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11:16:45

안티오코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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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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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6대 군주
Antiochus III the Great
안티오코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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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출생 기원전 241년
셀레우코스 제국 슈쉬
사망 기원전 187년 7월 3일
셀레우코스 제국 슈쉬
재위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기원전 223년 ~ 기원전 187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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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제호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Antiochus III the Great
가족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아버지)
라오디케 2세(어머니)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형)
라오디케 3세(아내)
안티오코스(장남)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차남)
라오디케 4세(삼녀)
클레오파트라 1세(사녀)
안티오키스(오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삼남)
참전 마그네시아 전투}}}}}}}}}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
3.1. 불안한 제국의 정세3.2. 제4차 시리아 전쟁3.3. 제국을 개혁하다3.4. 아나바시스(동방 원정)
3.4.1. 메가스(대왕)의 칭호를 얻다
3.5. 이집트 전선3.6. 로마-셀레우코스 전쟁3.7. 최후
4.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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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제6대 왕(BC 223~187 재위).

알렉산드로스 3세를 제외한 역대 그리스인 중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했으며, 카르타고를 패배시키고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떠오른 로마 공화국에 대항하는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다. 사후에도 지중해 세계에서 전설로서 회자되었으며, 로마에 대항하는 이들은 그를 모방해 자신을 새로운 안티오코스 메가스라고 선포하곤 했다.
"안티오코스는 한니발 이후 로마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왕이었는데, 셀레우코스 니카토르[1]가 지배하던 아시아를 거의 모두 손에 넣어 사나운 야만족을 잠재운 다음, 자기에게 아직도 싸움을 걸어올 유일한 나라인 로마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1권의 569쪽/ 현대지성사/ 이성규 옮김.

명과 암이 뚜렷한 군주로 평해지는데, 동방에서는 이란 지역을 다시금 제패하며 인도와의 경계에 이르는 제국을 재건하는 데에 성공한 반면, 서방에서는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맞섰지만 참담하게 무너져내렸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 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디케 3세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강화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를 개선하기도 했다.

2. 언어별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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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Antiochus Megas
그리스어 Ἀντίoχoς Μέγας[2]
중국어 安条克三世

3. 생애

3.1. 불안한 제국의 정세

파일:터키 셀레우코스 2.jpg
안티오코스 3세가 제위에 오를 때의 셀레우코스 왕조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사후 그의 장남인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가 왕위를 계승했다.[3] 그 과정에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케라우노스'(번개)라는 별명처럼 번개같이 그들을 진압하러 친정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친정 중에 군이 반란을 일으켜 살해당하고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총리에 헤르미아스, 소아시아 총독에 아카이오스 2세, 메디아와 페르시스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형제를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키고 반란자들의 척결에 나섰다.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할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은 잇따른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제국 개국 이래 최대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서쪽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도스 공화국, 페르가몬 왕국, 폰토스 왕국 등이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박트리아가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가 침입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왕의 시해자들과도 싸워야 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총독 직위를 유임시킨 몰론, 알렉산드로스, 아카이오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 중 선왕을 시해한 이들은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하자마자 간신 헤르미아스의 도움으로 처단했으나, 이는 헤르미아스가 충신이라서가 아닌 안티오코스 3세를 허수아비로 세워 막후에서 정권을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세 총독의 반란도 후술할 내용에서 나오듯 헤르미아스의 전횡이 자초한 일이었다.

