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쥐: 남들 하는 대로만 하자. 그게 내 좌우명이야! 괜히 튈 필요 뭐 있어? 골치 아픈 것보다 안전한 게 낫잖아. 내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 나그네쥐: 개X끼야.[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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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중심리(群衆心理 / Herd mentality, Mob Mentality)란 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할 때 집단에서 고립되지 않거나 모욕당하지 않으려고 그 행동에 동조하려는 심리를 뜻한다. 이는 현대에도 SNS 활동에서 목격되곤 한다. SNS에서 특정 여론이 형성됐을 때 그 여론에 거스르지 않으려는 심리를 겪는 경우가 예시다.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2. 예시
긍정적 예시[2] | 부정적 예시[3][4] |
일반적인 예시로는 난 별로 관심이 없는데 사람들이 많이 입어서 나도 사서 입는다든가, 모여서 뒷담화를 한다거나, 빨간불에 다함께 무단횡단을 한다거나, 다들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경우가 있다. 사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군중심리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3. 귀스타브 르 봉의 저서
귀스타브 르 봉이 1895년에 저술한 책.
프랑스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한 르 봉은 군의관으로 보불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9월 대학살 등 각종 비이성적인 군중의 폭동에 충격을 받게 된다. 이에 의사로서 돈을 벌어 연구 후 쓴, 논문 형식을 탈피한 에세이 특징의 저서이다. 처칠, 레닌, 스탈린 같은 지도자들과 프랑스의 샤를 드골도 애독자였고 프랑스 군부 인사들과도 이 문제로 편지 교류도 하였고 르 봉이 주최하는 정기 모임에 각계 인사들이 모여 주요 사회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르봉을 매우 만나고 싶어했다. 무솔리니는 집권 초기 이탈리아의 만성적인 사회 무질서를 해결하였고 르봉과 말년에 몇통의 편지교류를 하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르봉의 사상을 찬양하면서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국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르 봉이 군중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유일한 사상가는 아니지만, 서유럽의 정치인들과 파시즘을 내세운 베니토 무솔리니나 아돌프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에게 호응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5] 그 이유는 다른 사상가들은 "군중은 이렇게 나쁘고 저렇게 나쁘다. 한마디로 통제 불능이다."의 결론을 낸 반면 유독 르 봉만큼은 "군중은 이렇게 나쁘고 저렇게 나쁘다. 그러나 이 점을 권력자들이 잘 활용할 여지가 있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르 봉의 관점을 취해서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형법체계를 고안하거나 집회 및 시위를 제한하는 등의 현장 적용도 바로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4. 상기 책에서 제창한 심리학 용어
4.1. 고전적 설명
같은 말로 대중심리가 있다.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상호작용할 때 나타나는 개인 수준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심리적 현상을 막연히 일컫는 말. 르 봉과 다른 사상가들이 제안했으나, 이후 학술적인 정교화는 필립 짐바르도와 같은 인물들의 몰개성화(deindividuation)라는 개념으로 비로소 확실히 정립되었다.[6]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수용소 학대 사건이나 《루시퍼 이펙트》 같은 책들의 출간과 함께 종종 주목받으며 꾸준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르 봉의 개념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상실"(loss)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실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짐바르도나 초창기 사회심리학자들에겐 주체성 내지는 "자기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20세기 중반 에릭슨이나 로키치 같은 연구자들이 볼 땐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르 봉의 생각에 가깝게 옮겨 보자면, 군중 속에 진입하는 개인은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과 관념 속에서 "나"에 대한 감각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내가 없어지고 군중만이 남게 된다는 것.[7] 다시 말하면 익명성에 기대어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이를 르 봉은 군중에 침잠(submergence)한다고 불렀다.
