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라틴어: Marcus Porcius Cato | |
출생 | 기원전 234년 |
로마 공화국 투스쿨룸 | |
사망 | 기원전 149년 (향년 85세) |
로마 공화국 로마 |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리키니아(첫째 부인) 살로니아(둘째 부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리키니아누스(장남)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살로니아누스(차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5년 |
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후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clearfix]
1. 개요
로마의 집정관, 감찰관이자 문인. BCE 234 ~ BCE 149. 풀네임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소 카토의 증조부로, 대(大) 카토라고도 한다. 별명은 현명한 카토(Cato Sapiens), 오래된 카토(Cato Priscus), 감찰관 카토(Cato Censorius).[4] 카르타고에 대한 강경파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견제한 인물로 유명하다.2. 생애
기원전 234년 로마 공화국 라티움 지역의 투스쿨룸 시에서 출생했다. 전승에 따르면, 포르키우스 씨족은 돼지[5] 사육에 종사하던 평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와 대 플리니우스는 그가 평생 동안 날카롭고 고집이 센 언행을 보였기에 '카토(Cato)'라는 코그노멘이 붙여졌다고 밝혔다. 또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노년기에 사피엔스(Sapiens: 현명한 자)라는 아그노멘으로 불렸다고 밝혔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노멘인 포르키우스와 코그노멘인 카토 모두 기원이 라틴어가 아니라 에트루리아어라며, 그의 조상은 로마인이 아니라 로마에 속하지 않았던 라틴족 또는 에트루리아인이나 사비니인이었으리라 추정한다.모든 기록은 그의 가족이 로마 공화국의 지배 계급인 파트리키에 속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가 출생했을 때 가족의 정확한 지위에 대해서는 눈에 띄는 조상은 찾아볼 수 없는 일개 평민이었다는 설부터 증조부가 한 전쟁에서 5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잃을 정도로 다량의 말을 보유했던 에퀴테스 신분이었다는 설까지 의견이 엇갈린다. 분명한 사실은 카토의 부모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는 포르키우스 씨족 최초로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과 감찰관까지 오른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로마군에 입대했다. 기원전 214년 칸나이 전투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210년 무렵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209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군대에 배속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이 기간 동안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들리면서 피타고라스학파를 접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207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군대에 복무했고 메타우루스 전투에 참전해 대승에 일조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로마에서 법무관을 여러 번 지낸 포르키우스 씨족 대표자와 인맥이 있었고, 카토는 그의 지원에 힘입어 출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서 '법무관을 여러 번 역임한 포르키우스'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플루타르코스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그는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칸나이 전투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은 파트리키들이 재능있는 청년과 클리엔텔라 관계를 구축하여 재기를 도모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플라쿠스가 카토를 후원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205년 또는 204년, 카토는 아프리카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 재무관이 되었다. 시칠리아에서 함대 출항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사령관과 다투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스키피오가 상륙 준비 및 경비 지출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너무 많은 재원이 낭비되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즉, 스키피오가 극장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고 있고 병사들에게 너무 많은 하사금을 수여한다는 것이다. 카토가 스키피오와 화해하고 아프리카로 건너갔는지, 아니면 갈등을 풀지 못하고 로마로 돌려보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제2차 포에니 전쟁 말년에 사르데냐로 보내졌고 기원전 202년 이전에 로마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로 돌아온 뒤 평민 조영관 선출 절차의 비리 문제를 지적하는 연설을 포로 로마노에서 했다.
