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0:07:11

한국-대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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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중화민국
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파일:external/weekly.chosun.com/2252_10_01.jpg
1968년 완공된 구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83-7[1]소재. 1992년 단교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사관으로 쓰고 있으며 2011년에 새 건물로 재건축했다.

1. 개요2. 비교표3. 역사
3.1. 국부천대냉전 시기까지3.2. "대만"과의 수교?3.3. 단교
3.3.1. 과정3.3.2. '한국의 배신' 주장
3.3.2.1. 반박
3.4. 단교 이후
3.4.1. 2020년대
4. 반한 논란
4.1. 대만은 반한이다?4.2. 대만은 반한이 아니다?4.3. 한국의 반응
5. 대만과 한국 국민간 인식의 불균형6. 문화 교류
6.1. 대만에서 한국 대중문화6.2. 한국에서 대만 대중문화6.3. 언어
7. 교통 교류8. 언론9. 경제 교류
9.1. 1인당 경제력
10. 참고할 만한 자료11. 외부 링크12.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국어한대관계(韓臺關係)
한중관계(韓中關係, 단교 이전)[2]
중국어(정체)中韓關係
臺韓關係

대한민국대만의 외교 관계를 서술한 문서이다.

양국은 단교하기 전까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러한 우호관계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화민국은 청나라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정부였다. 과거 일제강점기 중화민국 정부인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3][4] 현재 대만이 통치하는 타이완섬 자체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청일전쟁 이후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었다.

중화민국 역시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동안 중일전쟁 등 일본에게 제국주의 침탈을 겪은 나라여서,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접점이 많다. 차이점이라면,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을 혐오하였고 창씨개명을 싫어하였지만, 대만은 대만일치시기 때 일본이 대만인의 창씨개명을 금지시키고 골수 친일파들에게만 창씨개명을 해주어 창씨개명한 대만인들은 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파일:Chiang_Kai-shek_came_to_korea_to_see_Syngman_Rhee.jpg
1953년 11월 27일, 장제스 총통아시아 반공 연맹 구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일제통치 시절의 이런 인연으로 중화민국은 1948년 대한민국과 최초로 수교한 상징적인 국가가 되었다. 중화민국은 국제 연합의 상임 이사국이기도 한 만큼 한국에게 든든한 우군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발발한 국공내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국민당은 중화민국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베이시로 옮기면서 거대한 중국 대륙의 주인에서 졸지에 외딴 섬나라 처지가 되고. 시골 촌구석 패거리에서 중국 대륙을 차지한 강대국이 된 마오쩌둥중국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냉전 시절에는 신생 공산국가인 중국과 북한을 견제코자, 진해에서 이승만장제스가 아시아 반공연맹을 창설할 정도로 반공주의의 혈맹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냉전이 점차 녹아가던 1992년, 마침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화룡점정으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함과 동시에 단교하게 되었고 오랜 맹방관계는 소원해졌다.

민간 교류가 활발하며 워킹홀리데이 협약이 체결된 나라이다.

2. 비교표

<colbgcolor=#fff,#444> 대한민국 대만
면적 100,450km² 36,197km²
인구 51,238,450명 23,404,138명
명목 GDP[출처] $1조 8,699억 (12위) $7,750억 (22위)
1인당 GDP[출처] $36,132 (30위) $33,233 (34위)
1인당 PPP[출처] $62,960 (26위) $79,031 (12위)
국방비 479억 달러 166억 달러
국가경쟁력[8] 20위 8위
IMF 분류 선진국 선진국
정치 공화제 / 대통령제 공화제 / 이원집정부제
민주주의지수 8.09 (22위) 8.92 (10위)
국가원수 윤석열 대통령 라이칭더 총통
정부수반 줘룽타이 행정원장

3. 역사

한국과 대만은 국부천대 이후와 냉전기에 외교적, 정치적으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그 이전에 한반도 국가들은 대만섬 사람들과 역사적으로 별다른 접점도 없었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사실상 한국과 대만 관계는 국부천대와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한반도 국가들의 입장에서 볼때 대만은 국부천대 이전까지는 중국 본토와 독립된 정치체로 존속한적 자체가 거의 없는, 중국의 일부이자,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제 식민 치하에서도 만주국처럼[9] '일본의 식민지배/통제 하에 있는 중국의 일부분' 정도로 인식했을지 몰라도, 딱히 '대만'이라는, 중국 본토와는 구별되는 지역으로 인식한적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대만에 대한 인지도가 생겨난것은 정성공이 대만에 정씨왕국을 세우면서부터였지만, 이때에는 중국과 별개의 지역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정씨왕국 이전에는 중개무역지나 미개한 원주민들이 사는 신비한 지역 정도로나 여겨지던 수준이었다. 또한 같은 중국/중화권이라도 한국계 국가들이 발흥했거나 영토로 삼은 적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언어/혈족적 관련이 깊은 중국조선족의 비율이 높은 만주 지역이나,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인접해 있으며 중국의 역사적/문화적 중심지였던 화북 지역, "매우 먼 중국 남쪽"이라는 이미지라도 있는 강남과는 달리 대만섬과는 딱히 인적/문화적 접점이 없었다. 심지어 본성인들의 원 출신지인 푸젠성과도 딱히 특기할 만한 접점이 없었다.[10]

이는 다른 한반도 주변국과 비교해도 대만이 더 두드러지는 점인데, 수천년에 걸쳐 한국계 국가들과 교류/사대/우호/적대 관계를 맺어온 중국 본토나, 마찬가지로 수천년에 걸쳐 교류/우호/적대 관계를 맺어왔으며, 20세기 초반에는 한반도를 식민지배까지 했던 일본, 17세기 무렵부터 조선과 접점이 있었으며, 20세기까지도 한반도 북부에 신탁통치 및 북한 정권 지원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러시아, 현대 한국에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 미국 등 다른 주변국과는 달리 한국과 대만섬은 역사적으로 별도의 교류나 접점 자체가 다른 주변국들과 비교하면 미미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 어느 정도의 교류는 있었던 류큐 왕국 정도의 교류도 없었다.

이는 대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다수 대만인들 및 대만 문화의 원류이자 현재진행형으로 대립 중인 중국과, 대만섬을 식민지화하고 류큐 제도라는 자국과 근접한 영토를[11] 가지고 있는 일본과는 달리 한반도는 '대만섬', 내지는 '대만인'과는 훨씬 접점이 적었다. 후술되었다시피 1991년까지 맺었던 한국과의 외교적인 관계 역시 '중국'과의 외교 관계였지, '대만'과의 외교 관계가 아니었으며, 냉전 당시에도 외교적, 정치적 관계와는 달리 국민 차원에서는 비교적 냉담한 관계였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이 '대만'이라는 지역을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 존재로 인식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과거에 대만을 영유했던 일본이나, (자신들의 입장에서) 일본과 그 뒤를 이은 미국에 빼앗긴 영토로 보고 반드시 되찾아와야 할 지역으로 보고 있는 중국과도 매우 다르다. 따라서 한국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였던 중화민국과의 외교적 관계가 끊어지고 난 다음에는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국 본토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특히 중화민국과의 단교 및 한중수교가 성사될 시점에는 대만 역시 민주화와 함께 중국과 구별되는 '대만', '대만인'의 정체성이 대두되었기에,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대만은 중국도 아니고, '한국과는 별 접점이 없는 동북아시아의 한 나라'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즉, 중국과 구별되는 '대만'과 한국과의 관계는 오히려 대만(중화민국)과의 단교를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3.1. 국부천대냉전 시기까지

과거 타이완섬(대만 섬)은 각종 유럽 국가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중국 청나라의 지배에 놓인 땅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타이완섬은 일본 제국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은 독립했고, 대만은 승전국이었던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그래서 다시 중국 땅이 되긴 했지만, 당시 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가 서로 싸우던 상황이었고, 2차대전 당시까지의 중국 지배자였던 장제스가 라이벌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타이완섬으로 피신한 후, 대륙은 중국의 지배 하에 놓이고, 도망친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대만 섬을 장악하면서 애매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중화민국의 경우 청나라 멸망 이후 중국을 지배한 국가였다. 쑨원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과 운용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재지도 중화민국에 위치해있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이나 연호 같은 것도 당연히 중화민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뒤처리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수교한 첫번째 국가가 바로 중화민국이었다.

그런데 국공내전 이후 장제스는 공산당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 성으로 옮겨갔고, 대륙에는 중국이 세워져 대만과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공관도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있었다가,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로 옮겼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토일부가 공산당에 점령당한 분단국가가 되었기에, 반공동지로서 유대감을 가져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고 군사적인 면에서 교류도 상당부분 있었다. 대만도 엄연한 분단국가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화교는 출신상으로는 산둥성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나, 대부분이 대만 국적을 갖고 있다.

한국과 대만의 군부 및 정계 지도자 중에는 옛 일본육군사관학교 혹은 황포군관학교 등의 동창, 동문들이 많았다. 과거 예편한 국군 고위 장성이 가는 곳이 대만 대사인 이유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황포군관학교 동기들을 통한 대만과의 친교 확대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실제로 육군 대장 출신으로 대만 대사를 역임했던 정일권이 주요 대만통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장제스조차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 출신이다. 일본육사는 당대 아시아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강력한 항일 애국자였던 장제스도 추천서까지 받아가며 말 그대로 기를 쓰고 일본육사에 입교했다. 제대로 군사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당대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열강반열에 든 일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오합지졸인 국부군 장성들을 보며 기가 차서, '너희가 우리 군대에 있으니까 사단장, 군단장을 해먹지 일본군이었으면 대대장도 못했다!'고 일갈했을 정도다. 실제로 장제스 외에는 국부군 고위 장성 가운데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장성이 없다시피 했다. 어찌보면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장제스가 2차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킨 걸 보면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슷한 경우론 호찌민과 보응우엔잡이나 후엔 오사마 빈라덴을 키워준 미군들도 있고..

역대 대만 대사들을 보면, 김홍일, 최용덕, 김신 등 옛 국부군에서 교육받거나 복무한 광복군 출신 고위 장성들이 주로 역임하였다. 특히 김홍일(1951~60), 김신(1962~70)의 경우 이례적이라 할 만큼 장기간 재임하였다. 즉 군부 인사의 학연을 통한 친교확대라기보다, 광복군 및 국부군 출신 한국인과 중국 국민당 간의 밀접한 관계를 통한 친교가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대만은 한국 입장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는 우방국이었으므로, 무게감 있는 인물을 대사로 파견하는 것이 관례적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엘리트 계층은 단연 군인들이었다. 군사정변 직전 기준으로, 해외 교육 및 연수 경험자가 외무부보다 국방부에 더 많았다. 정일권뿐 아니라 백선엽, 유재흥 등 중장 이상의 고위 장성들은 세계 각지의 대사로 파견되었다. 지금도 레바논 등 분쟁지역 국가의 대사들에 군 장성 출신들이 임명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교단절 전까지 한국에게 중국 = 대만이었고, 대만으로 중국어를 배우러 유학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 관련 학과, 특히 중국어나 동양철학 전공 교사들의 경우 2000년대 기준으로 대다수가 대만 유학파 출신이었다.[12] 중국 유학파들은 한중수교 이후 세대들.

한국의 1970년대의 백과사전에서 '국기' 항목을 찾으면 세계의 국기가 쭉 나오는데 거기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나오고 밑에 중국이라 적힌 사례도 흔했다. 도올 김용옥이 자신의 논어 해설 저서에 대만 유학 경험을 써놨는데 대만을 그냥 중국으로 부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국 대륙으로 간 줄로 착각하기가 쉽다.

냉전 시대에 한국에서는 중국을 중국공산당의 준말로서 "중공"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국'이라고 하면 대만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공과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대만을 '자유중국'으로 칭하고, 대륙의 중공 정권은 그냥 '중공', '공산중국'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1공화국 시절엔 '국부중국'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물론 지리적 명칭인 대만/타이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긴 했으나, '자유중국' 혹은 정식 국명인 '중화민국'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공산권과 대립하는 동아시아의 반공진영 국가에게 의례적으로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그나마 자유중국, 자유월남(남베트남)은 남이 불러준 이름인데, 민주주의와는 백만년은 동떨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자신들이 주장한 이름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대만은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 누가봐도 대륙 수복을 목적으로 하는 참전이기에 확전을 염려한 미국의 반대로 참전하지 못하고 물자 지원만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대만군을 참전시켜 대륙 남부를 공격해 중국을 교란시키는 작전도 고려했으나 해임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6.25 전쟁 당시 잡힌 중공군 포로들 중 반공포로 14,000여명은 대만으로의 망명을 허가해주었다. 이들은 대만에서 반공의사 대접을 받았다.

80년대 후반부터 단교 직전까지, 대한민국은 대만에게 있어 엄청난 귀빈이었다.