르 봉에 따르면, 군중에 잠겨드는 개인은 "나"에 대한 생각을 상실한 끝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고차원적인 이성과 규범, 현실 인식은 모두 사라진 후, 개인은 그저 그때그때 드는 충동과 감정, 욕구에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을 일체 생략한 채로 야수 떼처럼 아우성을 치며 자기 좋을 대로 난리법석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르 봉은 이 상황을 가리켜 전염(contagion)이라고 불렀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오싹함을 느낄 법하지만, 르 봉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른 사상가들이 미처 내놓지 못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군중이 비단 야만인 떼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향력에 크게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권력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간단한 말 몇 마디, 분노를 자아내는 상황, 센세이셔널하고 자극적인 사건, 주변 사람들의 행동, 이 모든 것이 개인을 의도치 않게 휩쓸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시위나 항쟁에서 연단에 선 지도자가 어째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 만일 이런 핵심 연사들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전례없이 통합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르 봉은 이를 암시(suggestion)라고 불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의 최면 열풍이 휘몰아치던 배경을 감안하면 굉장히 직관적인 설명이었다.[8] 평소라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이었겠지만 일단 군중 속에만 들어가면 (평소에는 코웃음쳤을) 감정적인 몇마디만으로도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합리와 이성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군중심리는 역사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해 왔으며 지혜있고 간교한 정치인들은 대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사용해왔다. 그 결과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말이다.
타인을 잘 꼬드기는 사람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군중심리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면 매우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 대표적인 예가 나치 독일. 독일은 이 때문에 연방헌법수호청을 만들어 또 다른 나치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사회 전체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필요하다면 정당 해산까지도 추진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많지만 대중의 뜻대로 무조건 따르면 다시금 나치가 생겨날 수밖에 없으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행동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이 독일 정부의 견해다.
이후 몰개성화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제시한 레온 페스팅어 등의 연구자들은[9] 집단 속에 소속된 개인이 더이상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만 대우받게 될 때 발생한다고 개념화했다. 이들은 르 봉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았지만 오늘날 군중(crowd)이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더 이상은 쓰이지 않게 된 것은 이들이 첫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 역시 네브라스카 심포지엄에서 몰개성화에 대해 이론적으로 정립하였으며, 이들이 70년대 이전까지 다져놓은 개념이 바로 몰개성화라는 현상, 더 폭넓게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게 된 일반적인 "군중" 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10]
아무튼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저건 군중심리다" 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다음의 기준들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상 충족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군중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감각을 잃어버리고,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특징을 인식하지 못한다.
- 군중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어떤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도덕적이거나 법적인 책임감을 경험하지 않는다.
- 군중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어떤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멈추거나 통제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 없다.
- 군중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어떤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그때그때의 욕구, 충동, 감정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 군중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상황과 분위기, 몇 마디 단순한 선동, 자극적인 사건, 옆 사람의 행동과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4.2. 비판과 전환점