기원전 199년 평민 조영관에 선출된 카토는 이듬해 법무관에 선임되어 사르데냐에 파견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샤르데냐인에게 여행 경비를 요구하지 않았고, 마차를 사용하지 않고 도보로 도시를 돌아다녔으며, 그의 의복과 신에게 바치는 그릇을 운반하는 한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모든 고리대금업자를 섬에서 추방했으며, 주민들이 총독으로부터 착취당하는 관행을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선정을 베푼 결과 그의 명망은 치솟았고, 기원전 195년 후원자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가 집정관을 맡았을 무렵, 로마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 긴축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오피우스 법(Lex Oppia)의 존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법은 여성들이 1/2 온스 이상의 금제 장신구를 소유하거나,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 입거나, 종교적 축제가 열리는 때를 제외하고 도시에서나 도시로부터 1마일 이내에서 마차를 타는 것을 금지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나 법의 존속은 불필요해 보였고, 여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 법의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토는 오피우스 법의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로마의 남성과 여성이 사치에 흠뻑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로마가 악의 유혹으로 가득 찬 그리스와 아시아로 팽창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라쿠사에서 가져온 조각상들과 코린토스와 아테네로부터 들여온 청동제 접시들 및 채색 꽃병 등을 지목하면서, 많은 로마인들이 그러한 것들에 찬사를 보내고 로마 신전의 테라코타 장식물들을 비웃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카토의 연설을 지어냈다고 본다. 대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로마가 아시아를 정복하기 전에는 로마 신전들에 대리석 조각상들이 없었다고 밝혔는데, 로마가 아직 아시아에 세력을 뻗기 전인 기원전 195년에 로마 신전에 '테라코타 장식물'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리비우스는 기원전 187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는 켈트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갈라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후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하면서부터 로마에서 심각한 사치가 벌어졌다고 서술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평생 사치를 적대시했던 카토가 오피우스 법의 폐지를 극력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실제로 한 연설 내용은 불분명하다. 아무튼 오피우스 법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지되었다.
그 후 이베리아인들의 봉기가 시작된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 2개 군단과 800 기병, 15,000명의 보조병 및 25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진한 카토는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를 침공해 엠포리아 전투에서 반군을 섬멸했다. 그 후 로마군은 반항적인 마을들을 모조리 파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을 감행했다. 기원전 195년 집정관에 선임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토가 히스파니아에서 잔혹행위를 서슴지 않는다고 규탄하며 로마로 즉각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본인이 히스파니아 주민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그들이 로마를 따르게 만들었는데 카토가 무력으로 그들을 살육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임기를 마치고 귀환한 카토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토는 약 400개의 도시를 차지했으며 자신이 히스파니아에서 보낸 기간보다 많은 도시를 공략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그는 군인들에게 상당 부분의 전리품을 분배하면서도 본인은 전혀 챙기지 않았다. 다만 승리의 여신 사원 건설에 기부하기 위해 약간의 돈을 챙겼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오기 전에 철광산과 은광산을 복원하거나 새로운 광산을 채굴하게 했고, 이로 인해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의 수입이 증가했다.
이후 갈리아 키살피나의 보이족 및 리구리아인들과 전쟁을 벌이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일부 사료에서는 그가 트라키아 부족들과의 전쟁에 참여했다고 서술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91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의 전쟁 때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 또는 레가투스로 복무했다. 그는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방문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한다. 카토는 아테네 사람들이 모인 광장 연단에 섰다. 그는 그리스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라틴어로 연설한 뒤 그리스인 통역사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카토 본인은 연설을 간결하게 한 데 비해 그리스 통역사의 번역본은 훨씬 더 장황하고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아테네인들은 카토의 라틴어 연설 속도와 간결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기원전 191년 글라브리오의 로마군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와 아이톨리아 동맹의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카토는 이 전투에서 한 개 분견대를 이끌고 야밤에 신속하게 이동해 연합군의 배후에 있던 고지를 장악한 뒤 적의 배후를 급습해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후 그는 로마로 돌아가서 승리를 보고했다. 이후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원로원 의사당과 포럼 및 법원에서 종종 연설했는데, 그 내용은 대개 귀족들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들이 사치와 탐욕, 허영심, 뻔뻔함, 방탕, 무례함, 오만함, 및 잔인함에 젖어들면서 대대로 이어온 조상들의 명예로운 관습이 위험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특히 겨냥한 대상은 자신을 후원하는 플라쿠스의 경쟁자인 스키피오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기원전 189년, 카토는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엔 그 외에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그리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출마했다. 이 중 최근에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글라브리오가 당선될 확률이 가장 높아보였다. 이때 카토가 전 사령관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두 명의 호민관이 글라브리오를 재판에 회부했고, 카토는 증인석에 서서 자신이 그리스에서 본 금은 그릇 중 일부가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카토를 위증 혐의로 고발했지만 곧 감찰관 입후보를 취소했고, 카토에 대한 고발 역시 취소되었다. 그러나 사령관으로 모셨던 이를 가차없이 고발한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커졌고, 결국 카토는 당해 감찰관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 후 아이톨리아 동맹와의 협상을 위해 그리스로 파견된 사절단에 참여했으며, 기원전 186년 로마 시내에 바커스를 모시는 비밀 의례인 바카날리아에 가담한 수천 명의 여인과 청년들이 온갖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유언장과 인장을 위조하며, 중상 모략을 일삼고, 친척을 중독시키거나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올라오자 이들을 강력히 규탄하는 연설을 해 원로원이 당해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바커스 신도들을 모조리 체포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를 구금하도록 일임하는 결의문을 체택하게 했다.
