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Der Große Türkenkrieg
튀르키예어 Kutsal İttifak Savaşları(신성 동맹 전쟁)
영어 The Great Turkish War
1. 개요2. 배경: 오스만 제국의 위협3. 전개
3.1. 개전: 제2차 빈 공방전 (1683년)3.2. 헝가리 전역3.3. 6차 베네치아-오스만 (모레아) 전쟁 전반3.4. 5차 폴란드-오스만 전쟁 (우크라이나 전역)3.5.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3.6. 2차 모하치 전투 (1687년)3.7. 벨그라드 전투 (1687년)3.8. 슬렌카멘 전투 (1691년)3.9. 아자크 함락 (1695년)3.10. 6차 베네치아-오스만 (모레아) 전쟁 후반3.11. 젠타 전투 (1697년)
4. 종전: 카를로비츠 조약5. 영향5.1. 오스만 제국의 쇠퇴
6. 관련 문서7. 둘러보기1. 개요
16세기에 엄청난 영토 팽창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 오스만 제국은 17세기에 들어 비대해진 관료제와 부패한 예니체리 문제로 점차 쇠퇴의 기조를 보였다. 서유럽이 절대왕정 시기에 군대 개혁을 이룩해 나간 것에 반해 오스만 군대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독일어권은 17세기 전반기에 지속된 30년 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초토화된 후 근대화 단계에 나아가 그 여파에서 간신히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1] 합스부르크 가문이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있을 무렵, 이웃 프랑스는 역시 전후에 내부 반란과 내전으로 혼란을 겪었지만 루이 14세 치세에서 반란세력들을 제압하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이었기에 비록 17세기 오스만 제국이 정체되었다 하더라도 30년 전쟁의 피해를 막 복구하는 중인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오스만 제국군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도 대등히 싸웠고[2] 17세기 후반에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 차례대로 선전했다. 이에 자신감을 찾은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트 4세 제위 시절, 상헝가리(Felvidék)[3]에서 발생한 퇴쾨이 임레의 주도로 발생한 반 합스부르크 봉기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1683년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하에 제2차 빈 공방전에 나섰다.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오히려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한 유럽 연합국에게 추격을 당하며 대 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로 영어 명칭을 보면 알겠지만 對 튀르크 전쟁이 아니라 大 튀르크 전쟁이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일방적으로 밀린 건 결코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서 인정받던 4개 국가에게 협공
그런데 기독교 연합국 쪽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동맹인 루이 14세가 대튀르크 전쟁을 틈타 팔츠 선제후국을 두고 시비를 걸어 9년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은 발칸반도와 라인강에서 동시에 두 전쟁을 수행했다. 이번에도 오스만의 오랜 동맹국인 프랑스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전쟁은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귀결되었다. 여담으로 이 전쟁에서 체결된 신성 동맹은 러시아가 서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첫번째 전쟁으로,
2. 배경: 오스만 제국의 위협
쉴레이만 1세 시기에 모하치 전투와 제1차 빈 공방전, 프레베자 해전 등으로 유럽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오스만 제국은 몰타 공방전과 레판토 해전으로 잠깐 성장세가 멈추는 듯 했지만 재차 정복 활동을 개시하였다. 재건된 오스만 해군은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유럽 각지[4]에 상륙, 약탈과 납치를 자행하여 스페인부터 스웨덴까지 여러 나라의 공분을 샀다.
게다가 16세기 유럽의 패권국이던 스페인도 네덜란드 독립전쟁, 잉글랜드와의 전쟁, 30년 전쟁, 프랑스와의 전쟁,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겪으며 쇠퇴했고, 프랑스는 프롱드의 난으로 바빴던데다 16세기부터 오스만의 동맹이자 주요 무역 상대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호응하듯, 17세기 전반에 내각이 부패로 얼룩지며 쇠퇴하던 오스만 제국은 쾨프륄뤼 가문이 재상직을 독점하면서 군대가 개혁되고 관료들의 기강이 잡히면서 5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645년 ~ 1669년)에서 24년간의 혈전 끝에 숙적 베네치아 공화국을 물리치고 크레타를 정복했다.
이후 4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663년 ~ 1664년)에서 현재의 슬로바키아 남부, 3차 오스만-폴란드[5] 전쟁 (1672년 - 1676년) 이후 포돌레(우크라이나 중부)까지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였다.[6]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동부 우크라이나를 얻은 루스 차르국과 우크라이나의 패권을 넣고 벌인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는데, 드네프르강이 양국의 국경선이 되었고 드네프르강 하류에 거주하는 코사크는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또한 1681-82년 퇴쾨이 임레의 상 헝가리 반란을 지원하여 포조니를 제외한 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고 제후국인 상헝가리 공국을 세워 합스부르크 세력의 영토를 잠식하였다.