늦게는 70년대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스탠리 밀그램이나 필립 짐바르도 등에 의해 힘이 실려 오던 군중 연구는 사실 그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여러 비판과 반론들에 노출되어 왔었다. 예컨대 1924년에 플로이드 올포트가 자신의 사회심리학 교과서에서 르 봉이 공허하고 무의미한 소리나 한다고 대차게 까댔으며, 1972년에는 터너와 킬리안의 저서 《집단행동학》(Collective Behavior)이 출판되면서 "군중들이 원래 그렇게 혼돈의 카오스 상태인 것이 아니라, 군중을 이끌고 있는 핵심 연사들이 누구인지를 봐야 한다" 는 지적이 나왔다. 즉 어떤 군중의 성격은 핵심 연사들이 누군가에 크게 좌우되며, 이들이 아군이라고 지정해 준 대상은 보호하고 (예: 특정 상점의 약탈을 막기 위해 자청해서 지켜준다거나) 적군이라고 지정해 준 대상은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변별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군중이 피아식별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많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다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전운동을 하고, 히피 문화를 향유하며 미국의 시민권 운동에 참여해 본 사람들이 속속 학계로 유입되면서 시대가 달라졌다. 학계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이전까지의 연구자들이 죄다 "공포에 질린 외부자의 관점" 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군중심리란 이런 거야~" 하면서 떠들던 이론가들 치고 실제로 군중을 현장에서 함께 체험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시위도 해 보고 투쟁도 벌여 본 젊은이들이 대학원에 들어와 석박사 학위를 거치면서 "아닌데요? 제가 실제로 시위도 뛰고 다 해 봤는데 전혀 안 그렇던데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11]
비단 내부자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이미 사회적으로도 군중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는 확산되고 있는 중이었다. 예컨대 1969년에 미국에서는 폭동 위원회(US riot commission)가 발족한 바 있는데 이는 60~70년대 빈발했던 흑인들의 도심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이들은 20여 개의 도시들에서 1,200여 명과의 인터뷰를 거쳤고, 그 결과 이 위원회는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군중에 대한 관점을 뒤엎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폭동에 참여했던 이 흑인들은 사회적으로 겉도는 히키코모리(?)나 무임승차자들이 결코 아니었고, 흥청망청 인생을 낭비하지도 않았으며, 충동적인 성격도 전혀 아니었고, 심지어는 전체 흑인 인구에 비교해서 교육을 많이 받은 편에 속했던 것이다.[12] 이 흑인들은 그때까지 주류 사회가 막연히 생각했던 "사회 불만분자" 들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학과 같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시위대들이 "사회의 변두리나 하층민인 것도 아니고, 사회 그 자체를 적대하는 것도 아니다" 라는 인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많은 분야들의 연구자들이, 그리고 르포 취재를 하는 저널리스트들이 시위 현장을 경험하면서 "놀랍도록 패턴화되고, 서로 의지하고 공유하는 독특한 대의명분 및 신념이 존재한다" 는 것을 발견해냈다.[13] 이와 같은 추세는 처음 군중심리라는 떡밥을 던졌던 사회심리학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4.3. 현대의 군중심리 이론
한때 병리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거시사회적 역동은 1979년을 맞아 급작스런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폴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이펠(H.Tajfel)과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존 터너(J.Turner)는 사회적 정체성 이론(SIT; social identity theory)이라는 것을 제안했는데, 이들은 개인이 "내가 누구지?" 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개인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에 따라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그 개인이 소속된 집단의 특성에 따라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생각이 나타나자 집단심리 연구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아직도 이 이론은 사회심리학계에 있어 최고존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이들은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게 "얻고, 잃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들에 따르면, 집단에 진입하는 개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정체성은 다층적이기에 집단 내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나는 이 집단의 구성원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는 계기가 존재하는가일 뿐이었다.[14] 이러한 이중성(duality)은 정체성이 상실된다는 설명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이 관점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곧 마이클 호그(M.Hogg)나 알렉산더 하슬람(A.Haslam) 등의 다른 이론가들을 불러모았고, 곧이어 이들의 노력으로 후속 이론으로서의 자기범주화 이론(SCT; self-categorization theory)과 같은 설명들이 나왔으며 이 역시 초대박을 터뜨렸다(…). 이때 참여했던 이론가들 중 스티븐 라이처(S.Reicher)는 동료 연구자 존 드루리(J.Drury) 및 클리포드 스토트(C.Stott) 등과 함께 당시 영국의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던 폭동 및 소요사태에 대한 학문적 설명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관건은 당시 최첨단의 이론으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정체성 접근(social identity approach)을 활용해서 종래의 군중심리를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는가였다. 1982년 이래로 르 봉의 고전적 관점과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비교하는 작업을 지속하면서 라이처는 르 봉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라이처에 따르면, 광장에 모인 시위대나 군중들은 명확한 집단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잘 해 봐야 버스정류장에 모인 사람 이상 경기장에 모인 서포터 미만의 관계에 불과한 것. 