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기업 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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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Rothschild Family |
가언 | Concordia Integritas Industria (조화, 성실, 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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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인 재벌 가문.2. 상세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를 뜻하는 독일어 '춤 로텐 실트'(zum rothen Schild)를 영어식 발음으로 바꾼 것인데, "붉은 방패"라고 하는 그 뜻은 그들의 문장에서 따온 뜻이며 Izaak Elchanan Rothschild가 1577년 로스차일드 특유의 집을 건설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집안은 환전 혹은 고철 매매 등 잡다한 일들을 하던 천민 출신[1]으로 19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이후 현재까지도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이다. 주된 사업 분야는 금융업이고, 그 외 석유, 금, 레저, 와인, 광산, 호텔 등 각종 분야에서 활동한다.로스차일드 가문이 떠오르게 된 사건들과 비밀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각종 음모론과 서브컬처에서는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비밀스럽게 세상을 지배하는 흑막으로 자주 지목받는다. 사실 이런 이미지가 생긴 이유는 현재까지도 미국 내에서 정치, 금융 등 큰 영향이 있고, 중요한 것들은 유대인들과 유대자본을 많이 쥐고 있으며,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근대 초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밸푸어 선언이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와 로스차일드 가문 사이의 뒷거래로 성사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금융 감독 시스템은 전례 없이 정교해지고 있다. 록펠러 가문이 쪼개지면서 과거의 영향을 상실하였듯[2] 로스차일드 가문도 긴 세월 동안 대규모 전쟁과 재산 분할 등으로 그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3. 재산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 규모는 관련 기업들이 상장을 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무엇보다 19세기 후반부터 가문에서 소유했던 토지와 성들, 그리고 다수의 미술 작품들을 팔았기 때문에 재산을 측정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그러나 카길이나 코크 인더스트리즈처럼 비상장 기업임에도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존재하지만 이들도 대략적인 덩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세계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의 부를 완전히 숨긴다는 것은 음모론자들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곧 대략적인 윤곽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아람코와 같이 거대 비상장기업도 막상 상장하려고 뚜껑 열어보니 미국 FAANG 수준 기업보다 약 2배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가총액이 나온 것처럼 로스차일드 가문의 비상장 자산이라고해도 세계 경제를 배후에서 좌지우지한다고 하기에는 한계가 많을 것이다.
오히려 대중의 눈을 피해 사업의 규모를 차근차근 축소해온 정황을 고려하면 과거 전성기에 비해 재산의 규모가 줄어든 건 확실해 보인다. 무엇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7세기부터 시작해서 내려온 가문이기 때문에 재산이 100명이 넘는 후손들 사이에 나뉘었고, 각 국가마다 수장이 따로 존재했었지만 현재는 영국과 프랑스밖에 없다. 현재 가장 영향력이 강한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장인 에블린 드 로스차일드(Evelyn de Rothschild)가 보유한 사유 재산은 2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는 미국 지부의 사유재산이 1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천문학적인 액수이기는 하지만 세계 경제의 숨겨진 지배자 노릇을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 물론 음모론자들은 포보스지의 발표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음모론자들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알려진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이 5경 원이 넘는다는 설은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속설이다. 5경이라는 숫자는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이 1850년 당시 6조 원에 달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에서 연 수익을 6%로 추정하여 대략 6조 원×(1.06)^150을 한 것이다. 하지만 1850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비롯한 여러 안 좋은 상황들 때문에 그 수익이 고정적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다 재산상 큰 손실도 수차례 봤다. 즉 그동안의 손익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정세변화에 따라 크게 손해를 본 적이 많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848년 혁명, 대공황, 나치즘이 로스차일드에게 큰 타격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야말로 로스차일드의 원수 중의 원수인 셈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중간에 지원 세력이 바뀌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에 우호적인 세력의 몰락을 불러와 로스차일드 가문에 타격을 입혔고, 나치는 말할 것도 없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매우 싫어했다.[3] 결국 로스차일드가 막강한 재력을 가졌지만 일국을 통치하는 정치권력에는 무력하다는 한계가 있다.[4]