일단 동아시아에선 일본 다음으로 존재감이 크기도 하고 실제로 대만과 수교한 국가 중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단교 직전인 1990년 기준으로, 서울에는 미국, 소련, 프랑스, 서독, 영국, 일본, 이탈리아 등 이른바 세계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여, 대만 외교관이 대사 자격으로, 강대국 대사들과 대등하게 접촉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중국에 밀려 수교국을 대거 상실한 다른 나라에선, 대만 외교관은 대사가 아니라 타이베이 대표일 뿐이었다.

대만 입장에선 당시 서울보다는 로마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까지 바티칸에는 대만 대사관이 있으며 지금까지 유럽 내 유일한 대만의 대사관이다. 이 대사관은 바티칸 땅이 좁아서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그러므로 주 교황청 대만 대사는 당연히 어엿한 한 나라의 대사 자격으로 교황청 주재 타국 대사들과 접촉할 수 있다. 한국은 1989년 이전에는 공산권 국가와 전혀 외교관계가 없었으며, 이탈리아바티칸은 공산권과도 꽤 접촉을 한 나라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주 교황청 대사와 주 이탈리아 대표는 겸임이 아닌 별개의 인물들이고 공관도 별개이며 주 교황청 대사는 어디까지나 바티칸에서 활동하는 외교관이라 주 이탈리아 외교관들과의 관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주 이탈리아 대표는 역시나 대만 대사가 아닌 타이베이 대표 취급을 받으니 불이익이 따른다. 바티칸이 한국보다 더 낫다는 식의 설명은 사실 어불성설인 셈이다.

또한 이런 대만의 한국에 대한 귀빈 대접은 미국, 일본 등 주요 강대국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80년대 이후의 일이고 국제 사회에서 대만의 지위가 한국보다 훨씬 높았던 40년대 말~60년대 초만 해도 한국 외교사절에 대한 대만 외교 당국의 갑질은 지금의 중국이 한국에게 하는 갑질 정도는 차라리 애교로 보일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튼 대한민국과 대만은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971년 대만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와 전 중국의 대표자격을 빼앗기며 UN에서 추방당할 때 한국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공산권의 반대로 참관국(옵저버)이었을 뿐, 가맹국이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맹국이 됐더라도 워낙 스코어 격차가 커서 큰 도움은 되지 못했겠지만.

유엔의 대만 축출은 월남의 멸망과 함께 한국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엄밀히는 장제스의 일당들을 축출한 것으로, 이 이후로 유엔은 중국을 사라진 중화민국의 후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 입장에선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가입했으니 정전협정 무효화→북한정권 승인 및 대한민국 불인정→정전협정 파기→적화통일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나돌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고, 북한은 중국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다만 수교 때도 국가적인 관계는 친밀했지만, 국민간의 정서 부분에서는 특별히 크게 친밀하거나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단교 이후나 이전이나 데면데면한 느낌에 더 가깝다.

3.2. "대만"과의 수교?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과 수교를 한 적이 없다. 한국은 단지 1948년 당시의 "중국"인 중화민국과 수교를 했고, 이듬해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베이로 옮겨간 후 그 외교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1992년 이후엔 주중대사관이 타이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셈이지만, 2012년에 한중수교 20년을 기념하는 것은 현재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진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 외교관계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바티칸 등 얼마 안 된다. 현재 대만의 수교국은 중국 건국 이후에 대만과 수교했거나 단교했거나 둘 중 하나다. 이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구별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중국'과 처음 수교한 뒤에, 수교하지도 않았던 '대만'이라는 나라와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라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은 중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아직까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UN)은 1971년 이래 중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인정하며 지금의 대만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은 1979년 이전의 대만수교사를 미중관계에 집어넣고 1979년 이후의 관계는 따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992년 수교로 기록했으며, 대만과 단교함으로써 그 외교관계가 끝났다고 설명한다. 즉 대만과 중국의 외교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 다만 이것은 중국 측의 입장을 반영한 것 때문일 수 있다. 중국은 각국과의 수교 연표를 작성할 때 자신의 전신(이라 주장하는) 중화민국과 해당국 간의 관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교 몇 년 기념도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관계만 따진다. 한국은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수교 시기가 아닌 조선 왕조대한제국 시기 때로 한다. 예를 들으면 한미수교 백주년 행사는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교 조약을 기준으로 했다. 영국과의 수교 기준점도 1880년으로 잡는다. 그래서 2010년한영수교 130주년이었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도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시기를 기점으로 삼는다.

반면 한러수교 20주년 기념 행사는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제국의 조러수교가 아닌 1990년 대한민국과 소련의 수교를 기준으로 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됐을 때 러시아를 소련의 후계국으로 인정해서 별다른 수교절차 없이 계속 외교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반면 구소련의 다른 구성국가들은 독립 시점에 맞춰서 따로 국가승인과 수교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 기산 시점을 다르게 보는데 대해서 국가체제 변혁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2번의 국가체제 변혁(러시아 제국→소련→러시아 연방)을 거친 러시아와 달리, 미국과 영국 같은 경우 과거 조선과 수교를 맺을 때나 지금이나 국가체제의 변경이 전혀 없는 나라라는 것을 근거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간단히 반박이 가능한데, 예를 들어 덴마크1902년 대한제국과 우호통상 조약을 맺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왕조를 유지 중임에도 수교 연도는 1959년으로 잡고 있다. 반대로 대한제국 시기 왕국이었다가 2차대전 후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와의 수교 연도 기산점도 반박의 근거가 된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과 적대관계였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과거엔 명백히 대한민국을 포함한 서방진영의 적대 공산국가였다. 북한을 도와 6.25 전쟁이 일어나게 한 데다, 직접 중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여 국군과 미군과 전쟁을 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는 기존의 수교 자체가 있었어도 무효화될 수준의 사건으로, 기존의 국가와 조약을 맺었어도 적대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재정립하고 새로이 수교를 맺은 시기를 수교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같은 사례로는 2015년 기준으로 한일 수교 50주년이 있다. 기사 참조. 한일 국회의 의원들 차원에서 수교 50주년 기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기준으로 둔 것이다. 원칙적으로 '수교'의 기준을 근대적 조약으로 보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기준으로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이전의 한국은 이념 사상이고 국제관례의 입장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일본을 '식민 지배의 원수'이자 '적대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일제의 침략으로 강화도 조약 당시의 조약관계가 무효화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적대국 관계에서 기존의 모든 조약을 효력 정지하며 수교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으니 1965년이 한일 수교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 견해는 앞의 견해보다 그럴듯 하긴 하지만 여전히 반박이 가능하다. 앞서 예를 든 덴마크1902년 대한제국과 우호통상 조약을 맺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왕조를 유지 중임에도 수교 연도는 1959년으로 잡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덴마크는 대한민국과 전면적으로 적대관계였던 적이 없으며, 오히려 6.25 전쟁 때는 대한민국에 의료지원을 해준 국가이기도 하다. 다만 2012년에 비공식적으로 수교 110주년 행사를 열기는 했다.

이에 덴마크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덴마크 보호령이 되어 사실상 추축국으로 떨어졌던 역사가 있고 따라서 추축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1902년의 수교 사실을 무효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견해는 자체적으로 아주 심각한 모순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 함께 완벽하게 추축국의 주요 일원이었던 독일, 이탈리아의 사례로 즉각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오스트리아의 사례 역시 같은 시기에 나치 독일이 주도한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사실상 나치 독일 그 자체로서 추축국 소속이었다는 점 역시 반박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한국이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수교년도를 서방국가와 달리 근대가 아닌 냉전시대나 냉전 이후로 잡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 일본이 한국의 적대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3.3. 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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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49
토론 - 합의사항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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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과정

"너무 슬프구요, 우리가 나라가 없는 게 너무 안됐어요."[13]
"착잡합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 취재에 응한 한성화교학교 학생들의 말
위는 당시 한국이 대만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단절했을 때 MBC 뉴스데스크 보도 영상이다. 진수지 대사의 당시 이름 표기가 한국식 한자로 김수기였음을 알 수 있다.

중화 텔레비전 당시 보도
한국대사관 폐쇄 당시 보도
한·중 외교관계 수립으로 …(중략)… 대만은 이번에 세 번째 타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난 것이고, 두 번째가 미중 수교, 세 번째가 한중 수교라는 것입니다. -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의 국제정세 문제에 관한 연설(’92. 09. 05.)

그러다가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공산권과 외교 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한국-중국 및 한국-대만 관계에 새로운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위 북방정책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외교 노선에 따라 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한 것에 이어서 1990년 10월에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점을 찍게 된다. 당시 국내외 외교 관측통들은 한소수교가 한중수교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북한이 소련보다는 중국과 더 가까웠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한중수교 추진 중엔 한중 양국이 대만과 북한의 눈치를 많이 보았었다.

이제부터는 북방정책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한중수교를 남겨 놓은 가운데, 1991년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단장으로 한 대규모 민간 사절단[14]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게다가 1990년을 전후하여 이미 상당한 양의 중국산 농산물이나 제품들이 국내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오죽하면 농민 단체에서 중국산 농산물 수입 규제를 요구했을 정도였다. 중국에서도 한국제 상품이 시판되는 등, 경제적 교류는 이미 상당부분 진척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급증하는 한중간 경제, 민간 교류와 별개로 양국의 수교 문제는 1991년까지만 해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는 양국이 북한과 대만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은 한국과 수교할 경우 이에 반발한 북한이 친소련으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한중 수교에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서방권의 외교 압박에 직면하면서 국제적 고립을 타개할 수단 중의 하나로 친미국가였던 한국과의 수교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이 급속히 와해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한국은 노태우 정부의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안에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했고, 중국 역시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동시에 제3세계 저개발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하여 수교국을 늘려나간다는 대만의 이른바 은탄(銀彈)외교를 차단할 필요성도 있었다. 이렇게 한중 상호 수교에 대한 양국의 공감대는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다.

대만은 빈곤한 제3세계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원조함으로써 수교국을 늘려 나가는 와중에, 이들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자신들이 UN에서 축출되었던 과정을 뒤집어서 UN 총회 투표 대결을 통해 UN으로 다시 복귀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은 대만이 제3세계 국가들과 외교 접촉을 하는 데 주요 창구 중의 하나였는데, 만일 한중 수교가 다시 이루어질 경우 이 주요 창구가 막히게 된다.

게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 새롭게 출범하면서 북한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사라졌다. 신생 러시아 연방은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므로, 종전처럼 동지 의식을 바탕으로 이어진 의리 외교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소련 붕괴 전후로 불거진 경제난, 민족 갈등 등 체제 전환에 따른 후유증을 수습하느라 중국을 견제하려고 나설만한 처지가 안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중국이 어떻게 나오건 간에 중국의 입장을 거스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사실상 초읽기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한중 수교가 가시화되면 북한과 대만이 견제에 나설 것이 불 보듯 뻔한지라 한중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과 대만을 설득하여 서로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비공개로 직접 수교 교섭을 벌여야만 했다. 결국, 1992년에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 교섭을 할 때 중국 측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들이대면서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물론, 이것은 중국의 외교에서 최우선 원칙으로 대한민국에만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 미국도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는 단교를 하였다.

흔히 중국에서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외교적으로 강요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대만에서도 과거에 똑같이 중국과의 단교를 요구했었다. 실제로 대만이 전 중국의 대표 자격으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 아래 유엔 상임이사국을 맡고 있던 1950~1960년대에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걸면서 중국을 왕따시키기도 했다. 1952 헬싱키 올림픽 때는 중국이 참가했다고 일방적으로 불참했을 정도였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의 UN 가입도 계속 반대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의 대외정책 변화와 함께 1960년대 이후 대폭 늘어난 제3세계 국가들의 중국 지지로 표대결에서 참패하면서 중국의 UN 가입이 확실시되자, 아예 선수를 쳐서 대만은 UN에서 자진탈퇴했다.

당시 미국은 차이니즈 타이완(Chinese Taiwan) 혹은 타이완 리퍼블릭(Taiwan Republic)이란 명칭으로 UN에 잔류할 것을 권고했지만, 장제스는 무시하고 유엔 탈퇴를 강행했다. 국부천대 이후 틈만 나면 대륙수복을 외쳐대던 장제스 입장에서는 자국(대만)이 가지고 있던 '중화권 대표국가'로서의 지위를 중국이 가져가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차이니즈 타이완(Chinese Taiwan) 같은 어정쩡한 이름으로 UN에 잔류하지 않고 탈퇴를 택했다. 장제스국민당 정부 입장에서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는 국명을 쓰지 못한다는 게 차라리 탈퇴하는 것만 못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UN 탈퇴의 실책이 타이완의 대외 관계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주고 있다. 당시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상 중국이 UN에 가입해서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강제로 대만을 UN에서 쫓아내는 것까지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홍콩 반환 문제가 걸려있던 영국은 국익이 우선이라서 친중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부르짖던 프랑스도 중국과 관계가 무난했다.