소아시아 총독 아카이오스 2세는 장인인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2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스스로를 왕이라 참칭하며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고, 페르가몬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독립해 나갔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형제는 각각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총독으로서, 간신 헤르미아스로부터 왕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세워 자신들의 반란을 친위 쿠데타로 포장했고, 이에 많은 이들이 헤르미아스 축출이라는 명분에 공감하며 호응해 수도 셀레우키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형제는 수도를 접수하자 아카이오스 2세처럼 자신들을 왕이라 참칭하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이는 형제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한편 안티오키아에서 웅거하던 안티오코스 3세는 헤르미아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다. 형제의 친위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반란군은 어디까지나 헤르미아스를 제거하기 위해 호응했던 것이지 형제 왕을 섬기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안티오코스 3세가 친정에 나서자 대부분의 반란군은 그대로 투항했고, 이에 몰론은 직접 군을 이끌고 티그리스 강을 도강하여 북상해 안티오코스 3세가 이끄는 니시비스 방면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몰론은 안티오코스 3세를 잡는 데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군의 좌익이 고립되어 투항하는 것을 막지 못해 패배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의 승승장구가 이어졌고, BC 220년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형제가 마침내 자결하는 것으로 형제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잔당도 같은 해에 메디아 북서부의 아트로파테네를 수복하면서 일소했다. 한편, 안티오코스 3세가 승승장구하며 위세가 커지자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헤르미아스는 반역을 꾀했는데, 이 음모가 안티오코스 3세의 측근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음모가 발각되자 헤르미아스는 국왕파의 자객에게 살해당했는데, 이 또한 BC 220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로써 제국 내에서 그의 왕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 자신이 왕임을 주장하는 아카이오스 2세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3.2. 제4차 시리아 전쟁

BC 219년, 제국을 안정시킨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의 혼란상을 노려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시리아 남부로 진격했고 이리하여 제4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제3차 시리아 전쟁의 복수전이기도 했기에 이제 겨우 21세가 된 젊은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안티오코스 3세 측이 유리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 피레우스,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BC 218년에는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도시를 장악한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제국령으로 만들고자 약 1년간 머물며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이때 양측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이집트는 겨우 3년 전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즉위해 왕권이 매우 미약했다. 반면 안티오코스 3세는 얼마 전 형제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으로 기세가 올라 있었다.

이집트의 권력을 쥔, 그 때까지 부패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던 권신 소시비오스는 단기 결전으로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구전을 계획했고, 능변가를 특사로 보내 이집트가 곧 항복할 것처럼 속이며, 타결될 듯 타결되지 않는 협상을 진행시켜 안티오코스 3세의 이집트로의 진군을 지체시켰다. 그동안 소시비오스는 군을 재소집하고, 용병도 최대한 긁어모아 BC 217년 팔레스타인 수복에 나섰다. 소시비오스의 진언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친정에 나섰고, 소시비오스의 책략에 놀아나 필요 이상의 시간을 팔레스타인에서 허비한 안티오코스 3세는 기껏 얻은 영토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라피아에서 이집트군에 맞섰다.

라피아 전투는 헬레니즘 세계의 전투 중, 입소스 전투 이후 가장 큰 전투라고 일컬어진다. 셀레우코스군은 약 70,000명, 프톨레마이오스군은 약 80,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투입되었다. 코끼리도 투입되었는데, 양군은 코끼리를 양익에 나누어 배치했다.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다.[4] 산병 부대와 팔랑크스들도 이집트군을 향해 기세좋게 공격했고 이집트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진으로 너무 깊이 진군했고 그 사이, 좌익을 희생해 제정신을 차린 이집트군이 수의 우세를 앞세워 셀레우코스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앙에서 점차 셀레우코스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좌익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측에 가담한 그리스 용병들의 분전으로 괴멸되었다. 그 때까지 전장을 지키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무사히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셀레우코스군은 라피아의 참패를 뒤로 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라피아 전투의 여파는 아이러니하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쇠퇴를 초래한 전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마케도니아인과 함께 활약한 토착 이집트인[5]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인하게 되자 그동안 소외되었던 정치에서의 지분을 요구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이집트에 독립 세력을 구축해 이집트는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집트는 이 내전이 장기화됨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다.