기원전 184년, 카토는 감찰관 선거에 재출마했다. 당시 그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약간의 유연성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고 연단에서 악에 빠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도시에 대 정화가 필요하다고 외쳤으며, 로마인들이 건전한 정신을 되찾고 싶다면 가장 신중하지는 않지만 가장 단호한 사람인 자신과 플라쿠스를 감찰관으로 세워야 한다며, 그러면 자신이 '사치'와 '타락'이라는 이름의 히드라의 머리를 베고 플라쿠스가 히드라의 상처를 불러 지버리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카토는 투표일이 열리기 전에 호민관 퀸투스 네비우스를 설득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반역죄로 고발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 때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았고, 그 대가로 포로로 잡은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을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주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당시 감찰관 선거에 출마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표심을 깎아먹기 위한 정치 공세라고 추정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재판에 참석하길 거부하고 자신의 영지인 리테르눔으로 낙향했고 그곳에서 기원전 183년에 사망했다. 동생 루키우스는 이 여파로 감찰관 선거에서 낙선했다.
선거 결과 플라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당선된 카토는 즉시 "국가 치유"를 목표로 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스키피오의 추종자 마닐루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 7명을 제명했다. 일설에 따르면, 루키우스는 그의 아내나 연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담즙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사치를 보였기 때문에 쫓겨났고, 마닐루스는 딸 앞에서 아내에게 키스해 고대의 관습을 위반했기 때문에 쫓겨났다고 한다. 또한 지금까지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고 있던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대신 동료 감찰관이자 후원자인 플라쿠스를 프린켑스에 세웠다. 이후 에퀴테스에 대한 대대적인 검토를 실시해 수많은 인원을 자격 미달을 이유로 계급을 박탈했다. 일부 학자들은 카토가 히스파니아에서 사령관을 맡고 있을 때 로마 기병이 무능한 면모를 보이는 것을 보고 효과적인 기병을 구성할 수 없는 에퀴테스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같은 조치를 내렸다고 추정한다. 카토는 뒤이어 인구 조사를 실시해 재산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많은 로마인을 강등했다.
카토는 여세를 몰아 로마 시민에게 부과되는 소비세를 대폭 인상해 사치품과 가정 노예에 대한 지출을 제한하도록 고안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농지를 위해서보다 남성 매춘부를 위해, 농장 노동자들을 위해서보다 식탁의 진기한 요리를 위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현실에 개탄하면서, 자신은 이 잘못된 풍조를 바로잡기 위해 이 법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1500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의류, 마차, 여성 장신구, 가정용품에 대해 매겨지는 세금이 10배나 폭증했으며, 유사한 세금 부과 방식이 1200데나리온 이상에 구입한 모든 노예에 적용되었다. 다만 농업 및 광업 분야에 투입된 노예를 보유한 이들에게는 증세가 가해지지 않았다.
