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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609년~1618년 | |
| 장소 |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 |
| 교전국 | 교전국1 | 교전국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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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 결과 | 폴란드-리투아니아 승리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 세베리아[1] 일대 차지 | |
1. 개요
1609년부터 1618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루스 차르국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폴란드의 유력 인사들은 처음에는 가짜 드미트리 1세와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지원한다는 구실로 러시아의 내분에 간섭하였다.2. 배경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러시아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정통성이 있던 후계자인 이반 4세의 아들 이반 황태자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은 이후 그의 아들들은 전부 요절하였다. 더구나 이반 4세 사후 새 황제가 된 표도르 1세도 후계를 두지 못한 채 요절했으며 방계로 남아 있던 이반 4세의 사촌과 그 가족들도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오래 전에 죽은 상황이었다. 즉,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1598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황위에 오르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류리크 왕조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반 4세의 막내 아들인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손칼을 가지고 놀다가 간질 발작 때문에 목에 칼이 찔려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고가 보리스 고두노프가 조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이는 그의 정통성을 위협하였다.이 때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인 즉, 가짜 드미트리 1세가 등장하였다. 극심한 흉년 때문에 보리스 고두노프는 인기가 없었고 이는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인기를 드높였다. 이 상황에서 1605년 4월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망하자 크로미에 주둔하던 군대는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인 표도르 2세는 쿠데타로 퇴위당하고 가짜 드미트리가 차르에 즉위하였다.[2] 7월 18일, 이반 4세의 미망인이자 진짜 차르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황후는 가짜 드미트리를 자신의 사생아로 인정했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 1세가 데려온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내부를 잠식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죽이고, 그와 함께 모스크바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살해당하거나 체포되어 다른 도시로 흩어졌다.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죽은 후 차르가 된 바실리 4세는 러시아 내에서 인기가 없고 권력이 취약했으며,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축출하고 모스크바에서 폴란드 병사 수백 명을 살해한 인물로 인해 반(反)폴란드적 통치자로 인식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내전은 계속되었고, 1607년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가짜 드미트리 2세가 등장해 다시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여러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과 용병 집단, 특히 약탈로 악명 높은 리소프치치 용병들이 그를 지원하면서 러시아 각지에서 혼란과 파괴가 확산되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폴란드군과 코사크의 도움으로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608년 모스크바 근교 투시노에 거대한 군영을 설치해 세력을 급속히 확대했고, 북동부 여러 도시의 충성을 얻었다. 그러나 약탈과 무질서로 민심이 악화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러시아 내전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하면서 그의 우세는 점차 약화되었다.
1608년 말부터 1609년 초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국경에 집결했고, 스몰렌스크 일대에 대한 체계적인 약탈과 침공이 시작되었으며, 알렉산드르 곤세프스키가 주도한 군사 행동은 국경 지역을 장악해 왕의 군대가 스몰렌스크로 접근하는 길을 열고 러시아군의 연락선을 위협했다. 바르샤바에서 열린 1609년 세임에서 지그문트 3세는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러시아 차르로 세우자는 계획을 제시했으나 내부 이견으로 결론을 내지 못했고, 이후 러시아가 스웨덴과 동맹을 맺자 이를 계기로 전쟁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었다. 1609년 봄 연방의 귀족과 용병, 외국 병력이 스몰렌스크 방향으로 집결했고, 국경 지역에서는 협박과 회유를 병행한 선동이 이루어졌으며, 러시아 측은 농민 동원과 방어진 구축을 시도했으나 지방 귀족들의 소극적 태도와 내전 장기화로 효과적인 방어를 하지 못했다. 결국 1609년 여름 무렵 국왕이 직접 스몰렌스크로 진군할 것이라는 정보가 확산되면서 미하일 셰인 총독은 본격적인 도시 방어 준비에 착수했고, 이는 곧 폴란드-러시아 전쟁의 직접적 개전 단계로 이어졌다.