3.3. 제국을 개혁하다

제4차 시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안티오코스 3세는 제국으로 돌아가 개혁을 시작했는데,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있던 관제를 개혁하여 문•무 대립을 없앴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때 추진되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제도를 혼합해 제국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완성하였다. 이 개혁으로 '스트라테고이'(장군)라고 불리는 지방 총독들이 문•무관을 통합하게 되었다. 또한 안티오키아만으로는 광활한 제국의 영토를 다스릴수 없기에 서쪽엔 사르디스, 동쪽엔 셀레우키아에 각각 행정 중심지를 설치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동방 문화보다 중시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토착세력의 반발을 낳기도 했다.

3.4. 아나바시스(동방 원정)

제4차 시리아 전쟁 이후 아카이오스 2세의 반란에 대처했다.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코스 3세는 BC 213년 아카이오스 2세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6]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BC 212년 안티오코스 3세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조공을 바쳤다. 파르티아아르사케스 2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점령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이듬해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다. BC 206년 안티오코스 3세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했고 인도의 왕족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다.[7]

3.4.1. 메가스(대왕)의 칭호를 얻다

안티오코스 3세는 사르디스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에, 별 수 없이 페르가몬 왕국, 비티니아 왕국, 카파도키아 왕국, 폰투스 왕국이 자신의 통치권 밖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년 후인 BC 212년, 그는 군대를 동쪽으로 출발시켰다. 그 성과로 아르메니아의 오론테스 왕조 제10대 국왕인 크세르크세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에게 바실레이오스 메가스 다시 말해 대왕이라는 명칭을 선사할 동방 원정[8]에 착수하였다. 우선, 준비 운동 격으로 BC 209년에 군대를 이끌고 원래는 셀레우코스 제국령이었으나, 지금은 파르티아의 수도가 되어 있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히르카니아(이란의 카스피 해 연안)까지 그들을 쫓아냈다. 파르티아의 왕인 아르사케스 2세는 사자를 보내 안티오코스 3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겠다고 하며 평화를 구걸했다.

다음 차례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었다. 박트리아 왕국은 원래 셀레우코스 제국령이었으나,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 1세가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디오도토스 1세의 아들 디오도토스 2세는 에우티데모스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에우티데모스가 디오도토스 왕가를 멸한 지 약 20년째 되었을 때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침공을 받았다. BC 209년, 파르티아를 복속시킨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격전 끝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아리우스 강 전투에서 박트리아 기병 10,000명을 몰살시키고 번개같이 진격하여 그 수도인 박트라(후일 발흐)를 포위했다. 이리하여 발생한 안티오코스 3세의 박트라 공성전은 유명하다. 2년간의 공성전에도 박트라가 함락되지 않자, 빨리 이 곳에서 떠나 지중해로 돌아가고 싶었던 안티오코스 3세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다. 에우티데모스도 이 공성전을 더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는 곧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박트리아 왕국이 맺은 조약의 내용은, ‘반역자 디오도토스를 처단한 공로로 박트리아 왕위에 에우티데모스를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에우티데모스가 어디까지나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위 군주로 섬겨야 한다는 내용이 전제된 것이지만, 어차피 셀레우코스 제국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안티오코스 3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다. 에우티데모스는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 갑자기 놀랄만한 제안을 했다. 바로 지난날의 원한을 씻게 되었으니,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고민 끝에 이를 응낙하기로 하고, 날을 잡아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리하여 박트리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완전히 화해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동방으로 좀 더 나아가기로 했다. BC 205년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로를 그대로 따라 카불 계곡과 힌두쿠시 산맥을 지나 인도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마우리아 제국의 왕족이었던 소파가세노스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받았다.[9] 그리고 셀레우코스 1세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해, 케르만 고원을 거쳐 셀레우키아로 입성했다. 이 성과는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고, 그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는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그리스인의 식민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셀레우키아에서 그는 또 새로운 동방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원정 방향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페르시아 만의 남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이다. 이 원정의 주 목적은 제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아라비아 유목민의 중심 도시인 게라(Gerrhae)를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원정은 게라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력이 재건되는 것으로 짧게 끝났다.[10]