그러나 핵심 연사들이 연단에 올라서서 메시지를 외치기 시작하고 경찰들이 시위를 통제하기 시작하는 순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들 군중들은 심리적인 수준에서 집단 의식을 갖게 되고, 연사들은 그들의 지도자로 간주되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군중들은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우리에게 적이 있다면 누구인가?" 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들에게 집단의식을 부여해 줄 연사에게 가장 많은 성원을 보낸다는 것이다. 귀에 착착 들어오는 슬로건, 결코 길지 않지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구호들은 이 세 가지 질문 중 하나 이상에 답변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인기를 끌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군중이 경찰과 대치하는 상태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한 군중들은 계속해서 서로 간에는 내집단(in-group) 의식을 공유하게 되고, 경찰과는 외집단(out-group)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기존의 군중심리 이론가들은 군중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내지는 무도덕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거라고 막연히 가정해 왔다. 그러나 라이처의 새 이론적 접근에 따르면, 군중들은 경찰과 대치해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단결되고 서로를 신뢰하며 협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내집단 도움행동이 극한까지 발현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집회 장소를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다치면 너나할 것 없이 붕대로 감아 주고,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와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고, 낯선 청년과 등을 맞대고 서서 서로의 존재감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힘주어 지적하듯이 내집단에 대한 이런 태도가 "항상" 외집단에 대한 적대행위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라이처는 경찰의 통제가 항상 격한 저항을 불러오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다른 일이 없다면, 군중은 기본적으로 경찰에 대해 "집회 현장의 질서와 안전을 지켜주려 하는 사람들" 이라고 여기고 외집단 적대행동을 보이지 않지만, 경찰측에서 우발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적대행위를 하는 것이 포착되면 집회 연사에 의해 두 집단 간의 관계가 새롭게 재조정된다. 선량한 시민들의 정당한 항의 vs.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권력의 시녀들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경찰 측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시위대에 대해서 "광장으로 몰려나온 옆집 아저씨들과 뒷집 아주머니들" 정도로만 여기지만, 일부 시위대가 흥분하여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이들도 내집단 vs. 외집단 적대의식이 자동으로 떠오르면서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위험한 불순분자들" 로 상대방을 재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황을 끝없이 악순환으로 몰고 가는 극한의 피드백으로 이어진다.
몰개성화의 경우 자기범주화의 관점에서 보면 집단 내 대체가능성이나 범주적 전형성 등의 다른 용어들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개인은 집단 내에서 완전히 익명성의 수풀을 활용해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에 진입한 개인이 추구하는 것은 그 집단에서 추구하는 목표와 이상을 체화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집단 내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도약해 올라가는 것이다. 집단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거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1991년에 매릴린 브루어(M.B.Brewer)라는 심리학자는 집단 속의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특성(distinctiveness)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찾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를 위시한 영국 사회심리학계는 폭동이나 소요사태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에 있어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라이처나 스토트, 드루리 등의 연구자들이 영국 전역의 시위 및 폭동 현장마다 직접 찾아가서 발로 뛰면서 그들에게 질문하고 소통하며 논문을 썼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시위 진압은 한국 일각에서 "기마경찰이 시위대를 짓밟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팬다" 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연구자들이 80~90년대 논문들에서 묘사한 사건 현장을 보면 그건 많이 양반이고(…)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황들이 많다.[15]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그것이 일견 무질서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집단과 내집단의 복잡한 심리적 역동으로 설명할 때 가장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즉, 대규모 폭력의 원인은 의외로 무질서가 아니라 도리어 체계적 사고방식에 있다는 것. 현대에 들어 이들 연구자들은 "군중은 무질서한가?" 의 케케묵은 질문을 뒤로 하고 군중이 모일 때 공중보건 문제는 어떻게 확산되고 예방될 수 있는지에 골몰하고 있다.
