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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잡힌 바예지트 1세와 티무르를 묘사한 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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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1402년 7월 28일 오늘날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 근처의 추부크 평원(Çubuk Ovası)에서 티무르의 티무르 제국와 바예지트 1세의 오스만 술탄국이 맞붙은 대회전. 티무르 일생의 마지막 회전이자 막 전성기에 접어든 오스만 술탄국에 일격을 가해 팽창을 반세기 이상 뒤로 밀어내며 동로마 제국의 수명도 덤으로 늘려준 전투이다. 앙고라 전투라고도 부른다.
2. 배경
1402년, 바예지트 1세는 권세의 절정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세르비아 공국과 불가리아 제2제국, 그리스 북부 일대를 완전히 제압했으며, 1394년에는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 공국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비록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가 1만 명만을 이끌고 오스만군 5만여 명[2]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북진을 저지했지만(로비네 전투), 그의 군대 역시 피해를 입었기에 헝가리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유럽 각국은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 십자군을 형성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완파당했다. 바예지트 1세는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계 공국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비록 1394년부터 시작해 8년여를 끈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아직도 가망이 없었지만 그런 것쯤은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기세등등한 상태였다.[3] 문제는, 오스만의 동쪽에는 이런 기세를 훨씬 능가하는 희대의 정복자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동쪽의 정복자 티무르는 자신의 제국을 한창 완성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마르칸트에서 처음 거병하여 30여 년 동안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워 이긴 끝에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에서 동쪽으로는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다음 목표인 서아시아 평정을 위해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그 무렵 바예지트는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 대부분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이 이르렀으니 전성기를 누리는 이슬람 세계의 두 강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된 상황에서 티무르와 바예지트, 두 사람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이미 1400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창 서아시아를 평정하고 있던 티무르에게 갈려버린 잘라이르 왕조의 술탄 아흐마드와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는 티무르를 피해 오스만으로 달아났는데 티무르가 이 둘의 송환을 요구하자 바예지트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이 있었다. 한편 아나톨리아를 평정하려는 바예지트의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튀르크계 공국들은 동쪽의 티무르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는데, 특히 바예지트가 동아나톨리아의 에르진잔을 점령하고 에르진잔의 에미르 무흐타르탄이 티무르에게 망명하자, 이에 티무르가 바예지트 1세에게 오만하고 위협적인 경고를 했는데,[4] 기세등등했던 바예지트 1세가 이를 가볍게 무시하자 티무르는 오스만이 점령한 에르진잔을 함락시켜 무흐타르탄을 복위시킨 다음 본보기로 오스만 동부의 국경도시인 시바스를 공격하여 잿더미로 만들고[5], 도시를 지키던 수비병 4천여 명을 생매장시켰다. 이에 분노한 바예지트는 티무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쪽으로 출정을 결정하였다.
한편 티무르는 시바스에서 서쪽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길로 티무르는 1400년에서 1401년에 걸쳐 시리아를 유린하였는데 시리아를 유린한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로 회군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술탄 아흐마드는 다시 이라크로 돌아왔는데 사실 사마르칸트로의 회군은 티무르의 함정이었고 티무르는 곧바로 남하하였다. 깜짝 술탄 아흐마드는 다시 오스만으로 도망쳤고 그길로 이라크를 유린한 티무르의 군대는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티무르가 신나게 이라크를 털어먹고 있을 그 사이 동쪽으로 진격한 바예지트는 시바스와 에르진잔 등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였다. 원정을 마친 티무르는 바예지트에게 술탄 아흐마드와 카라 유수프의 송환을 재차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자 두 사람은 수 차례에 걸쳐 모욕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설전을 이어간다.
1402년 초 티무르는 다시 원정을 시작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사기와[6]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7] 이 군대가 향할 곳은 드디어 그 바예지트가 다스리고 있는 오스만 술탄국이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 앞서 티무르는 캅카스의 조지아를 공격했으며 이 조지아 원정은 티무르에게 간만에 '지하드' 의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자마자 티무르는 곧바로 동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에야 말로 티무르와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 바예지트는 수년 동안 계속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마저 포기한 후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중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인 앙카라에 도착한 바예지트는 참모들과 향후 전략에 대해 논의했는데 참모들은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이곳 앙카라에서 티무르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간언했으나 바예지트는 티무르의 군대가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히 들어오기 전에 국경의 산지에서 요격하자고 주장했고 앙카라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후 동쪽 시바스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사이 티무르는 기동력이 뛰어난 자신의 군대의 강점을 이용해 카이세리로 우회하여 비밀리에 오스만 영토 안으로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는데 성공해 바예지트의 허를 제대로 찔렀고 곧바로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앙카라에 나타나 앙카라를 포위했다, 바예지트는 토카트에서 티무르의 분견대와 교전을 벌이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깜짝 놀란 바예지트는 앙카라로 황급히 회군했다. 그리고 7월 27일 앙카라를 포위하며 여유롭게 바예지트를 기다리던 티무르는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전속력으로 회군하느라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진이 빠진 오스만군을 맞이한다.