3. 전개
1682년 8월 6일 오스만 조정은 퇴쾨이 임레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였다. 다만 곧바로 행군하더라도 헝가리에 당도할 무렵이면 이미 겨울이 닥쳐올 시기라, 본격적인 진군은 이듬해 봄으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 역시 바보는 아닌지라 6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빈과 죄르의 수비를 강화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동맹을 맺어 전쟁에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스만 제국군이 크라쿠프 혹은 빈을 공격할 시에 상호 원조를 약속하는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했다.3.1. 개전: 제2차 빈 공방전 (1683년)
1683년 3월 31일 재차 선전포고가 있은 후 대 와지르 메르지콘루 카라 무스타파 파샤 휘하의 15만 오스만 대군은 다음날 에디르네에서 출정하였다. 5월 초엽 벨그라드를 지난 오스만 제국군은 에르데이 공국, 몰다비아 공국, 상헝가리 등의 동맹군과 합류하였다. 트란실바니아-상헝가리 군에게 죄르를 포위하게 한 후 12만 대군은 곧장 빈으로 진격하였고, 7월 7일 그 근교에서 4만의 크림 칸국군과 합류하였다.
오스트리아 조정은 오스만 제국군이 빈과 부더 사이의 죄르에 공격을 집중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곳의 방어를 강화하였는데, 예상과 달리 오스만 제국군이 단숨에 빈으로 진격해오자 혼란에 빠졌다. 16만에 육박하는 적군에 질겁한 레오폴트 1세는 파사우로 몽진하였고, 로렌 공작 샤를 5세[7] 역시 2만 병력과 린츠로 철수하였다. 7월 14일 오스만 군대가 진영을 갖출 무렵, 빈에는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베르크 백작 휘하 1만 5천 수비대만이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과 남아있었다.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빈에 항복을 요구했지만, 얼마전 페르츠톨즈도르프에서 항복했음에도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수비대는 이를 거절하였다.
7월 17일부터 포위가 시작되었고, 오스만 군대는 성벽 주변에 참호를 파고 봉쇄에 나섰다. 1529년 제1차 빈 공방전을 되새긴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무리한 포격과 정면 공격 대신 도시를 말려죽이려는 목적이었기에 수비대의 대포 370문에 훨씬 못미치는 150문의 대포만을 가져왔다. 수비대가 지하에 목재를 다량 묻어둔 탓에 포위군의 갱도 작업은 지체되었고, 도시를 온전히 취하고 싶던 카라 무스타파의 소극적인 공격으로 포위는 장기화되었다. 8월 들어 로렌 공작 샤를 5세의 원군이 빈 서북쪽 외곽의 비삼베르크에서 퇴쾨이 임레의 상헝가리군을 격파하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 얀 3세 소비에스키는 바르샤바 조약에 의거하여 원군을 편성하였고, 8월 15일 3만의 병력과 크라쿠프를 떠났다.
9월 6일 얀 3세 소비에스키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이 빈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툴룬에서 도나우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당도하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군은 공세를 강화하였고, 갱도가 폭발하며 성벽에 12m 길이의 틈이 생겼다. 9월 8일 오스만 제국군은 틈새에 공세를 가한 끝에 외벽을 장악하였고, 수비대와 주민들은 내성으로 철수하여 최후의 순간을 준비하였다.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8만의 독일-폴란드 연합군이 인근에 집결했다는 소식에도 그전에 도시를 취할 것이라 여겨 고작 3만의 타타르 기병대에게 후방을 맡기고 포위에 집중하였다. 9월 11일 새벽, 연합군이 다가오자 일부 오스만 제국군이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고 일부 요새화된 마을들을 잃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병력 대부분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으나 정작 예니체리와 시파히 정예 병력은 포위망에 그대로 둔 채였다. 그는 병력의 우세로 시간을 버는 동안 정예 부대가 먼저 빈을 함락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10곳의 갱도 작전은 모두 실패하였고 오후 4시 무렵 연합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제국군의 공세를 버텨내던 오스만 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윙드 후사르의 돌격에 무너졌고,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후퇴를 명하였다. 오후 6시에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지휘 하에 3천의 윙드 후사르를 필두로 한 1만 8천의 기병대는 (기록된) 역사상 가장 큰 기병 돌격을 감행하였고, 빈 수비대 역시 호응하며 오스만 진영을 점령하였다. 빈은 구원되었고, 오스만 제국에게는 대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제2차 빈 공방전 문서 참고.
