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라틴어: Publius Rupil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29년 이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조부)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아버지) 루키우스 루필리우스(형제) 루필리아(딸)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2년 |
전임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
동기 |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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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루필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푸블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 루키우스 루필리우스는 기원전 133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31년 또는 130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그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원에 힘입어 로마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3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132년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원로원은 지난해에 살해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호라동을 조사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동료 집정관과 함께 많은 이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
이후 시칠리아에서 발발한 제1차 노예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향했다. 그는 반란군의 주요 요새인 타우로메니움과 엔누를 습격해 2만 명 이상의 노예를 살해하고 반란군 지도자 에우노스를 생포했다. 이듬해에도 총독의 권한으로 시칠리아에 남아서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던 그곳을 안정시켰고, 모든 도망 노예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내용의 렉스 루필리아(lex Rupilia)를 통과시켰다. 그 후 로마로 귀환하여 기원전 131년 개선식을 거행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하기 전에 죽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129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형제가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루필리우스의 딸 루필리아는 제1차 노예 전쟁에서 루필리우스의 휘하에서 장교로 복무한 퀸투스 파비우스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