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라틴어: Publius Popillius Laena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버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형제)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들)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들) 퀸투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2년 |
전임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
동기 |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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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포필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기원전 172년과 15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기원전 133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30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3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시칠리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를 통치하면서 917명의 도망친 노예를 체포해 그들의 주인에게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지며, 기원전 132년에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라이나스는 카푸아와 레기움을 연결하는 도로인 포필라 가도를 건설했고, 아르미눔과 아트리아를 연결하는 또다른 도로를 건설했다. 여기에 플라미니아 가도를 아드리아 해 북쪽 해안 지대인 아르미눔에서 아퀼레이아까지 연장했다. 한편, 그는 공유지를 가난한 시민들에게 분배했고, 단지 목초지였던 공유지를 경작지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남쪽의 루카니아와 북쪽의 아이밀리아 가도에 각각 그의 이름을 딴 2개의 정착지 포룸 포필리우스가 건설되었다.
한편, 원로원은 지난해에 살해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호라동을 조사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이 위원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해 많은 이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고, 이로 인해 평민들의 증오를 받았다. 기원전 12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그는 즉시 재판 없이 시민을 죽이거나 추방한 인사를 민회가 재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공식적으로 기소되기 전에 이탈리아를 떠났다고 한다. 반면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맹렬한 비난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추방되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브루투스, 그리고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누케리아로 망명한 '퀸투스 포필리우스'를 거론했다. 학자들은 키케로가 라이나스의 이름을 오기했다고 본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의 귀환은 친척들에게 중요한 임무가 되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를 막기 위해 민회에서 특별 연설을 했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원로원 최종 권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뒤 호민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가 그의 귀환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키면서, 그는 비로소 로마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에게는 세 아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퀸투스가 있었다. 이중 푸블리우스와 퀸투스는 시칠리아의 비문에서만 언급되며, 가이우스는 기원전 107년 레카투스를 맡은 사실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