4. 비밀주의
가문의 모든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만 맡고, 철저한 기밀 유지가 특징.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이 아닌 CEO가 임명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밀 유지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CEO가 바지사장일 수도 있고, 회사의 가장 주요한 것은 주주의 권한이기 때문이다.5. 역사
과거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이었고[5], 현재는 프랑스의 유력가[6]이자, 영국의 세습 남작인 매우 특이한 가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미지와 달리, 초창기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게토안에서 골동품상과 환전업을 하던 유대인 가문이었다.원래 유대인들은 유럽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남들이 꺼리던 상업, 금융업[7]뿐만 아니라 고물상[8] 등을 했다. 유대인 고물상의 경우 일반적으론 안 좋은 이미지가 있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의외로 우리가 지금 아는 그런 이미지와 달리 신뢰할 수 있는 상인으로서 활동했다. 그들은 다른 상인들과 달리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거나 은혜를 베푼 사람들의 상황이 변한다고 해서 절대 배반[9]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즉 신용이 매우 투철하였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명성과 함께 당시 귀족들에게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환전상을 하고 헤센 가문의 종주이자 헤센카셀 방백국의 빌헬름 9세[10]와 거래하게 되면서 금융업자가 된다. 여기에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 마이어의 일솜씨를 마음에 들어한 빌헬름 9세는 그에게 장부관리 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입성하자 빌헬름 9세는 국외로 도피했다. 마이어는 자신의 가산이 프랑스에 의해 몰수당하면서도 빌헬름 9세의 재산은 철저히 숨겨놓았고, 훗날 복귀한 빌헬름 9세는 동전 한닢까지 고스란히 보관해둔 마이어의 관리 능력과 진실성에 감동하여 가문의 재산관리자로 임명한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11]들을 각각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오스트리아 빈,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로 보내 국제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 로스차일드의 네트워크는 작은 유대인 가문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 세계의 금권을 재패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특이한 유대인 가문”에 불과했다. 당대의 최고 금권은 베어링 가문[12]이었다.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의 첫 수장 네이선 로스차일드 때부터 비상하려다 다시 바닥에 처박힐 뻔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한 것을 보고 영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군자금을 유럽 대륙에 대량으로 조달하기 위해 먼 전쟁터에서 사용하기 힘들었던 파운드 스털링과 달리 거래가 비교적 쉬웠던 영국 금(기니)을 커미션을 받고 유럽 가문 지부간 교류를 통해 파악되던 금 시세 차이를 이용해 차익거래까지 실현하며 프랑스 해군의 봉쇄를 뚫고 밀수해서 파는 사업을 했는데 나폴레옹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시 망하면서 금의 수요가 줄어들며 금값이 곧 폭락할 예정이라 파산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유럽에 널리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통해 워털루 전쟁의 결과를 잽싸게 입수한 뒤 가문의 운명을 건 승부수를 띄웠는데, 나폴레옹의 몰락이 확실하다 판단하고, (미래의) 승전국들의 군 예산이 삭감되면서 국채 발행이 줄어들어 이미 발행된 국채의 가치가 올라갈 것을 예상하며 국채를 특히 영란은행의 영구채권이었던 콘솔(Consol)을 가문의 자본을 모조리 끌어모아 전량 매수해버린 것이다. 예상대로 국채의 가치가 올라가자 사촌들이 익절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네이선은 계속 존버하여 고점에서 이익 실현을 했다. 이로써 로스차일드는 간신히 파산 위기를 넘기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대사의 대부분을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영국 내 타 세력과 다투면서 보냈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전역에 퍼져 국가별 분파로 나뉘어진 상당히 특이한 형태였기 때문에 가문의 각 분파들은 자신들이 거하는 국가의 현실에 맞춰 처신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분파별로 정책이 충돌하기도 했다.
이후 런던이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면서 런던 재계의 큰손이었던 로스차일드도 영향력이 높아졌고, 베어링 가문으로 대표되는 영국 토호들의 구심점이었던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세포이 항쟁으로 해체 되면서 진정으로 권력을 쥐게된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세습가능한 귀족 작위까지 받으면서 오늘날 알려진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상이 완성되었다.
