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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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티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에서 오랫동안 독립국이었던 적이 별로 없다. 크로아티아인은 남슬라브계에 속하며, 언어인 크로아티아어도 옆나라인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와 거의 같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불렸다.본래 크로아티아가 속한 발칸반도는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었지만, 민족 구성은 남슬라브계가 다수였기에 19세기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한 이후,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의 영향과 세르비아의 주도하에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발칸의 여러 지역과 민족을 포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거부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나치 독일의 괴뢰국 형태로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나치 독일의 패배로 끝나며 다시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소속국이 되었다. 이후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 전쟁 끝에 오늘날의 크로아티아가 탄생했다.
2. 고대사
국토사의 측면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일리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후 로마 속주로서 달마티아(Dalmatia)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현재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지중해에 면한 지역이다. 내륙지역은 판노니아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 유명한 달마시안의 원산지.4세기 게르만족의 거센 침공에 시달렸으며,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 제국이 패배한 뒤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여러 혼란한 상황을 거쳐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으나 8세기 슬라브족이 남하하여 차지했고, 이후 슬라브족의 영토로 계속 남았다.[1]
크로아티아인의 정착과정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가 10세기 경에 저술한 《De Administrando Imperio》(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이전시대의 크로아티아인의 이주와 형성 과정에 관한 문헌기록은 빈약하기 때문에 추론과 가설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6세기 경에 아바르족의 지배를 피해 달아난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동로마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사절을 보내 일리리쿰[2]에 주거지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조상에 해당하는 남슬라브족은 아바르인들이 몰락하자 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3. 중세사
크로아티아인의 발칸 반도 정착은 동로마 제국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 지역이 원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래 동로마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던 만큼, 원래 크로아티아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바르족이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국은 프랑크 왕국, 달마티아의 크로아티아 공국은 동로마의 지배에 들어갔다. 판노니아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카롤루스 대제의 대대적인 기독교 정책으로 로마 교회(가톨릭)로 개종하였다. 그와 더불어 닌(Nin)에는 최초의 크로아티아 기독교 교구가 세워졌다. 이렇게 한동안 크로아티아는 동로마가 지배하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공국과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는 내륙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823년에는 동로마가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달마티아도 프랑크 왕국에 복속된다. 그 후 크로아티아는 즈데슬라브(Zdeslav, 재위 878-879) 재위기에 잠시 동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콘스탄티노플 교회 관할에 잠시 속하기도 했지만, 즈데슬라브 사후 브라니미르(Branimir, 재위 879-892) 재위기에 다시 로마 교회 관할로 돌아왔다.
크로아티아 공국은 925년을 전후하여 닌의 크네즈(Knez: 대공) 토미슬라브(Tomislav, 재위 910-928)가 왕을 칭하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이 되었다.[3] 참고로 토미슬라브는 크로아티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왕이고 대크로아티아주의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군주이기도 한데, 정작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해서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저 928년이란 연도도 928년에 닌 교구 폐지 회의가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회의에 토미슬라브가 참석했을 거라고 추측해서 정한 것이다.
크로아티아 왕국은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Petar Krešimir IV, 재위 1058~1075)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054년 동서교회가 분열된 후인 1059년에 로마 교회에 사절을 보내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아 비오그라드(Biograd)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더불어 크로아티아 내에서 로마 교회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또한 그는 크로아티아 해안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건설·육성했는데, 이 덕분에 닌 외에도 쉬베니크(Šibenik), 스크라딘(Skradin) 등의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대대적인 영토확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영토를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내륙지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지까지 확장시켰으며,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지역의 섬들이 크로아티아의 영토로서 확고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하지만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075년 동로마 제국과 협상을 맺은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았고, 왕 자신은 노르만족에 의해 생포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그는 석방을 위해 크로아티아 해안의 여러 도시들을 포기했지만,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노르만족의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포사비나(Posavina)지역의 반(Ban: 부왕)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 재위 1075~1089)가 로마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즈보니미르 재위기에는 키릴 형제가 전해준 글라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발전했고, 중세 봉건체제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즈보니미르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1089년에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다가 국력소모와 재정파탄을 이유로 원정을 반대하던 귀족들에게 시해당했다.