그리고, 중소결렬 이후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을 비롯한 한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과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정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기본적으로 전 인류의 거진 1/4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신에, 인구 1000만 명(당시) 규모의 소국이 UN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힘의 균형 면에서 부적절하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대만 측은 몇달 전부터 한국 쪽 공식/비공식 루트를 총동원하여, 중국과의 수교에 대해 문의해왔다. 비록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더라도 대만이 한국과의 수교는 절대로 끊지 않을 것이라면서, 국교 유지에 필사적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책사로 통했던 박철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당시 한국의 정, 관, 군계 유력인사들이 대만 정부로부터 국빈으로 초청을 받아 대만을 방문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대한민국은 당시 대만에 있어서 최후의 대국이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 접해있는 최전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던 한국에 보내는 특명전권대사 자리는 상당히 중요시되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 고위 외교관과 중장이상의 예비역 장성[15]이 관례적으로 대사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외교관 출신의 대사의 경우에는 외교부 상무 또는 정무차장(차관) 출신이나 UN대사 등의 외교적 핵심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추후에 미국대사 또는 대표, 외교부 부장(장관)이 되는 핵심코스였다.

그렇지만 한중수교는 성사되면 양측이 서로 얻을 수 있는 실리가 워낙에 커서 그저 의리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해,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에 대해 외교적 판정승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 결국 한국 외무부는 대만 대사를 소환하여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대만과의 단교 계획을 밝힌다. 이는 전세계에서 제일 먼저 알린 것이며, 미국의 24시간 전의 최후통첩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다. 일본은 고작 단교 열흘 전에 최후통첩을 했다.

한편 첸푸(錢復, 전복) 대만 외교부장은 주한 대사관으로부터 한중수교 합의를 통보받은 후, 8월 19일 입법원 대표들을 외교부로 불러서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는 사실을 통지하고 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입법원 의원들은 외교부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즉각 언론에 누설하였고, 당연히 대만 국내의 여론은 격분했다. 한국 정부는 대만 소식통을 통하여 한중수교 뉴스가 전해지자, 처음에는 즉각 부인했다가 결국 하루만에 이를 번복하여 한중수교 사실을 시인했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대만에 유학중이던 한국외대 중국어과 학생이 대만인들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8월 21일 공식적으로 대만 측에게 단교 문서를 전달한다. 1971년 유엔 축출 때와 마찬가지로, 대만 측에서 선수를 쳐서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24일, 대만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대만 대사관은 6시간 만에 국기 하강식을 갖고 스스로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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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주한 대만 대사 진수지(金樹基, 김수기).[16] 그의 입장에서도 한중수교는 그야말로 사형선고같은 대우나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한대사 자리는 외교부장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관문이었으나 단교로 인해 진 대사의 외교부장 영전도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중수교와 한국-대만 단교 가능성을 진수지 대사가 전혀 모르지는 않았었다. 당시 한국이나 대만의 외교가에서 한중수교와 그로 인한 한국-대만 단교는 기정사실이고,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대만 국적의 화교들은 중국 정부와 그렇게 관계가 나쁘지는 않다. 심지어 대만과 수교 중인 시절보다 더 낫다는 평가다. 사실 이런 원인 중 하나는 한국의 대만 국적 화교들이 본국 거주민과 달리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고, 본국은 '중국인' 정체성을 버려 가면서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도 있다. 그러니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찾다 보면 비록 반공주의자 화교라도 대륙 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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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내려가는 청천백일만지홍기. 관련기사 당시 대만 외교부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했으나 시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만이 철수한 대사관은 곧바로 중국 대사관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본래 청나라외교공관이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쓰였다.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은 외교관계가 있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서울(경성)에 공관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독립한 뒤, 청나라 시절 때처럼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던 것인데 중국 측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한편 문제의 중국 대사관은 재건축 문제로 종로구 효자동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2014년 1월에 복귀했다. 복귀 후 개관식 개최.

그나마, 한국 정부는 대만 대사관의 직원들을 무력으로 쫓아내지 않으면서 신사적으로 대우를 해줬고, 사전에 미리 철수를 할 수 있도록 길게 시간을 줬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중국 측에게 새로운 대사관 부지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에서 사용하던 대사관을 자신들이 점유하면서 양안관계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대만 대사관에 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대만 국적의 화교 사업가에게 매각하는 식으로 눈가리고 아웅했지만, 그 덕분에 중국 내 미국 자산이 동결되는 보복조치를 당했다. 미국도 당했는데 1992년의 대한민국은. 다만 사우디의 경우, 국왕이였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배려로 대만 대사관이 곧장 타이베이 대표부로 간판만 바꿔달 수 있었다. 당연히 중국 측은 격분했지만, 사실 수교 전까지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는데다 산유국 +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에게 중국이 특별한 보복을 취하려고 해도 산유국에다 할 수 있는 보복수단이 없었다. 심지어, 프랑스의 경우는 아예 경찰들이 개를 풀어서 강제로 쫓아냈다고 한다.

3.3.2. '한국의 배신' 주장

냉전기 한국과 대만은 우방국이었으며, 서로가 분단된 자본주의 국가고 대치하고 있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며, 1980년대 말에 들어와서야 민주화가 진전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냉전 시절에도 대만의 행적이 그렇게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반박도 있다(아래 문단 참조).

중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던 한국이 1988년 중국에 대한 호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했을 때, 대만 측은 당연히 항의했다. 대만이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라는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강조되지만, 여타 소국들과 달리 한국은 차례 차례 단절되어 가는 대만 외교에서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그러한 조치가 대만 입장에서는 중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 외교관에 대한 대접은 국빈 수준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대만 외교상 최후의 대국'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근거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한국보다 인구도 더 많고, 면적도 더 넓다는 점을 든다. 남아공이 단교한 시기는 1996년 중국과 수교 접촉을 가진 뒤, 1998년 정식으로 단교했으므로 한국보다 대만과의 수교 역사가 길었다. 다만 1992년 기준 한국 4300만, 남아공 3900만으로 1990년대 초 단교 당시까지는 한국이 남아공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남아공 인구가 한국 인구를 추월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무엇보다 경제력에서 남아공과 차이가 컸다. 당시 한국은 한창 삼저호황과 수출증대로 경제가 호조였고, 단교 전후 기간에는 인구가 수십배 많은 중국과 비교해도 중국 GDP의 70%에 달할 정도였으며 세계 10~11위 수준의 경제규모를 유지했다. 반면 남아공은 90년대 초반, 대만보다도 경제규모가 작았다.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줬던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비판받기도 했다. 당시 남아공은 F. W. 더클레르크 집권 이후 넬슨 만델라 석방,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종식 노력, UN 재가입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로 복귀하고 있던 터였다.

당시 한국은 대만과 이해관계가 밀접한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수교국이었으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경제대국으로 성장세를 보였다. 대만 외교계에서 외교부장으로 영전하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주한대사였으며, 대만 정부 역시 한중수교 저지에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단교 당시 주한 대만 대사는 진수지(金樹基)였는데, 주한대사 자리는 외교부장으로 올라가는 관문이었으나 단교로 인해 진 대사의 외교부장 영전도 좌절되었다.

특히 한국 내의 전통적인 반공, 반중 논리에 입각한 이들 가운데는 대만과의 단교를 명분적, 도덕적인 잘못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조선일보 2016.5.12. 칼럼 "타이완을 홀대해서는 안 되는 까닭"[17] 다만 일반적으로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 중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3.3.2.1. 반박
배신이라고 하기 위해선 양국의 신뢰가 긴밀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국가 대 국가 레벨이 아닌 민간 레벨에서 수교 시절의 대만은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던 때가 제법 있었다. 1960년대에 월드컵 축구 아시아 지역예선으로 원정을 간 한국 대표팀이 편파 판정에 항의하자, 대만 관중들이 난입해서 선수를 폭행하는 깽판을 저지른 적도 있다. 그 이후인 80년대만 해도 대만이 한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몇 가지 있다.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때 대만 언론이 한국을 방문 후 그때부터 한국의 부정적인 면만 집중적으로 방송에 내보내서 부각시켰다.

서울이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닐 때, 대만은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해서 반대표를 던졌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은 절대로 올림픽을 개최하면 안 된다며 노골적으로 일본 나고야 올림픽을 공개 지지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서울이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이후 대만 언론은 일부러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는 서울의 종로 등의 뒷골목을 활보하며 더러운 거리의 도시라는 식으로 한국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방송을 올림픽 특집으로 꾸미고, 서울 시내 달동네를 보여주며 이런 가난한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투의 방송을 내보냈다. 한국이 88 올림픽 이후 의외로 선전하자 대만 언론이 한국의 비리로 점철된 검은 올림픽이라고 억지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대만 거주 한국인들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특히 대만의 반한 감정 문제에서 88 서울 올림픽의 사례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79년 미국과 단교하면서 (88년 올림픽 유치전이 본격화된) 80년대 이후의 대만은 외교적으로 거의 완전히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당장 바덴바덴 IOC 총회가 열린 81년 기준으로 대만에게 남아있던 수교국 중 인구 천만급 이상의 어느 정도 존재감 있는 국가는 한국 외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 정도 뿐이었던 것. 게다가 지정학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사우디나 남아공과 대만의 관계가 소 닭 보는 관계에 가까웠다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장기간 유지해온데다 지정학적으로는 대만의 이해관계 및 안전 보장에 직결되는 동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수교국으로서, 대만 외교가에서 한국의 중요성은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이 막대했다.

바덴바덴 현지 분위기에서 '서울은 딱 3표 나오겠다'고 했던 것 역시 한국은 당사국이니 당연히 자국에게 표를 줄 것이고, 미국은 당시 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며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냐고까지 평가받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에 표를 줄 가능성이 높았으며, 대만의 경우 한국과의 외교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해두는 것이 필요한 입장이니 한국에 표를 줄 가능성이 높다는 정세 예측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표결 결과 서울이 예상보다 훨씬 큰 격차로 나고야를 따돌리고 승리한 상황에서 정작 당연히 한국을 지지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대만은 오히려 일본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이후 올림픽 개최까지 지속적으로 한국의 올림픽 개최에 대해 극히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성장과 냉전 구도의 완화, 중국의 국제 외교 무대 복귀 등이 겹치면서 80년대 들어 대만의 국제적 영향력 및 지역 내에서의 위상이 급추락할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국가는 일본뿐이었고, 1964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일본은 자국의 강화된 위상을 세계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80년대 이후 대만은 국제적 영향력에서 한국에 완전히 추월당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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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및 대만과의 단교에 대한 대만인들의 유별난 분노는 애증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국 주제에 종주국을 배반하다니!'라는 봉건적인 중화사상도 기저에 깔려 있다. 대만인들도 사실 본성인들 자체가 중국 주류 민족인 한족이고, 외성인들은 중국인(대륙)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냉전 기간 동안 부국(富國)이었기에 한국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는 시선이 많다.

중국 국민당이 대륙의 합법 정권이었던 시절부터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동시에 장제스광복군을 이른바 '한국 광복군 행동준승'에 의거, 국민당군의 휘하에 두려 했다. 1941년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 사이에 합의된 행동준승에 의하면 광복군은 국민당 정부의 허락 없이는 총알 한 발도 쏠 수 없는 군대였고, 심지어 광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격하더라도 여전히 군의 통수권은 장개석에게 있었다. 결국 무늬만 대한민국 광복군이지, 사실상 국민당 정부군의 조선인 부대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광복군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이탈하거나, 합류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걷던 단체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의 지원 없이는 갓난아기처럼 무력하기만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해방 이후에도 중화 사대 관계에 의거하여 한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물론 국공내전에서 패하면서 그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냉전 하에서 양국의 외교 협력과는 별개로, 대만인들은 당시 대만이 한국보다 빨리 경제 성장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만만하게 보면서 깔보는 정서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컬러 TV가 1980년대에나 보급된데 반해서 대만에서는 1970년대에 컬러TV가 보급되었고 해외여행자유화는 한국에서 1989년에나 이루어진데 반해 대만에서는 1979년에 시행했고, 자동차 대중화도 한국은 1980년대 중후반에나 시작된데 반해 대만에서는 이보다 5년 더 앞서서 시작되었다.

물가 상승 문제나 경상수지도 한국보다 대만이 더 우월했다. 한국은 물가 상승률이 한 자릿수대로 떨어진 것이 1980년대에나 이루어진데 반해 대만은 이미 1960년대에 물가 안정을 이룩했고, 대만이 이미 1970년대에 경상수지 흑자가 이루어진 데 반해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서야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그나마도 3저 호황이 끝나면서 다시 적자로 돌아서면서 IMF 외환 위기 이전까지는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빈부 격차도 한국에 비해 대만이 훨씬 더 적었다. 이걸 한국이 2000년대에 따라잡고 봉급 수준도 대만의 2배 이상으로 뒤집은 것이다.

