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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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6대 군주 Philip I Philadelphus 필리포스 1세 | ||||
<colbgcolor=#000> 출생 | 미상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사망 | 미상 | |||
셀레우코스 제국 킬리키아 올바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94년 ~ 기원전 8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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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안티오코스 8세 그리포스(아버지) 트뤼파이나(어머니)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첫째 형)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둘째 형)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에로스(남동생)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니소스(남동생) 라오디케 7세 테아(여동생)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아들) | |||
참전 | 셀레우코스 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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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26대 군주. 사촌인 안티오코스 10세에 대항하여 쌍둥이 형 안티오코스 11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안티오코스 11세가 전사한 후에는 데메트리오스 3세와 연합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3세와 내전을 벌이다 수세에 몰리자 파르티아군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승리하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그 후 다마스쿠스를 점거한 안티오코스 12세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뒤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2. 생애
안티오코스 8세와 트뤼파이나의 셋째 아들이다. 형으로 셀레우코스 6세, 쌍둥이 형제로 알려진 안티오코스 11세가 있었고, 남동생으로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2세, 여동생으로 라오디케 7세 테아가 있었다. 기원전 113년 안티오코스 8세의 이부동생 안티오코스 9세가 반란을 일으킨 이래, 제국은 안티오코스 8세 세력과 안티오코스 9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가 최고 관료 헤라클리온에 의해 암살당하자, 안티오코스 9세가 일시적으로 제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6세가 킬리키아 서부의 셀레우키아 시를 거점으로 삼았고, 데메트리오스 3세가 다마스쿠스에서 자립했다.기원전 96년 말, 셀레우코스 6세가 안티오코스 9세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모의 원수인 안티오코스 9세를 죽인 뒤 안티오키아에 입성하여 단독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가 기원전 94년 반란을 일으켜 안티오키아로 진격했고, 셀레우코스 6세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몹수에스티아로 피신했으나, 거기서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가 폭동에 휘말려 사망했다. 이에 필리포스 1세는 쌍둥이 형제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고, 기원전 93년 초에 안티오코스 11세와 함께 몹수에스티아를 약탈해 맏형 셀레우코스 6세의 복수를 단행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11세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해 안티오코스 10세를 몰아내고 몇달 동안 수도에서 통치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10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했고, 기원전 93년 말 오론테스 강 인근에서 안티오코스 11세를 격파했다. 안티오코스 11세는 적의 추격을 피해 강을 도하하려다가 물에 빠져 익사했다. 필리포스 1세는 킬리키아에 할거하면서 다마스쿠스의 데메트리오스 3세와 연합해 형제들의 원수인 안티오코스 10세에 대항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10세는 킬리키아를 곧 공략했고, 필리포스 1세는 베로에아에서 농성했다. 그러던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8년, 안티오코스 10세가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와 연합하여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던 중 전사했다.
이후 안티오키아를 공략한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 필리포스 1세에게 칼을 겨누었다. 기원전 87년, 필리포스 1세는 베로에아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의 보병대 10,000명과 기병대 1,000명에게 포위당했다. 이에 파르티아에 구원을 요청했고, 파르티아 총독 미트리다테스 시나체스가 출진해 데메트리오스 3세의 진영을 포위했다. 물을 구할 길이 없어 수많은 병사가 갈증으로 고통받자, 데메트리오스 3세는 어쩔 수 없이 파르티아군에 항복한 뒤 파르티아로 끌려갔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사라진 뒤, 필리포스 1세는 안티오키아를 공략하고 화폐의 무게를 1,600g에서 1,565g으로 줄여서 새로 발행했다.
그러나 그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안티오코스 10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아들 안티오코스 13세와 함께 시리아에 은신하여 왕위를 되찾을 기회를 노렸고, 막내동생 안티오코스 12세는 다마스쿠스에서 할거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83년, 필리포스 1세는 안티오코스 12세가 나바테아를 상대로 원정을 떠난 틈을 타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갔다. 그를 위해 성문을 연 도시 총독 밀레시우스는 새 주인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반기를 들어 다마스쿠스에서 필리포스 1세를 몰아냈다.
다마스쿠스에서 쫓겨난 뒤 필리포스 1세의 행적에 관한 문헌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비문이 킬리키아의 올바 시에서 발견된 것을 볼 때,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올바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살다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여담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역대 군주들이 발행한 주화 중 가장 오랫동안 발행되었다. 이 사람의 초상화가 그려진 주화 도안은 시리아 속주와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로마 공화국 발행주화인 '필리포스 주화'로 불리며 기원전 13년경까지 계속 발행되었다.이렇게 된 이유는 비용 절감을 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셀레우코스 제국의 향수를 적당히 이용해 활용하기 용이하고, 주화 함량이 적당해 경제적 유용성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지 주민과 로마인 모두 필리포스 1세를 시리아 셀레우코스 제국의 마지막 정통군주로 생각해 필리포스 1세의 것을 바꿀 생각이 없었던 정치적 이유도 컸다. 따라서 시리아 속주의 초대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이래, 로마 총독들은 셀레우코스 최후의 군주 중 그의 얼굴이 그려진 주화는 뒷면에 로마의 베스타 여신 등과 결합시켜 계속 발행했다. 이는 자치권을 얻은 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도시들도 비슷해, 그들은 로마 정부와 아우구스투스의 묵인 아래 기원전 13년까지 필리포스 1세의 얼굴을 넣은 주화를 계속 발행, 유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