즈보니미르가 귀족들에게 시해당한 후 스트예판 2세(Stjepan II, 재위 1089~1091)가 옹립되었다. 하지만 그가 후손없이 죽자 계승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 광경을 보다못한 즈보니미르의 왕비 옐레나 리예파(Jelena Lijepa, ?~1091)가 즈보니미르의 처남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헝가리 왕국 국왕 라슬로 1세(László I, 재위 1077~1095)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제안했고, 제안을 수락한 라슬로 1세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슬라보니아(Slavonia)[4]의 반(Ban) 페타르 스나치치(Petar Snačić, 재위 1093~1097)를 왕으로 추대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반발에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얻지 못했다. 그 후 1097년 라슬로 1세의 뒤를 이은 칼만(Kálmán I, 재위 1095~1116)이 스나치치를 살해하고 슬라보니아 점령에 성공하지만, 달마티아 지역 귀족들의 저항에 못이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되 칼만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로써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성립했다.
13세기 아르파드 왕조가 몰락하며 헝가리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완전히 무너지자 지역 영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제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으나 헝가리에 카페앙주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중흥을 맞이하고 세르비아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위협을 떨쳐냈다. 그러나 15세기 헝가리 국왕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등 헝가리가 유럽 정세 한복판에 깊숙히 말려들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달마티아를 빼앗겼다.
4. 근대사 - 합스부르크 제국 (1526–1918)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군의 피상적인 침공과 약탈을 겪었지만, 크로아티아가 오스만 제국과 본격적으로 엮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전반에 들어서이다. 1526년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을 침공했고 이에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다.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3국의 국왕을 겸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가문의 러요시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헝가리군은 대패하여 사실상 멸망했다. 이때 러요시 1세의 자형이자 처남인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러요시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당시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크로아티아 왕국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속하게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동시에 보헤미아 왕국도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고, 북서부 헝가리도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어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성립되었다[5].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계속되었다.혈연에 근거한 선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합스부르크 가문은 강압적인 독일화 정책이 불가능하여 요제프 2세 이전까지는 현지의 문화와 자치권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크로아티아도 상당 수준의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포함된 이후 크로아티아의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의 거듭된 공세를 받는 군사 변경 지대(Hrvatska vojna krajina)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해적들이 들끓는 탓에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
1664년 오스만 제국과의 불평등한 버슈바르 조약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판, 즈린스키 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꾀하기도 했는데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제압되었고 반란 주동자들은 비너노이슈타트에서 처형당했다. 이때 부친을 잃은 헝가리인 귀족 퇴쾨이 임레는 1682년 상헝가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듬해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구원으로 빈 포위는 풀렸고, 이어서 대튀르크 전쟁이 벌어져 오스트리아는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크로아티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옛 크로아트 왕국의 영토였던 슬라보니아 일대를 되찾았다.
1797년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결과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이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는데 베네치아가 다스리던 달마티아 역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이로서 지금의 크로아티아 전체가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는데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참패하면서 쇤브룬 조약으로 프랑스에 할양되었다가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크로아티아인에게 독일화, 헝가리의 헝가리인은 헝가리인대로 마자르화를 크로아티아인에게 강요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크로아티아인은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종주국으로 크로아티아인의 권리를 억압하려는 헝가리와는 사이가 최악이었는데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헝가리인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크로아티아인은 요시프 옐라치치를 필두로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맹세한 후 헝가리 봉기 진압에 앞장섰다. 덕분에 크로아티아는 제한적으로나마 동등한 주권을 얻을 수 있었다.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에게 연달아 패하여 충격과 후유증에 휩싸여 있는 동안, 헝가리 민족 운동이 고조되어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중제국)이 수립되어 헝가리 왕국은 사실상 주권국이 되었다. 이때 크로아티아의 통치권은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넘어갔다.[6] 헝가리는 크로아티아를 완전 편입하고 헝가리 왕국 내 타 소수민족[7]들처럼 마자르화를 하려했으나 크로아티아는 주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하였다. 이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나서서 크로아티아를 지지하며 압력을 넣은 덕분에 크로아티아의 주권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8]
크로아티아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양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크로아티아는 이스트리아 반도와 함께 제국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의 해군 및 해양 정책에서 크로아티아의 비중은 매우 컸으며,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도 실제 인구 비중에 비해 크로아티아계의 수가 더 많았다.