더욱이 1988년 대만의 차기 호위함 사업인 캉딩급 호위함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울산급 호위함을 도입하기로 했다가 대만 국민들의 큰 반발을 샀던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대만 위키피디아 링크에 따르면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은 1988년 5월 17일 한국으로부터 16척의 울산급 호위함을 구매 승인하였는데 1989년 돌연 프랑스에서 무기 구매를 타진하고 1990년 라파예트급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 버린다. 이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어찌 무기를 살 수 있냐는 국민감정에 의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으로, 현대중공업은 손해를 본 것도 본 것이지만 국가간 계약에서 이렇게 신의 없는 일을 한 것에 어리둥절함을 넘어 황망해했는데, 해당 사건이 있던 시기는 엄연히 1992년 즉 한국대만의 국교가 유지되는 상태였다. 그 이후 2년 만에 한국은 대만과 단교하게 되니 어찌 보면 대만의 분명한 자충수.[18]

실제 단교 문제로 따지면 일본이 먼저 대만과 단교해버렸었음에도 대만은 일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감을 가지지 않고 여전히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축출당할 때는 프랑스 경찰들이 대만 대사관에 개를 풀어서 짐승처럼 쫓아냈을 정도다.

다음으로, 대만이 한중 수교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이미 80년대 후반 한국이 북방 정책을 추진할 때부터 한중 수교 가능성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냉전이 격화되던 1980년대 중반에도,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를 추진하자 한국 측에서는 프랑스와 북한의 수교를 승인하는 대가로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중재해줄 것을 프랑스에 요구한 바 있다.

이렇게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와 중국 관계는 당시에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수 반공 성향의 샤를 드 골 대통령 시기에 일찌감치 중국을 승인하고, 대만과 단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념과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실사구시적 외교가 전통이었고, 또 당시 대통령이 사회당 출신으로 비교적 북한에 유화적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 중국과 경제 교류는 물론 헬리콥터, 미사일, 레이더 등 군사기술까지 이전해 줄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이런 군사 협력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 파탄나기는 했다.

그런데 한국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측에서는 중국 대신 폴란드와 수교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함으로써 한국이 입게 될 외교적 손실을 커버하려면 북한-프랑스, 한국-중국의 교차 수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버텼다. 결국 프랑스는 북한과의 수교를 단념하고, 파리 주재 북한 통상 대표부를 일반 대표부로 승격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고, 한국은 몇 년 후에 프랑스의 중재 없이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과 프랑스는 아직도 미수교 상태이다.

특히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자, 대만 내에서도 한중 수교는 시간 문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시의 외교 관측통들은 한소 수교보다 한중 수교가 먼저 성사될 것으로 예측했는데, 한소 수교가 먼저 이루어지고 한중 수교가 나중에 이루어진 걸 보면 당시 한국 정부가 대만과의 외교 관계 정리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추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중국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추진한 것도 있다.

주(駐) 타이베이 한국 대표부의 조백상 대표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대만에 대해 저자세를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실 대만인들은 신세대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처럼 젊을수록 단교 건에 대한 배신감 역시 약하다. 밑에서도 설명할 국민당의 무리수 선거 광고도 결국에는 선거 참패로 이어지면서 역설적으로 대만인들의 한국 경제에 대한 열폭 감정의 약발이 미미해졌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마잉주 집권 이후로는 대만 정치권에서도 우선 순위는 낮지만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은근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3.4. 단교 이후

여전히 대한민국과 대만은 어느 정도 비공식적인 교류는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대사관이 철수하긴 했지만, 대신 대표부 성격의 외교 기구가 상대국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부는 타이베이에 위치해 있으며, 대만의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네거리의 동화면세점 건물에 위치해 있다.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주한국대만대표부 문서 참고.[19]

또한 부산광역시 중앙역 바로 앞에 부산사무처도 두고 있다. 문화교류도 어느 정도 활발하며 특히 90년대 말부터 한국노래와 드라마, 게임이 대만에서도 인기를 얻었고 현재도 대만 거리를 걷다보면 한국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또한 민간 단체로 대만계 화교들의 협회인 한국화교협회 연합총회(韓國華僑協會聯合總會)가 있으며 서울 중구 명동2가, 영등포, 인천에 협회를 두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 내부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격화되면서, 친중화민국 또는 친대만 사이에서 중국단교하고 다시 대만과 재수교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간혹 있다. 특히 코로나19 범유행 시기 이러한 반감이 극대화되면서 재수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진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얻고 있는 이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비현실적인 주장에 가깝다. 그리고,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현재 중국과 한창 치고 받고 있는 미국부터 대만과 재수교했을 것이지만, 미국은 아직도 중국과 단교를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 진출해서 얻는 경제적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2010년대 들어 미국중국과의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보고 있다면서 수시로 불만을 제기하고, 관세 보복을 통하여 무역 전쟁까지 벌이고 있는 것도 미국이 중국과 비교하면 수출에서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미국이 얻는 이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미국도 역시 중국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는 중이다. 결국, 국제 사회는 국익이 우선이며 정치적이나 이념적인 갈등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3.4.1. 2020년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대만 관계/2020년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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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9일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이 대만의 잠수함 건조를 지원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청와대 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대만 외교부가 홍순창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부대표를 불러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자국 장관의 연설을 당일 취소시킨 데 대해 항의했다.#1#2 그리고 중국 눈치보기라는 논란이 일어났다.#

2022년 2월 19일부로 한국-대만 사이의 국제운전면허증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대만 외교부는 아래와 같은 짤을 외교부 공식 인스타에 게시했다. #
파일:한국-대만_국제운전면허.png

3월 9일 구준엽서희원과 결혼 발표를 한 다음날 대만으로 출국하자 대만에서 화제가 되었다.#

4월 9일 대만 해역에서 발견된 시신 2구 신원이 조난 사고를 당한 예인선 교토 1호의 한국 선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2022년 12월 31일. 대만 외교부가 "한국 국회의원 대표단과 조경태 한국-대만 의원친선협회장이 28일부터 31일까지 대만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2023년 2월 28일, 대만의 한 식당에서 한국 고교생들이 아이스크림을 공용 숟가락으로 퍼먹은 사건이 일어나자 논란이 일어났다.#

4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대만해협의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국제 사회가 반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5월 30일, 경상남도가 대만과 일본 관광객들을 유치한다고 밝혔다.#

4. 반한 논란

4.1. 대만은 반한이다?

대만은 일본 못지않게 혐한이 심각한 국가라는 의견이 있다. 대만 웹만 보더라도 일본의 혐한을 따라서 한국 흉보기를 하거나, 한국의 여러 문제점을 과대평가하는 혐한은 이미 널려 있다. 대만은 한류로 인해 한국 문화에 대한 친근감은 있지만, 단교과정에서의 앙금과 한국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대만인들의 대한감정이 절대로 좋은 게 아니다. 걸핏하면 한국에 대한 험담이나 악의적인 보도가 쏟아져 나오는 게 대만언론이다.#

파일:대만반한관련_80년대기사.jpg

대만 내의 반한에 대해 주로 제시되는 근거로는 단교가 있다. 한국이 1992년 대만과 단교하며 대만을 배신해 그로 인해 반한감정이 생겼다는 주장이다. 현 대만의 수교국들과 외교 실정을 보면 매우 어이없는 일이지만, 실제 대만 사람들은 반한감정을 단교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표면적인 이유고 현실에서 대만의 반한은 단교 이전인 80년대부터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대만은 1971년 유엔에서 퇴출을 당하고 단교국들이 서서히 늘어나며 국제사회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만이 우호국이라 부르면서 좋아하는 일본은 1972년에 단교를 선언하였고[20] 미국은 1979년에 대만과 단교를 하였다. 그렇게 점점 추락하는 국력 속에서 80년대 이후로 부상하는 한국을 견제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기사: 군용 선박 수출"타격" 대만반한 분위기 고조 - 매일경제(1988)

또한 위의 반박 단락에서 언급되었듯이 대만이 한국보다 먼저 경제 발전을 이뤄낸 것도 있고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한국을 아래에 내려다보는 기저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는데 그런 나라가 감히 자기보다 올라서려 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도 같이 작용하며 현재의 반한감정을 형성하는데 주된 원인이 되었다.

번외로,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대만은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이없어 보이지만, 대만은 스포츠, 경제, 문화 심지어 군사적면에서까지 한국에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견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한국 인구의 40%, 영토 면적 역시 1/3, GDP 역시 40% 정도에 불과하며 아예 한국과는 체급, 국력이 다른 수준으로 변했으니 당연히 한국과 적절한 비교 대상이 될리가 없다.

게다가, 대만은 UN 회원국 조차 아니고 정식으로 국가로 인정받는 수교국 역시 몇 되지 않는 대만의 현실 속에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나 외교력은 아예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게다가, 문화적으로도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한국과 다르게 중국과 구별되는 문화적 영향력이 거의 없다시피한 대만이 한국과 라이벌이 될 리가 만무하다. 문제는 중화사상에 입각해 자신들이 무시하는 한국이 자신들보다 강한 나라라는 사고방식과 현실의 괴리가 한국에 대한 열등감과 반한감정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 역시 이 정도의 체급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며, 실제로 일본 우익이 한국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이런 '체급' 차이에서 기반한 측면도 크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이러니저러니해도 수천년동안 비교적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해 왔으며, 서로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점에서 대만과의 관계와는 다른 측면도 크다.
파일:attachment/pk.jpg
한국과 대만 10대 기업 비교. 가운데 숫자의 단위는 억 미국 달러.[21]

그나마도 이 표는 2013년부터 대만이 경제위기를 맞아 대기업이 침체를 겪으면서 의미가 없게 되었다. 사실 저 비교표만 봐도 대한민국 일반인이 한번이라도 들어본 기업은 HTC, Foxconn, 에이서, TSMC 정도일 것이다.

이 회사들을 짧게 설명해보자면 HTC는 대만의 자존심과도 같은 스마트폰 기업으로 한때는 잠시나마 안드로이드 OS 체제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현재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별명이 Help This Company다.

Foxconn은 국내에서는 애플의 하청업체로 유명한 기업이다. 최근 삼성전자와의 경쟁 끝에 샤프전자 인수에 성공했다. 물론 이번 인수전 승리엔 일본 관료들의 삼성 배척 운동이 한몫했다. 인수 후 폭스콘 회장이 삼성전자에 샤프패널 공급을 끊어버리자 삼성TV 저가형은 눈물을 머금고 중국제 패널을 쓰다가 엘지디스플레이와의 TV용 대형 LCD 공급계약 체결이라는 결과를 뽑아냈다.

에이서는 90년대에 한국에 진출했지만 수익성이 부진하자 야반도주하듯이 철수하여 구매자들의 A/S문제라든지 무수한 문제를 일으켰다. 2000년대엔 한국에 재진출했다가 야반도주한 놈들이 뭔 낯으로 돌아오냐며 욕먹고 막장기업이라느니 대만답게 개판이라는 비난과 같이 대만 기업 이미지 악화에 기여하고 말았다.

2020년 7월에는 대만 반도체 회사인 TSMC삼성전자시가총액을 추월했지만 TSMC를 빼면 격차는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10위까지 기업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위 차트보다 더 벌어졌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도요타 시가총액 2배지만 일본 경제와 한국 경제 차이가 여전한 것과 비슷하다.

10만원~20만원대에 팔리는 인텔 아톰 프로세서 또는 셀러론 프로세서가 탑재된 중소기업 태블릿PC나 노트북의 경우 대만제 ODM과 중국제 ODM이 공존하기도 한다.


위 영상은 대만 정부가 중국과 체결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의 서비스 부문 추가 비준이 중국에 비판적인 민진당 등 야권, 학생단체의 반대로 지연되는 동안 한중 FTA가 체결되어 중국 시장을 한국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에 대한 경제 라이벌 의식에 호소하면서 "경제 발목잡는 야당을 심판하자"는 의도였지만, 막상 해당 선거(2014년 지방공직인원선거-한국의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하면서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애국심 마케팅이라 널리 욕을 쳐먹은 것은 덤이었다. 한중 FTA를 막는 게 아니라 민진당을 선거에서 참패시켜 동력을 상실케 해 ECFA 확대를 빠르게 하자는 것[22]이었지만, 현실은 반대로 국민당이 민진당한테 관광당했으니 실제로 ECFA 서비스/투자협정은 국민당의 지방선거 참패 이후 비준동의안이 멈췄다.

일단 대만의 지자체에서 "한중 FTA를 막읍시다!"라는 공약을 내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과 중국이 맺는 경제협정을 제 3국의 일개 도시(市)의 지자체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없고, 손댈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닐 뿐더러, 된다면 내정간섭이다. 대만 총통이나 중국 주석도 제대로 간섭하지 못하는 것을 제 3국의 일개 지자체의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는 것 자체가 그저 어이가 뺨을 치는 소리다.

그리고, 가끔 한국에 대해 잘못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는 한국인들이 공자 한국인설을 주장한다는 말이 있다. 최근 마잉주 총통에게 한국 유학생이 직접 공자의 한국인설을 제기한 루머에 대해서 바로 잡아달라고 탄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부 환빠 성향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한 사례는 있지만 그런 사례는 공자에만 그치진 않는다. 그리고 이 주장은 말할 가치도 없는 마이너한 주장일 뿐이다.