긴 시간을 동인도 회사 세력과의 경쟁으로 보낸 탓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있어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13], 이는 이후에 록펠러 가문 대두와 함께 금본위주의 체제의 붕괴로 가문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역설적으로 세계의 금권을 장악한 전성기 때, 과거의 교훈을 잊은 당대 수장 빅터 로스차일드의 독단적 행동이 이 쇠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체 게바라는 반자본주의적, 반미주의적인 그의 사상에 따라 로스차일드 가문을 악마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6. 로스차일드 가문의 분파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들을 당시 유럽 5대 도시인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나폴리로 보내 국제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현재는 다섯개 분파중 영국과 프랑스 두 곳의 분파만 현존하고 있다.6.1. 독일 로스차일드(구 본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만큼 초창기에는 이쪽이 본가였다. 가문의 수장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본인이었다. 이후 영국 지부가 훨씬 더 규모가 커진 데다가 로스차일드 본가의 대가 끊어지면서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철수, 다섯 로스차일드 분파 중 가장 먼저 몰락했다.6.2. 이탈리아 로스차일드
이탈리아 지부는 교황령, 나폴리, 토스카나의 군주들과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명문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의 주요 고객이었던 귀족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었고[14] 사업 전망도 꾸준히 하락했고, 독일 본가처럼 대가 끊어지면서 1920년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6.3.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
오스트리아 지부는 1820년대에 은행을 개설해서 성공했고, 이후 철도 사업에도 진출해서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명문가중 하나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귀족 작위도 하사받았다. 그러나 안슐루스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해 재산을 강제로 몰수당했고, 오스트리아 지부의 수장 루트비히 나탈니엘 폰 로트실트 남작을 비롯한 가족들 상당수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후에 이들은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1999년에 1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미술품을 돌려받았다. 이 반환 받은 예술품들은 박물관에 보내졌다.2019년 1월 25일,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하(下)오스트리아(Niederösterreich) 지역에 약 7천 헥타르(1만7천300 에이커)의 숲을 소유하고 있는 2개의 신탁을 현지 주요 제지회사 '프린츠호른'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20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6.4. 프랑스 로스차일드(로쉴드)
프랑스 지부는 원래 2개였다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 다른 지부들처럼 금융사업을 하고 있으며 와인 사업도 하고 있다. 이들은 성을 프랑스식으로 '로쉴드'라고 읽는다.첫 번째 프랑스 지부(금융)는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막내 아들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파리에 지부를 세운것이 시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그는 대다수 철도 건설과 채광 산업의 자금조달 역할을 했다. 자크의 아들 귀스타브 드 로스차일드와 알퐁스 자크 드 로스차일드는 은행 사업을 계속했고, 모은 돈을 1870년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스차일드 프랑스 지부 역시 국제적 투자 은행의 거장이 되었다.
두 번째 프랑스 지부(와인 사업)은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의 영국 지부의 수장인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4남으로 1850년에 파리로 건너왔고, 그의 삼촌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와 함께 일했다. 1853년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지롱드주에 위치한 보르도 포도주의 생산 양조장을 사들여서 포도밭을 개명했고, 이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포도주, 샤토 무통 로쉴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포도주들 중 하나가 되었다. 너세니얼의 삼촌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양조장을 획득했고 아들인 알퐁스 자크 드 로쉴드에게 물려줬으며 비슷한 시기에 로스차일드 프랑스 지부 2개가 하나로 합쳐졌다.
로쉴드 가문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로쉴드 가문의 저택은 파리 근교에 있는 Schloss Ferrières(샤토 페리에르)였다. 전쟁 때 로쉴드 가의 대표인 알퐁스는 지방으로 피신하고 집사만이 남아서 페리에르 저택을 지켰고, 독일군이 저택을 징발해서 파리 봉쇄전 당시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숙소 겸 최고사령부로 사용했다. 빌헬름 1세는 저택의 약탈 및 파괴를 금지하고 알퐁스 본인이 아닌 부인의 침실을 사용했고, 침대도 자신의 군용 침대를 가져다 썼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빌헬름 1세가 저택을 떠난 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독일군 병사들이 창고의 와인을 훔쳐가거나 동물들을 죽이는 등의 행패를 부렸고, 심지어는 비스마르크조차 "값을 쳐줄 테니 와인 1박스를 내놓으라"고 할 정도였다. 출처 이후 알퐁스 제임스 드 로쉴드(Alphonse James de Rothschild,1827 ~ 1905)는 독일과의 배상금 협상 과정에 참여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공인 1등급 와인인 '샤토 무똥 로쉴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와인으로 유명한 필리프 로쉴드 남작(Baron Philippe de Rothschild, 1902~1988)이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핵심 인물이었다.