3. 전개
3.1. 양군의 전력
기세좋게 치고 올라가던 두 제국이 맞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양측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은 티무르군을 80만 내지는 120만으로, 오스만군을 40만에서 80만까지 마구마구 부풀려대고 있어 혼란은 더한다. 티무르는 이전까지 자신의 주요 원정에서 수십만 이상의 전력을 동원한 전례가 없으며[8], 바예지트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David Nicolle이라는 학자는 티무르의 군을 14만, 바예지트의 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Ilhan Niaz는 티무르군을 10만, 오스만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다.티무르군은 시리아 원정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켰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계 공국들의 전력을 끌어모아 티무르의 지휘 경력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력은 투르크-몽골 계열의 경기병이었으며, 인도 원정에서 획득한 다수의 전투 코끼리 또한 편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보병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티무르군의 좌익 지휘는 티무르의 막내 아들이자 후에 티무르 제국 3대 군주로써 명군이라 추양받는 샤 루흐, 티무르의 손자로 2대 군주에 올랐다가 샤 로흐에게 찬탈당하는 할릴 술탄이 맡았고 우익 지휘는 티무르의 아들이자 할릴 술탄의 아버지인 미란 샤[9]가 맡았다. 전위는 티무르의 손자인 아부 바크르가, 친위대는 티무르의 외손자인 술탄 후세인,[10] 중앙군은 피르 무하메드[11]가 맡았다. 물론 최고 지휘관은 티무르 자신이었다.
어느정도 병과와 군제가 정돈된 티무르군과는 달리 바예지트 1세의 오스만 군대는 여러 군대가 혼재한 혼성군에 가까웠다. 술탄 자신은 1천여의 예니체리들의 호위를 받았고[12] 군의 주력은 시파히들이었으나 튀르크계 공국들이 파견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 또한 발칸 반도의 유럽 봉신들도 다수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지휘하는 기병 5천에서 1만 명 가량이 주력이라 할 만 했다.
오스만군의 우익은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좌익은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쉴레이만이 맡았다. 이쪽도 최고 지휘관은 물론 바예지트 1세 본인이었다.
3.2. 결과
전투는 다음날인 28일 오스만군이 티무르군에 선공을 걸면서 시작되었다. 급하게 돌아와서 피로한 상태였음에도 티무르군이 이미 앙카라 일대의 물줄기를 돌려 수원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티무르군을 돌파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예지트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앙카라에서 급하게 돌아온 이상 어쩔 수 없이 앙카라에 도착한 그 날 하루를 쉬고 다음날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사이 앙카라 인근의 마을들을 약탈하느라 흩어져있던 티무르의 군대를 재규합할 시간을 줘버린 것이다. 차라리 피로한 상태였더라도 앙카라에 도착한 27일 그날 바로 티무르를 공격했으면 바예지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이때 티무르는 오스만군이 혼성 부대라는 약점을 찔러, 미리 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 출신 병사들에게 밀사를 보내 이간질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적중했다.[13] 급한 행군으로 인해 몹시 피로한 상태였던 오스만군은 그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공세를 감행하는 근성을 보였으나, 튀르크계 공국들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결국 자중지란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튀르크군 뿐만 아니라 오스만군의 중핵이었던 시파히까지 티무르군에 항복하기 시작하자 오스만군의 붕괴는 더이상 막을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티무르군은 전과확대를 기도했고, 바예지트 1세는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저항을 시도해 보았으나 티무르는 인도산 전투 코끼리 부대를 내세워 이를 단박에 짓밟았다.
