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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이전
14세기 초를 전후하여,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중시하고 알말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초원 지대에 머무르고자 하는 세력과, 정주지대에 궁성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토착귀족들과 협력할 것을 강조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다.[1] 칸국의 동부 지역[2][3]에서는 유목민 세력이 더 강했고, 칸국의 서부 지역(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정주 세력들이 더 강했다. 전자는 스스로를 '모굴인'이라고 칭했고, 후자는 스스로를 '차가타이인'이라고 칭했다.
1347년에 카잔 칸이 카라우나스부[4]의 아미르 카자간에게 패사하였고, 카자간은 다니슈멘지를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운 뒤 실권을 장악했다. 1년 뒤인 1348년, 동부 지역의 유력부족이었던 두글라트부[5]를 중심으로 한 '모굴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투글루크 티무르를 칸으로 추대한 뒤에 떨어져 나갔다. 이로써 차가타이 칸국은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과 서차가타이 칸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서차가타이 칸국에서 카라우나스부의 지배는 카자간과 그의 아들 압둘라 2대 12년에 걸쳐 이어졌지만, 1358년 압둘라가 현지의 튀르크계 귀족들의 음모로 암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압둘라의 죽음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다. 이때 동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이슬람을 수용하고 투글루크 티무르의 강력한 지도 아래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혼란에 빠진 트란스옥시아나를 1360년과 1361년에 걸쳐 두 차례 침공하여, 여러 부족들의 유력자(아미르)들을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차가타이 칸국을 재통일 했다. 티무르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이다.
2. 건국과 전성기
2.1. 티무르 시대
티무르는 1336년 사마르칸트 인근의 케쉬에서 출생한 인물로, 몽골 제국의 귀족가문이자 보르지긴 씨족의 방계인 바를라스부[6]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의 티무르는 하인들을 데리고 가축을 약탈하는 등 도적질을 일삼았지만, 뛰어난 군사 지휘자로서 그 재능을 발휘하여 서서히 인망을 모아 1360년대 무렵에는 차가타이 칸국 서부의 유력자로까지 성장하였다.티무르 제국은 1369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서차가타이 칸국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한 것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티무르는 몽골 제국 및 이슬람 제국의 동시 재건을 기치로 내걸며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1370년부터 1405년까지 계속된 티무르의 원정에 의해 제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는데, 초기 10년 가량은 동부의 모굴리스탄 칸국, 서부의 호라즘, 북부의 킵차크 칸국(주치인 울루스)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모굴리스탄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스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칸을 참칭하였고 이를 빌미로 티무르는 1370년 모굴리스탄 칸국 원정을 감행하여 성공리에 마무리했다.[7] 이어 1372년부터 1373년까지는 호라즘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 때 킵차크 칸국 좌익의 군주 우루스 칸에 반발하던 토크타미쉬 칸이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라즘의 쿵그라트 왕조[8]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었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 미란 샤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헤라트[9]를, 1383~1384년에는 칸다하르[10]를 점령했다. 이어 이란으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레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 귀환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원으로 킵차크 칸국의 군주가 된 토크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지역 등에 원정을 계속했고, 1395년 사라이를 함락시켰다.[11] 그리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북인도 지역으로 쳐들어가 이 곳을 지배하고 있던 델리 술탄국[12]를 격파한 후 수도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13]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를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술탄국[14]을 침공,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를 생포했고, 1404년에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티무르의 지배지는 과거 몽골 제국 서부의 3대 칸국(주치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의 영역을 모두 포함하였다.[15][16]
이후 동쪽의 명나라[17]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 《승전기》에 따르면 영락제가 7년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아 압력을 가하자 티무르는 "밀린 7년치를 내 직접 가져다 주겠다."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러나 원정길에 오른 이후인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병사하는 바람에 명나라 원정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티무르 시대의 제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부족 연맹체들이 지배하는 영토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의 직할령이었다. 페르시아 서부,[18] 킵차크 초원,[19], 모굴리스탄[20] 등이 전자에 해당하고 호라산, 페르가나, 호라즘 등 이후에도 티무르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지배한 영토는 후자에 해당한다. 티무르는 전자에 대해서는 항구적인 정복보다는 상위 군주로 인정받고 조공을 받는 선에 그쳤는데, 왜냐하면 그가 이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 연맹체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21] 한편 후자에 속하는 영토에서, 티무르는 항구적인 정복을 위한 조치들을 여럿 취했다. 대표적으로 전쟁 도중에 파괴된 도시들을 군대를 이용하여 복구하고, 관개 시설을 새롭게 정비하고, 요새를 건설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예군을 각 정복지로 이주시키는 등의 정책들이 바로 그것이다.