3. 전개
3.1. 전반기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곧장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당시 러시아 내부는 혼란 그 자체여서 폴란드의 침략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1609년 9월 중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스몰렌스크에 도착하였다. 보병과 중포가 부족해 초기에는 도시의 조기 항복을 기대했을 뿐 본격적인 공성 준비는 미흡했다. 그래서 지그문트 3세는 세인에게 항복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전령에게 그가 다시 비슷한 제안을 한다면 "드니프로 강물을 마시게 해 줄 것"(즉, 익사시킬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항복 의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폴란드군의 첫 번째 강습은 성문 방어 시설과 야간 공격 실패로 큰 손실만 남긴 채 좌절되었다. 이후 폴란드군은 병력을 증강해 2만 명 이상으로 늘렸으나, 지하 갱도전과 포격에서도 수비군의 대응에 고전했으며, 스몰렌스크 수비대는 화력 우세와 적극적인 출격으로 적의 진지를 교란하고 방어 능력을 더욱 강화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바실리 4세가 축출되고 권력은 7인 귀족들이 장악했다. 이들은 셰인에게 항복을 명령했다, 하지만 셰인은 독자적으로 명령을 거부했고, 시민들도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이에 격분한 지그문트 3세는 사흘 안에 도시를 항복하지 않으면 사형에 쳐한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하지만 셰인은 최후 통첩을 거절했고 지그문트 3세는 대포를 더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대포가 오자 1610년 11월 21일, 폴란드군은 다시 성벽 아래를 무너뜨려 새로운 틈을 만들었다. 이후 세 차례의 유혈 공격이 더 이어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덕분에 스몰렌스크 주민들은 두 번째 겨울의 포위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611년 봄이 되자 요새 수비대는 극도로 줄어들었고, 이를 눈치 챈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스몰렌스크를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수비대는 더 이상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스몰렌스크는 함락되었다.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코사크인, 그리고 용병들은 스몰렌스크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시민들은 모노마흐 대성당 에 숨었는데, 대성당 지하에는 대량의 화약이 비축되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대성당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을 때, 시민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벨랴니친은 화약을 폭파시켜 대성당과 함께 많은 침략자들을 함께 파괴했다. 이 포위전을 지휘한 셰인은 포로로 잡혔고, 8년 간 폴란드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3]
1610년 6월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가짜 드미트리 2세의 포위에서 모스크바를 해방한 뒤 스몰렌스크 구원을 위해 진군했고, 이에 지그문트 3세는 공성을 유지한 채 주키에프스키가 이끄는 부대를 파견했다. 러시아군 사령관 드미트리 슈이스키는 목책 요새로 기병의 위력을 무력화하는 기존 전술을 시도했으나, 전위 부대가 차례보-자이미슈체에서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7월 4일 새벽 클루시노에서 러시아·스웨덴 주력군과 주키에프스키의 소수 정예군이 맞붙었다. 기습과 연속 돌격으로 시작된 전투에서 러시아군 대부분은 초반에 붕괴했고, 스웨덴 용병들은 미지급 급료에 대한 불만으로 동요하다가 결국 상당수가 폴란드 측과 협상해 이탈하거나 중립을 선언했다. 지휘 체계가 붕괴된 가운데 슈이스키는 수동적으로 행동하다가 패주했고, 러시아군은 대규모 추격을 당하며 병참, 포병, 군기와 재물을 모두 상실했다. 이로써 수적 열세였던 주키에프스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클루시노 전투의 참패는 러시아 측의 군사적·정치적 붕괴를 가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키에프스키와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갈등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친폴란드, 반폴란드, 스웨덴, 그리고 국내 보야르 파벌들이 상황을 일시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 끝에 친폴란드 파벌이 우위를 점했고, 폴란드군은 10월 8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할 수 있었다. 보야르들은 폴란드군에게 모스크바의 성문을 열어주고 주키에프스키에게 무정부 상태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한 조건으로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가 새로운 러시아의 차르가 되는 것을 조건으로 넣었고, 보야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정교회로 개종한다면 브와디스와프가 루스 차르국의 차르로 등극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3.2. 후반기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아들의 정교회 개종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러시아의 차르가 되기를 원했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 보야르 간의 합의는 붕괴되었고, 브와디스와프의 즉위는 실현되지 못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도주 후 피살되었고, 모스크바에는 소규모 폴란드 수비대만이 고립된 채 남았다. 1611년 모스크바에서 반(反)폴란드 봉기가 일어나 크렘린이 포위되었고, 총대주교 헤르모겐은 저항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거부해 옥사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쿠즈마 미닌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제2의 국민의용군을 조직했고, 1612년 폴란드 구원군의 시도는 실패했으며, 결국 크렘린의 폴란드 수비대는 굶주림 끝에 항복해 모스크바는 러시아 손에 탈환되었다.모스크바가 탈환된 후 미하일 1세가 새로운 차르로 등극했다. 러시아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손아귀에 있던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초기에는 기아와 동요 소식,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차단 실패 등으로 성공이 예상되었으나, 1614년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봉쇄를 돌파해 보급과 증원을 스몰렌스크에 들이면서 기회가 상실되었다. 이후 소규모 교전과 협상이 이어졌고, 1616년 초에는 러시아군이 출격한 적 부대를 격파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봉쇄는 느슨했고 내부 이탈과 지휘 분열로 포위군의 처지는 악화되었다. 1616년 말 알렉산드르 곤셉스키가 적극 공세에 나서 보급로를 차단하고 성내에 보급을 성공시키자 포위는 결정적으로 흔들렸고, 1617년 증원군 편성에도 불구하고 지연과 적 증원, 브와디스와프의 원정 준비 소식, 자체 전력 약화로 러시아군은 결국 스몰렌스크 포위를 해제하고 벨라야 방면으로 철수했다.