5. 현대사 (1918–)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 크로아티아계는 이미 몰락이 기정사실화된 합스부르크와 결별하고 남슬라브 통일운동에 합류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원래 국명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 위주로 흘러가는 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을 보고 남슬라브인 통일운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대세르비아주의였다고 분개한 크로아티아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분쟁을 일으켰다.[9] 크로아티아 문제는 크로아티아계가 반유고슬라비아 성향 국가인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지원을 얻어 아예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더 심각해졌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임박해 정세가 심상치 않은 1939년 8월 크로아티아 농민당과 유고슬라비아의 섭정 파블레 왕자의 타협으로 크로아티아계 거주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폭넓은 자치권을 가지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a)로 재편되었으나 이미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다.결국 1941년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을 비롯한 추축국의 침공 때 병력 소집을 거부하여 유고슬라비아의 파탄에 일조했다. 이후 독일-이탈리아-헝가리의 괴뢰 국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세워졌고 독일의 후원 하에 반세르비아 조직인 우스타샤가 정권을 잡아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벌였는데, 어찌나 잔혹했는지 천하의 독일 국방군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당한 세르비아인의 수는 30만 명에서 70만 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대부분의 학살이 저질러진 보스니아의 2차대전 직후 세르비아인이 100만여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거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인구의 20%에서 40%가 죽은 격이었다. 이 비율이면 유대인 학살보다 더하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계의 체트니크라는 민족주의 저항군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게릴라들 모두와 격렬히 충돌하였다. 이 때문인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크로아티아가 인지도를 올렸을 때, 일각에서는 크로아티아의 체크무늬 유니폼을 보면 나치가 생각난다면서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었을 정도였다.
1945년 이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렸으나, 1980년 티토가 죽은 뒤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대두되자 크로아티아도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으며 1990년 총선에서 유고슬라비아 내 각 공화국의 총선이 민족주의 정파의 승리로 끝났고, 크로아티아도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압승을 거뒀으며 1991년 동구권의 붕괴를 계기로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국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연방 붕괴를 거부한 세르비아계 연방군과 무력 충돌,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났으나, 국제사회의 중재와 압력으로 연방군이 철군함으로써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을 달성하였다. 다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계가 다수이던 크로아티아 동부 크라이나 지방이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설립을 선포하여 1995년 여름까지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10]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문제로 말썽이 일어나지만, 크로아티아 역사는 아니므로 패스.[11] 독립 이후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물가상승률이 높아 한 동안 경제가 엉망진창이었으나 화폐개혁을 하는 김에 독일 마르크화에 페그를 거는 방식으로 물가를 안정화시켰고 국제재제로 투자유치에 어려움을 겼던 세르비아와는 다르게 크로아티아는 그런 면에서 제약이 덜했던지라 1990년대 중반부터 안정세를 되찾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다시 휘청이기는 하나, 2000년대에 서방 세계로의 경제 통합을 지향하여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였다.
크로아티아도 2013년부터 EU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이후 솅겐 협정에도 가입하게 된다.
한편 EU 가입 국민투표 통과를 위해 2012년에 여야 합의 하에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하면 국민투표 결과가 무효화되는 선거법 조항을 삭제했는데, 이를 노리고 가톨릭 시민단체들이 기습적으로 서명을 모아[12]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국민투표 결과 투표율 37.8%, 찬성률 66.3%로 개헌안이 가결되었으나 크로아티아 의회는 시민결합에 결혼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해당 헌법 조항을 우회하여 현재에 이른다.