2.2. 1차 내전기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티무르 사후 후계 구도를 두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티무르는 생전에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피르 무함마드는 티무르가 사망할 때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서 멀리 떨어진 발흐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인 할릴 술탄이 권력을 잡았으나 기존 고위층들의 반감을 사 인기를 잃었고,[22] 뒤이어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서투르키스탄에 국한되었고, 중부 이란의 이스파한과 쉬라즈 등지는 티무르의 둘째아들 우마르 셰이흐의 자식들이 지배했다. . 그런가 하면 제국의 가장 서북부에 해당되는 서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코만 계통의 유목부족들, 즉 잘라이르 왕조와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등이 독립해 있었다.이 시기에 특히 티무르 제국에게 위협이 된 것은 흑양 왕조였다. 흑양 왕조의 수장 카라 유수프는 1408년 사르드루드 전투에서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를 전사시켰으며,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하여 티무르 제국의 서부 영토(아제르바이잔과 이라크)를 집어삼켰다. 한편 티무르에 의해 복속되었던 백양 왕조와 오스만 술탄국, 조지아 왕국, 맘루크 왕조 또한 이 무렵에 독립하거나 다른 세력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2.3. 샤 루흐 시대
이 내분으로 나라 자체가 막장이 될 뻔 했으나, 이후 샤 루흐가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근거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제국의 재건을 꾀했고, 중부 이란의 티무르 일족들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전 끝에 복구된 제국은 티무르 시대보다는 비교적 약화되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반항하는 외부 세력들을 이전처러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동부에서는 모굴리스탄 칸국이 이전의 피해를 회복하고 카슈가르 일대를 위협했으며, 북부에서는 아불 하이르 칸의 지도 아래 우즈베크인들이 트란스옥시아나에 지속적으로 쳐들어왔다. 또한 서쪽에서는 여전히 흑양 왕조를 비롯한 투르코만 세력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했다.1410년대,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가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샤 루흐는 1421~34년에 걸친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그를 패배시켰으며[23] 모굴리스탄 칸국에도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1425년에는 아들 울루그 베그를 보내 원정을 감행했다. 다만 이전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완전 정복은 불가능했으므로, 몇몇 대도시들과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고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타협했다.
샤 루흐는 중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하여 몇 차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고 맞이하고 했다. 1413년 샤 루흐의 사절단은 북경을 방문하였고 이들이 귀환할 때 영락제는 진성과 이달을 헤라트로 파견했고, 이들은 1415년 귀환하여 『서역행정기(西域行程記)』와 『서역번국지(西域蕃國志)』라는 글을 남겼다. 1419~1421년에도 샤 루흐와 그의 아들 바이숭쿠르가 보낸 사신단이 명에 다녀갔는데, 이때 사신이었던 기야스 앗 딘 나카시는 당시 영락제와 화재를 입은 자금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했다.[24] 더불어 이들 사절단은 명나라의 광활함과 부유함, 역참제도를 비롯한 명나라의 행정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놀라운 점은 이들 사신단이 둘러본 지역은 어디까지나 강남지방에 비하여 낙후되었던 화북지역이라는 것이다.[25] 역사가들도 샤 루흐의 시기를 진정한 전성기로 여기고 있으며, 유럽과 동방의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샤 루흐의 시대는 이전 티무르 시대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융성하였다. 샤 루흐는 예술과 학문에 엄청난 후원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 과학자들의 활동을 장려하여 많은 업적들을 남기도록 했다. 이 무렵에 페르시아 문화와 튀르크-몽골 문화가 혼합된 건축 양식이 발달하여 수도 헤라트와 마슈하드에 여러 모스크 및 마드라사(신학교)들이 세워졌다. 또한 샤나메를 비롯하여 다양한 고전 작품들이 차가타이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판본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정교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사본이나 세밀화들이 여럿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샤 루흐 시대에도 제국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당장 문서상 티무르 제국의 영토인데도 흑양 왕조, 백양 왕조가 흥기하여 서부 이란에서 쫓겨나는 등 샤 루흐의 통치가 먹혀들지 않는 지방도 적게나마 있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순회공연을 다녀야 했던 것. 하지만 다행히도 샤 루흐는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 제국의 분열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1447년에 손자 무함마드가 페르시아 서부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사망했다.