그는 감찰관을 맡는 동안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입을 늘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리들이 속주민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낸 뒤 로마로 보내는 기부금을 늘렸으며, 건물을 수리할 때 지불되는 금액을 줄이는 방향으로 계약을 수정하고 공유지에 불법으로 지어진 모든 건물과 주 수도관 및 수로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확보한 재정으로 포로 로마노에 포르티아 신전을 건설하고 로마의 하수구를 수리하고 분수에 돌을 깔았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카토의 이러한 정책에 강한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44번이나 고발했지만 하나같이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토는 감찰관 임기를 마친 뒤 노년을 아버지가 물려준 토지를 경영하는 데 투자하면서도 고리대금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원전 171년 히스파니아 총독 마르쿠스 티키니우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라, 가이우스 마티에누스가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되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결성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조사와 재판 결과 필라와 마티에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티키니우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카토는 고소인으로서 법정에서 연설했다. 이후에도 원로원과 포로 로마노에 종종 나와서 로마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사치와 악덕을 지속적으로 성토했으며, 그리스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풍조를 비판했다. 기원전 155년 플라톤 아카데미 출신 그리스 철학자들이 로마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귀족 청년들이 그들의 강의를 청취하기 위해 몰려들자, 그는 철학자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53년 또는 152년, 카토는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사이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카르타고에 갔다. 그러나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카르타고의 경제가 회복된 것을 보고 나중에 로마를 또다시 위협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로마에 돌아온 후 카르타고를 무력으로 정벌하여 완전히 파괴해야 로마가 안전하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설파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어떤 연설을 할 때마다 말미에 "이에 덧붙여서 나는 카르타고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Ceterum censeo Carthaginem delendam esse)"라고 말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위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이에 대응해 "나는 카르타고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원전 150년, 먼 히스파니아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루시타니아 전쟁을 치르던 중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정착할 땅을 나눠줄 테니 귀순하라고 권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갈바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짐을 수레에 싣고 가족과 가축을 대동한 채 로마에 귀순했다. 로마 병사들이 족장들에게 루시타니아인들을 세 그룹으로 나뉘게 한 뒤 서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인도했다. 갈바는 루시타니아인들에게 무기를 반납하도록 한 뒤 병사들을 시켜 그들 주변에 참호를 파게 한 후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어린이, 여자, 노인은 노예로 삼게 했다. 이후 거의 모든 전리품을 자기 것으로 삼고 병사들에겐 적은 양만 주었다. 하지만 일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달아났는데, 그 중에는 로마에 원한을 품고 오랜 세월 로마를 괴롭힐 비리아투스가 있었다.
갈바는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기원전 149년 그가 지난해 속주에서 벌인 만행을 놓고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호민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노예로 팔린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갈바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지던 중, 카토가 나섰다. 그는 서두에서 "나이, 목소리, 힘, 노년 등 많은 것들이 나를 여기에 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진정으로 그러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뒤, 갈바의 잔인한 조치는 로마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며, 갈바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기원전 153년 집정관이며 갈바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던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카토가 갈바를 증오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여론은 명망높은 카토의 주장에 감화되어 반 갈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갈바는 다른 전술을 구사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갈바는 호민관 리보의 법안에 대한 투표일에 두 명의 미성년 아들과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의 아들이자 제자를 사람들 앞에 데려와서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로마를 위해 애썼건만 이제 야만인들을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게 되었소. 나는 이 수치를 견딜 수 없어 유언장을 작성해두고 죽음을 맞이하려 하니, 부디 이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시오."
그 말을 들은 민중은 눈물을 흘렸고, 리보의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갈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를 퍼부은 덕분에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카토는 이 일이 있고 얼마 후인 기원전 149년에 사망했다. 그 후 카르타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제3차 포에니 전쟁 발발 3년만인 기원전 146년에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카토는 경쟁자인 스키피오에 비해 군공이 모자라고 그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으나 한편 당시 로마 고위직들에 비해 부정축재를 삼갔고 법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자유로운 사치 풍조나 그리스 문화 애호를 비난했지만 그 자신은 상업에 능했고 그리스 문화의 깊은 이해자였다. 이처럼 그는 로마공화정의 전성기와 명암을 자신에게 나타낸 듯한 특이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은 훗날 소카토의 후광이 되었다.
