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23:29:29

레온 폰 빌린스키

<colbgcolor=#000><colcolor=#ffcc21>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치인
레온 폰 빌린스키
Leon von Biliński
파일:Bilinski.jpg
본명 Leon von Biliński
레온 폰 빌린스키
출생 1846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제국|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잘레시치키
사망 1923년 6월 14일 (향년 77세)

[[오스트리아|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주요 경력 시스라이타니아 재무장관 (1895-1897, 1909-1911)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재무장관 (1912-191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 (1912-1915)
폴란드 재무장관 (1919)
정당 폴란드인 클럽
학력 르비우 대학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레온 폰 빌린스키(Leon von Biliński, 폴란드어: Leon Biliński)는 폴란드계 오스트리아인 정치인이자 경제학자였다. 빌린스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두 차례 시스라이타니아 재무장관직을 역임했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재무장관 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1912-1915)을 지냈다.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폴란드인의 주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 침공 강력히 찬성했던 6인 중 1명이었다. 종전후에는 폴란드 재무장관을 잠시 맡기도 했다.

2. 생애

빌린스키는 1846년 6월 15일 현재의 우크라이나 영토인 잘레시치키(Zaleszczyki)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귀족 출신의 빅토르 빌린스키(Wiktor Biliński), 어머니는 말비나 브루니츠카(Malwina Brunicka) 남작부인이었다. 빌린스키는 어린 시절을 갈리치아 지방에서 보냈으며, 1862년부터 1865년까지 르비우 대학교(University of Lviv)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행정 관료로 일했던 그는 1871년 르비우 대학교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며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78년에는 르비우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1879년까지 재임하며 대학 행정과 교육 개혁에 힘썼다. 특히 여성의 대학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3년 오스트리아 제국의회(Reichsrat) 의원으로 선출된 빌린스키는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897년부터 1900년까지는 제국의회 부의장직을 수행했고, 1900년부터는 종신직 상원의원(Herrenhaus)으로 활동했다.

빌린스키는 보수적인 성향의 정치인이었지만, 동시에 폴란드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에도 힘썼다. 그는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시스라이타니아 재무장관을 지냈는데, 이 시기에 세제 개혁과 화폐 안정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에도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두 차례 더 시스라이타니아 재무장관직을 역임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정 정책을 이끌었다. 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는데, 빌린스키는 세르비아인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포용적인 정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이는 강경파 군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와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포티오레크는 세르비아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두 사람의 대립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빌린스키는 전쟁을 기회로 폴란드 민족의 지위를 높이려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러시아령 폴란드를 통합해 합스부르크 왕가 치하의 폴란드 왕국을 세우는 이른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해법'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헝가리독일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빌린스키는 독립한 폴란드로 돌아가 1919년 총리 이그나치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내각에서 재무장관직을 잠시 수행했다. 당시 빌린스키는 폴란드의 전후 재건을 위한 경제 정책 수립에 관여했다. 재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으로 거처를 옮겨 오스트리아-폴란드 은행(Polnisch-Österreichische Bank)의 총재로 일했다. 빌린스키는 1923년 6월 14일 빈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폴란드 민족의 지위 향상을 위해 헌신한 정치인이자, 제국 말기의 혼란기에 제국의 개혁과 안정을 도모했던 관료의 모습을 보여준다.[1]

[1] 때문에 세르비아 침공 당시에는 전쟁에 찬성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자 반대파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