다음의 과학동아 기사도 참고해 보자. #(上) #(中) #(下)
4.4. 대한민국에서 군중심리의 쓰임
대한민국의 군중심리는 일종의 쏠림현상 혹은 편승 효과, 즉 남들이 다들 하니까 자신도 그게 좋을 거라 생각해서 좋다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의 경우 특정 작품으로의 과도한 관람객 쏠림[16], 스포츠의 경우 길거리 응원[17], 정치사회 이슈의 경우 시위 및 사회운동의 참여를 예로 들 수 있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신상털이를 하거나 비난을 받을 만한 특정 인물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단체로 몰려가서 악성 댓글을 다는 것도 군중심리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군중심리가 작용했기에 참여하게 된 부분도 일정 부분 존재하지만 이걸 이유로 반대 측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판할 때 군중심리에 휘둘린다고 좀비나 레밍에 비유하는 경우도 많다. 군중심리라는 단어 자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말랑말랑(?)해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우리편에게 좋으면 집단지성, 상대 편에게 좋으면 군중심리라며 선전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군중심리라는 단어 자체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어서, 라벨링의 효과만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전략적인 명명이 된다.4.5. 군국주의, 파시즘과 군중심리
군중심리가 집단의 비이성적인 단체행동이라고 가정했을 때 넒은 의미에서 파시즘과 군국주의도 군중심리의 하나다. 더 정확하게는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군중심리라고 하겠다.[18] 파시즘이나 군국주의가 기타의 군중심리와 다른점은 단일화된 우상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여기서 단일화된 우상의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 김일성 등이다. 그리고 그것이 파편화되어 하부조직으로 하달될 때는 보통의 군중심리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비무장 민간인이나 포로에 대한 학살, 소수집단에 대한 비이성적 증오 등이다.일부에서는 감성적인 다수의 군중심리가 파시즘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의 종착역이 군국주의라는 것이다. 강한 군대와 강한 나라라는 구호는 다수의 대중을 최면시키고 항구적인 군중심리 상태에 빠지게 만드게 된다. 변질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에서도 이러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의 공통점은 선군정치와 독재정치이다. 요약하자면 소수의 의견이나 민주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독재를 기반으로 (강한 나라, 소수를 희생시켜서 얻은 발전 등)환상에 최면된 상태에서 비이성적이고 광기적인 행동을 국가단위로 실행하는 것이 군국주의와 파시즘이라 하겠다.
4.6. 여담
- EBS의 실험과 심리학자에 따르면 군중심리는 3명 이상이 될 때부터 작용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3의 법칙 공교롭게도 사자성어 중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3명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 낸다' 즉, 근거 없는 말이라도 3명 이상이 모여서 말을 맞추면 그것이 사실로 치부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럴듯한 루머, 혹은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에도 쉽게 흔들리는 군중심리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군중심리를 이용하면 일반인도 연예인으로 만들 수 있다.
- 르 봉에 따르면 개개인은 합리적이고 배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뭉치면 하향평준화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실험에서 개개인 혹은 소수의 인원이 강의를 들을 경우에는 대학생 수준으로 강의를 해도 이해를 했으나, 다수, 즉 군중이 모이면 고등학생 수준으로 설명을 해야 했다.
- 위의 연구자 라이처가 제시했듯이 어중이 떠중이들의 집회처럼 보여도 강경진압을 시도하면 엉뚱하게도 전민항쟁으로 번지는 사례가 꽤 있다. 물론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불만이 폭발한 계기가 된 것으로 직접적 원인 외의 문제가 더 컸다. 프랑스 혁명도 사실 귀족들 등쌀에 따로 의회를 만들어 승인받으려고 했다가 얼마가지 못해 무효화된 게 원인이었고, 러시아 혁명도 '차르폐하 배고파여 빵 좀 주세여 극진히 모시겠나이다'라는 대중의 움직임에 냅다 총부터 쏴 제낀게 원인.
아닌 것 같지? - 나무위키도 군중심리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 편집하다 보면 다수의 의견 때문에 소수의 의견이 묻히는 경우도 꽤 많이 볼 수 있으며, 심지어 반달이나 트롤로 몰고 올바른 의견이건 아니건 일단 마음에 안 든다고 삭제했다가 뒤늦게 지적을 받고 복구하기도 한다.
- 심리학자 캐서린 샌더슨은 방관자 효과에 관한 저서에서, 자신이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 다닐 때에 있었던 '누드 올림픽' 행사에 관해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그런 행동을 심지어 가장 똑똑한 학생들마저 할 수 있는 원인으로 군중심리를 꼽았다.
