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묵향'에 등장하는 국가에 대한 내용은 코린트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고대 그리스에 존재했던 폴리스이자, 현재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주 코린티아 현에 존재하는 도시 이름. 개신교 성경에는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가 있으므로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고린도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가톨릭 성경에는 코린토 1서, 코린토 2서라고 되어 있고[1]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고린토'.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아르고스 등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주요 도시국가 중 하나로써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다만 고대 ~ 중세 시기 도시는 내륙의 산 밑에 있는 반면 현재 시가지는 해안가에 자리한다. 유적지는 현 시가지의 서남쪽 3km 지점에 있으니 참고할 것. 지리적으로 그리스 중부 아티카 지방과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6km 가량의 육지로 연결된 지협에 해당하며, 고대부터 수차례 시도한 끝에 근대 시기 코린토스 운하가 개설되었다.
2. 역사
코린토스 아크로폴리스 성채 (아크로 코린트)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 도시를 세운 사람은 시시포스. 이후 친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모인 이오카스테를 왕비로 취하게 되는 오이디푸스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코린토스에 버려져 왕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나중에 자신에게 내려진 그 신탁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패륜을 피하기 위해 양부모의 곁을 떠났지만, 의도치 않게 친부를 죽이고 친모를 취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그리스 북부와 스파르타가 자리잡고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목을 꽉 잡고 있는 나라답게 상업이 많이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양대 강국인 아테네, 스파르타 덕분에 덜 알려졌지만, 아테네, 스파르타 다음으로 강대한 폴리스였다.
일전에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코르키라와 앙숙 관계였다. 코르키라도 만만치 않은 해군력을 갖고 있던 터라 그리스사 최초의 해전에서 코린토스가 패하여 코르키라는 독립하고 경제적 실권도 뜯기게 되었기 때문. 이후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와 친선 관계를 유지했는데, 스파르타는 코린토스의 해군력과 경제력 때문에 코린토스가 자신들과의 동맹을 취소하고 아테네 편에 붙을까 늘 걱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테네가 코린토스와 싸우려는 코르키라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을 때[2] 스파르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그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많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남아있는 주요 유적인 아폴로 신전의 기둥은 도리아 양식이다..
건축사에 있어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으로 유명하다.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은 그리스 시대에 매우 유명했던 건축 양식으로,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배우면 첫 학기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코린토스 양식의 그림을 외워야 한다. 이 건축 양식은 코린토스뿐 아니라 지금의 터키, 그리스,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에게 해 연안을 아우르던 그리스 세계 전체가 쓰던 건축양식이었다. 코린토스 양식 기둥은 이오니아, 도리스 양식과 달리 무척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기둥 꼭대기를 나뭇잎으로 감싸듯 조각하는데 이 풀은 아칸서스라는 지중해에서 자라는 풀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풍요를 뜻한다.
이렇듯 그리스 세계에서 꽤 유명하고 큰 도시였으나, 로마에 의해 카르타고와 사이좋게 멸망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는 코린토스가 로마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여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본보기였다. 코린토스는 카르타고와 똑같이 도시가 파괴당하고 소금이 뿌려졌으며, 주민들은 몽땅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3] 두 도시는 기원전 146년에 함께 멸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3년 간에 걸친 제3차 포에니 전쟁 끝에 카르타고도 같이 멸망했던 해다. 로마에게는 지중해 서부의 카르타고, 동부의 그리스를 완전 병탄했던 영광의 해가 된다.[4]
그러나 나중에 로마인에 의해 도시가 통째로 다시 세워지고, 그 결과 이전의 민족과는 관련 없는 새로운 민족이 이주하여 코린토스의 주인이 된다. 중세에도 펠로폰네소스의 관문으로써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되었고, 특히 15세기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오스만 제국의 남진에 맞서기 위해 아크로코린트 성채를 보강하고 코린토스 지협에 헥사밀리온을 견립하기도 하였다. 헥사밀리온 유적은 코린트 시와 운하 사이에 일부 남아있다.
펠로폰네소스 지협을 통과하는 코린토스 운하가 뚫려 있다. 고대로부터 '이 지협을 뚫어버리면 참 편하겠구나!!' 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서, 코린토스 운하는 고대에도 수많은 정치가들이 시도하였다. 최초의 작업은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가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기술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그리스의 여러 정치가들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등이 이를 시작하였다가 암살당하면서 중단되고는 했다.
제대로 작정하고 뚫어본 건 네로였는데, 그는 유대인 포로들을 동원해 양쪽에서 뚫고 가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중앙에 엄청나게 큰 암석지대를 만났고 이를 도무지 뚫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공사를 포기하고 말았다.[5] 따라서 그때 이후로 계속 보류되어 오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첨단 기술이 가능해진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운하를 파는 데 성공했다.
3. 갤러리
파우스타 신전의 코린트 양식 기둥
옛 분수대의 코린트 양식 기둥
헥사밀리온 성벽
코린트 운하 일대. 지도가 남북이 바뀌어 상단 우측이 코린트, 하단이 루트라키이다.
코린트 운하
파일:그리스 터키 코린트.jpg
코린트 성채 (아크로코린트)
4. 매체에서 등장
4.1. 도미네이션즈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코린트(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가톨릭 신자라도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고린도라고 한다. 마태오 복음서 등도 마찬가지.[2] 사실 코린토스 역시 아테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만, 코린토스는 단순히 옛 정을 생각해 아테네가 도와줄 것이라 믿었지만 코르키라는 스파르타 견제라는 좀 더 현실적인 근거로 아테네를 설득했다. 이 사례는 현실적 상황 판단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할 때 가끔씩 인용되기도 한다.[3] 이때의 코린토스는 그야말로 재수 옴붙은 경우로, 당시 로마의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이 하필이면 그리스 혐오와 대외 강경책으로 유명한 대 카토였다. 또한 카르타고를 파괴해서 주변국들에게 본보기로 삼자는 것이 이미 로마 내부의 방침으로 세워진 상태였는데 하필 이때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파괴하자는 방침에 코린토스도 덤으로 끼게 된 것이었다.[4] 그래서 연도에 따른 판도가 나오는 애니메이션형 역사 유튜브를 보면 기원전 146년에 로마가 카르타고(남쪽)와 그리스(동쪽)로 확 넓어져서 (아직 공화정이지만) 제국이라고 할 만한 판도가 나오기 시작한다.[5] 당시엔 곡괭이질로 뚫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