3. 저서
카토는 생전에 라틴어로 무수한 연설문과 저서를 집필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카토가 150개의 연설문을 남겼다고 밝혔지만 현재까지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지는 연설문은 약 80개다. 그가 생전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저서는 《농업론(De agri cultura)》, 《기원(Origines)》, 《아들에게(Ad filium)》[6], 《도덕의 시( Carmen de moribus)》, 《군사에 관하여"(De re militari)》 등이지만, 이중 전문이 전해지는 농업론과 후대 역사가들에게 부분적으로 인용된 기원론을 제외한 나머지는 실전되었다.《농업론(De agri cultura)》은 농촌의 경제 생활을 관리하기 위한 162가지 팁 및 권장 사항 모음집이다. 그는 종종 다른 표현으로 조언을 두 번 반복하고 권장 사항 중 하나를 네 번 반복하면서, 반복되는 충고는 대부분 중요하다고 분류했다. 그는 로마 시에 거주하는 이들이 아니라 농촌에서 실제로 일하는 농부들을 대상으로 책을 집필했기 때문에, 쟁기질 기술이나 무화과 건조 방법 등 농사 짓는 데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농사를 어떻게 잘 지으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지를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카토가 이 저서에서 여러 상품들을 비교 분석하면서, 올리브를 재배할 때 제일 많은 수익을 보고 곡물을 생산할 때 수익성이 저조하다고 밝혔다고 알려졌지만, 일부 학자들은 수익성이 있는 순서대로 상품을 나열한 게 아니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부문들만 나열한 거라고 주장한다. 한편, 카토는 노예 착취에 대해 많은 조언을 제공했다. 노예가 주인에 대항하여 연합하지 못하도록 노예 사이에 분쟁을 부풀리라고 권했으며, 모든 하인을 집에 가둬서 일하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게 한 뒤 굶어죽기 싫으면 일하라고 강요하라고 권고했다.
《기원(Origines)》은 로마 건국부터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의 로마 역사를 다룬 7권의 에세이다. 그는 제1권에서 로마 왕국의 역사를 다뤘고, 제2권과 제3권은 이탈리아 부족 및 도시들의 기원을 다뤘으며, 지 4권부터 7권까지는 로마의 역사를 다뤘다고 전해진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마르쿠스 베리우스 플라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대 플리니우스,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 마크로비우스, 아울루스 겔리우스 등 후대 역사가들의 저서에 일부 내용이 인용되었다. 카토는 이 저서에서 로마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인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부터 살았던 선주민들은 트로이가 함락되기 여러 세대 전에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일 것이라 추정했다. 그 선주민들을 원시적인 야만인들로 보는 이전 로마 역사가들의 관점에 비하면 색다른 주장이었다. 또한 아르카디아인들이 아이네이아스의 뒤를 이어 이주하여 아이올릭(Aeolic) 방언을 확산시켰으며, 사비니인들의 기원은 한 스파르타인들의 정착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카토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분리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좋은 미덕을 칭송하면서 로마가 지나친 사치와 방탕에 허덕이는 현 상황을 지탄했다.
4. 그리스 혐오자?
카토는 대표적인 그리스 문화 애호자였던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7]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는 대조적으로, 로마가 그리스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키케로를 비롯한 몇몇 고대 저술가들은 카토가 노년에 이르러서야 그리스 학문을 연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는 신빙성 없다고 간주한다. 카토는 기원전 209년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타렌툼에 있을 때 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자 네아르코스의 제자였고, 기원전 204년 사르데냐에 있던 그리스계 시인 퀸투스 엔니우스를 로마로 데려왔다. 이는 그가 젊은 시절에 그리스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그는 그리스인 노예 킬론에게 자신의 가정에서 다른 노예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했으며, 그리스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플루타르코스는 카토가 그리스 문화를 잘 몰라서 싫어한 게 아니라 잘 알았지만 오히려 혐오했다고 설명한다[8]. 그에 따르면, 카토는 이소크라테스의 교육방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조롱했다. 이소크라테스 학교의 학생들이 마치 하데스(Hades)의 미노스(Minos) 앞에서 연설하려는 것처럼 노인이 될 때까지도 계속 장황한 연설 연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소크라테스에 대해 "악처와 어리석은 아들들에게도 언제나 온건하고 친절한 것을 제외하고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다"고 비평했으며, 수다쟁이이자 폭력적으로 참주가 되고자 의도한 인물로 비난하기도 했다. 기원전 155년 그리스에서 건너온 철학자들이 로마의 젊은 귀족들을 상대로 강연해 열띤 호응을 얻었을 때, 카토는 몹시 불쾌해하면서 정무관들에게 무엇이든 설득으로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자들로 이루어진 사절들을 오랫동안 체류시킨다고 비난하고 사절들의 제안에 대한 원로원의 결정을 신속히 내리고 저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로마의 젊은이들에게 이전처럼 로마의 법과 선조들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토는 그리스 의술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아들에게 그리스 의사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족을 제외하고 로마인을 포함한 모든 야만인을 살해하기로 서약했으니 절대로 그들과 관계하지 말거라!"