3.5. 이집트 전선

파일:셀레우코스 터키 2.jpg

BC 205년(혹은 BC 204년), 라피아의 영웅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아직 유아에 불과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마우리아 제국과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요한 맹우(盟友)였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손을 잡았다. 두 군주는 이집트, 페르가몬, 트라키아를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분할하고, 서로가 필요하면 즉시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페르가몬이나 로도스 등이 셀레우코스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BC 200년, 안티오코스 3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오론테스 왕가를 멸망시켰다. 앞으로 10년간, 아르메니아 고원은 안티오코스 3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거대한 봉신국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안티오코스 3세와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을 로마가 알게 되었다. 로마는 사절을 보내, 이집트 그 자체만은 침공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두 군주는 그런 요구에 흔쾌히 응했고, 로마의 사절은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돌아갔다. 같은 해인 BC 200년, 안티오코스 3세는 드디어 팔레스티나를 침공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출신의 유능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장군, 스코파스의 눈부신 활약은 안티오코스 3세를 또다시 좌절시키는 듯 했다. BC 199년에는 스코파스의 지휘하에 이집트군이 팔레스티나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거의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파스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었다. BC 198년, 오늘날 요르단인 파니온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과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군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파니온 전투에서 스코파스는 셀레우코스군이 동방으로 원정하면서 안티오코스 3세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카타프락토이의 매운 맛을 봐야만 했다. 개전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카타프락트는 이집트의 기병대를 쓸어버렸고, 그들은 그대로 도주해버렸다. 버림받은 보병대는 측면에서 들어오는 카타프락트와 정면에서 들어오는 팔랑크스의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어 결국 이집트군은 여기서 대패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팔레스티나 정복을 마침내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의 기세는 바야흐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11]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향하에 놓였다.

3.6.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영광과 함께 암울한 소식 역시 존재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로마와 대결하여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깡패마냥 휘젓고 다니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가 로마군에 의해 간단히 압살당한 것은 동부 지중해 세계에 큰 경종을 울렸다. 필리포스 5세는 수도 펠라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그동안 필리포스 5세가 애써 키워놓은 마케도니아의 촌락을 약탈하고 다녔다. 필리포스 5세는 이런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항전한 이유는 안티오코스 3세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마침 팔레스티나에서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어 있던 상황이었고, 페르가몬 왕국에 군대를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필리포스 5세를 도울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필리포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로마에 항복하여 그 보호국이 됨으로써 동맹을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는 곧 로마에 더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그리스 내의 분쟁에서 언제나 필리포스 5세의 반대편을 들었고, 이런 불만은 계속 쌓여가 종국에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안티고노스 왕조가 반(反)로마의 기치 아래 다시 비밀리에 우호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유다는 로마인들의 명성을 들었다. 그들은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저희 편에 서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호의를 베풀고, 저희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누구와도 우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말 대단히 강하다는 것이었다. 유다는 또 그들이 갈리아인들과 용감하게 싸워 그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에스파냐 지방에서 그곳의 은광과 금광을 점령하려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로마인들은 그 지방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계획대로 끈기 있게 그곳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고 세상 끝에서 쳐들어온 임금들을 무찌르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다른 임금들은 그들에게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그들은 또 키팀 임금 필리포스와 페르세우스를 비롯하여 자기들에게 반항하는 자들과 싸워서 그들을 무너뜨리고 정복하였다. 그리고 코끼리 백이십 마리와 기병대와 병거대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싸우러 온 아시아 임금 대안티오코스도 쳐부수었다. 그들은 안티오코스를 사로잡아 그와 그의 뒤를 잇는 임금들이 많은 조공과 인질을 바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도, 메디아, 리디아 등 가장 좋은 지방을 안티오코스에게서 빼앗아 에우메네스 임금에게 주었다.

