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Marcus Aemilius Lepid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6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2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 |
동기 | 마르쿠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 |
후임 |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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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지들은 기원전 28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레피두스'라는 코그노멘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그의 조부 또는 아버지였을 것이라 추정한다.기원전 232년 마르쿠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른 뒤 사르데냐 반란군을 진압하는 임무를 동료와 함께 수행했다. 그들은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지만, 뒤이어 코르시카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다가 모든 전리품을 잃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폴리비오스는 두 사람이 집권하던 시기에 호민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가장 가난한 시민들에게 피케눔의 정복지(이른바 켈트 들판)를 나눠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기원전 216년 말에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아우구르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아들들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22쌍의 검투사들을 포로 로마노에 데려와서 대규모 검투사 경기를 벌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세 아들 마르쿠스, 루키우스, 퀸투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루키우스와 퀸투스는 아버지를 위해 검투사 경기를 벌인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마르쿠스는 기원전 218년 법무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21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패했다. 하지만 바로와 파울루스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역사상 최악의 대패를 당했으니, 낙선한 게 다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손자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187년, 기원전 17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79년 감찰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180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하는 등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