플루타르코스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비꼬는 어투로 다음과 같이 덧붙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그의 장남과 아내는 안타깝게도 그가 직접 만들어낸 요리를 먹다가 그보다 먼저 죽었다."
이렇듯 플루타르코스 등 많은 고대 역사가들은 카토가 그리스 문화를 맹목적으로 혐오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오랫동안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카토가 정말로 그리스 혐오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의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풍토에 반대했을 뿐 그리스 문화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카토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그리스 문학들을 통달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가 여러 사료에 드러난다는 점, 그의 저서 '기원'에 이탈리아인들의 기원이 아이네이아스보다 몇 세대 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며 사비니인들이 스파트라인의 후예라는 등 그리스인을 이탈리아 종족들의 기원으로 삼는데 거리낌 없었다는 점, 카토의 연설문 향간에 그리스어와 비슷한 용어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로마에 만연한 사치 풍조를 맹렬히 공격하면서도 대 플리니우스, 리비우스 등 후대 로마 역사가들과는 달리 그리스 문화를 사치 풍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제시한다.
참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노카토 (Marcus Porcius Cato)의 태도
5. 가족
카토는 기원전 194/193년에 리키니아로 알려진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리키니아누스를 낳았다. 아들 카토는 유능한 변호사로서 입지를 굳혔고 기원전 152년에 법무관에 선출되었지만 미처 임기를 수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기원전 155년, 카토는 아내 리키니아가 죽자 자신의 노예 살로니우스의 딸 살로니아를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고 그녀와 재혼했다. 당시 카토에겐 이미 장성한 아들인 리키니아누스가 있었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죽자 카토와 동침하는 살로니아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카토가 살로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나서자, 자기가 노예 애인을 반대해 화가 나서 모욕을 주려고 이러느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에 카토는 나는 너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런 아들을 더 가지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라고 달랬다.이후 살로니아는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살로니아누스를 낳았다. 리키니아누스는 동생을 인정하지 않다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카토 가문의 대는 살로니아누스의 후예들이 이어가 소 카토로 이어졌다. 카토는 살로니아가 아이를 가졌을 당시 이미 80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 카토와 소 카토는 증조부-증손자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130살 넘게 차이난다.
6. 어록
유머나 촌철살인의 어법을 좋아하고 군중을 비아냥대는 경향이 있어서 다양한 어록을 남겼다.전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건 로마이고, 우리 원로원은 그런 로마를 지배하는 패권자입니다. 하지만 우리 위에는 마누라라는 또 하나의 패권자가 있지요.
모든 인간들은 제 마누라를 지배합니다. 우리 로마인들은 모든 인간들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는 우리 여편네들한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9]
모든 인간들은 제 마누라를 지배합니다. 우리 로마인들은 모든 인간들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는 우리 여편네들한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9]
시민 여러분, 아시다시피 위장이랑 말다툼하긴 어려운 일이죠. 놈에겐 귀가 안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철이 안 되었는데 곡물을 나누어 달라며 보채는 군중에게
철이 안 되었는데 곡물을 나누어 달라며 보채는 군중에게
물고기 한 마리가 소 한 마리보다 비싼 값으로 팔리는 도시를 구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만연한 사치를 한탄하며[10]
만연한 사치를 한탄하며[10]
어떤 사람의 조언을 개인적으로는 감히 따르려 하지 않으면서, 집단으로는 우르르 끌려가는구나.
