듭(csomózott)으로 만든 것이 있다. 헝가리로 들어오거나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대부분의 제품들은 후자의 것이다. 이 제품들은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점령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부터 특히 트란실바니아를 중심으로 많이 수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트란실바니아 교회에서는 소위 ‘터키식 기도 카페트’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터키식 기도 카페트’는 오늘 국제적으로도 ‘트란실바니아식 카페트’라고 불린다. 이 당시 수입되었던 카페트의 대부분은 아나톨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이 문화적 영향은 20세기 초반 헝가리 민족의식이 각성되고,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헝가리 적으로 변형된 ‘분리파형식’(szecesszionizmus, művészeti irányzat)의 한 갈래가 되어, 헝가리 예술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재해석되고, 재탄생되었다. 당시 헝가리의 예술가들은 헝가리 적인 것의 뿌리를 ‘헝가리에서 뿌리를 내린 동양식 방식’에서 찾고자 했고, 그것이 유럽인과 헝가리인을 구분 짓는 헝가리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Ibid.
4. 관련 문서
- 튀르키예/외교 / 튀르키예-유럽 관계(유럽연합-튀르키예 관계)
- 헝가리/외교
- 튀르키예/역사
- 헝가리/역사
- 헝가리/경제
- 튀르키예/경제
- 헝가리/문화
- 튀르키예/문화
- 헝가리인 / 튀르키예인
- 헝가리어 / 튀르키예어
- 우랄알타이어족, 범투란주의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1] 퇴쾨이 임레와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해 사망했고, 대타협으로 헝가리가 주권을 되찾은 1867년이 지나서야 헝가리 왕국(현재의 슬로바키아)으로 이장되었다.[2] 오늘날 헝가리의 주요 관광 상품 중 하나가 온천 관광이다.[3] 참고로 16~17세기 당시에는 이슬람과 가톨릭 사이의 관계보다는 이슬람과 개신교 사이의 관계가 더 원만한 편이었다.오스만 제국과 영국은 대항해시대 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었기 때문에, 영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는 일종의 반가톨릭 연합 동맹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4] 다른 국가의 예를 들자면 포르투갈인들이 역사적으로 늘 위협해왔던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본인들을 식민지배를 했던 압스부르고 왕조에 적대적인 편이지만 후신인 스페인에는 우호적인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