이 때에 튀르크군이나 시파히보다 오히려 유럽 봉신군이 오스만 술탄국에 더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좌익을 지휘했던 쉴레이만 또한 세르비아 기사단의 구원을 받고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했다고 한다. 이들은 티무르군의 화살로도 뚫리지 않는 중갑[14] 탓에 티무르군의 진형을 여러 차례 헤집어놓는 등, 그나마 가장 크게 활약했으며, 티무르로부터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라는 칭찬까지 들었다.[15]
전황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자 바예지트 1세는 도주를 기도했으나 실패, 포로로 잡혔다. 단 하루 만에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오스만 술탄국의 주력 군대가 힘 한번 못써보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4. 영향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였던 부르사는 힘없이 문을 열었으며, 그외의 여러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남부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카라만, 잔다르[16], 아이딘, 멘테셰, 게르미얀, 사루한, 테케 등의 오스만 술탄국이 정복했던 튀르크계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이 대거 재건 되었다. 그렇게 오스만을 대위기로 몰아놓고 티무르가 동쪽으로 돌아갈 무렵, 바예지트의 자식들은 후계자 다툼에 돌입했다.[17] 이후 10여년간 오스만 술탄국은 네 명의 형제들이 하나뿐인 술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공위시대에 돌입한다.[18]바예지트 1세는 자신의 군대가 파괴되고 포로로 잡힌 것도 모자라 부르사에서 끌려온 자신의 처자식들까지 확인하고는 실의에 빠졌다. 티무르는 바예지트 1세에게 꽤 잘 대해줬다고는 하나 워낙에 기록이 엇갈려 알기 어렵다.[19] 바예지트 1세는 이듬해 8월 감옥에서 사망하는데, 병사라는 말도 있고 자결이라고도 전한다.
유럽 각국은 처음에 이 소식을 듣고는 환호에 휩싸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제노바 상인들의 경우 성벽에 몽골의 깃발을 내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직후 티무르군에 의해 아나톨리아 전역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떨었다.[20] 역설적이게도 티무르군의 만행에 의해 유럽과 오스만 술탄국은 잠시나마 화해의 분위기가 감돌았고 "똑같이 무서운 놈들이라도 아는 놈이 모르는 놈보다 그나마 낫다"는 생각에 이탈리아 선박들이 발칸 반도로 도망치려는 오스만 패잔병들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발칸 반도로 피난시키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에게 복속되었던 유럽 봉신들이 반기를 안 든 건 아니어서, 세르비아 공국 및 왈라키아 공국, 동로마 제국 등은 오스만 술탄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후계자 다툼을 벌이는 바예지트 1세의 자식들 사이에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줄타기와 눈치싸움에 돌입한다. 이후 바예지트의 넷째 아들로서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거한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의 후유증을 어느 정도 치유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로 뒤를 이은 무라트 2세가 내전의 뒷수습을 마친 뒤 다시 한 번 확장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다시 뒤를 이은 메흐메트 2세 때인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제국의 기틀을 다졌는데, 이 때는 앙카라 전투로부터 5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티무르는 한번의 전투로 승부를 마무리짓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나 티무르답게 이 지역을 온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행보는 전혀 보이지 않고 막대한 약탈품을 챙겨 사마르칸트로 귀환한다. 만약 티무르가 이때 오스만 술탄국을 정복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최소한 아나톨리아 반도는 장악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티무르는 이러한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스만에 의해 멸망당한 튀르크계 공국들을 재건시키는 선에서 일을 끝내고 사마르칸트로 돌아가 다음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이후 3년 뒤 티무르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사망한다. 이후 앙카라 전투에서 각 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티무르의 자식들과 손자들 간의 내분으로 티무르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몽골인의 관습 때문이었다. 칭기즈 칸이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듯이 티무르도 그랬던 것인데, 티무르는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 챙겨주었다. 그런데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하라' 라고 명확하게 정하고 죽은 칭기즈 칸과는 달리, 티무르는 후계자 문제를 명확히 정해놓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서로 내가 정통이네 아니네 하며 내전을 일으킨 것이 당연했다. 샤 루흐가 티무르 사후 혼란을 수습했지만 샤 루흐 사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져 붕괴해버리고 만다.