2.4. 울루그 베그 시대
그리고 샤 루흐의 장자인 울루그 베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훌륭한 문화인이자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였던 그는,[26] 1409년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로부터 과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장려하면서 그들에게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티무르 제국의 두 대도시였던 사마르칸트과 헤라트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서 대단히 번영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고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건축 양식 또한 한 층 더 발전하여 제국 곳곳에 화려한 모스크와 영묘가 건설되었다. 울루그 벡 스스로도 구면 기하학이나 삼각함수 등 천문역산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기 때문에 유명하다. 따라서 그의 치세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적인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때의 티무르 제국은 당대 이슬람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제국 치하의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를 여행하고 이를 자세히 기록했다.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경향은 그대로 물려받고 나라도 잘 다스리긴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했고, 즉위 2년만인 1449년에 부친의 정치가 이슬람교를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아들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 내전기가 다시금 도래했고, 이때부터 티무르 제국은 본격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3. 쇠락
3.1. 2차 내전기
아버지를 참수시킨 아들 압달 라티프는 제위한지 고작 6달 만에 똑같이 반란을 당해 겨우 나이 서른에 아버지처럼 참수되었으며 이리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곧장 무정부 상태로 돌입한다. 한편 페르시아 중부와 호라산 일대는 각각 술탄 무함마드, 아불 카심 바부르가 장악하고 있었다. 혼란기를 틈탄 여러 지방세력들이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놓고 아웅다웅하기 시작하면서,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제국의 서부는 기회를 노린 흑양 왕조와 흑양 왕조를 멸망시킨 백양 왕조에게 차례차례 뜯겨나갔다.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이 혼란해지자, 이 기회를 이용해 티무르의 3남 미란 샤의 손자였던 아부 사이드가 우즈베크인들의 도움으로 1451년 사마르칸트를 장악했다. 이후 아부 사이드는 여세를 몰아 1454년에 발흐를 합병하고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했다. 따라서 제국은 호라산의 아불 카심 바부르와 트란스옥시아나의 아부 사이드로 양분되었다. 1458년 아부 사이드가 헤라트를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2차 내전이 종식되었다.
1차 내전기 때와 마찬가지로, 티무르 제국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주변 국가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자한 샤가 이끄는 카라 코윤루는 1477년 이후 호라산을 제외한 페르시아 영토 전역을 제국으로부터 빼앗아갔으며, 1458년에는 제국의 수도 헤라트를 잠시 점령하기까지 했다. 또한 킵차크 칸국이 붕괴하면서, 북방의 우즈베크인들이 시르다리야 강을 넘어 본격적으로 남하하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3.2. 아부 사이드 시대: 일시적인 통일?
1451년에 즉위한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상술했듯이 1458년 호라산을 평정하고 헤라트에 입성하여 중앙아시아와 동부 이란을 석권했다. 그는 헤라트와 사마르칸트라는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동시에 지배하고,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까지 진군한 마지막 티무르 군주였다. 또한 그는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문율을 깨고 스스로 '칸'을 칭했다.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인들의 힘을 빌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고, 이후 타슈켄트에 있던 수피즘 낙쉬반디 교단의 셰이흐 아흐라르를 초청하여 그 종교적 권위를 배경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했다. 이어 헤라트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이란 동부 지역을 지배 아래 둠으로써 제국의 재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외부에 투사되는 티무르 제국의 힘은 확연히 약해졌는데, 이는 우즈베크인과 모굴리스탄 칸국, 아크 코윤루의 성장 때문이었다. 아부 사이드는 모굴리스탄 칸국에 대해서는 제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유누스를 칸으로 임명하고 파견함으로써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인들이 시르다리야 강을 넘어 트란스옥시아나를 약탈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백양 왕조를 치러 갔다가 1469년에 오히려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4. 황혼기
4.1. 남북조 시대
아부 사이드 사후, 비교적 짧은 기간(1469~1470년) 동안 내전이 일어났다. 그 결과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아무다리야 이남의 영토, 즉 호라산 일대는 후세인 바이카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은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가운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도가 유지되었다. 또한 서쪽의 백양 왕조와도 어느 정도 화평을 이루었으며, 북쪽의 우즈베크인들 역시 아불 하이르가 사망하면서 일시적으로 와해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내부 분열과 전쟁으로 점철된 티무르 제국사 전체를 둘러보아도 드물게 매우 평화로웠다.이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티무르 르네상스'로 불리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 발전이 절정에 달했다는 점이다. 헤라트에서 집권한 후세인 바이카라는 재상 알리 시르 나바이와 함께 문예를 보호하여, 헤라트 궁정을 중심으로 티무르 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맞먹을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의, 최고로 화려한 마지막 문화적 번영을 이루어냈다. 반면 사마르칸트의 궁정은 낙쉬반디 교단의 영향으로 헤라트만큼 예술을 부흥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안디잔과 페르가나를 차지한 우마르 셰이흐 2세가 1494년 사망하자 12살밖에 안 된 그의 아들 바부르가 뒤를 이었다.
