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라틴어: Gnaeus Baebius Tamphi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조부) 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아버지)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2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
동기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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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플레브스 집안인 바이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그나이우스,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기원전 219년 한니발 바르카의 사군툼 공방전에 항의하기 위해 카르타고를 방문하고 나중에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형제로 기원전 181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가 있었다.기원전 204년 호민관을 맡았다. 당시 감찰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서로를 비방하고 서로를 도덕적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추려 하는 등 추태를 보이자, 그는 감찰관들의 추잡한 행동을 기소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던 두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200년 평민 조영관을 맡아 평민들의 위한 경기를 3차례 개최했다. 이듬해 법무관으로 선출된 뒤 갈리아 키살피나로 가서 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아르미눔 근처에서 새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로부터 자신이 부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인수브레스 족을 침공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포위되어 6,700명을 잃고 패주했다. 렌툴루스는 이 소식에 격분해 탐필루스를 규탄하고 로마로 쫓아보냈다.
기원전 186년 버려진 식민도시인 시폰토와 부생트 시를 재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82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그와 함께 리구리아를 임지로 부여받았다. 두 집정관은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펼쳤고, 원로원은 승리 소식을 접하고 하룻 동안 감사제를 드리기로 했다. 이듬해에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작전을 이어가 리구리아 부족 전체를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고, 기원전 181년 말 로마로 귀환한 뒤 파울루스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