러시아군이 철수하자 지그문트 3세는 다시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은 정통 차르 브와디스와프 바사가 찬탈자 로마노프 왕조에 맞서 일으킨 반란으로 포장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1617년 봄 원정을 시작해 가을에 스몰렌스크에 도착했고, 도로고부주와 비야즈마가 배신과 동요 속에 거의 저항 없이 넘어가면서 러시아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선봉은 모자이스크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급료 문제와 혹한으로 진격이 지체되어 겨울 동안 공세가 둔화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포자르스키, 리코프, 체르카스키의 세 군을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1618년 봄 증원된 브와디스와프와 호트케비치는 모자이스크를 주공 방향으로 삼아 격전을 벌였다. 한 달 넘는 전투 끝에 병력 열세와 포위 위험을 우려한 러시아군은 모자이스크를 포기하고 후퇴했으며, 소수 수비대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도시 함락에는 이르지 못한 채 1618년 9월 브와디스와프군은 모자이스크를 우회해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1618년 가을 브와디스와프를 옹립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는 모자이스크에서 러시아 주력군이 후퇴한 뒤 모스크바로 진군하여 9월 말 수도 외곽에 도달했고, 러시아 측은 드미트리 포자르스키와 보리스 리코프 등의 지휘 아래 급히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백성 동원과 성벽 보강, 포병 배치를 서둘렀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도시 내부에서 반란이나 문 개방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협상과 심리전을 병행했으나, 러시아 정부와 시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수도 내 질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0월 10일(구력) 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자모스크보레치예와 아르바트 방면에서 기습적인 야간 강습을 감행해 성문과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준비된 러시아 수비군과 시민 민병대의 완강한 저항, 포병 사격과 역습으로 인해 돌파에 실패하고 큰 손실을 입었다. 공략 실패 이후 브와디스와프 진영은 더 이상의 대규모 강습이 어렵다고 판단해 포위를 유지하며 압박하는 전략으로 전환했지만 보급 부족과 군 내부의 불만, 추위의 심화로 장기 포위 역시 지속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한편 러시아 측도 전면적인 반격에 나설 여력이 없었으나 수도 방어에는 성공했고, 결국 양측은 군사적 결판이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어 협상이 본격화되었으며 그 결과 1618년 말 데울리노 휴전으로 이어져 모스크바 공성은 실패로 끝났다.
4. 결과
어려운 군사적 상황으로 인해 모스크바 당국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편, 일부 코사크 부대는 모스크바 북쪽과 북서쪽 도시들을 계속 공격하여 야로슬라블과 볼로그다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모스크바 시민들의 경제를 위협했다. 코사크의 습격에 러시아는 폴란드에 저자세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정부 역시 장기간의 혼란과 외세 침입으로 국가가 극도로 피폐해져 외교적 선택지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1618년 데울리노에서 휴전이 체결되었고, 러시아는 스몰렌스크와 체르니고프를 포함한 광범한 서부·남서부 영토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할양하는 큰 대가를 치렀으며, 그 대신 일부 소규모 요새만을 돌려받았다. 이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고, 러시아는 15세기 말 수준의 국경으로 후퇴했다.손실은 막대했지만 데울리노 휴전은 장기간의 내전과 외침으로 이어진 동란 시대를 실질적으로 종결시키며 러시아 국가가 정상적인 재건 단계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전쟁에 참여한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보수를 받고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