《성경》 <마카베오 상권> 8장 1~8절

BC 196년, 시리아 전쟁이 매듭지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하고, 시리아 경영에서 영원히 손을 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게 되었다. 파니온 전투로 인해 역전된 역학관계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상실할 때까지 계속된다. BC 198년, 시리아 전쟁과는 별도로 안티오코스 3세는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다. 이는 오히려 그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하여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BC 197년에는 이오니아 도시국가가 거의 모두 안티오코스 3세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이들 중 몇몇이 로마에 지원을 청했고, 양 강대국간의 적대감이 본격화되었다. BC 196년, 안티오코스 3세는 트라키아에 상륙했고, 여기서 자신의 종주권을 선언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최대 영토는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리스는 권력의 공백상태로 안티오코스 3세의 트라키아 합병 선언에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다. 트라키아를 합병한다고 선언함[12]으로써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관계 악화가 상당히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행보 속에서,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궁정에 망명 신청을 낸 사건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 한니발의 활약에 관해 들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것이 그 자신에 걸맞은 대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싶어 했으나, 그가 나중에 이끈 것은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다(...)[13]

BC 191년, 때마침 로마에 불만이 많던 아이톨리아 동맹이 사령관으로 안티오코스 3세를 선출하자 그는 군대 10,000명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지난날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을 이겼던 바로 그 테르모필레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군은 숫자도 많았고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포위당했으므로, 10,000명이 거의 다 죽는 참사 끝에 안티오코스 3세만 병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시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지중해 서쪽 최대의 군사대국과 처음으로 맞붙는 중요한 순간에 상대를 너무 얕잡아본 것이었다.

한니발에게는 페니키아 해군이 맡겨졌다.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로도스는 당시 최강의 해군을 가진 국가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 페니키아 해군을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격파했다. 한니발의 패배를 접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해군 제독 폴리크세니다스의 지휘하에 함선 90척을 맡겨 미오네소스 해전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비슷한 수의 로마-로도스 연합 선단과의 싸움은 또다시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이제 셀레우코스 제국이 로마군의 아시아 상륙을 제지할 방도가 없어졌다. 양 군은 마그네시아에서 충돌했다. 셀레우코스 제국 흥망의 분기점이 된 이 회전을 마그네시아 전투라고 한다.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이끄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총 70,000명 규모로, 카타프락트를 포함한 기병이 12,000명이었으며, 낫 달린 전차, 코끼리 54마리 등 제국 내에서 징집할 수 있는 병종은 모두 모았다. 총 50,000명 규모인 로마군은 로마-그리스의 혼합 병종으로 무장했으나, 대부분이 로마군이었고, 그리스인은 주로 펠타스토이와 호플리타이로 전투에 참가한 듯 하다. 기병은 5,000명 가량이었다. 결전 장소인 마그네시아는 개활지가 아니라서 기병을 활용하기 적합지 못한 장소였다.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좌익에서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전차가 기병의 진군을 방해한 것이다. 그러자 우익에서 안티오코스 3세 자신이 이끄는 카타프락트 부대가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머지 로마군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의 캠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장을 뜻하지 않게 이탈했고, 그와 동시에 페르가몬 왕으로 로마의 동맹 기병을 담당한 에우메네스 2세가 혼란에 빠져있던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좌익으로 돌격하여 그들을 괴멸시켰다. 중앙에서는 로마군이 코끼리를 겁먹게 하는 데 성공하여 그와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을 찔러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전투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진지가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무너진 이후였다.[14]

리비우스에 의하면 로마군의 피해는 349명에 불과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50,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15] 동방을 휘젓고 다니며 '메가스'란 칭호를 받았던 군주의 전과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퍼펙트한 패배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결국 로마군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BC 188년, 그는 로마인들과 아파메아에서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굴욕적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15,000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새로운 국경선으로 타우루스 산맥이 설정되었다. 제국 해군의 규모 역시 로마의 규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또, 후일 안티오코스 4세가 되는 자신의 3남을 로마에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되고자 했던 안티오코스 3세의 야망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3.7. 최후

