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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바르바리 전쟁 حرب طرابلس First Barbary War | |
기간 | |
1801년 5월 10일~1805년 6월 10일 | |
장소 | |
지중해, 리비아 지역 | |
원인 | |
바르바리 해적의 미국 상선 약탈 바르바리 해적의 트리폴리 조약 일방적 파기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미국 스웨덴 시칠리아 왕국 |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 모로코 |
지휘관 | |
토머스 제퍼슨 리차드 모리스 윌리엄 이튼 에드워드 프레블 구스타프 4세 아돌프 루돌프 세데르스트룀 | 유수프 카라만르 하산 베이 술레이만 빈 모하메드 |
전력 | |
500명[1] 프리깃 12척 스쿠너 4척 브릭 3척 케치 1척 | 4,000명 함대 규모 불명 |
결과 | |
미국의 승리 평화조약 체결 | |
영향 | |
바르바리 해적의 미국 및 유럽인 포로 500명 석방 | |
피해규모 | |
35명 사망 64명 부상 | 800명 사망 1,200명 부상 |
파일:external/i1.wp.com/USS-Enterprise-barbary-war.jpg |
트리폴리 사략선과 교전 중인 USS 엔터프라이즈(1801년) |
[clearfix]
1. 개요
1801년에서 1805년까지 벌어진 미국과 바르바리 해적간의 전쟁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외전쟁이자 미 해군의 첫 해외원정으로 기록되어 있다.[2]2. 배경
18세기에서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지중해 일대에는 여전히 바르바리 해적이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은 유럽의 상선들을 습격해 납치한 뒤, 석방의 대가로 몸값을 요구했다.[3] 이들은 단순히 상선만 터는 수준이 아니라, 지브롤터 해협 너머 북해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는 물론이며 심지어 대서양을 횡단하여 북아메리카의 해안가 마을을 틈만 나면 침략해 주민들을 납치하는 글로벌 해적들이었다.미국이 독립하기 전에는 13개 식민지 선박들도 영국 국적선으로 인정을 받아서 바르바리 해적들의 납치를 면할수 있었지만, 미국이 독립한 후로 바르바리 해적들은 신생국 미국의 국력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미국 선박들을 납치해 몸값을 뜯어냈다.[4] 당시 미국은 신생 국가로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라 제때 몸값을 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1796년 바르바리 해적과 트리폴리 조약을 맺어 미국 정부와 바르바리 세력간의 우호 관계를 확립하는 대가로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보장을 받았다. 하지만 바르바리 해적은 이후에도 조약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미국 선박들을 나포했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미국 정부는 윌리엄 베인브리지를 사절로 보내 요구 금액에 겨우 모자라게 맞춘 돈을 들려 바르바리 해적을 통제하는 지중해 파샤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파샤들은 종주국인 이스탄불에 가서 협상하라는 핑계로 회담을 피했다. 결국 베이브리지는 이스탄불까지 가서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오스만 제국이 입항을 거부한 탓에 결국 성조기를 내리고 오스만 제국 깃발을 달아 입항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협상이 통하지 않자, 미국은 자국민 안보에 위협을 느껴 해군의 창설 및 군비 증강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게 창설된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해 상선들을 보호하고 해적과의 협상을 거부하는 강경책을 피자 바르바리 해적들도 "미국 선박은 납치하여도 돈을 안 준다"라면서 잡아둔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미국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던 때에, 1801년 5월 14일,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의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Yusuf Karamanlı)[5]가 트리폴리에 있던 미국 영사관의 성조기가 걸린 깃대를 칼로 베어서 성조기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침내 분노한 미국은 이 사건을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 간주하며 트리폴리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
3. 진행
그러던 6월 1일, 리처드 데일 준제독이 인솔하는 4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미합중국 해군 함대가 지브롤터를 통과해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들의 본래 임무는 지중해의 미국 상선 보호였지만 트리폴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통보해 1차 바르바리 전쟁이 시작되었다.갑작스레 전쟁이 시작되자, 미 해군 함대는 트리폴리를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고 그 앞바다에 진주하여 해상 봉쇄에 치중했다. 트리폴리의 바르바리 해적 세력이 전선 24척에 2만 5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정면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8월 1일에는 미 해군 엔터프라이즈호와 트리폴리 바르바리 해적의 폴라카선이 교전을 벌였는데, 엔터프라이즈호의 포격으로 해적 폴라카선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그 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805년에는 미합중국 육군의 윌리엄 이튼(William Eaton) 장군이 이끄는 미 해병대와 현지 용병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가 리비아 북동부 도시 다르나(Darnah)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 측은 35명이 전사하고 64명이 부상을 당한 데 비해, 바르바리 해적단은 80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부상을 입었다.
4. 결과
이 전투로 인해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인과 유럽인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을 조인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바르바리 해적의 무력이 완전히 꺾이진 않았기에, 미국이 미영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바르바리 해적들은 다시 미국 선박을 공격했다. 이에 겐트 조약으로 한숨 돌린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다시 지중해에 미 해군을 파견하여(2차 바르바리 전쟁)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이 토벌로 큰 피해를 입어 다시는 미국 선박을 건드리지 못했다.미 해병대의 군가 Marines' Hymn#에 몬테수마 궁전에서 트리폴리 해변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the shores of Tripoli)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바로 이 전쟁 때문이다. 몬테수마는 미국-멕시코 전쟁, 트리폴리는 바르바리 전쟁을 말하는것.
전투에서 활약한 미 해병대원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이 휘두르는 칼날로부터 목을 보호하기 위해 질긴 가죽으로 만든 칼라가 달린 제복을 입었는데, 미군 해병대를 가리켜 부르는 '가죽 목(Leatherneck)'이란 별칭은 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유래했다.[6]
[1] 데르나 전투 당시 참전한 미 해병대원들과 용병들[2] 물론, 이 당시의 미국은 유럽의 강대국들로부터 땅만 무식하게 큰 약소국 취급을 받았고, 실제 국력도 별 볼 일없는 수준이었다. 독립 당시 인구가 250-300만 수준인데, 동시대 조선 인구가 1천 500만에 달했을 정도다.[3] 쉽게 말해서 21세기의 소말리아 해적하고 같다. 다만 영국 국적선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영국 국적선을 건드렸다가는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이 출동해 그야말로 초토화를 시켜줬기 때문에 악명 높은 바르바리 해적들도 영국 국적선은 건드리지 않았다.[4] 당연히 영국 해군은 이러한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5] 알바니아 출신의 오스만 제국의 세력가로 트리폴리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군주다.[6] 도현신(2012), <15장 바르바리 해적단, 서구인들의 300년 공포>,《어메이징 세계사》, 서해문집, 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