5. 현실의 사례
군중심리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경우도 있을 것이나, 모름지기 모든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비율은 다를지언정 공존하기 마련이니 부정, 긍정을 떠나서 일단 작용한 사례 중점이다. 사회의 부조리가 팽배해 있을 때 현명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 대중들을 제대로 설득하여 사용한다면 매우 긍정적일 수 있다.미국 광고업계에 따르면 군중심리를 이용한 광고는 중산층에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반대로 상류층을 향한 광고는 군중심리보다는 특별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19]
과거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현대인의 관점에서 매우 미개하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군중심리에 젖어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것을 알 수 있다. 석전[20], 요바이, 인종 차별, 노예 제도, 공개처형, 콜로세움에서 벌였던 각종 만행들, 마녀사냥,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 독일 국민들의 히틀러 지지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현대인이 당시에 태어나서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분명 과거의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므로 군중심리는 인간의 가치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현대인들보다 고차원적이고 발전된 존재들이 보기에 현대인들은 상당히 비윤리적이고 미개하지만, 자신들의 미개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5.1. 대표적인 사상
6. 관련 명언 및 시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There is nothing less understanding and more proud than the blind mass.
눈 먼 대중보다 더 이해력 없으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자들은 없다.
헤로도토스
눈 먼 대중보다 더 이해력 없으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자들은 없다.
헤로도토스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박노해 - '꽃 피는 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박노해 - '꽃 피는 말'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떼어 보면 모두 영리하고 분별이 있지만, 집단을 이루면 모두가 바보가 되고 만다.
프리드리히 실러
프리드리히 실러
7. 관련 문서
- We Become What We Behold
- 개돼지
- 경로의존성
- 관성의 법칙: 이처럼 사람들이 더 모인 쪽으로 더 쏠리기도 한다.
- 귀스타브 르 봉
- 규모의 경제
- 까야 제맛
- 깨진 유리창 이론
-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군중에 의거한 논증(Argumentum Ad Populum))
-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일반화에 군중심리를 적용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도 있다.
- 매스미디어
- 물타기
- 반지성주의
- 부화뇌동
- 인지부조화
- 여론조작
- 집단사고
- 폭력시위
- 편견 및 고정관념
- 언어의 사회성
- 방관자 효과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누가 어떤 이를 도와주자 주변 사람들이 그 누구에게 들러붙어 날로 먹으려 할 때일 수 있다.
- 집단주의
- 확증편향
- 외향성
- 침묵의 나선
- 신드롬
- 유행
[1] 다만 실제 레밍은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설 중 두 개로는 먹이를 찾아 우르르 이동하다가 절벽을 만나면 멈춰도 뒤에 오는 수많은 레밍 때문에 밀려서 사망한다는 설과 먹이로 나오는 풀이 소화액만 만들어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파 물가 건너에 먹이가 있을까 하다가 떨어져 죽는다는 설이 있다.[2] 2003년 10월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에 사람이 빠지자 모두가 우왕좌왕하다 사람들이 차량을 밀어서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사이에 피해자를 잡아 끌어올려 주었다. 이러한 일은 2003년 10월, 2005년 10월, 2005년 12월까지 총 세 번이나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위 사진에서 빠졌던 사람은 사망했다(#). 군중심리가 영웅적 행동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귀스타브 르 봉 역시 그 가능성을 예측하던 부분이기도 하다.[3] 집단 어리석음도 그런 예이다.[4] 독일 국민들이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한테 세뇌되었다.[5] Reicher, 1996.