파일:터키 셀레우코스 1.jpg
로마에게 패배하고 맺은 아파메아 평화조약 이후의 셀레우코스 왕조

사실, 제국의 주요 수입원은 시리아 북부와 바빌로니아였기 때문에 무거운 배상금이나 소아시아 포기는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제국의 위신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바실레이오스 메가스”의 권위를 선언한 지 불과 10년만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는 것, 이 때문에 속주들은 곧바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군인 아르탁세스 1세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아르메니아가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또, 파르티아가 공격해 오기도 했다. 제국의 동부 속주는 또다시 난장판이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날 결심을 했다. 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제국에 충성하고 있었으므로, 셀레우키아에서 출발하여 이란 고원의 독립적인 세력들을 토벌하고 이 지역에 다시 제국의 권위를 세우고 싶었다. 그는 다시 원정군을 꾸려 셀레우키아를 출발했다. 처음에는 원정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가 여기에서 최후를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셀레우키아에서 가까운 자그로스 산맥의 바알 신전을 약탈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갑자기 암살자가 뛰쳐나와 그를 찔렀다. 치명상을 입은 안티오코스 3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4. 사후

그가 암살당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은 장남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BC 187~175)가 통치했다. 그는 긴축 정책을 취하여 로마나 주변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힘썼다. 셀레우코스 4세는 훗날 데메트리오스 1세가 되는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고, 그 대신 동생인 안티오코스를 데리고 왔다. 셀레우코스 4세는 로마에 배상금을 모두 갚고,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다시 지중해와 중동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4세는 대신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하고, 그에 편승하여 왕위를 얻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안티오코스 4세는 다시 셀레우코스 제국을 강대국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으나, 그리 길지 않은 통치 끝에 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끌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명장 폼페이우스가 '제국'을 접수할 때 즈음에는, 안티오코스 3세가 이룩했던 영역의 20분의 1도 안 되는 조그만 구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하 장군이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시자인 셀레우코스 1세[2] Μέγας '메가스'는 '대왕'이라는 의미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왕' 역시 '메가스'이다.[3] '케라우노스'란 번개라는 뜻으로, 이는 그의 행동이나 결단이 신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4]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도 코끼리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컸다. 코끼리 항목 참조[5] 그리스어로 '마치모이'[6] 당대엔 '아나바시스'라고 불렸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와는 다르다!(BC 212~205)[7] 시조 셀레우코스 1세 때처럼 코끼리를 받아온다.[8] '아나바시스'. 크세노폰아나바시스와는 다르다.[9] 셀레우코스 1세 시절에도 인도까지 가서 코끼리를 받아온 적이 있다. 다만 대부분이 늙고 병들어서 금방 죽었다.[10] 게라 시민들에게 500탈렌트를 조공받았다.[11]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 5세는 로도스 및 페르가몬과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에 원정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필리포스 5세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로마에게 패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그를 돕지 않았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 5세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12] 시조 셀레우코스 1세가 트라키아를 점령한 적이 있음을 들어 정당성을 주장했다.[13]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당시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사람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돌아오지 않고 왕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이 계획은 철회된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므로 이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 적어도 카르타고는 그에게 복속될 게 뻔한데, 그 때도 한니발이 신하로 남아 있으려 했을까? 여러모로 한니발에게 독립된 지휘권을 주지 않은게 멍청한 결정이라 보긴 어렵다. 안티오코스 3세가 너무 쉽게 말아먹어서 문제였지만.[14] 반면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쓴 《로마사》 4권에 의하면, 로마군이 궁병과 투석병 등 원거리 병과들을 내세워 셀레우코스 군대의 중무장 보병들을 계속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괴롭히다 지치게 하여 무너뜨렸다고 기록했다.[15] 단 이 기록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리비우스가 전하는 로마군의 전과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