프랑스 지부는 1982년에 프랑수아 미테랑이 이끄는 정부가 로쉴드 은행을 국유화 하면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이에 프랑스 지부 수장이었던 다비드 드 로쉴드는 세 명의 직원과 1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 자본으로 완전히 새로운 로스차일드 은행을 다시 세웠고 오늘날 프랑스 로쉴드 은행은 어느정도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프랑스 로쉴드 은행 출신이다.
6.5. 영국 로스차일드(현 본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창립자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3남인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1798년 대영제국 런던에 세운 지부다. 대영제국이 19세기 세계 패권국이 되면서 독일 본가보다 규모가 더 커졌고, 독일 본가가 20세기초 몰락하면서 영국 지부가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문의 본가가 되었다.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처음에 맨체스터에 직물 사업을 차렸고, 나중에 자본이 확장하자 런던에 은행을 세워 본격적인 금융 사업을 시작하였다.
19세기 초,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 동안 타국 정부에 빌려준 금을 관리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철저하고 정확한 정보, 운반 시스템을 활용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전투를 치르던 웰링턴 공작에게 군대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정부 주도 프로젝트에 복잡하고 정교한 금융을 제공하여, 영국이 19세기 후반에 최전성기를 맞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에 세운 은행은 영국은행에 충분한 주화와 금화들을 공급하였고, 유동성 위기를 피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 남작[15]의 사업은 그의 장남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16]이 물려받았고, 그의 경영 기간동안 로스차일드 은행은 1875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의 지분 매입을 지원했다. 또한 남아프리카 총독 세실 로즈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873년, 영국 지부는 다국적 광산 회사 '리오 틴토'의 구리 광산을 인수했다. 1905년 로스차일드 가문은 리오 틴토의 지분을 30% 가량 소유하며 최대주주가 되었다. 1887년, 프랑스 지부와 영국 지부가 합작하여,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의 지분을 인수하여 최대주주가 되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상은 대단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41개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대저택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909년에 로스차일드가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리고 브라질의 독립에도 크게 관여했다.
로스차일드 남작 (Baron Rothschild, 1885년) | |||
대수 | 이름 | 생몰년 | 작위 보유 기간 |
1 |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17] | 1840년~1915년 | 1885년~1915년 |
2 |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18] | 1868년~1937년 | 1915년~1937년[19] |
3 | 너대니얼 메이어 빅터 로스차일드(Nathaniel Mayer Victor Rothschild)[20] | 1910년~1990년 | 1937년~1990년 |
4 | 너대니얼 찰스 제이콥 로스차일드(Nathaniel Charles Jacob Rothschild)[21] | 1936년~2024년 | 1990년~2024년 |
5 | 너대니얼 필립 빅터 제임스 로스차일드(Nathaniel Philip Victor James Rothschild)[22] | 1971년~ | 2024년~ |
7. 음모론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과 함께 음모론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론이 그렇듯이 저마다 주장하는 바가 중구난방인데, 비밀결사의 창설자, 비밀결사 지도부의 일원, 비밀결사의 하수인 등 다양한 주장이 혼재되어 있다.하지만 정작 로스차일드 가문과 프리메이슨의 관계는 영 좋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숙적이었던 베어링 가문의 연고지가 스코틀랜드이고 베어링 파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것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이기 때문이다. 일루미나티의 경우 프랑스 로스차일드 분파와 관계가 있었으나 이또한 여러 지역의 서로 다른 프리메이슨 세력들과 주변국 세력과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로스차일드 가문에 일루미나티와 친했던 것도 아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전역에 진출하여 여러 국가에 분파를 세워 독자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세력과 조직에 어설프게 얽었다간 커다란 모순점이 생기기 쉽다.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동인도 회사가 세포이 항쟁으로 몰락하고, 대중국 아편무역을 사순 가문이 독점하면서 경쟁 세력의 구심점이 깨지기 전까지는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현대시기 베어링 가문으로 대표되는 동인도 회사 투자 세력과 대립했고, 여러 사건과 경쟁자 및 도전자들로 인하여 힘들었던 역사도 많았다. 즉, 대중들이 흔히 상상하는 무소불위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대부분 영국 내부 유력 세력들, 특히 베어링의 연고지인 스코틀랜드 쪽 인사들과 권력투쟁을 치러왔다.