3.2. 헝가리 전역
프랑스의 공격을 우려하던 빈 조정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을 원하였으나 연합군의 통수권을 지닌 얀 3세 소비에스키는 기세를 몰아 진격을 강행하였다. 10월 7일, 에스테르곰을 향해 진격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에스테르곰 북쪽 파르카니(Párkány)[8]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습격에 직면하여 2천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로렌 공작 샤를 5세가 이끄는 제국군[9]이 당도하였고, 2만 8천의 연합군은 반격하여 오스만군을 격퇴하고 파르카니를 장악하였다. 도나우강을 건넌 연합군은 에스테르곰을 포위하였고, 10월 28일 지휘관 이브라힘 파샤가 항복하였다. 이로써 헝가리 북부의 주요 도시 에스테르곰은 78년만에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후 샤를이 기습적으로 페슈트를 점령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곧 철수하였다. 12월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교살되었다.1684년 초엽 교황의 제창으로 헝가리 해방을 목표로 한 신성 동맹이 결성되었다.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외에도 루스 차르국,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 가입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던 에르데이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게도 최소한 중립을 약속받았다. 1684년 봄 오스만 제국의 동맹인 프랑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룩셈부르크를 공격해 점령하였지만, 교황의 중재로 더이상 싸우지 않고 레겐스부르크에서 20년 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8월 15일) 한편 이미 6월 18일 출정한 연합군은 비셰그라드를 점령한 후 남하하였고, 이에 부더의 무스타파 파샤 역시 2만 대군과 북상하였다. 6월 27일 바츠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트므슈바르 총독 아흐메트 파샤를 포함한 3천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하였고, 포격 끝에 바츠 수비대가 항복하였다.
3.2.1. 제1차 부더 공방전 (오스만 승리)
6월 29일 바츠를 떠난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소개된 후 방화된 페슈트에 입성하였다. 독일 기병대는 철수하는 병력의 후방 엄호를 맡은 예니체리 부대를 공격하였고 격전 끝에 오스만군은 부더로 철수하였다. 6월 30일 제국군은 페슈트를 중심으로 진영을 꾸렸고, 상반된 논의 끝에 바츠에서 센텐드레 섬을 건너 부더 방면으로 넘어갔다. (7월 8-10일) 이에 부더의 무스타파 파샤는 2만 5천 병력과 출정하여 10일 센텐드레 섬에서 연합군을 공격했으나 패퇴하였고, 12일 야음을 틈타 부더 남쪽 에르드로 철수하였다. 7월 14일 3만의 제국군은 오부더를 거점으로 부더를 포위하였다. 부더는 5명의 파샤 휘하에 놓인 1만이 넘는 수비대와 2백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다음날 회의 후 포격이 시작되었고, 17일 성벽에 틈이 생겼다.18일 제국군은 부더 성벽에 공격을 가하였으나 무스타파 파샤가 보낸 기병대와 2천 수비대가 협공하여 격퇴하였다. 한편 헝가리군과 합류한 포위군은 19일 부더의 강변 성벽에 총공격을 가하였고, 격전 끝에 외성을 장악하였다. 수백의 오스만 수비대는 내성으로 철수하려 하였으나 수비대장 카라 메흐메트 파샤가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제국군에게 학살되었다. 포위군은 심한 포격과 갱도 작전으로 공세에 나섰지만 수비대의 빈번한 반격에 연거푸 실패하였고, 수백여 기독교도 포로들이 처형되었다. 연이은 전투와 역병으로 8월 중순에 이르면 3만 5천의 포위군 중 2만여 정도만이 남았고, 11일 샤를은 레오폴트 1세에게 퇴각을 청하였다. 10일 수비대장 카라 메흐메트 파샤가 포탄에 맞아 전사했음에도 이브라힘 파샤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항전을 계속하였고, 양측 모두 원군이 파견되었다. 우선 9월 중순 포위군은 1만 5천여 병력을 증원받았고, 바이에른 포병대의 5일 간의 포격 끝에 9월 18일 성벽에는 큰 틈이 생겼다.
