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라틴어: Gnaeus Octav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6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소아시아 라오디케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조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아버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5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동기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후임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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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노빌레스 가문인 옥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205년 법무관을 역임했다.기원전 172년 조영관을 맡았으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간인 기원전 169년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와 함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해 "로마 관료들의 자의적인 강탈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원로원의 결의가 있었으니 페르세우스와 손잡지 마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에 사망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대신해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10인 관리인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68년 함대 지휘관으로 선임되어 멜리베아 시를 함락시키고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한 페르세우스 왕을 압박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암피폴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전후 처리를 발표했을 때 그리스어로 통역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하여 파울루스가 개선식을 거행할 때 참석했고, 로마 최초의 코린토스식 기둥 건물인 포르티쿠스 옥타비아를 건설했다.
기원전 165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훌륭한 저택을 건설했고, 시민들은 이 저택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163년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함께 동방으로 가서 마케도니아의 정세를 살피고 카파도키아 왕국과 갈라티아간의 불화를 중재한 뒤 시리아로 가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기원전 188년에 체결된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을 준수하는 지 살펴보고, 협약에서 정한 제한 조건에 따라 셀레우코스 함대를 불태우고 전투 코끼리를 처치했다. 이에 제국 시민들은 강한 적의를 품었다. 기원전 162년, 그는 라오디케아 시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를 참관하던 중 렙티누스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살인자는 로마로 보내져서 처형되었고, 그는 라오디케아에 안장되었다. 이후 포로 로마노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아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12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