[1] 전투 국면에서 스웜 전술이 아주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고, 부지휘관들의 소개와 부대들의 구성에 대해서도 잘 나와 있다. 다만, 바예지드가 회군 후 6월 무렵에 급히 행군하면서 무더위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과 추북(Çubuk) 계곡의 물줄기를 티무르가 도착하자마자 차지해, 그들의 군대가 탈진해 극심한 갈증과 피로를 느끼는 심리전 국면이 빠져 있긴 하다. 그 이후로는 스웜 전술 및 전면전으로 사실 더 많은 병력으로 몰아붙여, 한니발이나 나폴레옹 같은 천재적인 세밀한 전술 능력을 보여준 건 아니고, 전면전에서 상대를 압박하면서 끝이 났다. 티무르는 애초에 기동력이 부족한 곳에서는 싸우지 않았고, 약탈하면서 상대를 위축시켰기 때문에 군사적 능력이라면 그게 그의 능력일 것이다. 천재라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전면전이 많았던 이유고, 역대급 랭킹에서 항상 밀려나는 이유이다. 따라서 영락제와 전투를 했어도 그의 초기 승산이라면 모를까, 영토를 차지하고 빼앗는 승률은 전혀 높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그 이상의 체급과 행정력, 인프라, 중앙집권이 완성된 나라였기 때문이고, 그의 전술이 대부분 유목민이 가지고 있는 기병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몽골처럼 파괴적으로 점령하기보다는 흉노처럼 치고 빠지는 형태였을 듯하다.[2] 오스만군 4만에 세르비아 봉신들의 군대가 8천~1만.[3] '사소한 일' 정도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자체를 신경쓰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다. 처음에 몇 번 두들겼지만 잘 안 된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포위만 할 뿐, 공격은 감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4] 간단히 말해서, 오스만이 이미 쳐 없앤 공국들을 모조리 재건하는 동시에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신하가 되라는 소리였다. 이는 몽골이 오스만이 독립해 나온 룸 술탄국을 신하국으로 삼았던 일을 근거로 한 것이었지만, 오스만의 입장에서 이 말은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5] 다만 티무르가 시바스를 잿더미로 만든건 티무르가 시바스에서 생애 처음으로 나병 환자를 보고 자신의 군대에 나병이 퍼질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6] 티무르의 고민 중 하나가 군대에 줄 봉급이 자꾸 밀린다는 것이였는데, 시리아랑 이라크 원정을 통해 밀린 봉급을 모두 지불하고도 한참 남을 정도의 부를 획득했다.[7] 인도 원정에서 얻은 코끼리 부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부대가 오랜 기간 전장에서 단련되었으며,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전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8] 토크타미시와의 전쟁이나 인도 원정 때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 최대였다.[9] 낙마 사고 이후 제정신이 아니어서 후계 구도에서 밀렸다. 근데 군을 지휘할 때는 멀쩡했다고 한다.[10] 티무르 사후 왕위를 노렸다가 할릴 술탄에게 발리고 샤 로흐에게 목이 따였다.[11] 티무르의 맏이 자항가르의 아들. 카불에 분봉받고, 티무르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할릴 술탄에게 처발리고 고립되어 암살당한다.[12] 예니체리가 5만여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딱히 근거가 없다. 먼 후대에 막장테크를 타기 전까지 예니체리의 수는 오스만군 전체의 10% 안팎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수십년 뒤에 예니체리의 규모가 많이 팽창한 뒤에도 총 규모는 1만선이었다.[13] 상술했듯이 바예지트 1세는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가고 있었는데, 티무르는 형식상으로나마 오스만에게 공국들을 모조리 재건한 다음 건드리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니 튀르크계 공국 출신 병사들이 티무르의 설득에 바로 넘어간 것은 당연한 일.[14] 당시 정황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이들 세르비아 기사단은 검은 색의 갑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대장간에서 불리기를 하지 않아 쇠가 검은 색으로 나온 이런 형태의 갑옷이 당시 유럽 기사들한테서 인기를 얻었다.[15] 다만 세르비아 기병들의 대부분은 독일인이나 카탈루냐 용병 출신들이었다.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 독일인들로 구성된 중장기병들이 여러 나라들에서 용병으로 자주 고용되기도 했다.[16] 잔다르 토후국은 아나톨리아 북부에 재건되었다.[17] 바예지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무스타파는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혔고 장남 쉴레이만은 루멜리아의 에디르네, 차남 이사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부르사, 사남 메흐메트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마시아에 근거지를 두었다. 삼남 무스타파는 티무르에 포로로 잡혀 계속 억류되어 있었고 막내 무사는 이사가 할거하기 이전 부르사를 근거지로 두고 있었다가 이사에게 자리를 뻇겨 게르미얀 공국으로 망명했다.[18]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티무르는 바예지트의 넷째 아들인 메흐메트를 술탄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내전 중에 네 형제는 제각기 주화를 발행했는데, 그 가운데 '술탄'이 발행했다는 것이 명시된 주화는 메흐메트의 것뿐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메흐메트의 치세를 공위기가 끝난 1413년부터가 아니라 앙카라 전투 직후부터로 보아야 한다고도 한다.[19] 유럽 측과 오스만 측 사료에는 티무르가 말을 탈 때 발받침으로 사용했다는 식의 기록까지 보이고, 후대했다는 것은 티무르 제국 측 역사가들의 기록에 보인다. 양측 역사가들의 입장 차이를 고려해보면, 그냥저냥 대했거나 아주 학대하거나 후대하지는 않았던 듯.[20] 유럽 역시 티무르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없는건 아닌데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를 휩쓸고 다닐 때 성 요한 기사단이 점거중이던 스미르나가 도매금으로 묶여 같이 갈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