5. 멸망
5.1. 우즈베크족의 침입
티무르 제국 말기인 15세기경의 영토. 티무르 시대와 비교하면 확 줄어든 것이 보인다. |
1490년대에 트란스옥시아나가 혼란해진 것은, 어쩌면 후세인 바이카라에게는 티무르 제국을 재통일할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후세인 바이카라는 당시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 때문에 이러한 호기를 이용하지 못했다. 후세인은 반란을 진압하고 카불의 바부르와 협력하여 우즈베크인들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1506년, 후세인이 죽고 그의 두 아들들(바디 알자만, 무자파르)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내분을 일으켰다. 바부르는 이를 보고 가망이 없다고 여겨 철수했고, 1년 뒤인 1507년에 티무르 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헤라트와 발흐마저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점령되었다. 바부르는 아프가니스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우즈베크인들은 원래 주치의 후손들이 튀르크인들과 뒤섞이고 여기에 사마르칸트 내 이란계 백인종(타지크인)까지 뒤섞여 페르시아화된 사람들로, 당시 문화적으로 꽃피어있던 티무르 제국의 학술적, 문화적 자원을 그대로 흡수해서 티무르의 후손들을 쫓아냈으면서 현재는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는 판이다. 그리고 원래 주치로부터 유래했으나 현재 우즈베크어는 주치의 후손들이 쓰는 킵차크계 튀르크어가 아닌 위구르와 같은 차가타이계 튀르크어이다.
6. 북인도에서의 새로운 시작
우즈베크인들의 침입기에 속된 말로 개털린 티무르 제국의 황족들 중 하나가 앞서 언급된 바부르인데, 바부르는 제국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를 떠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으로 도망쳐 그 곳에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의 후손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무굴 제국을 티무르 제국의 후신으로 간주하는 역사적 시선도 있다.
이후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티무르 제국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를 탈환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가끔은 과거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도 점령하는 등 옛 영토를 되찾는 듯 했으나...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우즈베크 칸이 이란의 신흥 세력인 사파비 제국 군주 샤(Shah) 이스마일 1세와 벌인 메르브 전투에서 패사하자, 바부르는 이스마일 1세의 도움으로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사마르칸트 등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는데, 바부르가 시아파 군인들을 데려와[27] 큰 반발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향을 떠난 바부르는 1525년 라호르를 점령하고 이듬해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북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의 토대를 놓았다. 이렇게 티무르 제국이 무너지면서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우즈베크 칸국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이들 모두가 튀르크계가 주인이거나 튀르크계와 상당히 관련있는 국가들로 사파비 제국은 페르시아 백인들이 건국했으나 키질바시(kizilbash)라는 투르크멘 유목민 부대가 주력부대였고, 오스만 제국은 오구즈 부족이었으며,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의 조상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 계통의 몽골혈통이었다.
