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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06년 11월 11일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조약은 오스만어와 헝가리어로 적혔다.
2. 언어별 표기
독일어 | Frieden von Zsitvatorok |
헝가리어 | Zsitvatoroki béke |
튀르키예어 | Zitvatorok Antlaşması |
3. 상세
1591년부터 크로아티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에서 15년간 지속된 양국간의 전쟁을 종결하는 조약이다. 전쟁은 초반에 소규모 회전에서 합스부르크 군대가 선전하다가 1526년 모하치 전투 이래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의 최대의 대규모 회전이었던 1596년 케레츠테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고,[1] 오히려 합스부르크군의 신형 무기의 위력을 체감한 오스만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주저했고, 전쟁에 흥미를 잃은 메흐메트 3세가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가면서 지지부진해졌다. 한편 합스부르크군은 대규모 회전 대신 요새 탈환 중심의 중규모 전투로 전술을 바꾸었고 이후 전쟁은 10년간 지리하게 지속되었다. 결국 에르데이 공국에서 보치커이 이슈트반의 주도로 반합스부르크 반란이 일어나자 양국은 종전 협상을 시작했다.합스부르크 측은 황제 루돌프 2세의 동생인 마티아스가 전권을 부여받아 협상에 임했고, 오스만 측은 파디샤 아흐메트 1세가 직접 협상에 임했다. 조약이 체결된 양국간의 국경마을은 현재 슬로바키아 서남부 라드반 나트 두나욤(Radvaň nad Dunajom)에 위치해 있다.
합스부르크 측은 (서부) 헝가리 왕위에 대한 3만 두카트의 연공 대신 20만 두카트의 배상금을 일시불로 내며 조공국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측에서도 합스부르크 황제를 '파디샤'로 칭하며 1547년 아드리아노플 조약 이후 60여년만에 신성 로마 제국을 동등한 위치로 대하게 되었으니, 합스부르크 측은 명분을 챙긴 셈이 되었다.
에르데이 반란으로 인해 종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합스부르크의 판정승으로 평가되는 조약이다. 파디샤가 친히 직접 국경에서 조약을 체결한 상황 자체가 이 전쟁이 최소한 오스만 제국의 승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스만은 전쟁에서 승전했을 경우 상대국 군주가 코스탄티니예로 와서 항복식을 치르도록 해왔다. 또 그동안 이 세상에 단 한명의 파디샤(황제)만이 존재해 왔던 오스만은 처음으로 또 다른 황제의 존재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다만 헝가리 전선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조금 늘어났다. 북부의 에게르, 서부의 너지카니저가 오스만 헝가리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슬로바키아 남서부 커셔 일대까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에르데이 공국이 차지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수월히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은 1663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다. #
[1] 회전에서 참패하고 도주한 오스만군의 야영지를 합스부르크군이 약탈하던 중 오스만군이 귀환하여 전리품에 정신이 팔린 합스부르크군을 기습했다. 이때 합스부르크군이 파디샤의 천막을 약탈하려하자 파디샤의 하인과 요리사들이 결사항전하여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