한명 한명은 잘 속지 않으면서 여럿이서는 속아 넘어가는 로마인들을 양떼라고 비난하며
한명 한명은 잘 속지 않으면서 여럿이서는 속아 넘어가는 로마인들을 양떼라고 비난하며
나는 내가 죽은후에 사람들이 왜 내 조각상이 있는지 묻는 것보다 내 조각상이 없는 이유를 묻기를 훨씬 더 좋아합니다.
7. 여담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집필하여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헌정한 책 《노년에 관하여》(Cato Maior de Senectute)는 노년의 대 카토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나눈 가상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1] 이는 사실 축약본(?)이고, 원문은 "Ceterum censeo Carthaginem esse delendam'(덧붙여, 제 생각으로는 카르타고는 반드시 망해야 합니다)"이다. 문법적으로 뜯어보자면 'Carthago delenda est'라는 문장 자체가 censeo의 목적어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Carthago delenda est'를 대격+부정사로 쓴 것이다. 이렇게 안긴 문장을 대격+부정사 형태로 표현하는 문법을 Accusativus cum Infinitivo 라고 하며, 줄여서 AcI라고도 부른다.[2] 이런 표현을 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말 그대로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더 이상 카르타고를 존속시킬 수는 없다는 의견을 가진 강경파였기 때문이다. 별 상관없어 보이는 연설을 한 후에도 저 말은 꼬박꼬박 붙였다고 한다. 심지어 카르타고산 석류를 원로원에 가져와 동료 의원들 앞에 보여주면서도 "이렇게 맛있고 풍족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적(카르타고)이 배로 불과 사흘 거리에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만큼 카르타고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인물. 그리고 로마는 후에 정말로 카르타고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키도록 여론을 지핀게 대 카토이다.[3] 훗날 라트비아 대통령인 에드가르스 린케비치가 러시아에 대한 사실상의 전쟁을 요구하면서 글 말미에 카르타고를 러시아로 바꾼 "Russia delenda est!"를 덧붙였다. 러시아 혐오를 내세운 정치인이니 카토의 카르타고 혐오정서와 비슷해서 그럴지도. 물론 능력이나 업적이 카토와는 비교도 안되는 인물이 본인이나 라트비아 자체가 직접 나서지 않고 프랑스나 NATO, EU를 앞세우려 한다고 대체로 여론의 평은 좋지않았다.[4] 감찰관 카토라는 별명은 그가 워낙 감찰관 직을 잘 수행하였기에 붙은 별명이다. 카토는 로마의 전통적 가치와 도덕을 중시하였고 감찰관이 된 후 이를 어기는 이가 있다 싶으면 가차없이 원로원에서 쫓아냈다. 하도 감찰관으로 유명하다보니 오히려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기원전 195년에 차석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5] 라틴어로 porcus[6]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백과사전 형식으로 모은 역사적 에세이였다고 전해진다.[7] Titus Quinctius Flamininus. 친그리스주의자였으며 집정관이 된 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196년 코린트에서 개최된 이스트미아 제전에서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한 후엔 일부 그리스인들에게서 신으로까지 숭배되었던 인물이다. 프로콘술이 된 후에도 앞장서서 마그네시아, 테살리아, 프티오티스, 에우보이아, 로크리스 등 여러 그리스 도시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치를 부여해주었다.[8] 사실 외국의 문화에 대해 잘 안다고 그 대상이나 해당 국가를 무조건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싫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한국의 대중문화인 한류에 대해 잘 아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국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국을 싫어하는 혐한이 될 수도 있다.[9] 여성들이 권력을 갖는 데 불만을 갖고 한 말이다. 평소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크게 부정적으로 본 어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말은 원래 테미스토클레스가 농담으로 한말을 인용한거라는 이야기가 후대사람인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기록에 있다.[10] 실제로 로마인들은 소고기 요리보다 물고기 요리를 더 좋아했다. 로마 시대에 소고기는 다소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먹는 격이 떨어지는 음식이었고, 반면 부자들은 물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카이사르의 부하이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이었던 안토니우스는 매일 같이 자신이 직접 로마의 어시장에 나가서 고급 생선들을 사들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