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라틴어: Gaius Flavius Fimbri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아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4년 |
전임 |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리우스 |
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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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로마 정계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플레브스 신분으로 집정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2. 생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의 조상 중에는 어떠한 고위 행정관이 없었으며, "노동의 대가로 명예를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호민관을 역임한 뒤 평민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하지만 탁월한 웅변술을 기반삼아 여러 재판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쌓았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민법에 정통했고 변호사들 사이에서 "완전히 무례하고 혀가 날카롭고 너무 뜨겁고 자기 연설에 도취된" 인간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에서 어렸을 때 그의 연설문을 읽었지만 이 책을 쓰기로 했을 때 연설문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기원전 107년 이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04년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에 당선되어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이 되었다. 하지만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 후 알려지지 않은 속주에서 총독을 맡고 로마에 귀환했다가 마르쿠스 그라티디우스에게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되었다. 기소측 증인으로는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원전 100년 12월 다른 원로원 의원과 함께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추종자들과의 혈투에 참여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기원전 91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으로부터 두 아들을 낳았다. 아들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는 마리우스의 로마 진군 때 정적들을 학살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토벌을 수행하고자 출진한 로마군에 가담해 지휘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살해하고 군대 지휘권을 확보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그러나 술라의 회유로 부하들이 대부분 술라 편으로 넘어가자 자살했다. 또다른 아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1]는 술라에 맞서 싸운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부관으로 활동하다가 술라에게 귀순하기로 한 장교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1] 프라이노멘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