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기 1516년 8월 24일 알레포에서 북쪽으로 44km 떨어진 다비크 마을 근처 목초지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맘루크 왕조군이 맞붙은 전투. 오스만 투르크는 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1년 만에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2. 배경
서기 16세기 초, 중동의 정세는 세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일대를 장악했고, 사파비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일대를 장악했으며,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 건국 이래 오스만 1세, 오르한, 무라트 1세, 바예지트 1세, 메흐메트 1세, 무라트 2세, 메흐메트 2세, 바예지트 2세 등 역대 군주의 꾸준한 정복 전쟁으로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다지고 있었다.한편 사파비 제국은 이스마일 1세가 1501년 건국한 이래 급격히 팽창하여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석권했지만, 시아파 교리를 신봉하며 수니파를 신봉하는 정복민들을 탄압해 심한 반발에 직면했다. 맘루크 왕조는 한때 유럽과 인도양을 잇는 중계 무역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으나, 유럽 열강이 새 항로를 개척하면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중동의 열강 중 하나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맘루크 왕조는 갈수록 무섭게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가 서로 싸워서 세력이 약해지길 바랐다. 그래서 사파비 왕조의 샤 이스마일 1세가 1500년대 초 유럽 국가들에게 반오스만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을 때, 맘루크 왕조는 사절이 자기네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했다. 오스만 측은 이 사실을 알고 맘루크 왕조에게 사절이 복귀하지 못하게 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후 1514년 8월 23일, 신임 술탄 셀림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 제국군을 격파하고 동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과 이란 북부 및 코카서스 일부 지역을 합병했다.
사파비 제국과 맘루크 왕조는 갈수록 무섭게 성장하는 오스만 제국에게 큰 위협을 느꼈다. 이후 셀림 1세는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왕조 사이의 완충 지대로 남겨졌던 라마잔 왕조와 둘카디르 왕조를 1515년 여름에 병함함으로써, 아나톨리아 전역을 석권했다. 그 중 둘카디르는 맘루크 왕조의 보호국이었기에, 맘루크 왕조의 술탄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는 1516년 사파비 왕조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깐수 알 구리는 5월 18일 카이로에 고관 투만 베이를 남겨두고 시리아로 출진했다. 그는 진군하는 동안 셀림 1세와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뒤 이집트로 망명한 아흐메트를 데려왔고, 찬탈자 셀림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투르크인들을 포섭했다.
한편,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4월에 고관 시난 파샤에게 선봉대를 맡겨서 적이 토로스 산맥의 통로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미리 가서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깐수 알 구리가 파견한 기병 중대가 먼저 도착하여 통로를 장악했다. 시난 파샤는 일단 적과 대치하였고, 7월에 코냐에 도착한 셀림 1세와 합류했다. 셀림 1세는 토로스 산맥의 좁은 산길에서 적과 싸우는 건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토로스 산맥을 우회하여 말라티야로 이동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깐수 알 구리는 후방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알레포로 후퇴했다.
깐수 알 구리는 오스만 제국과의 정면 대결은 승산이 적다고 보고 재상 무글라 베이를 파견해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셀림 1세는 무글라 베이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깍아버리고 맘루크 진영에 돌려보냈다. 결국 전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깐수 알 구리는 알레포로 남하하는 오스만군과 맞서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이후 8월 24일 다비크 마을 인근의 목초지에서 양군이 조우하면서, 시리아와 이집트의 패권이 걸린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만 제국군
- 지휘관: 셀림 1세
- 병력: 30,000 ~ 60,000명.
3.2. 맘루크 왕조군
- 지휘관: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
- 병력: 20,000 ~ 50,000명.
4. 전투 경과
1516년 8월 24일 오전, 양군은 다비크 마을 인근 목초지에서 조우했다. 술탄 깐수 알 구리는 맘루크군의 핵심 전력인 중기병대를 역초승달 형태로 선두에 배치하고, 보병대를 두 번째 라인에 배치했다. 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고, 우익 부대는 다마스쿠스 총독 시베이가 지휘했으며, 좌익은 알레포 총독 카이르 베이가 지휘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군은 측면에 기병대를 배치했고, 두 번째 라인의 우익에는 경포를 배치했으며, 중앙에는 셀림 1세가 이끄는 근위대를 배치하고, 좌익에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예니체리를 배치했다. 그리고 맨 뒤 대열에 배치된 마차에는 중포 여러 개가 설치되었다.전투 초반, 술탄의 지휘하에 맘루크 기병대가 선제 돌격을 감행했다. 맘루크 좌익 기병대가 먼저 오스만 제국 우익 기병대와 맞붙어 상대를 순식간에 압도하여 전장에서 패주시켰다. 뒤이어 맘루크 중앙과 우익 기병대가 오스만 제국 좌익 기병대와 충돌했고, 오스만 좌익 기병대는 적군의 공세에 밀려 천천히 후퇴했다. 맘루크 좌익 기병대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했지만, 오스만군이 사전에 배치해둔 경포들의 일제 사격을 받고 상당한 피해를 입은 채 후방으로 물러났다. 깐수 알 구리는 중앙의 기병대를 재정비한 뒤, 적의 중앙 대열로 돌격했다. 이 공세가 상당히 강력했는지, 셀림 1세는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병사들을 마차 뒤로 질서정연하게 후퇴시켰다.
그 후 마차 위에 설치된 중포들이 포격을 가했고, 맘루크 중앙 기병대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한편, 맘루크 우익 기병대는 오스만 좌익 기병대를 격퇴했지만, 2번째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예니체리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패퇴했다. 그 때, 알레포 총독 카이르 베이는 전투에서 패했다고 확신했거나 사전에 배신하기로 밀약을 맺었는지,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보병을 데리고 전장을 떠났다. 이로 인해 맘루크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오스만군은 이 틈을 타 총공격을 가했다. 결국 깐수 알 구리를 비롯한 맘루크 기병대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살아남은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마르지 다비크 전투는 오스만군의 완승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