그 밖엔 한국이 강릉시 단오제를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단오의 기원국인 중국 측이 "단오를 한국에 빼앗겼다" "한국이 단오절을 자신들의 명절이라고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오해도 환빠로 인한 오해와 함께 널리 퍼진 오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조선풍으로 각색(현지화)한 '예수의 일생' 연작 그림을 "한국이 예수마저 한국인이라 거짓부렁한다"는 유튜브 영상도 있다.[23] 심지어 환빠를 깔 목적으로 디시에서 만든 '환빠가 생각하는' 세계지도가 역시 대만을 통해 퍼지면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세계지도로 알려진 경우도 있다. 위와 같은 억지스런 왜곡과 오해가 하나의 인터넷 문화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대만에 알려진 또 다른 잘못된 사실의 예로 T-50 골든이글의 개발 과정이 있다.T-50 체계개발 당시 F-CK-1 개발에 관여한 소수의 대만 엔지니어들이 중량 절감 설계의 일환으로 수평 미익의 재질 변경에 대한 자문을 해준일이 있었는데, 대만에서 이 사실이 와전 내지는 왜곡돼 "대만 기술진이 T-50 개발에 참가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T-50은 경국의 카피판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 대만에 퍼져있으며, 이렇게 본인들이 왜곡한 사실을 본인들도 2024년 현재까지도 사실이라고 믿는 지경에 이르러 한국의 항공 발전에 대만의 항공 산업이 주축이 되었다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기사 물론 실상은 T-50 개발과정에 깊게 관여한 해외 파트너는 미국의 록히드 마틴이었고, 대만측 엔지니어들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1, #2

주리시(朱立熙)[24][25] 대만 지한원장에 의하면 젊은 세대는 그래도 한류 등의 영향으로 비교적 친한적인 편이나 대만의 고령층은 한국에 대해 중화사상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여기에 더해 일제시대 당시 조선의 경제력이 대만보다 열악했던 점 및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의 경제력이 한국보다 앞서 있었던 데 따른 멸시감과 우월의식도 한몫 한다. 그리고 단교 전 양국 간 갈등을 목격한 40-50대의 경우 특히 한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대만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목적과 선정적인 대만 언론매체들이 이를 조장했다는 것. # 사실 대만 언론의 선정성 경쟁은 한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가 않다. 인구가 한국의 절반 정도 수준인 국가에서 지상파 방송사가 5개인데다가, 종합편성채널이 20개, 보도채널이 9개나 될 정도니 자연히 방송사들은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선정성 경쟁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복마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문이라고 해서 사정이 특별히 다르지는 않다. 대만/문화 항목 참조.

대만에서 유년시절 5년을 거주했으며, 대만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컨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한국인 유튜버가, 2020년 7월에 업로드한 한국에 관련된 루머들을 해명하는 영상의 상위 코멘트에는 해명한 내용들을 오히려 재반박하거나 한국인 입장에서 매우 보기 거북한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인 PTT에는 한국 관련 이슈나 사건 사고들이 자주 게시되는데, 불미스런 사건이나 사고에는 특히나 수많은 코멘트가 등록된다. 상당수가 한국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댓글이다.

사실, 위의 유튜버는 다른 동영상에서 대만인들에게 약간의 불만을 드러내었다. 대만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었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사람도 늘었지만, 한국 관련 악성 루머나 오해에 대한 해명을 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관련 컨텐츠를 업로드하는 대만 유튜버들도 늘었지만, 어디까지나 한국 화장품, 한국 여행, 한국 연예계 소식으로 '돈을 벌기 위한 비즈니스' 차원의 내용이 주를 이루며, 철저하게 비지니스에만 이용되고, 비하와 루머에 해명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한국의 위치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낸다.

게다가, 대만 내 한류의 유행과, 대만의 혐한 감정을 절대적으로 결부짓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2010년 양수쥔 사건으로 대만 전역에서 혐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불을 지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인터넷에서 루머들을 확산하고 공유했던 연령대가 당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이 현재 대만의 20~30대이다.

현 대만의 젊은 세대들이 반한감정의 원인으로 내세우는 근거는 '스포츠, 전자산업, 범죄 및 사건' 이다. 특히 이 중에서 스포츠가 가장 심각한데, 기본적으로 대만인들에게 한국 스포츠는 '심판을 매수하는 치졸한 방식으로 승부하고, 선수들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없고 반칙을 일삼으며, 이런 식으로 더럽게 승리하여 거만한 태도를 취한다' 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당연히,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대만 정치권과 언론의 뿌리깊은 부채질에 의해 이러한 이미지는 뿌리깊게 각인된 상태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과 더불어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그 감정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대만 정치권에서는 이 반한감정을 또 한 번 정치질에 이용하는 못된 짓을 저지른다. 당연히 2010년 양수쥔의 실격 판정은 한국과 전혀 무관했으나, 당시 인터넷을 이용하던 주류층이던 젊은 대만인들에게는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만의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와 달리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이미 중화권 문화와 사회에 깊숙히 뿌리가 박힌 중화사상의 영향에서 이들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큰 오판이다. 중국 본토, 중화인민공화국과 구별되는 정치체이자 국가로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춘다고 해서 대만의 중화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아니며, 중국의 일부도 아닌 아예 독자적인 국가지만, 싱가포르계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중화사상에 기반한 우월주의를 가지는 경우가 없지 않으며, 이는 홍콩인들이나 중국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대만은 싱가포르나 홍콩, 영미권의 화교들과는 달리 서구권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짙게 받아서 독자적 정체성을 갖추게 되었다기보다는 정치적, 지리적 요인으로 중국 본토와는 구별되게 된 것으로, 문화적으로 중화권 기질이 더 강하며 '중화권'으로서의 정체성도 더하면 더했지, 약하지는 않다. 게다가 애초에 '중화'라는 개념 자체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문명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중국'과 독자적인 국가로서 대만의 정체성이 젊은 세대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추세라고는 해도 중화사상 자체의 영향력이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대만이 중국이 아니라고 해서 중화권 국가가 아닌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에 젊은층의 이용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만의 인터넷 여론 등에서도 중화사상에 기반하여 멋대로 한국을 낮춰보는 시선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범람연맹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구별되는 정체성과 대만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인 범록연맹 성향의 대만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범록연맹 측에서도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은 완강하게 부정을 하더라도, 대만이 '중화권' 국가이자, 대만인들과 대만 문화의 원류가 중국 문화에 있다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범록연맹 내에서도 대만의 중화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으나 주류세력이 아니다.

타이베이시의 한국인 초등학교가 테러를 당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마잉주 총통이 직접 나서서 "한국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진정시키겠다" 라고 여론을 진화시키는 것에 나섰고, 양수쥔 선수가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에게 사과를 했으나, 아직까지도 잘못이 한국 측에 있는 것으로 멋대로 오해하고 있는 대만인들도 많다. 실제로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신아람 선수가 오심을 당하자, 양수쥔 사건의 인과응보라고 조롱하는 대만의 여론이 주류였다.# 박인비 선수 역시 이러한 스포츠 반한감정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전자산업으로 기인한 반한감정으로는, 삼성전자와의 해프닝이 가장 크다. 삼성전자의 공격적인 반도체 업계 진출과 치킨게임의 가장 큰 희생자가 대만이었고, 한국에 이를 갈고 있다가 '삼성의 후기 조작사건(三星寫手門事件)#을 크게 이슈화 시키며 스포츠 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도 부정적인 편법을 일삼는 프레임을 만들어 씌웠다.

또한, 이렇게 본인들이 생산한 한국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편견들은 현재도 유효하며 상당히 대중적으로 퍼져있다.#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제 대만에서 "팩트"로 취급되며 이에 관련된 비판과 사실 교정은 전혀 이루어지지도 못한다. 설령 현재 표출되는 반한은 줄어 들었을 지언정, 그 반한의 연료가 된 편견과 선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착화되어, 감정적인 반한에 끼워맞추면서 멋대로 "혐오"를 "정당화" 하고 본인들을 한국의 악독한 "피해자"로 포장하는 재료가 되어버렸다.

요약하자면, 이 모든것들은 전부 대만에서 굉장히 과장되고 일반화를 통해 설계되어 변질된 한국에 대한 시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대만 언론에서는 이러한 반한감정을 이용하여, 한국에 관련된 자극적이고 편향된 기사나 보도를 자주한다. 심지어 조작도 서슴치 않는다.[26] 특히 한국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하거나, 한국인이 대만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전 방송사가 앞다투어 이를 보도한다.

결국 이러한 자극적인 보도를 빈번하게 접하는 대만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한국과 한국인은 부정과 사기를 일삼는 것을 모자라, 대만과 대만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모습과 이미지로 각인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이런 한국과 한국인에게 반한감정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는 당위성까지 내재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혐오감정을 조성하며 일반화를 하게 되어 한국도 대만을 상대로 충분히 같은 선동과 혐오감정을 설파할 수 있다. 한국에서 보이스 피싱 범죄에 가담하다 수감되었던 대만 여학생에 관한 기사 여대생 보이스피싱 체포 사건 당시에 대만언론에서는 한국을 범죄소굴로 묘사하며 매우 위험한 곳으로 표현해서 보도했었다. 대만인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 사건을 가지고 또 한 번의 반한선동을 시도한 것이다. 대만 범죄조직의 한국내 필로폰 유통에 관한 기사.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반한감정을 무조건 열등감이 원인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는 무엇보다도 대만인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원인이다. 아무리 한국인들이 대만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그들을 대해도 결국에 그들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문단에서 보다시피 대만의 반한감정은 매우 과장되고 실체없는 근거들로 정당화 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혐오에 사실은 중요치 않다. 공자 한국인설을 한국인이 중국 예능에 나와 반박해도 아직도 중화권 혐한들은 공자 한국인설을 혐한에 이용한다. 심지어 '도둑국' 이라는 표현까지 만들어 정당화 시킨다. 오로지 혐한이라는 목적 앞에 끼워 맞추는 논리들을 결국에는 대만인들 스스로가 깨우치고 반성하지 않으면 이 반한감정은 사라지기가 힘들다.

그리고, 한류의 유행으로 반한감정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관점도 지양해야 한다. 시진핑미국 드라마를 즐겨보고, 김정일도 영화광으로 생전 미국 영화를 즐겨 보고, 아베 신조는 생전 한식을 아주 좋아했다. 당장에 반중 여론이 압도적인 대한민국에서도 짜장면, 탕수육, 짬뽕을 안 먹는 한국인들도 거의 없다. 전세계적으로 한류가 퍼졌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기거나, 혹은 한국에 아예 관심이 없던 사람이 싫어하는 쪽으로 흑화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 나라에 대한 환상과 그 나라 사람에 대한 성적대상화는 그 나라에 대한 진정한 친선과는 큰 관계가 없다.

대만의 반한

4.2. 대만은 반한이 아니다?

본 문서에서 서술된 것과 다르게 대만 내 반한 감정은 과장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자극적인 소재를 원하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과장되게 표현된 것이 국내 네티즌들에게 여과없이 전달된 것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앞에 언급된 공자 한국인 설이니 하는 것들은 주로 미디어가 부풀리는 것이다. 앞에 언급이 되어 있지만 대만의 미디어의 선정성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그 수준을 뛰어 넘는다. 한국 종편채널들의 자극적인 보도는 애교 수준일 정도. 한국에서는 인터넷에나 올라올 '대륙의 기상' 따위의 내용이 메인 뉴스에 여러 꼭지 방송되는 수준이고, 대만 미디어의 저질스러운 수준을 모르는 한국 네티즌들이나 한국의 언론사들이 이런 내용을 보고 방송사 뉴스가 저런 걸 얘기할 정도면 반한감정이 되게 심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들의 언사가 여과없이 한국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부분이 있다. 대만은 오랜기간 경제침체를 겪고 있으며, 정권교체가 된다고 해서 이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경제 구조가 되어버렸다. 총통 선거에서는 늘 경제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지만, 대만이 상대적으로 의식하는 국가는 오직 한국이었고 스스로 국가적 역량이 한국과 비슷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거 시즌만 되면 정치권에서는 허구한 날 한국을 까는 기사를 쓰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언론이 이를 비판해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장되게 부풀리는 경향도 있다. 그리고, 대만 언론은 대놓고 정파가 갈라져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파의 주장만 마구잡이로 보도를 한다. 즉, 정치권과 언론이 반한감정에 앞장서고 있는 셈인데 대만의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인이 봤을 때는 당연히 언론과 거물권 정치인들을 통하여 나오는 주장들이 대만 국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반한 문단에서 언급되듯이 정치권이 지방선거에서 한중 FTA를 막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오히려 대만 국민들에게 까이는 실정이다.