바이에른 부대는 그곳으로 진격하였지만 3시간의 혈투 끝에 격퇴되었다. 9월 22일엔 오스만 측 원군이 근교에 당도하여 포위망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0월 26일 헝가리군이 먼저 철수하였고 4일 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돌아온 무스타파 파샤가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31일 오스만측 보급 선단이 부더에 당도하였고, 수비대가 성을 나서 바이에른 진영을 습격하였다. 11월 1일 포위군은 병약자들을 수송을 위해 머르기트 섬으로 옮겼고, 화기를 선박에 실었다. 3일 제국군은 에스테르곰 방면으로 철수하였고 일부는 페슈트로 향하였다. 부더 수비대는 머르기트 섬을 공격해 수천의 포로를 사로잡았고 센텐드레 섬에서 오스트리아측 수송선을 약탈, 승선한 이들을 학살하였다. 5일 무스타파 파샤의 입성과 함께 부더에서는 성대한 축하연이 열렸고, 이브라힘 파샤는 부더의 총독으로 봉해졌다.[10] 부더 공방전으로 제국군은 2만 2천의 병력을 잃었다.
포위 도중인 9월 17일와 제국군이 에페례시에서 퇴쾨이 임레를 격파하고 28일 바르트퍼를 점령한 것이 빈 조정에겐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다만 11월 7일 ~ 24일 에페례시 포위는 실패하였다. 한편 7월 8일 자그레브와 페치 사이의 주르데바츠에서 출정한 병력은 슬라보니아로 진격, 2일 후 비로비티차를 포위하였다. 소규모의 오스만 원군은 격파되었고, 2주 간의 포위 끝에 수비대는 철수를 대가로 항복하였다. 부더에서 돌아온 오스만 총독은 외세크 부근에서 군대를 모았지만 크로아티아군에게 격파되었다. 다만 무리하지 않은 크로아티아군은 회군하였고, 당시 빈 조정은 부더 공방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크로아티아 전선은 내팽개쳐졌다. 1685년 7월 7일 제국군이 에르셰쿠이바르를 포위하였다. 8월 16일 타티 전투에서 오스만 측의 원군이 격파되었고, 19일 오전 7시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공격 2시간 만에 수비대는 백기를 들었으나, 제국군은 그에 개의치 않고 5천여 오스만 제국군 대부분을 학살하였다.
3.2.2. 제2차 부더 공방전 (1686년)
1686년 6월 12일, 독일인-헝가리인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모인 8만 신성동맹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부더로 향하였다. 에스테르곰을 지난 연합군이 15일 비셰그라드에 당도하자 현지 오스만 주둔군이 도주하였고, 지휘관 샤를은 포로 심문을 토해 부더에 1만 5천 수비대가 배치된 것을 깨달았다. 17일에 연합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개된 페슈트에 입성한 후 포위를 준비하였다. 부더에서는 총독 압둘라흐만 압디 파샤가 외성, 이스마일 파샤가 내성을 수비하였다. 오스만 지도부는 성벽을 보강, 성벽 외부에 지뢰를 매설하였으며 포격 시의 화재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성 내부 주택들의 지붕을 허물었다.[11] 그들의 목적은 대규모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버틴 후 포위군을 역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6월 24일 포위군은 부더의 외성을 장악하였고, 헝가리군은 체플 섬에서 오스만 보급 선단을 격파하고 승조원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7월 1일, 포격과 함께 본격적인 포위가 시작되었다.7일에는 갱도 작전이 개시되었고 13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7월 중순에 이르면 성벽 곳곳에 균열이 생겼지만 다음날 수비대가 복구하였다. 그러던 15일 오스만 수비대가 포위측 갱도를 야습하였고, 22일에도 반복하여 4개의 대포를 빼앗았다. 한편 20일 포위군은 수비측 시파히 기병대를 밖으로 유인한 후 격파하여 그 파샤를 전사시켰고, 22일엔 마차시 궁전 옆의 화약고에 포탄을 명중시켜 1천이 넘는 사망자를 내었다. 한편 그랜드 와지르 사르 쉴레이만 파샤 휘하의 원군이 외세크에 당도한 후 부더에 전갈을 보내었는데 헝가리 기병대가 이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25일에는 포위 도중 최대 규모의 수비대가 남과 북쪽에서 동시에 성밖으로 나와 공격에 나섰고 포위 측과 서로 큰 피해를 주고받은 후 철수하였다. 27일 헝가리 기병대가 대폭발로 붕괴된 강변 성벽을 공격, 격퇴되었으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30일 포위 측은 오스만 사령부에 항복하면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겠지만 계속 저항한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비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 통보하였으나 거부되었다.
