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라틴어: Titus Quinctius Crispi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08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아풀리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조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아버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8년 |
전임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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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부관 출신으로, 그와 함께 한니발 바르카와 대적했으나 전사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퀸크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라는 이름을 썼지만 어떤 경력을 거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 루키우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그리스의 해방자'라는 칭송을 받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크리스피누스는 기원전 213년 시칠리아 시라쿠사를 포위한(시라쿠사 공방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최측근으로서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마르켈루스는 그를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시라쿠사를 해상에서 포위하게 하였다. 그는 시라쿠사를 지원하기 위해 온 카르타고 해군을 격퇴하는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212년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군대에 배속되어 카푸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때 카푸아 전사 바디우스(Badius)와 결투를 벌여 상대방의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히고 방패와 말을 노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시라쿠사 공방전에서 중요한 임무를 한창 수행하는 와중에 갑자기 카푸아로 배속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이 일화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기원전 210년 말 법무관에 선출되어 카푸아 주둔군 사령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209년 말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선임 직후 한니발 바르카의 배후지인 브루티움으로 진군하여 로크리 시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이 접근해오자 포위망을 풀고 베누시아로 진군한 마르켈루스와 합류했다. 양측은 베누시아와 반티아 사이에서 조우하였지만, 양측 모두 상대를 만만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섣불리 회전을 벌이지 않고 단지 소규모 전투만 벌었다. 이 무렵,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 300명을 2개의 로마군 진영 사이의 숲이 우거진 고지로 보냈다. 그리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고, 그저 그곳으로 향할 정찰대에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는 직접 그곳을 정찰하기로 마음먹고, 크리스피누스를 대동한 채 소규모 호위병들만 이끌고 그 고지로 향했다. 그들은 곧 누미디아 기병대의 습격을 받았고, 마르켈루스는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한편 크리스피누스는 중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는 진영에 도착한 뒤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의 인장을 얻었다는 사실을 모든 인근 마을에 알렸다. 그 결과,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의 명령을 사칭하여 여러 마을에 보낸 서신을 어떤 마을도 믿지 않았고, 한니발은 마르켈루스를 죽인 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는 마르켈루스가 이끌었던 군대를 베누시아로 보냈고, 자신은 카푸아로 가면서 원로원에 이 사건을 알렸다. 원로원은 그의 요청에 따라 세 명의 고위 인사를 파견했다. 사절들은 크리스피누스가 직접 로마로 가지 못할 경우 독재관을 지명하도록 촉구하라는 지시를 별도로 받았다.
크리스피누스는 부상이 심각하여 로마로 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독재관으로 추천했다. 그 후 카푸아에서 몇달간 신음하다가 기원전 208년 후반기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로마 역사상 최초로 두 집정관이 같은 해에 전사했다. 로마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던 칸나이 전투 때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지만,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살아남았는데, 이 소규모 접전으로 두 집정관이 나란히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