[1] 사실 이러한 조짐은 10~12대 칸인 케벡과 15대 칸인 타르마시린의 시대부터 이미 나타나 있었다. 이전에 칸국의 중심 지역이 톈산 북방의 초원에서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주지대로 옮겨가면서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층들 대부분이 이슬람화-정주화되었지만, 초원에 계속해서 남아있던 유목민들은 칸국의 지배층이 기존의 전통(텡그리, 유목생활 등)을 버리고 이슬람에게 기우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2] 오늘날의 신장 지역. 동튀르키스탄이라고도 한다.[3] 별도로 톈산 북방의 초원 지대는 모굴리스탄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발하슈 호와 이식쿨 호 사이에 위치해있다.[4] 카라우나스부는 원래 있었던 부족이 아니라, 몽골 제국이 분열되면서 여러 부족들이 뒤섞여져 만들어진 '인위적인 부족'이었다.[5] 나중에 모굴리스탄 칸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6] 바를라스부의 시조인 투마나이 칸(Tumanay Khan)은 칭기스 칸의 고조부였다.[7] 이 시기는 몽골 제국이 멸망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이므로 '칸'은 반드시 칭기스 칸의 직계 후예인 황금씨족이어야 한다는 암묵적 인식이 구(舊)몽골 제국 영토에 널리 퍼져있었다. 티무르 역시 자신의 세력을 바탕으로 칸을 참칭하고 싶었으나, 황금씨족이 아니었기에 그의 호칭은 아미르(amir)나 부마(gurgen)에 머물렀다. 실제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토목의 변 전후로 칸을 칭했으나, 예하 부족들이 반발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하였다.[8] 몽골 제국의 부족 중 하나인 옹기라트(콩기라트, 쿵그라트라고도 함)이 세운 왕조였다. 티무르 제국에게 멸망.[9] 당시 일 칸국의 분열 이후에 등장한 카르트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10] 마찬가지로 당시 일 칸국의 분열 이후에 등장한 미라반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 참고로 미라반 왕조는 훨씬 이전에 시스탄 일대를 호령했던 사파르 왕조의 후손이다.[11] 이를 계기로 킵차크 칸국은 쇠퇴 일로를 걸었으며 토크타미쉬 역시 티무르에게 도전한 대가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12] 정확하게는 델리 술탄국의 왕조 중 하나였던 투글루크 왕조[13] 인도는 우상의 나라이자 재화의 나라였다. 이슬람에서 경멸하는 우상 숭배의 나라였기에 이를 빌미로 '성전'을 표방하여 쳐들어 간 다음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른바 '티무르식 성전'.[14] 훗날의 오스만 제국[15] 이 시기의 티무르 제국은 현재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메소포타미아, 캅카스 산맥, 아나톨리아 동부 내륙 지역을 아우르던 대제국이었는데, 그 당시 면적이 비슷한 나라는 명나라말고는 없었다[16] 티무르가 정복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약 무기의 사용과 중앙아시아 여타 세력들의 쇠락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티무르 본인의 군사적 재능도 한몫했다.[17] 당시 원나라를 북방 초원으로 밀어내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부활을 제창하던 티무르에게는 좋은 목표였던 것.[18] 흑양 왕조, 백양 왕조 등 투르코만 계통의 제부족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정복하기에는 다소 무리였다.[19] 킵차크 칸국. 이쪽도 칸국을 구성하는 부족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티무르 본인이 직접 지배하는 것보다는 대리인을 내세워서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20] 모굴리스탄 칸국[21] 티무르의 군대는 대부분은 서차가타이 칸국의 부족 연맹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만족할만한 봉급이나 보수가 주어지지 않으면 군주를 배반하고 흩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이들에 대해서 여러 당근과 채찍을 휘둘러가며 자신의 편으로 겨우겨우 끌어들여야 했다.[22] 부인의 충고대로 하급 아미르들을 고위직에 기용하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23] 그러나 샤 루흐가 사망한 뒤 흑양 왕조의 세력은 다시 커져 1450년대에는 이스파한, 쉬라즈, 키르만 등을 모두 점거했다. 이들은 1460년대 후반 백양부 우준 하산의 공격으로 무너졌지만, 서부 이란은 여전히 티무르 왕조의 통제밖에 있었다.[24] 사신이 방문했을 때 막 지어진 자금성에 벼락이 내리쳐 궁궐이 불탔는데, 이를 보며 영락제가 "하늘이시여, 제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이리도 가혹하게 구십니까!"라고 하늘에 울부짖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25] 다만 경제력은 강남이 앞섰지만 행정력의 촘촘함은 수도권이 위치한 화북이 앞섰다.[26] 어느 정도냐면 세월이 흘러 그에 대하여 알게된 근대 시기 서구권 천문학자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지동설로 유명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거리를 측정하였고 온갖 천문학 및 수학 연구에 대해서도 엄청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러한 게 드러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는 달에 난 화산 분출구를 발견하자 울루그 베그라고 이름을 지어 그를 기렸을 정도다.[27] 악바르 대제 초기에 권신이었던 장군 바이람 칸도 시아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