7.1. 워털루 전투 음모론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 전투 결과에 대해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패밀리 네트워크를 통해 정부 전령보다도 빠르게 영국군의 승리 소식을 입수하여 정보를 교란해 시장에서 이득을 취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대중에는 흔히 로스차일드가 영국 귀족들한테서 주식을 사다가 떼돈 벌었다고 알려져있다.하지만 이는 사실인지 불분명하다. 로스차일드를 연구했던 하버드의 교수 니얼 퍼거슨 같은 학자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원래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는 일을 해서 이득을 취했고,(프랑스로서도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면 이득이라 생각해서 막지 않은 모양)[23] 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이후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잘못 예상하였다.
그리고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전후 영국 정부 차입이 감소해서 국채가 폭등할 것이라 예상하고, 영국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이 예상은 들어맞아 채권 가격이 폭등하여, 40% 쯤 상승한 고점에서 채권을 매각해서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를 넘는 거액을 벌어 위기를 모면했다.
결국 로스차일드는 정보를 조작한 적도 없고, 조작은커녕 예상을 잘못해서 금으로 돈 벌려다가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빠르게 망해버린 바람에 가문 전체가 망할 뻔했다. 결국 음모 같은 것은 없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적 흐름을 절묘하게, 그것도 뒤늦게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것이 음모론에 대한 퍼거슨의 반박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정보 조작을 했다는 "주작"을 벌인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음모론도 있다. 음모론에 대한 음모론인 셈. 이 경우 나치 독일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깎아내리려는데 국채 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아 주식으로 슬쩍 바꿔놓은 것이라 주장한다.
7.2. FED 음모론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 달러를 생산하는 것에 개입하며 아직도 세계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음모론이 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 제도 폐지를 혜지하면서 기축 통화는 달러가 되었는데, 이 달러를 생성하는 것이 바로 Fed(Federal Reserve Board/Banks)이다. 이곳은 미국의 중앙은행[24]이지만 민간은행이고, 이 민간은행의 최대 주주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매우 우호적인 기업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미국 대통령도 어쩌질 못하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으려다 암살당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초기 FED의 주주(총20만) 록펠러와 쿤롭의 뉴욕내셔널시티은행[25] 3만 폴와버그의 뉴욕내셔널상업은행 2만 1천 JP의 퍼스트내셔널은행 1만 5천 로스차일드의 하노버은행 1만 2천, 체이스은행 6천[26], 케미컬은행 6천[27], 총 2만 4천 후에 이들 은행의 연준 지분은 조정되어 53%에 이르게 되고 현재는 약 70%대로 추정. 앤드루 잭슨 - "내가 은행을 죽였어"라는 유언을 남긴 대통령,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암살자의 권총 2발 모두 불발로 다행히도 암살당하지 않는다. 에이브러햄 링컨 -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하고 그린백을 발행. 1865년 4월 15일 암살. 존 F. 케네디 - FED를 배제하고 재무부에 화폐발행권을 넘겨줌. 1963년 11월 22일 암살. |
그러나 은행의 주주들이라고 해도 배당금은 화폐발행액수의 겨우 6퍼센트에 불과하며 94퍼센트의 수익은 미국 재무부로 환수된다. 또한 FED의 주주는 FED에 관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리고 FED의 주요 주주들인 JP모건체이스, 씨티뱅크,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등은 주식시장에 상장된 공개회사이고, 해당 은행들의 지분 현황을 보면 예시1 JP모건체이스 로스차일드 가문과 어떤 연관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은행에 대한 특정 주주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은행 지분 10% 이상을 보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8. 실존 인물
- 로런스 리 로스차일드 또는 래리 로스차일드(Lawrence Lee Rothschild or Larry Rothschild, 1954 ~ ) - 미국의 야구코치. 30년 가까이 투수코치로 활동 중. 현재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투수코치이다.