대만민의기금회의 2018년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한국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58.4%,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33.8%로 반한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호감을 가진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2017년 조사(호감 48.6%, 비호감 41.7%)와 비교했을 때 호감을 표시한 비율이 오히려 더 높아진 편이었다. 다만 해당 비호감 비율 33.8%도 조사대상 10개국 중 북한, 필리핀, 중국에 이어 4위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반한론 항목에서는 유튜브 댓글이나 PTT같은 익명 커뮤니티 댓글을 근거로 혐한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를 한국에서의 유튜브 댓글과 디씨인사이드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대로 대입시켜보면 한국도 똑같이 제노포비아가 만연한 나라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키보드나 두들기는 극단적인 키보드워리어 무리의 언행에 비추어 상대 국가를 판단하는 것은 한국어 좀 배운 외국인이 네이버 뉴스 댓글을 읽고서 "한국은 이런 나라구나" 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과의 동급인 실책이다.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서도 대만의 혐한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종종 이와 관련된 사건들이 터지고 있지만 #, 2022년에는 최근 중국이 '한국 김치는 중국식 채소 절임인 파오차이(泡菜)의 일종'이라며 억지 주장을 펴는 가운데 대만 정부가 김치를 한국의 상징으로 표현한 포스터를 공개했다. # 그리고, 막무가내로 반한감정을 표출하던 과거와 다르게 대만에서도 서서히 한국의 눈치를 보고 있으며 대놓고 반한감정을 표출하는 행동을 줄이고 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2002년 이후 중국에서 동북공정 등 한국사 왜곡으로 논란을 빚는 와중에, 대만의 사학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한국의 역사학자들과 함께 중국의 한국사 왜곡을 비판하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 한국일보 기사 한겨레 기사 동아일보 기사 : 中 대학교재-대만 교수들 "고구려는 중국 아닌 한국역사" 물론, 대만의 학자들 중에서 동북공정에 동의하는 입장을 가진 경우도 있으므로 일반화를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만에서는 소신있는 태도를 내세우는 발언이 가능한 것이다.

2013년 방영된 꽃보다 할배와 여행사들의 대만 붐 조성으로 한국-대만간 민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양국 방문 관광객 증가와 한국-대만 워킹홀리데이 쿼터수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4.3. 한국의 반응

전체적으로 한국인들이 대만에 대한 감정은 무감정에 가깝지만 2010년 이후로 대만의 반한 감정이 한국에 많이 알려졌고, 2010년 11월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로 인해 한국인들의 대만에 대한 감정도 나빠진 면이 있다.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에서 대만 정부는 양국 국민들의 반응과 달리 공식적으로는 한국 탓이라는 말은 한 적은 없다. 다만 당시 우둔이 행정원장이 욕한 적은 있다. 그리고 계속 문제가 커지자 진정시키겠다고 한국에 통보했다.

다만 최근 미세먼지, 중국 어선의 서해 불법 조업, 사드 보복,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등으로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나타나는 상황의 영향으로 대만에 대한 인식이 이전에 비해선 좋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양안관계에서는 거의 일방적으로 대만을 옹호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건 민간분야의 얘기이고 정부 차원에서는 1992년 이래로 수교관계를 가진 만큼 공식적인 정치외교면에서는 중국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한중관계가 악화되며 한국인들(주로 게이머들) 사이에선 타이완 넘버원 드립이 성행하고 있다.

그래도 냉전을 통해 대만이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실제로 인식할 수 있었던 80~90년대 출생 한국인들과 달리[27], 냉전체제가 완전히 해소되어버린 2000년대 이후 출생 한국인들은 대만에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다.

사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한국인들에게는 홍콩, 마카오, 싱가폴 등과 함께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주변국이라는 인식은 거의 없고, 오히려 관광지, 내지는 여행지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대만의 한 방송사에서 2022년 3월 21일에 있었던 중국동방항공 추락 사고 소식을 다루면서 기체 설명에 동방항공이 아닌,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모형을 사용하며 논란이 일었고# 2022년 4월, 대만의 TVBS 방송국에서는 한국의 코로나 상황을 전하며 태극기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합성해 또 논란이 일었다.# 이에 네티즌들은 "대만이 혐한 국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만도 결국 중국인이다" 등의 반응과, 몇몇 커뮤니티에선 조금 더 심하게 "나라도 없는 것들", "섬짱깨" 란 멸칭들이 나오며 그동안 무관심 했던 대만의 혐한 성향에 대한 재확인과 반대만 정서를 표출하게 됐다.

TVBS의 악의적 왜곡보도에 대해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가 항의 했으며, 재발방지를 요청했다. # 이에 대해 TVBS는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

허나 이 TVBS는 또, 한국의 블랙 이글스를 "김치기"라고불렀다가 급히도 블라인드 처리를 해놨다. 요약글 해당 보도 영상에는 한국인들의 항의 댓글들이 달리고 있고, 또 그것을 비꼬며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대만인들의 댓글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심지어 T-50 훈련기가 본인들 전투기의 아류 전투기라는 주장을 하며 한국의 산업이 대만의 카피캣인양 믿고 비하하는 대만인들의 댓글들도 볼 수 있다.

다만 위 사건에 대해서 한국 측의 잘못도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김치기라는 별명이 대만 밀덕 커뮤니티에서 평소에 그렇게 불리던 애칭이었다는 것을 한국 언론들이 몰랐던 점과, 보도 내용 자체는 저번과는 다르게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항공기를 봐서 들뜬 밀덕과 항덕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대만 현지에서도 김치기라고 부른 것이 비하적인 의미로 부른 것이 아니었지만 한국 측이 비하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당황했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28] 결론적으로 한국인들이 대만 언론에 대해 무지하여 벌어진 촌극이었다.

그러나 무슨 유튜버도 아니고 공식 방송사 보도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별명을 쓰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에펨코리아DC인사이드에서 차크리 나루에벳보고 나룻배라는 표현을 쓴다고 YTN에서 태국 해군에 대한 방송을 할 때 나룻배라고 부르면 몰매를 맞는 것처럼 불쾌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해당 방송의 아나운서는 대만이 아니라 한국 네티즌들이 T-50을 김치기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FA-50이나 T-50을 김치기라고 부르는 커뮤니티는 없으니 대만 놈들이 또 없는 말 지어내서 혐한하는 구나라고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또 위 대만 현지 기사는 원인을 잘못 잡고 있다. 이 기사는 '중국 김치공정 때문에 김치의 중국번역명 파오차이를 쓰는 걸 한국인들은 불편해하고 신치라고 중국 번역명을 새로 정했는데 우리가 파오차이기라고 했으니까 기분 나쁜거다'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국내 반응은 파오차이라고 부르든 신치라고 부르든 전투기에 굳이 '김치'를 붙이며 운운하는 게 불쾌하다는 거지 파오차이라고 해서 기분 나쁜게 아니다. 신치기라고 해도 똑같이 기분 나빴을 거라는 거. 굳이 비교하면 일본 배보고 스시선이라고 하거나 대만 메인보드 보고 우육면보드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뜬금 없고 '뭔 소리지?' 싶은 것이다.

단 대만의 경우, 아래 대만 외교부가 한국과의 국제운전면허증 협약 체결을 축하하면서 올린 그림처럼 김치를 한국과의 관계에서 '우리 한국 문화에 관심가지고 있어요'라는 표시로 자주 쓰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애초에 한국이 김치를 한국 대표문화로 홍보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파일:한국-대만_국제운전면허.png

다만 2020년대 들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일반 국민들의 대(對)대만 여론은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다. 2023년 실시된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의 77%는 대만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응답했고, '비우호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19%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대만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4개 조사 대상국 중 일본(82%가 '우호적'이라고 응답)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5. 대만과 한국 국민간 인식의 불균형

위에서 언급했듯, 사실 한국인들이 대만을 이웃나라로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언론 보도 및 주변국들에 대한 인식 등지에서도 드러나는데, 한국인들은 중시해야 할 주변국들로 '한반도 주변 4강'(미국,일본,중국,러시아)을 꼽고, 북한 역시 우호/적대를 떠나서 신경 자체는 쓰는데 비해 대만은 미/일/중/러+북 과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단지 외교관계가 없는 것과는 다른 게, 북한도 외교 관계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북한에 대한 민간/외교적 관심도는 대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주변국'으로 인식 자체는 하더라도 한반도 주변 4강과 동등하게 중요하거나 밀접한 주변국으로 인식하지는 않으며, 한국과 동등한 대상 및 비교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경우가 다수이다. 더 나아가 아예 '주변국'으로 취급 자체를 안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대만인들의 반한 감정 및 라이벌 의식, 자국과 한국을 비교 대상으로 보는 것, 중화사상에 기반해 아래로 보고싶어하는 것 등에 대해 황당하고 어이없어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예시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주변국들과는 달리 별 접점도 관심도 없는 나라가 일방적으로 한국을 싫어하거나 경쟁 상대로 여기는 꼴이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기준 한국의 라이벌 내지는 비교대상은 스포츠든, 역사갈등이든, 경제적인 면이든 일본,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 미국, 유럽 국가들이지 대만은 언급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1인당 GDP를 넘었다' 같은 기사에는 관심이 쏟아져도 '대만이 우리나라 1인당 GDP를 넘었다'라는 기사에는 별 반응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은 대만을 무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주변국으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비교적 반중 감정이 적은[29] 40대 이상, 여성층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들 상당 수는 대만을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나 홍콩, 싱가포르 같은 멀리 있는 중화권 국가에 가깝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상당 수의 한국인이 대만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인식하게 되는 계기는 중국에 대한 반감 혹은 일본 다음으로 무비자로 갈만한 가까운 여행지이지 일상 생활에서 한국인이 대만을 접하는 일이 거의 없고 특히 대만 문화를 소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나마 포청천,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이 잘 알려진 경우로 통하는데 중국이나 홍콩 드라마로 알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외교 면에서 존재감이 강하지도 않고 군사 면에서도 우리가 도움을 받기도 도움을 주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중국 인민해방군이나 일본 자위대처럼 한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규모도 아니다. 그나마 경제의 경우 한국의 6위 수출시장으로 존재감이 있는 편이다. 결정적으로 국가간 경쟁이 가장 부각되는 스포츠가 한국과는 경쟁이 안된다.[30] 축구[31], 올림픽[32], 아시안 게임[33]에서는 거의 상대가 안되며 그나마 부각되는 게 야구인데 이것도 2008년 이후 대표팀 기준 11승 3패로 '혹시 모를 변수' 수준이지 라이벌로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34]

대만의 한국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비해 한국 대중이 대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위에 설명하였듯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만의 정체성 때문이다. '그래서 대만이 중국이랑 뭐가 달라?'라고 하면 정치/사회적인 면 말고는 부각되는 것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고 중국보다 훨씬 자유롭지만 결국 대만 인구 대다수가 한족이고 중국어[35]를 쓰며 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결국 우리나라랑 좀 가까이 있는 홍콩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대해 경쟁의식이든 호감이든 보이는 경우가 드물 듯, 반감을 가지든 호감을 가지든 중국이 그 대상이 되지 대만을 따로 떼어놓아서 반감이든 호감이든 관심을 가질 계기 자체가 드문 것이다.[36] 그래서 최근 그나마 대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이유가 중국과 대만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인 정치적, 사회적인 면이 최근 중국의 전랑외교홍콩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조사처럼 최근 한국인들의 대만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것이다. 기존에 대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대만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라이벌 의식이나 반한 여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민주주의 국가고 한한령 때 한국처럼 중국으로부터 대만이 핍박 받고 있는 것 같으니까 지지한다'라는 여론이 많은 것이다.

반대로 위와 같은 경로로 대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 나무위키 문서를 검색해보거나 대만에 대한 여러 언론 보도를 보고 대만의 반한 여론과 위에 언급된 여러 날조 사건들이나 주요국들 중에서도 가장 단교를 늦게 했는데도 단교를 이유로 혐한하는 모습을 알게 되면 대만에 대한 지지나 응원, 호감을 철회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부분을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 많이 보이는데 일본은 대만 정체성을 기준으로 봐도 대만일치시기에 50년 간 대만섬을 식민지배를 했고, 중국 정체성으로 따지면 당연히 중일전쟁을 일으켜서 다수의 중국인을 학살한 국가이고, 일본이 단교도 한국보다 20년이나 빨리했는데 왜 반일 여론은 거의 없고 대만을 식민지배한 것도 아니고 단교도 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한 한국에 대해 혐한/반한을 하냐는 것이다.예시, 예시2

6. 문화 교류

6.1. 대만에서 한국 대중문화

1990년대 말부터 대만 지상파 TV의 저녁 시간대에는 한국 드라마(중국어로 한쥐(韓劇)라고 부른다.) 여러 개가 방영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중화 문화권에서 한류 열풍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해외에서 부는 한국 대중문화 열풍에 대해서 한류(韓流)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곳이 대만이다. 그리고 최초의 한류 스타는 바로 클론으로 한때 대만 연예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월드컵 송은 현지 여가수가 번안해서 불러 크게 히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한류 현상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보도도 거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특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대폭발하던 시점부터 국내언론들이 '한류'라는 표현을 대거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대중음악 인기도 대단하다. 1990년대 후반 1세대 아이돌이 전성기였던 시절, 대만의 레전드급 영화배우 겸 가수 서회옥이 당시 한국에서 유행했던 수많은 곡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 클론의 도시탈출, 디바의 왜불러[37]가 있다. 이밖에도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표절곡들과 번안곡들이 많은걸로 알려져 있다.#

슈퍼주니어는 대만 내 현지 음원/음반 차트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단교 이례 최초로 대만에서 한국 유명인사에게 전용기를 보내주었으며, 우리나라의 골든디스크나 서울 가요대상에 해당되는 금곡장 시상식에서 외국 가수 최초로 자국 가수를 제치고 대상을 두차례 거머쥐기도 했다. 또한 라디오나 길거리, 음식점에서도 한국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오고, 광저우 아시안 게임 태권도 사건 때에 소녀시대, 원더걸스 불매운동이 이슈가 되어 "소녀시대, 원더걸스가 와도 용서해 줄 수 없다!" 같은 웃픈 구호까지 등장했다.