한편 23일부터 8월 초까지 약 1만에 달하는 헝가리 증원 병력이 포위망에 합류하였다. 8월 1일 오스만 원군의 접근 소식에 포위군은 포위망을 두른 성벽을 건설하였고,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도시를 점령하려는 의도로 3일에 총공격을 시도하였다. 2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포위군은 사상자 및 질병 등으로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인원이 4만 정도로 축소되었다. 원군에 대한 공격, 철수 등을 놓고 궁리하던 신성도맹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측 원군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8일부터 오스만측 원군의 선발대과 포위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12일 쉴레이만 파샤 휘하 본대가 에르드에 당도하였다. 한편 10일 하트반에서 출정한 오스만 원군은 헝가리 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14일 쉴레이만 파샤는 포위망에 공세를 퍼부었고, 부더의 시파히 기병대도 벨그라드 문을 나서 협공에 나섰다. 이들은 크로아티아-헝가리 기병대를 몰아붙였으나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군이 반격에 성공하였다. 기세를 얻은 연합군은 2만의 병력으로 참호를 나와 돌격하였고, 쉴레이만 파샤는 철수하였다. (부더커시 전투)
오스만 구원군은 대부분 젊고 경험이 부족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쉴레이만 파샤는 섣불리 대규모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20일 새벽 1천의 오스만 기병대가 포위망을 뚫고 부더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저지되었다. 22일 포위군은 남쪽 성벽에 공세를 펼쳐 이슈트반 성탑을 장악하였다. 29일은 벨그라드 정복, 모하치 전투, 부더 입성 등 16세기 헝가리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여러 승리가 기록된 날이었다. 이날 1천 시파히와 2천 예니체리 부대가 포위망을 공격하였으나 소수만이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 2천의 에르데이 공국 병력이 포위망에 합류하자 샤를은 포위를 풀고 원군과 전면전에 나선다는 소식을 퍼뜨린 후, 9월 2일 아침 북을 울리며 쉴레이만 파샤의 군대와 대치하였다.[12] 얼마후 참호로 돌아간 연합군은 오후 3시, 6문의 대포를 3차례 발사하는 신호탄과 함께 부더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샤를은 6천 병력과 북쪽 성벽을 공격하였고, 헝가리 병사들이 성벽에 깃발을 내걸자 사기가 고취되었다.
포위군이 원군과 대치한다 여기고 휴식을 취하던 수비대는 뒤늦게 낮잠에서 일어나 방벽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전황은 기운 상태였다. 한편 남쪽 성벽에서는 3천의 바이에른 부대가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지휘 하에 공격하였으나 북쪽 성벽과 달리 수비대의 맹렬한 저항에 막혔다. 그러던 오후 5시 무렵 북쪽 성벽의 빈 성문이 돌파되었다. 연합군은 시내로 몰려들어왔고, 부더의 지휘관 압둘라흐만 파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시내 중심부의 헤스 언드라시 광장에서 최후의 돌격을 가한 후 전사하였다. 이로써 145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부더 지배가 종식되었다. 부더는 연합군에게 3일간 약탈되었고, 전리품에 눈이 먼 용병들은 시내의 모든 집에 방화하였다. 주민들은 폭력에 노출되었고, 특히 오스만 측에 협조하여 도시를 방어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유대인 구역이 전소되고 시나고그의 문서들은 불태워졌다. 당대의 사가는 1천 탈러를 지불한 수백의 유대인만이 살아남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의 파도바 등 유럽 각지에선 반유대 폭동이 발발하였다. 대대적으로 파괴된 부더의 재건은 한세기가 걸렸고, 포위군은 4만의 인명 손실을 내었다.
점령군이 살인과 약탈에 치중하던 틈에 쉴레이만 파샤는 벨그라드를 향해 철수하였고, 샤를은 약탈이 끝난 6일에야 6천 헝가리 기병을 보내 추격하게 하였지만 별 타격을 입히진 못하였다. 다만 여러 전선의 전쟁에 시달리던 오스만 제국은 제한된 병력을 소수의 거점 도시에 집중시키는 패착을 저질렀고, 헝가리-제국군은 방치된 성채들을 점령하며 도시들을 봉쇄한 결과 어렵지 않게 수비대의 항복을 이끌어내었다.