- 한나 드 로스차일드(Hannah De Rothschild, 1851 ~ 1890) - 아치볼드 프림로즈의 부인,한 때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다.
-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David De Rothschild, 1978 ~ ) - 영국의 환경운동가, 탐험가으로서 현대자동차 홍보에도 참여했었다. 그는 에벌린 로버트 아드리안 로스차일드 경(Evelyn Robert Adrian Rothschild)의 아들이다.
- 벤자민 드 로스차일드(Benjamin de Rothschild, 1963 ~ 2021) -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그룹(Edmond de Rothschild Group)의 회장. 202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제임스 로스차일드 (James Rothschild, 1985 ~ ) : 힐튼 호텔 설립자 콘래드 힐튼의 증손녀, 상속녀이자 사교계 명사인 니키 힐튼의 배우자
그 외에도 수많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들이 많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들은 대부분 영국, 미국, 프랑스에 많이 산다.
9. 대중매체
상기한 각종 음모론으로 인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서브컬처에서의 묘사도 비밀스럽게 세계를 지배하는 흑막으로 자주 등장한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시리즈에서 주인공 오토나시 사야를 지원하는 뒷빽으로서 활동하는 조직인 "붉은 방패"로서 등장. 작품에 따라서는 조직을 이끄는 가문의 이름이 로스차일드가 아닌 다른 이름의 가문으로 나오기도 하는 등[28] 직접적으로는 그 모티브인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연관성을 딱히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 시리즈에서 나오는 "붉은 방패"는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을 가리킨다. 아무튼 로스차일드 가문이 악역으로서 등장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 한국의 라이트노벨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도 "세계"의 일원으로 등장.
- 폴아웃 3의 동부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 구성원들 중 수석 서기란 사람들 중에 서기 로스차일드란 사람이 있다.(메인퀘 관련 브리핑을 하거나 리버티 프라임 관련 의뢰를 주는 그 사람) 이 로스차일드가 그 로스차일드 가문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명. 다만 하필이면 빨간 옷(상술했듯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라는 뜻의 독일어 성씨를 영어로 번역한 이름이다.)을 입은데다가,(물론 빨간 옷은 이 사람만 입은게 아니고 서기나 엘더들도 입는 옷이긴 하다.) 동부 브라더후드의 중요한 부분들을 관리담당하는 수석 서기라는 점 등등 현실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 도시야월기담에서는 에티루스의 이야기에서 언급되는데, 워털루 전투가 발발하던 시기에 통신원을 매수하여 영국 증권 주식 대부분을 삼켰다고 한다. 에티루스 또한 이들에게 낚여 전 재산을 날렸었다고. 그러나 저택에 쳐들어 온 에티루스의 협박으로 주식 20%를 그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에티루스는 뭐든지 올 인은 좋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 로스차일드 가문을 다룬 역사책으로 데릭 윌슨(Derek Wilson)의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Rothschild : A story of wealth and power)이 있다.
- 한국의 소설 템빨의 등장인물인 판미르가 드워프들의 도시 탈리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협력해주었으며, 61권 후반에서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을 견제하는 혁명단을 이끄는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언급된다.
- 한국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외과의사 엘리제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모티브로 한 차일드 가문이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대영제국을 모티브로 한 작중배경이 되는 브리티아 제국을 쥐락펴락 하는것도 같으며, 브리티아 제국 황실의 외척으로 나온다.[29]
- 웹소설 나 혼자 소드 마스터에서도 칠룡회 최강인 금룡공주의 성이 로스차일드다. 금룡공주의 가신이 미합중국의 대통령[30]이나 록펠러 가문일 정도로 금룡고주는 사실상 미국의 지배자로 묘사된다.
- 웹소설 템빨에서도 소설 속 가상 현실 게임인 'Satisfy'를 베타테스트때부터 지원해 온 가문으로 등장한다. 특히 비슷한 가문기업 인페르노와 함께 소설 속 진짜 뒷사람들만 아는 운석이 떨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집단이다.