2000년대 들어 대만에서의 한국 대중문화가 그들이 옛날부터 심취해 있던 일본이랑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을 수준 혹은 2010년대가 넘어서는 그 이상까지 정착돼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15년에 자국 출신인 쯔위걸그룹 TWICE의 멤버가 되어 한국 연예계에 데뷔한 후로 이러한 모습을 잘 알 수 있는데, 쯔위가 아시아 아이돌 팝의 선두주자인 K-POP의 메이저 기획사에서 데뷔한 사건을 가지고서 몇 달 내내 언론들 메인에 걸어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대만의 주목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사실 대만 자국 내에서 활동하는 스타가 보기 힘든 건 대부분의 대만 출신 연예인들이 중국이나 홍콩, 일본, 한국 등으로 가서 활동하는 사례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국여행업협회(KATA)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8월 한국을 방문한 대만 관광객의 수는 7만 9,400여명으로 1년 전(2015년)보다 3.1배, 2년 전(2014년)보다 33%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2015년 통계는 메르스 사태로 외국 관광객이 격감하여 평소보다 차이가 커졌던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쯔위가 대만인들의 한국 관광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2018년에는 대만에서 한국 영화도 수용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신과함께-죄와 벌, 신과함께-인과 연 두 편 모두 대만 박스오피스 1위를 거머쥘 정도로 대만에서 한국 영화도 수용도가 높다. 이런 텐트폴 무비의 대만 흥행 성공으로 인해 한국 영화들이 2017년 이후로 신나게 대만에 상륙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극장판 또봇 : 로봇군단의 습격같은 작품도 2018년 대만 수출이 되기도 한다. 2020년 한국 애니메이션 마왕의 딸 이리샤가 대만에 개봉[38]하여 좋은 평가를 얻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Top 10에 진입도 못 해봤는데 대만에서는 박스오피스 9위까지 했다.

2018년 11월 말에는 연간 기준으로 한국을 방문한 대만인의 수가 처음 1백만명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2020년 8월 22일, 타이베이에서 카카오프렌즈 매장이 오픈했다.#

3년만에 개최된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서 한국 작가들의 책들이 전시됐다.#

대만 최대 규모의 경기장인 가오슝 스타디움에서 블랙핑크의 콘서트가 2023년 3월 18,19일 양일간 개최됐는데 앞서 예매오픈과 동시에 1회차는 1분, 2회차는 4분만에 10만여장의 티켓이 전석 매진이 됐다. 블랙핑크의 대만 공연 화제성과 남다른 위상은 대만 입국 당시 수많은 언론매체들이 앞다퉈 공항과 호텔 두곳에서 이원 생중계를 하는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39] 이틀간의 공연은 총 101,096명으로 해외가수 단일 투어 최초 10만 관객을 넘어섰으며, 공연 당일날은 가오슝시의 한화로 약 342억7,740만원의 관광수익을 가져다줘 엄청난 경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가오슝의 역과 경기장 주변은 신년행사보다 더 많은 50만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한편 티켓을 못구한 팬들을 대상으로 암표가 40만 대만 달러(1,716만원)까지 치솟아 이에 대만 정부가 직접 나서 중징계와 더불어 법개정을 예고하기도 했다.

한국과 대만이 단교 상태라 대만 법상으로 한국 저작권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탓에 판웨이보 같은 표절가수가 당당하게 활동하기도 하지만, 법적인 문제를 떠나 대놓고 표절해대는 탓에 대만 현지에서도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

6.2. 한국에서 대만 대중문화

1980-90년대 당시에 포청천 등 사극을 중심으로 대만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호소자 시리즈 등의 대만 영화도 상당수 흥행하기도 했으며,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순까지 영건이나 채지충의 중국고전만화시리즈, 접지전사 등의 대만 만화도 흥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화는 접지전사 이후로 수입되는 만화가 그리 없는 상황이다. 물론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아만의 백귀야행지가 연재되는 등 아예 없지는 않다. 가뭄에 콩나듯해서 그렇지 참고로 백귀야행지의 평점은 9.9점대로 꽤 좋은 편이다.

방송 역시 무분별한 개방에 따른 방송사의 영세화로 프로그램의 질이 나빠지면서 사그라들었다. 일부 대만 드라마가 알려지는 경우가 있지만 딱히 인기를 얻지는 못하는 수준. 영화역시 불법공유로 시장이 망가지면서 거의 중국 쪽에 의존하게 된 상황. 덕택에 포청천도 중국이나 홍콩에서 만든 드라마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다.

2015년 이후로는 나의 소녀시대를 필두로 대만 영화들도 한국 영화 시장에 개봉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영화들이 대만 영화 시장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하는 등 주류 영화로 자리잡을 동안 대만 영화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철저하게 비주류인 것이 걸림돌이다. 대부분 독립영화 취급으로 아트하우스 상영관에만 제한적 상영에 그치거나 아예 실제 개봉을 못하고 영화제 초청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다.

대만의 한류열풍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F4, S.H.E, 비륜해(飛輪海), 주걸륜(周杰倫) 등 한국에서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은 대만 연예인들도 있다. 특히 주걸륜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은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으며, 대만 여행에서 이 영화의 촬영지를 방문하는 여행객들도 있다.

이와 별도로 한국 오덕계의 친대만 성향이 적지 않다. 게임계에서는 반교 -Detention-환원 -Devotion- 두 작품으로 연달아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 개발사 레드 캔들이 잘 알려져 있다. DEEMO, Cytus 등의 게임을 만든 Rayark도 인지도가 있는데 어째서인지 이쪽은 일본 개발사나 한국 개발사로 착각하는 사람이 조금 있다.

버블티지파이 같은 대만의 길거리 음식을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는 펑리수, 누가 크래커 같은 대만의 디저트를 수입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6.3. 언어

양국간의 언어 교류가 냉전 시절부터 이어졌다. 냉전 시절에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40] 그외에도 주음부호를 배우는 것도 필수적이었다. 한중수교 이후, 대만과는 단교하면서 대만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경우가 줄어들었지만,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으로 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국에서 오래 일한 외국인 강사들은 타이완(대만)과 타이(태국)를 잘 구분 못하는 어린 한국인 학생들이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대만과 타이를 헷갈리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있다고. 별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세 유럽 시기에 본인이 최초의 포모사 출신 유럽인이라 사기쳤던 백인 조지 살마나자르(1679?~1763)는 본인의 허풍에 대한 영감을 다른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샴 왕국에 대한 논문에서 얻었다고 한다.

반대로 대만을 '중국'과 완전히 별개로 인식해서 대만에서 중국어를 쓴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중공을 중국이라 부르면서 생긴 문제. 그 반대로 대만에서 표준중국어만 쓰고 대만어라는 게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2010년대 이후, 한중관계한한령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나면서 대만으로 유학오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한국에서 대만쪽 중국어 시험이 실시중이고 대만에서도 TOPIK이 실시중이다.

7. 교통 교류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이 존재한다. 양국의 항공사들이 항공노선을 확충 및 확대하면서 양국간 교류가 많아졌다.

저가 항공사들이 대만행 항공 노선을 대폭 확충하면서 대만이 한국인들의 인기 여행지로 자리잡았으며 여행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대만의 미식 문화가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양국은 무비자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2010년대 후반에 중국이 실시한 한한령으로 인한 한중간 갈등이 생기자 대만으로 관광하러 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양국은 자동출입국심사 상호이용 협약에 따라 양국 국민은 상대국 방문 시 사전 등록 후 자동출입국심사 이용이 가능하다. # # #

제주도를 방문하는 대만인 관광객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2024년에는 제주 방문 대만인 관광객이 10만명 이상을 기록하는 등 대만인 관광객들의 제주 방문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제주-타이베이 항공노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주도를 잇는 대만 노선을 통해 대만인 관광객들이 제주도를 방문하고 있다. 1월부터 9월까지 제주 직항 노선을 통해 대만인 관광객들의 제주방문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8. 언론

한국 언론들이 워싱턴 D.C, 밴쿠버, 도쿄, 베이징, 모스크바, 런던, 파리, 베를린, 홍콩, 하노이, 자카르타, 카이로, 테헤란, 이스탄불, 로마 등에는 특파원을 보내지만 타이베이에는 왜 특파원이 없을까 싶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바로 중국공산당의 압력 때문이다. 주한중국대사관하나의 중국 압력을 넣어 한국 언론사들이 타이베이에 주재원을 보내지 못하게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뒤에서 감시하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타이베이, 가오슝 등 대만의 도시에 해외 지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보도되는 대만 관련 소식은 대개 홍콩신문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발인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중국의 압력 때문에 대만 소식은 주로 SCMP를 통해 보도되는 것을 한국이 하루 이틀 있다가 보도하는 형식이다.

연합뉴스에서 2009년에 한국언론 중에선 처음으로 타이베이에 특파원을 파견한 적이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의 압박으로 인해 통신원으로 대체된 상태다. 결국 2020년 코로나19이후로는 연합뉴스에서도 대만 통신원을 없앴다. 대만 소식은 연합보SCMP을 번역해서 내보내고 있다.

9. 경제 교류

아무리 단교를 했다 하더라도 한국과 대만은 비공식적으로 교류를 하고 있으며 사실 정치적인 교류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도 하다.[41] 특히 IT산업. GIGABYTE, MSI, ASUS 등의 부품회사들이 많이 교역하고 있으며, 한국 관광에서도 중국, 일본, 미국 다음으로 많이 입국하는 나라가 대만이다. 반대로 2014년 기준 대만 입국 관광객 역시 중국, 일본 다음으로 한국 3위다. 다만 대만에서는 홍콩/마카오에서 온 관광객을 중국 대륙에서 온 관광객과 따로 분류하는데, 이에 따르면 홍콩/마카오 관광객이 3위이고 한국이 4위.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만 브랜드는 바로 버블티 회사 공차이다. 다만 잠시 한국법인이 인수하여 한국 브랜드였다가 후에 미국자본이 인수하여 미국 기업으로 바뀌었다. 17년에 공차 코리아가 본사를 인수했기 때문. 휠라와 비슷한 케이스다. 또 자이언트같은 자전거 회사들도 꽤나 유명.

그런데 이게 상품교역이나 인적교류에만 치중된다. 대만과는 투자보장협정(BIT)과 자유무역협정이 없기 때문에 전면적인 교류 확대에 장애물이 있다. 원래 1980년대 BIT를 한국-대만 간에 체결할 뻔했지만 중국 대륙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대만 처리문제가 걸려서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대신 2010년대 들어 BIT 체결 및 TPP를 통한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등이 진지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 대륙 정부의 견제가 좀 있지만, 이쪽은 한중 FTA를 먼저 해서 괜찮다. 그리고 대만과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대만 측이 한국 선박항공기의 항로 진입을 통제하는 등 양국 간 경제 갈등이 약간 있는데다 단교 관계라 정부간 외교/통상협의가 제한되는 등 애로사항이 꽤나 많다. 2016년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현 장관)의 인터뷰 내용.

일반 국가와 미승인국과의 외교관계는 대표부급 관계이므로, 외교관이 아니라 민간 자격이기 때문에, 통상 협상에서 전권 위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통상 협상에서 전권대사를 따로 뽑아 특사 형식으로 파견하고 협상을 하는데, 절차가 복잡하다. 이런 식으로 한국-대만 BIT나 FTA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제한사항이 있어 일단 다른 방법을 찾는 듯하다.

2010년대 들어서 인적교류는 관광이 대부분이다. 무역 수준은 연 300억 달러 수준에서 수년째 정체되고 있다. 비즈니스는 비활성화 되어 있는데, 한국-대만 간 컨벤션센터 교류도 없다. 예를 들어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의 IT 행사인 컴퓨텍스 타이베이(난강전람관)에서 시행)에는 한국 회사가 거의 참가하지 않는다. 정작 일본이나 중국, 미국, 독일 회사 등은 잘만 참가한다. 한국에서 하는 지스타나 기계산업전 등에도 대만의 회사들이 경쟁력이 있음에도 많이 참가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신산업 행사에는 기가바이트아수스 등이 참가하기는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대만간 상호간 공장 설립이나 기업 M&A, SOC 민자사업 투자에는 서로 소극적이다.