2019년 11월 6일에 자그레브에서 교사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
2023년 크로아티아가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통화를 유로로 전환했다.
6.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유럽 왕가 크로아티아 트르피미로비치 왕가 파트
- 김철민, 〈크로아티아인의 발칸유럽 정착과 중세 왕국의 발전사 연구〉 (동유럽발칸학회, 2007)
[1] 달마티아 지역이 슬라브화한 이후에도 이곳에서 라틴인들은 지속해서 살아왔지만 슬라브인들의 출산율이 더 높았기 때문에 점점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는 크로아티아인에게 동화되었고 이들이 쓰던 언어인 달마티아어도 날이 갈수록 세가 축소되어 19세기 이르러서는 사멸 직전에까지 이르렀으며 마지막 화자인 Tuone Udaina가 1898년에 폭파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완전히 사멸하였다.[2] 현재의 발칸반도 서부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포괄하는 지역.[3] 당시 기록에는 왕을 칭했다는 직접적 기록은 없고 대신에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10세(Joannes X, ?~928)가 토미슬라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왕(Rex)이라 칭한 대목이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토미슬라브가 아니라 스트예판 드르지슬라브(Stjepan Držislav, 재위 969–997)를 최초의 크로아티아 왕으로 보기도 한다.[4] 현 크로아티아의 동부 지방. 합스부르크 제국 시기에는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존재하기도 했다.[5] 다만 페르디난트 1세 초창기에는 동부 에르데이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귀족이자 오스만의 신하로 들어간 서포여이 야노시와 대립왕 관계였고, 성 이슈트반 왕관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은 막시밀리안 2세 대에 들어서였다.[6] 정확하게는 달마티아 왕국을 제외하고 크로아티아 왕국과 슬라보니아 왕국이 헝가리의 관할이 되었다.[7]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8] 크로아티아인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이래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을 바쳤다. 오스만 제국과 대립할 때 크로아티아인 귀족들은 헝가리로 건너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는 방파제를 자처했고, 헝가리가 독립운동을 펼칠 때마다 앞서 진압하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그렇다 보니 동군연합이어도 크로아티아인과 헝가리인 간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신들에게 항상 충성하는 크로아티아인을 헝가리인의 압제로부터 구해주었다.[9] 크로아티아계의 불만이 폭발하게 된 결정타는 1928년 크로아티아계의 권리를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농민당(HSS) 당수였던 스체판 라디치(Stjepan Radić)가 국회에서 세르비아계 의원의 총을 맞아 암살된 일이었다. 이 사건은 다음해인 1929년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정치를 전복시키고 절대왕정 독재를 실시하는 계기가 된다.[10] 이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관광지로 유명한 두브로브니크의 경우 세르비아 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망대 측의 마을과 성벽 일대가 초토화되었으며,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해당 지역에 전쟁 박람관을 조성하였다. 또한 2019년 1월 21일까지 두브로브니크 성 내에 참전용 추념 코너를 조성해 세르비아와의 치열한 공방전을 관광객들에게 보이고 있다. 허나 세르비아 역시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학살과 탄압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가해국가면서도 이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내에서 살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한테 학살을 당한 전적이 있던 피해자였던지라 크로아티아가 과거 구 유고내전 당시 부코바르 시민 학살 등 세르비아 측에서 자행한 크로아티아인 학살을 문제 삼아 세르비아를 비난하면 크로아티아가 저지른 전범 행위들을 앞세워가며 피해자 행세하지마라고 크로아티아를 비판하기도 한다.[11] 단 헤르체고비나주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서 사실상 크로아티아령 취급을 받긴 한다.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다수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동부 지역의 스릅스카 공화국도 마찬가지여서 여기도 역시 세르비아인들로부터 사실상 세르비아 땅 취급을 받는다.[12] 크로아티아에서는 직전 선거 유권자 수의 10% 이상만큼 서명을 모으면 개헌 국민투표 발의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