이후 1687년 12월 17일에 제국군이 에으리를 점령했고 6백여 튀르크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3.3. 6차 베네치아-오스만 (모레아) 전쟁 전반
15년 전 크레타의 상실을 기억하던 베네치아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대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신성 동맹에 가입하였고 함대를 출동시켰다. 첫 번째 목표는 레프카다 섬이었다. 16일 동안의 포위 공격으로 함락시키는데 성공한 후, 오스만 제국의 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고 프레베자와 보니차 만을 점령한다.그 후, 하노버 선제후국과 작센 선제후국의 용병을 고용한 후 코르푸에 집결한 뒤 모레아 정복을 시작한다. 이를 들은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685년 6월 21일 베네치아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진격했고 베네치아의 옛 요새 코로니에 상륙했다. 그리고 연이어 요새를 함락한 베네치아군은 이오니아 제도로 향했으나 겨울에 불어닥친 질병으로 전투는 지속되지 못하고 휴전 상태에 들어간다. 이듬해 3월초 베네치아군은 메세니아만을 공격했다.
옛 나바리노 성을 함락한 베네치아군은 이스마일 파샤의 군대를 격퇴시켜 코린트로 후퇴시키고 다시 병력을 모은 뒤 공격했지만 모르시니의 군대에 의해 격파당해 코린트는 함락당했다. 그러나 9년 간의 전쟁으로 신병과 용병이 탈영을 해 당시 진격은 늦춰졌다. 그러는 사이 메흐메트 파샤는 파트라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쾨니히스마르크의 공격에 파트라는 함락당했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마지막 오스만군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후 아테네로 입성했다. 그 와중에 베네치아 군이 아테네의 오스만 수비군과 싸우며 오스만 측의 화약고였던 파르테논 신전에 대포를 명중시켜 당시까지만 해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형을 상당히 잘 유지하고 있던 2000년된 신전을 파괴한 일이 있었다.
아테네를 빼앗긴 오스만 제국군은 테베에 군대를 집결 시키고 아테네 교외의 아티카 반도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그곳의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함께 싸울 의사가 없어서 아테네에서 후퇴해 네그로폰테를 공격했다. 네그레폰테에 상륙한 베네치아군은 요새를 포위한후 공격을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질병이 퍼져서 하노버와 헤센 용병은 그리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르시니는 베네치아로 돌아가고 새로운 사령관으로 지올라노 카르나로가 부임했다.
카르나로는 그리스보다는 달마티아 지역 공격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작은 시골도시 신지를 공격해고 크로아티아의 지역 민병대를 모집해 공격하지만 대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헤르체그노비 요새가 함락당해 오스만 제국군은 저항을 포기하였고, 라구사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3.4. 5차 폴란드-오스만 전쟁 (우크라이나 전역)
빈을 구원한 후 얀 3세 소비에스키는 1676년 상실했던 포돌레 수복에 나섰다. 그러나 세임(의회)이 계속해서 재정 지원을 거부해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몰다비아 공국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심신이 피폐해진 얀 소비에스키는 바르샤바 남부 근교의 빌라누프 궁전에서 칩거하다 1696년 사망했다. 그러나 포돌레 자체는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폴란드 영토로 돌아왔다.3.5.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한편, 오스만 제국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파견할 정예군을 파견할 준비가 끝났을 무렵, 루스 차르국이 전쟁에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참전하였다는 소식이 코스탄티니예에 닿았다.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바흐치사라이 조약에서 드네프르강을 국경으로 정하며 20년간의 평화를 약속한 바 있어 크림 방면은 안심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동맹국인 크림 칸국이 위험에 처한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오스만 조정은 정예군의 대부분을 아자크로 파견할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 반격 부대의 대부분이 동방으로 빠지면서 오스트리아 군대는 더욱 수월하게 헝가리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까지 진격했다.
3.6. 2차 모하치 전투 (1687년)
1차 모하치 전투 (1526년)의 배로 갚아주다
오스만 제국의 영구적인 헝가리 상실,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지배 시작이 된 전투로 오스만 제국은 강화협상을 부탁했지만 레오폴트 1세는 여세를 몰아 진격을 결정했다. 1687년 로렌 공작은 약 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강의 지류 드라바강의 도시 외세크로 향했다. 로렌 공작은 드라바강 유역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오스만 군은 도발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지역이 전쟁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로렌 공작은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였지만 이를 본 사리 쉴레이만 파샤는 지나가고 있는 제국군을 공격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 기습작전은 실패로 끝이났고 오히려 반격을 당해 오스트리아의 좌익만 공격을 감행했지만 놀랍게도 오스만 제국군은 대패를 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때 10,000여명이 전사하는 괴멸적 피해를 당했다.