2015년 자유무역협정은 한국과 대만이 2015년 9월 동시에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TPP 가입국 및 상호간 협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BIT가 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 주식회사가 대만 핀테크 기업을 인수하여 라인페이를 만들고, 대만의 유안타그룹이 동양증권을 인수해서 유안타증권을 만드는 등 BIT가 없음에도 일단 제한적으로 기업교류가 있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 국명 문제로 트러블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추진하는 TPP에는 대만이 '중화민국'으로 가입하는 것을 추진중인데, 양자협정인 BIT에 있어서는 대만의 정식국명인 중화민국을 쓸 것이냐, 중국 정부의 견제를 받은 WTO 국명인 "대만, 팽호, 금문, 마조 개별관세영역"을 쓸 것이냐 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있다.

2015년 12월 13일 연합뉴스가 대만에 르포 취재를 갔는데 민주진보당 측에서 "5대 교역 상대국인 한국과의 무역 교류를 강화할 예정이며 TPP 동반 가입을 위한 협력 방안도 검토할 것이다."라며 대한민국과의 동반 TPP 가입 의사를 확실시하였다. 2차 TPP 가입국 중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무역협상 경험이 풍부하다보니 한국과 대만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기사 2016년 차이잉원 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무역협상 방식을 배우겠다고 한다.

일단 2015년 투자보장협정을 시도하는 모양이다. 또한 2015년 한국거래소(KRX)가 자본시장 국제화를 위해 ETF 교차거래를 위한 첫 파트너로 대만의 대만증권거래소(TWSE)를 선택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2010년대들어서 다시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2016년부터 KRX - TWSE 간 ETF 교차거래가 시작된다. 2015년 10월 27일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가 공식 발표되었다. 한국거래소에서도 "우리나라와 경제 환경이 유사한 대만거래소와 대표지수(Taiwan 50) 추종 ETF 교차상장을 먼저 추진하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2월 13일 다시 기사가 나왔다.

상당히 큰 변화로, 유안타그룹이 한국 동양증권을 인수하여 유안타증권이 된 이후로 한국 텔레비전 광고방송, 인터넷 광고, 심지어 한국 길거리 등에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상당히 많이 노출되고 있는 등, 한국 내에서 대만의 입지가 다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한 한국거래소-대만증권거래소 주식시장 ETF(대만: KOSPI200 ETF, 한국: 가권지수 ETF) 교차상장은 2016년 10월 7일에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대만증권거래소 보도자료 한국거래소 상장기념식 이에 따라 2016년 10월 6일 대만 정부에서 한국의 KOSPI200 선물상품이 적격상품으로 인증받으면서 한국-대만 간 금융투자 분야에서도 시장 확대가 기대된다. 그리고 최근 사드 배치로 중국간에 관계가 냉각되자 중국 관광의 대체제로 대만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대만산 파인애플이 한국 시장에 첫 진출했다.#

삼성전자가 대만의 UMC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2021년, 양국은 소득세 이중과세방지 협정을 체결했다.#

2023년 5월 22일, 한국무역협회가 대만의 양대 경제 단체와 경제교류 MOU를 체결했다.#

9.1. 1인당 경제력

1인당 GDP(명목)
연도 한국 대만 한국:대만[42]
1980 $1,761 $2,367 0.74
1985 $2,538 $3,295 0.77
1990 $6,732 $8,178 0.82
1995 $12,742 $13,076 0.97
2000 $12,257 $14,876 0.82
2005 $19,402 $16,503 1.18
2010 $23,087 $19,261 1.20
2015 $28,732 $22,373 1.28
2020 $31,497 $28,306 1.11
2021 $34,866 $32,123 1.09
1인당 GDP(PPP)
연도 한국 대만 한국:대만[43]
1980 $2,190 $3,473 0.63
1985 $4,131 $5,855 0.71
1990 $7,548 $10,088 0.75
1995 $12,134 $15,606 0.78
2000 $16,517 $21,675 0.76
2005 $23,468 $28,933 0.81
2010 $30,984 $38,583 0.80
2015 $38,111 $47,061 0.81
2020 $44,621 $55,724 0.80
2021 $47,027 $59,398 0.79

IMF 2021년 4월 자료

6.25 전쟁과 같은 전란을 국토에서 직접 겪지 않았으며, 본토에서 가져온 자산을 통해 경제상황이 훨씬 더 좋았던 대만은 2003년까지는 1인당 GDP에서 줄곧 한국을 앞서왔다. 외환위기 직전에 한국이 대만을 넘어설 뻔 했으나, 이후 IMF가 동아시아를 휩쓰는 동안 대만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위기를 버텨내며 차이는 다시 벌어졌다.

원화가치 절상과 대만 달러 절하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며, 2004년에 한국은 명목 1인당 GDP에서 대만을 추월했다.

그러나 2021년에는 한국과 대만의 명목 1인당 GDP 차이가 9%까지 상당히 많이 줄었는데, 그 이유는 한국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입으면서 역성장을 한 반면, 대만은 비교적 경제도 선방했고 코로나도 억제한 덕분에 1인당 명목 GDP가 지속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반면 PPP로는 대만은 항상 한국과 일본보다 높았으며, 현재에도 약 25% 정도 높게 측정되며 여전히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양안관계 및 대만 경제의 특성으로 인해 신 대만 달러가 저평가되는 현상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상황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시기의 수출 호황과 환율효과에 힘입어, 2022년 대만이 1인당 GNI에서 일시적으로 한국을 추월하였으나 2023년 다시 뒤집힌 상태다.#

10. 참고할 만한 자료

11. 외부 링크

12. 관련 문서


[1] 도로명주소로는 명동2길 27.[2] 여기서 '중(中)'은 '중화민국' 으로서의 대만을 지칭한다. 대한민국과 대만이 단교하기 전까지의 한중관계는 대만과의 관계를 지칭했다. 현재는 한중관계라고 하면 대체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지칭한다.[3] 이를 증명하듯이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쑨원장제스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4] 다만 장제스의 경우는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공관계 내지는 심하면 속국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 장중정총통당안(蔣中正總統檔案)에는 대놓고 "조선도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망언도 있을 정도였다. 자세한건 여기를 참고할 것.[출처] 2024년 10월 IMF 기준. #[출처] [출처] [8]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산정. #[9] 대만과 만주는 일제의 통제 하에 떨어진 시기나 양상이 다르긴 하나, 본래 청/중국의 영토였다가 일제의 세력 확장의 일환으로 일본의 통제 하에 들어간 영토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10] 사실 산둥반도 출신이 많은 한국 화교들 입장에서도 푸젠성이나 대만 같은 중국 남부 지역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지역인데, 하물며 아예 민족/어족 단위에서 다르고 역사적/지리적으로도 가깝다고 보기 어려운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11] 류큐 제도 최남서단의 요나구니 섬은 대만과의 거리가 불과 100km 가량으로, 날씨가 좋으면 대만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12] 그보다도 앞선 세대 중에는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을 때 중국 대륙 유학을 한 경우도 있다. 1960년대 중정의 중국 전문가들은 거의 다 이런 대륙 유학파 출신으로 개중에는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옌안에서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해 문자 그대로 공산주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까지 있었다. 반면에 소련 전문가는 매우 부족해서 일본과 미국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했고 구 관동군과 대본영 막료들에게 정보를 구걸해야 했다.[13] 이는 대만이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의해 유엔에서 중국의 합법적인 유일한 대표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정됨에 따라 사실상 강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14] 당시에는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민간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15] 역대 대사 중 2명이나 중화민국 해군총사령(참모총장) 출신이다.[16] 1936년생으로 절강성 출신 외성인이다. 1958년 외교부 입부 후에 정보부문과 북미부문에서 활약해온 외교관이다. 1983년 주 코스타리카 대사를 거쳐 1985년 외교부 상무차장(차관)이 되었다. 1989년 외교부 정무차장(차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90년 당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인해 불안했던 대만당국에서 주한대사를 제의했고 이를 받아들였다. 단교 이후에도 주독일 대만대표, 주러시아 대만대표를 역임한 후에 2004년에 은퇴하였다. 중문 위키에 따르면 2020년 6월 초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17] 다만 이 칼럼을 쓴 사람은 진보적 법학자이자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가 구설수로 사퇴한 안경환이었다.[18] 심지어 그렇게 뽑은 라파예트급의 도입과정에서 비리가 발견되며 대만 내에서는 대만 국방사에서의 큰 오점으로 기록되는 것은 물론 계획했던 16척이 아니라 6척만 도입하고 끝나버렸다. 여러모로 대만 해군력 악화의 주범이기도 하다.[19] 조세조약도 여느 나라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와 ○○국 정부간의 소득에 대한 조세의 이중과세회피와 탈세방지를 위한 협약' 식의 명칭을 가진 조약이 체결되어 그 자체가 시행된 반면, 대만의 경우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와 주한국 타이베이 대표부 간의 소득에 관한 조세의 이중과세 방지와 탈세 예방을 위한 약정'을 체결하고서 그 시행을 위해 별도의 법률을 제정했다.[20] 심지어 일본은 중화민국과 수교도 하기 전인 1950년대 부터 중공과 수교 및 경제적 교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21]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색해보일 수 있으나 한국전력공사 역시 매출액으로 보면, 한국 국내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기업이다.[22] 자유무역협정 항목에 "경쟁적 자유화 효과" 문단 참고.[23] 실제로 천주교의 현지 토착화의 포교 정책을 알면 이렇게 말을 절대 못한다.[24] 대만의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 언론도 그를 지한파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언론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여러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2017년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한국인 교수의 신상을 공개하여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지한파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위안부 문제와 한일갈등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친일적이고 한국의 민족성을 비판하는 등 지한이라고 보기 어려운 태도를 보였다.#[25] 심지어 혐한이라는 평도 상당하다.# 해당 게시글을 쓴 작가의 글들을 보면 2017년 한국인 교수 성추행 사건 관련 글들도 있는데 사실상 한국인 교수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무고당했다는 것이 결론이다. 주리시의 행적에 관한 여러가지 일화들도 있으며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26] 간 적도 없는데…20대 한국 女, 타이완 TV서 '진상 고객'[27] 그러나 이들 역시 직접적으로 냉전을 경험한 세대가 아니며, 아예 냉전 체제 자체가 끝난 다음에 태어난 90년대 생들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28] 플러스로 그 뉴스 기사 마지막 말이 뼈를 때린다. 과거에 대만인들도 泡菜 하면 중국 대륙의 파오차이가 아닌 한국의 김치를 떠올릴 정도가 되었고, 그래서 T-50 골든 이글을 애칭으로 김치기라 불렀으나, 대한민국에서 이 일에 대한 부정적 보도가 나오고 있고, 공식 명칭도 아니며,(T-50의 공식 명칭은 골든 이글, 김치의 공식 번역명은 辛奇) 대만인이 이미 한국인이 붙여 놓은 김치의 정식 명칭인 辛奇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고로 이 변화를 알아야지만 대만인이 존중하지 않는다는 논란이(쉽게 말해 무례하다)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29] 한국인이 대만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보통 반중 감정에서 오는 중국에 대한 거부감, 적대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타이완 넘버원[30] 한국과 대만 관계가 한국과 일본과 다른 가장 큰 부분이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적으로 비교도 안되던 70~90년대에도 축구를 비롯한 주요 스포츠에서 일본과 한국은 항상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정착했다.[31] 대만의 경우 월드컵은 본선 진출 0회이며 올림픽아시안 게임 축구, 아시안 컵도 메달권이었던건 1950년대까지였다[32] 2024 파리 올림픽 기준 한국 8위(메달 32개), 대만 35위(메달 7개)[33]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기준 한국 3위(메달 190개), 대만 6위(메달 67개)[34] 2008년 이전 기록을 포함해도 19승 5패[35] 대만 공식 언어인 표준 중국어는 물론, 대만어도 중국 복건성의 민남어 계통 언어이다. 즉 중국어 방언[36] 예를 들어 대만에서 만든 삼국군영전, 활협전을 재미있게 플레이해도 중국의 소설인 삼국지에 대한 호감, 무협 문학에 대한 호감만 늘어나는게 일반적이고 반대로 공자날조설을 대만이 일본 넷우익발 가짜뉴스를 번역해서 퍼뜨렸어도 이에 대한 반감은 중국을 향하지 대만을 향하지는 않았다[37] 홍콩의 가수 겸 배우인 두덕위도 영어와 광동어로 번안해서 불렀다.[38] 심지어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대만에서 한국어 개봉했다. 한국어 예고편[39] 하지만 공항과 호텔 주변의 삼엄한 경비로 인해 멤버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40] 당시 중국어를 배우는 경우, 대만 유학이 필수적이었고 대만쪽 중국어가 표준이었다.[41] 물론 중앙정치 차원은 중국의 존재감이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인 측면에서보나 너무 존재감이 강하기 때문에 주로 지자체 단위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42]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43]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44] Taipei Mission in Korea, 駐韓國台北代表部[45] 서울부산에 사무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