[6] 그러나 몰개성화에 대해 심리학계의 관심은 심드렁하거나 오히려 비판적이며, 짐바르도 역시 이 주제에 목을 매지 않는 편이다. 집단 동일시 같은 더 세련된(?) 용어들이 대부분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이버심리학이나 커뮤니케이션학 같은 분야에서 인터넷 악플이나 사이버 범죄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세프 왈서(Joseph B. Walther)와 같은 사이버 의사소통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니 이 쪽으로 찾아가야 관련문헌이 많이 나온다.[7] 현대 심리학계에서 이런 주장은 그야말로 기함을 하고 넘어갈 만큼 밑도끝도 없는 뇌피셜이지만, 길게 잡아 20세기 중반까지 (특히나 홀로코스트라든지 소련/중공과의 심리전을 목도한) 지식인들에게는 이게 의외로 설득력이 꽤 있었다.[8] 암시가 개인마다 통하는 정도가 다 다른데 이를 "피암시성"이라고도 한다. 피암시성이 높은 사람은 타인에게 잘 속고, 사실이 아닌 것도 쉽게 사실로 믿으며 상황과 분위기에 쉽게 압도당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10대 초반 여성들의 피암시성이 가장 높으며, 이것이 높을 경우 집단 히스테리와 같은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는 것을 발견했다.[9] Festinger, Pepitone, & Newcomb, 1952.[10] 이후로는 용어를 약간 달리하여 몰개인화(depersonalization)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기존의 몰개성화가 개별성의 상실에 주안점을 두는 반면, 몰개인화의 경우 자기관념(self-conception)에 있어서의 사회적 범주 내 교환가능성에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현대에는 자기범주화 이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주제로 옮겨 갔다고 할 수 있다.[11] 이와 같은 학문 외적 전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eicher(1994, 2012)를 볼 것.[12] Fogelson, 1968, 1971; Wanderer, 1969.[13] Rude, 1964; Nye, 1975; Davis, 1978, McPhail, 1991.[14] 예컨대 대다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좋지만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지만 일본인과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만나는 상황에서는 그들과 얼마든지 쉽사리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들에게 "나는 한국인이다" 를 상기시켜 줄 경우, 일본인 상대방에 대해 전보다는 더 껄끄러워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일본인을 친구로 만드는 것은 소위 민족에 대한 배신(?)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자신의 국적이라는 집단 정체성이 현저(salient)하지 않았을 뿐이다.[15] 특히 시위 현장 속에서 영국 기자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도 많이 인용하는데 경찰이고 시위대고 간에 피로 흥건한 도로 위에 널부러져서 고통스럽게 신음한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많다. 한 기자가 탄 차량이 충돌 현장으로 잘못 들어가서 있는 대로 파손되는가 하면, 또 어떤 기자가 피신한 건물 주위로 동네가 온통 불타고 있고 성난 청년들이 아우성치며 돌아다니는 아찔한 상황도 인용되어 있다.[16]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디워 열풍. 그러나 대한민국이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심하다는 근거는 빈약하다. 전 국민의 20% 이상이 한 영화를 보는 일은 외국에서도 왕왕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수준의 영화가 아닌데도 쏠릴 때도 있다는 식의 비판도 자주 제기된다. 물론 이는 군중심리라기 보다는 스크린 과점 때문이라고 보는 게 설득력 있지만.[17] 대표적으로 2002 월드컵 붉은악마 신드롬이 있다. 그야말로 한국 전역을 덮은 전설이자 전국민을 열광시킨 추억이지만, 사실 축구에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신드롬이 끝난 뒤에 열기가 귀신같이 소강되었다.[18] 나치 독일은 국민들을 나치즘에 세뇌시키기 위해 선전선동부를 창설하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 를 장관으로 앉혀 놓았는데, 총력전 연설 당시 군중심리를 활용하기 위해 괴벨스의 연설에 동의하고 찬양하는 척하는 배우들을 심어, 괴벨스가 미리 집어준 부분이 끝날때마다 일어서 박수를 치고 큰 소리로 환호하게 하였다. 이에 대중들 역시 군중심리에 의해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곧 전 국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되게 된다.[19] 아서 프리먼, 로즈 드월프,'그 동안 당신만 몰랐던 스마트한 실수들',송지현 역,애플북스,2011,p66[20] 돌로 사람을 쳐죽여도 그러려니 했던 놀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