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라틴어: Gaius Fabricius Lusc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파브리키누스 루스키누스(조부) 가이우스 파브리키누스 루스키누스(아버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들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크시누스(증손자?)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82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 |
동기 |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
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임기 | 기원전 278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동기 |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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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극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의 가족은 기원전 306년 직후 로마로 이주하여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헤르니키 족의 일원이라고 추정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기원전 282년 파브리키우스 가문 최초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루스카니족과 브루티움 족에 맞서 투리 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큰 전투를 치러 2만 명을 사살하고 적장 스타티우스 스타틸리우스를 포함한 5천 명을 생포했다고 한다. 이후 반란을 일으킨 캄파니아 군단에 의해 점령된 레기움을 탈환하고 반란 주모자들을 로마로 보내 처형했다. 이후 개선식을 거행했고 포로 로마노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281년 타라스(현재 이탈리아 타란토)인들이 투리에 주둔한 로마 함대를 공격했을 때, 그는 여전히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로마 함대를 공격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사절을 타라스에 파견했지만, 타라스인들이 사절들이 그리스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고 비웃고 온갖 모욕을 가한 끝에 쫓아내자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타라스인들이 에페이로스 왕국의 군주 피로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피로스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280년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피로스 1세에게 패배한 뒤, 로마 포로들을 되돌려받기 위해 피로스 1세에게 파견된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다. 그와 함께 간 사절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로스는 막대한 금을 사절단에게 주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화 협상을 이끌어가려 했다. 플로루스와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에페이로스 왕국이 보유한 재산 일부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루스키누스는 선물을 받기를 거부했고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도 거부했다.
다음날, 피로스는 로마 사절들에게 압박을 가하기로 했다. 사절단이 피로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천막이 갑자기 치워지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로마인들을 향해 큰 소리를 냈다.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사절들은 화들짝 놀랐지만, 루스키누스는 태연한 얼굴로 피로스에게 한 마디 했다.
"당신의 금은 어제 나에게 아무런 인상도 주지 않았으며, 오늘 당신의 짐승도 그렇지 않을 것이오."
피로스는 루스키누스의 이러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로마 포로들을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풀어줬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로스의 주치의가 로마 당국에 비밀리에 접근해 피로스를 독살할 테니 보상을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키누스는 즉각 이 소식을 피로스에게 알렸다. 피로스가 이에 고마움을 느껴 자신의 측근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루스키누스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그 쪽에 가면 당신의 측근들이 당신을 버리고 나를 왕으로 옹립할거요."
이후 피로스가 로마군 포로 600여 명을 석방해 주자, 루스키누스는 포로들을 똑같이 석방해줬다고 한다.
기원전 278년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피로스가 시칠리아 원정을 떠난 틈을 타 피로스와 손잡은 루스카니족과 삼니움족을 공격해 승리한 뒤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77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는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용감했지만 매우 탐욕스럽고 재산 강탈을 서슴지 않는다는 악평을 받았기에 당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루스키누스는 그가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루피누스는 그 덕분에 당선되었다. 이에 루피누스가 감사를 표하자, 루스키누스는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 없소. 나는 노예로 팔리는 것보다 강도를 당하는 편이 더 낫다고 봤을 뿐이오."
기원전 275년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된 후 사치를 일삼는 원로원 의원들을 대거 제명했다. 지난날 그의 지원에 힘입어 집정관이 되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역시 10파운드의 은제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원로원에서 축출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사후에 포메리움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루스키누스가 가장 고결한 집정관이었다고 평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루스키누스의 딸들은 아버지가 별다른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에 시달리다가 원로원의 지원 덕분에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 법무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가 그의 증손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