[1]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2] 단, 록펠러 가문이 가문의 조직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한 경향이 있으므로, 유명무실 해졌다고 넘겨 짚을 수는 없다. 로스차일드도 비슷하게 가문의 위세를 최대한 억제해서 실리만 챙긴 바가 있다.[3]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인이니까.[4] 사실 이는 다른 국가들에서도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삼성이 아무리 영향력이 강해도 한국 정부를 거스를 수 없어 비위를 맞춰주고 있으며,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도 역사상 최대의 부를 거머쥐었음에도 미국 정부의 결정으로 수십개로 쪼개졌다. 그리고 유대계 재벌들이 미국 정계에 천문학적인 로비를 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편의를 봐주고 있지만 미국의 정세가 변하면 내쳐질 수 있는 상황이다.[5] 현재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고, 작위도 없어졌지만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로부터 작위와 함께 가문 문양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문 문양에 공작관이 있다.[6] 한때 프랑스의 귀족가문이었지만 19세기 이후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되면서 귀족 제도도 같이 폐지되었다. 이때 프랑스 로스차일드의 귀족 작위도 박탈되었다.[7] 원래는 상업만 하다가 일부 상인들이 상업으로 번 종잣돈으로 금융업자가 되었다.[8] 꽤 값진 물건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9] 금융계의 스위스 용병처럼 행동했다고 보면 된다. 현재도 로스차일드 가문을 돕는 사람들을 절대 배반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10] 1803년 헤센카셀 방백국이 헤센 선제후국으로 승격된 이후에는 헤센 선제후 빌헬름 1세로 불린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꽤 난봉꾼이었는지 정부 3명에게서 사생아 25명을 낳았다. 적자녀 4명을 포함하면 29명의 자녀가 있다.[11] 원래 자녀수가 16명인데 6명이 일찍죽고 5남 5녀만 성인이 됐다.[12] 조상은 독일계로 브레멘 출신의 양모 상인인 요한 베어링이 영국으로 이주하며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자식들이 세운 베어링스 은행은 1995년 닉 리슨에 의해 파산하기 전까지 영국 여왕을 고객으로 두며 여왕의 은행(the Queen's Bank)라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명문 은행이었다.[13] 일본 근대화 초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은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 ~ 1911)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였다. 당장 그 악명높은 운요호가 스코틀랜드 조선소에서 건조된 배로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스 회원으로 추정되는 어느 스코틀랜드 사람이 일본 제국에 헐값에 팔아넘겼다. 미국의 경우도 동인도 회사 쪽 세력이 선두주자였다.[14] 다만 로스차일드는 바티칸과의 밀접한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15] 위의 마이어 암셀의 3남 네이선 마이어의 손자이자 동명이인이다.[16] 아버지 네이선 마이어처럼 할아버지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의 이름을 물려받았다.[17] 영국의 은행가, 사업가, 금융가.[18] 영국의 은행가, 정치인, 동물학자.[19] 결혼을 하지 않아서 조카인 빅터에게 작위가 돌아갔다, 다만 사생아 딸이 한 명있었다.[20] 영국의 은행가, 군인, 과학자.[21] 영국의 은행가, 자선사업가, 교수.[22] 영국의 은행가.[23] 사실 로스차일드 가문도 영국과 프랑스 양쪽에 퍼져있다.[24] 한국의 한국은행과 같은 역할.[25] 지금의 씨티은행[26] 1955년 JP모건과 합병[27] 1996년 JP모건체이스와 합병[28] 예를 들어 BLOOD+에서는 조직을 이끄는 가문의 이름이 골드슈미트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29] 참고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귀족 작위는 받아봤지만 영국 왕실을 비롯한 유럽의 왕실들과 혼맥을 맺어본 적은 없다. 20세기까지도 유럽 왕실들은 귀천상혼이 엄격한 편이었는데 일반 귀족 그것도 5등작 중 가장 낮은 남작이기도 하고 유대인이라서 왕족이 유대인과 결혼한다고 하면 여전히 반대 여론이 심하다.[30] 공주를 모시면서 하고 있는 취미생활이라고 주인공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