결정적으로 패배한 후 메흐메트 4세는 책임을 지고 하야하였다. 그리고 파디샤로 즉위한 그의 이복 동생 쉴레이만 2세는 인도의 무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아우랑제브 역시 마라타 동맹과의 데칸 전쟁을 치르고 있던지라 지원군을 파견할 수 없는 상태라 결국 지원은 불발 된다.[13]
3.7. 벨그라드 전투 (1687년)
제1차 모하치 전투의 복수에 성공한 오스트리아는 여세를 몰아 벨그라드로 향한다. 오스만 제국군은 사바강에서 제국군을 막으려 하였지만 제국군은 이미 강을 건넌 뒤였던지라 제국군이 후속 병력을 위해 부교를 건설 하려 하는 걸 막고자 오스만 제국군 포병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포병진지 기습 공격으로 무산되었고 벨그라드는 포위당했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군 병력에 압도당한 오스만 제국군은 후퇴했고 결국 벨그라드는 함락되었다.3.8. 슬렌카멘 전투 (1691년)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은 다시 남진을 감행하였다. 오스트리아, 오스만 양군은 도나우강의 지류 티서강을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의 현재 실력으로는 판노니아 평원의 광활한 대지에 오랜 전쟁을 벌일 수 없었고 오히려 제국군은 오스만 제국군의 보급마차를 공격하여 보급을 차단하고 총사령관인 쾨프륄뤼 파질 무스타파 파샤가 전사하자 후퇴하였다.그러나 프랑스가 일으킨 대동맹 전쟁(9년 전쟁)의 영향으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에르데이 점령만으로 만족을 했다.
3.9. 아자크 함락 (1695년)
루스 차르국의 장군 바실리 골로친은 약 9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페레코프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강행군이라 군사들과 군마가 지쳐서 페레코프에서 130km 떨어진 곳에 진지와 요새를 구축한 후 방비에 들어갔다. 이를 본 크림 타타르족은 공격을 감행했고 러시아군은 선전하였지만 식수가 없어서 고전해 골리친은 후퇴했다. 이는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무너진 결정적 원인이었다.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다시 크림반도를 향해 진군을 명령하였다. 이번의 목표는 크림 반도로 가는 길목에있는 항구도시 아자크였다. 카자크 기병대로 구성된 3만명의 군대는 첫번째 아자크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두번째 공격 때는 오스만 함대를 막기 위해 함대를 건설해 돈강 유역에 나타난 오스만 제국 함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아자크를 포위해 1695년 7월 19일 아자크는 함락되었다.
3.10. 6차 베네치아-오스만 (모레아) 전쟁 후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신경을 쓰자 오스만 제국군은 반격을 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군은 그리스 민병대를 모집해 이를 타개하려 했지만 이 지역은 오히려 독립 무장세력의 안식처가 되고 베네치아군의 달마티아인과 알바니아인이 탈영해 이 독립세력에 합류했다.한편 그리스에 사는 현지 유력자들은 오스만 제국군에 입대를 요구해 많은 그리스인들은 모집에 응하거나 베네치아군을 탈영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를 몰아 레판토를 공격하였지만 실패로 끝나고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에 군대를 상륙시켜 발로나와 카니니 요새를 공격해 함락시켰지만 1691년 3월 14일 오스만 제국군은 발로나 요새를 다시 되찾은 후 현지에서 학살을 벌이자 베네치아군과 현지인들은 코르푸로 후퇴했다.
이렇게 베네치아가 다시 밀리기 시작하자 베네치아로 복귀한 상태였던 모르시니가 다시 전선에 나서게 되고 대치 상황은 연이어 일어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전이 되어 목표였던 베네치아군은 15세기 중반에 베네치아 령이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를 회복하였고 더 나아가 16세기까지 점유하던 에게 해의 섬들을 재정복,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한세기 반만에 회복하였다.
3.11. 젠타 전투 (1697년)
오스만 제국의 전의를 완전히 꺾은 대회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신경 쓴 시간에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2세는 군제개혁을 감행한 후 1696년 원정에 나서 제국군을 두 차례나 물리쳤다. 그 후 1697년 다시 헝가리를 탈환하기 위해 헝가리의 도시 세게드로 향했다. 오스트리아의 젊은 장군 사부아 공자 외젠은 7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강 유역에 주둔해 있었다.
한편, 오스만군 기병대 사령관 퇴쾨이 임레는 티텔성을 점령한 후 강 유역을 따라 진군했지만 행선지를 눈치챈 오스트리아가 티서강을 건너고 있는 오스만군을 후방에서 기습 공격한 후 반달 모양으로 에워쌌다.
파디샤의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수천 명이 티서강에 빠져 익사했다. 이 참담한 광경을 본 무스타파 2세는 후퇴를 명령한 후 퇴각하였다. 그리고 제국군은 파디샤의 막대한 보물과 인장을 노획한 후 신성동맹의 수장 레오폴트 1세에게 진상하였다.
4. 종전: 카를로비츠 조약
자세한 내용은 카를로비츠 조약 문서 참고하십시오.5. 영향
5.1. 오스만 제국의 쇠퇴
대 튀르크 전쟁의 파급력은 강했지만 의외로 이 전쟁 한번으로 오스만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오스만 지도부는 당장 대유럽 최전선이 부더에서 벨그라드까지 내려오기는 했지만, 애초에 헝가리까지 점유하는 건 무리였으며 "살다보면 질 수도 있는거지" 정도로 치부하고 근본적으로 오스만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경쟁력에서 아예 밀리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않았다.대 튀르크 전쟁 직후인 18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은 튤립 시대라는 문화적 중흥기를 맞이하였고, 이후 18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적국과 1대1로 싸웠을 때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부아 공자 외젠이 지휘한 1716년 - 1718년의 전쟁 제외)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4] 베네치아에게 뺏긴 모레아, 러시아(루스 차르국)에게 뺏긴 아자크를 모두 15년도 안되어 회수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뺏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일부도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1739년의 벨그라드 조약에서 회복하였다.
이후 18세기 후반까지 오스만-유럽 전선은 사바강 - 도나우강 - 카르파티아산맥 - 드네스트르강 - 남부 우크라이나 선으로 안정화되었다. 또 유럽 국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인도까지 평정한 전쟁기계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 나디르 샤의 침공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1768~1774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와, 도나우강 하구, 캅카스 일대에서 오스만군을 박살냈고 바다에서는 지브롤터를 돌아온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격파한 1770년의 체슈메 해전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해군이 오스만 제국의 앞바다인 동지중해를 헤집고 다니는 등 이전의 전쟁들과 차원이 다른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결국 굴욕적인 내용의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의 제1번국인 크림 칸국에게 허구헌날 노예사냥을 당하는 신세였던 러시아가 급격하게 성장해 자신들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기고 그 제1번국을 먹어치워 그동안 오스만의 호수였던 흑해에서 오스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현실에 오스만 지도부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계기로 쇠퇴 중인 오스만의 현실에 전국가적인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개혁을 통해 제국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부던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무색하게 19세기~20세기 초에 걸쳐 오스만 제국은 거의 일방적으로 무너지며 '유럽의 환자'로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15]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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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피해가 컸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은 신성 로마 제국 권역이기도 했던 보헤미아 왕국을 제외하면 피해 없이 전쟁을 마무리했다.[2] 다만 3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에서 에스테르곰을 함락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의 반란으로 지트바토로크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오스만 황제와 동격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연공 납부가 중지되었다.[3] 현재의 슬로바키아.[4] 북유럽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웨덴, 심지어 아이슬란드까지..)[5] 대홍수 이후 쇠퇴하던 중이었다.[6] 다만 얀 3세 소비에스키가 헤트만 시절 지휘한 호틴 전투에서 호되게 패하긴 했다.[7] 그의 손자 프랑수아 에티엔은 나중에 레오폴트 1세의 손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한다.[8] 현재의 슬로바키아 슈투로보(Štúrovo).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루도비트 슈투르의 이름을 따 1948년 개칭되었다.[9] 여기서 제국군이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명령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들이 파견하여 소집된 병력을 의미한다. 독일어로는 Reichsarmee.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 점점 영방국가화가 가속되며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이후부터는 거의 오스트리아군과 동일시되었다.[10] 그러나 이듬해 그는 파디샤의 명으로 교살되었고, 그의 후임인 압둘라흐만 파샤는 부더의 마지막 오스만 총독이 되었다.[11] 이는 수십년 전 칸디아 공방전에서 베네치아 수비대가 썼던 방법이었다.[12] 사실 포위군 측 첩자가 북소리를 통해 수비대에게 다음날 포위군이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를 알려주었기에 수비대는 효과적으로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13] 사실 무굴 제국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아우랑제브였지만, 마라타 동맹의 교활한 게릴라전에 휘말려 제대로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비만 소모했다가 결국 무굴 제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몰아가고 본인도 후회 끝에 죽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라타 동맹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14] 물론 이는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의 형편없는 졸전 때문이었다.[15] 그러나 객관적 측면에서 보면 오스만은 환자까진 아니었다. 그렇기에 현재는 저 표현은 오스만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도발 의사도 섞여 있었다고 보고 있다. 저 말을 처음 했던 니콜라이 1세도 크림 전쟁에서 털리며 음독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