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8:28:05

십자군 전쟁

십자군 원정에서 넘어옴

중세 교황청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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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협약 주교 선출에 황제권 배제
십자군 전쟁 교황권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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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원정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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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십자군의 출발(1096년).

1. 개요2. 배경
2.1. 원인2.2. 기타 원정 동기
3. 교전 세력
3.1. 십자군 국가3.2. 소속 기사단3.3. 주요 인물
4. 십자군의 원정 목록5. 십자군의 원정 연표6. 외전7. 영향
7.1. 교회의 권위 약화7.2. 장원의 해체7.3. 전후 국제 정세
7.3.1. 키예프 루스의 쇠퇴7.3.2. 이탈리아·헝가리의 이득7.3.3. 이슬람권에 대한 충격7.3.4. 동로마 제국의 쇠퇴7.3.5. 에티오피아
7.4. 몽골 제국의 영향7.5. 동방과의 교류
8. 유대인 학살9. 실패 원인10. 평가
10.1. 미화의 시대10.2. 비판 및 격하의 시대10.3.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11. 대중매체에서12. 기타13. 참고 자료14. 영토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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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자군 전쟁(, Expeditio Sacra[2])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간헐적으로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을 가리킨다.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크루치아테(Cruciatae)'로도 불렸으며, 이를 현대 영어로는 '크루세이드(Crusades)'라고 한다. 이는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예수를 기리기 위해 십자가를 가지고 전쟁을 했다고 해서 '십자군 전쟁'이 되었다.

2. 배경

1071년 동로마 제국황제 로마노스 4세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3]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약해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년 3월 피아첸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첸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 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 차례[4]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2.1. 원인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배경과 목적을 분석해 보면 크게 다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
  • 1. 기후 변화와 유목 세력의 중동 침투
루지에로의 '십자군'에는 실제로 십자군이 거의 없었으며,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군사들은 대부분은 현지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를 믿는 시리아인들, 프랑크족 정착민들이었다. 루지에로가 전사한 후 최후의 저항을 이끌었던 영웅적인 기사는 아르메니아인이었는데, 그는 서방 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적 기준에서 이단자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들을 패배시킨 군대는 명목상으로는 무슬림이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애매한 입장이었으며, 흔히 상상하는 '사라센인'이나 '베두인족'보다는 훈족이나 몽골 전사들을 닮았고 서쪽에서 온 프랑크인들만큼이나 이 지방에서 이방인들이었다. 상황은 더 복잡한 것을 넘어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Steve Tibble, The Crusader Armies: 1099-1187
십자군을 억압자로 보는 대중적인 편견과 달리, 십자군 국가들은 이교도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압제자가 아니었다. 11세기 레반트 지방의 지배층은 무슬림이었지만, 피지배층 인구의 대다수는 무슬림이 아니라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던 토착 기독교인이었다. 무슬림 피지배층 또한 현지 기독교인들과 공유된 민족 정체성, 그리고 고향에 대한 애착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이후 십자군의 통치에 순응했다. 십자군 통치자들은 경제적 이익을 이해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모스크는 계속 열려 있었고 무슬림은 여전히 순례를 할 수 있었다. 무슬림 내부의 분쟁에 대해서는 이슬람 법이 허용되었고, 공동체 간의 다툼은 프랑크식 법원에서 비교적 공정하게 집행되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도 남성이 무슬림 여성을 강간한 것에 대한 처벌은 기독교도 여성을 강간한 것과 동일했다.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11-12세기 중동의 전쟁은 종교나 문화가 아니라 유목 사회와 정착 사회 간의 근본적인 긴장에서 비롯되었다. 11세기의 기후 변화는 초원에서의 삶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고, 수많은 유목 부족들을 중동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서로 이질적인 민족 집단이 부족한 자원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면서 목축민과 농민 세력과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유목민 세력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무슬림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투쟁의 근본적인 축을 보지 못하게 한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논의되기 이전부터 레반트 지방은 이미 현지 무슬림 지배층의 내분과 유목민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도적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약탈을 당하는 순례자들도 굉장히 많았으며, 그 결과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유럽까지 퍼지게 되었다. 성지 순례자들은 분쟁지역을 지나면서 겪은 고난과 투르크인들에게 당한 불편들을 서유럽으로 돌아와 말해주었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를 적절히 과장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소문들을 서방의 원군을 얻기 위한 지원 요청에 명분으로 써먹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인들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정확히 따지자면 1009년에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대놓고 탄압하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했으나,[5] 1040년대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머니건 외교로 파티마 왕조와 타협, 기독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성묘 교회를 복구한다. 어쨌거나 아랍계 왕조들은 성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돈을 반겨서 순례자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었다.

문제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기존 동로마-파티마의 레반트 세계 질서를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셀주크 제국은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감각이 아직 없어서 순례자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정책적으로 순례자들이 탄압당한 적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거짓된 것이라는 수정주의가 한때 크게 유행했으나, 순례자가 피해를 입은 것과 예루살렘이 기독교 입장에서 모욕당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보니 수정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해석처럼 궁색한 주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레반트 지방의 황폐화는 단순한 치안 악화 수준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1070년대엔 말리크 샤가 통치하는 셀주크 제국의 에미르 아트시즈가 성지를 포함한 시리아 전체를 파티마 왕조에게서 빼앗았는데, 예루살렘의 저항을 모스크 안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며 진압해버린다. 1079년엔 말리크 샤의 동생 투투쉬가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를 통치하더니, 1086년엔 그 투투쉬가 형 말리크 샤에게 쫓겨난다. 말리크 샤가 1092년에 죽자 돌아온 투투쉬가 1094년에 시리아를 탈환하나 바로 다음 해에 전쟁에서 패하며 사망. 결국 1096년에 출발한 1차 십자군이 도달하기 직전인 1098년에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가 재정복한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 간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 전쟁에 휘말린 순례자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6] 다만 수정주의 논쟁을 겪은 이후 학계의 관점은 기존처럼 무슬림들이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박해한게 아니라, 서유럽인들을 알리가 없었던 현지의 세속적인 지정학적 분쟁을 겪으면서 피해가 순례자들에게 튀기 시작했고, 라틴 기독교인들은 이걸 종교적 박해로 받아들였다는게 관점의 차이이다.
  • 2. 기독교의 '성지 회복' 열망
나는, 아니,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전령이 되어 이 사실을 곳곳에 전파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보병이든 기사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서둘러 도와주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우리 친구들의 땅에서 사악한 무리를 쫓아내는 일을 돕기를 바라십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물론 자리에 계시지 않는 분에게도 말씀드립니다."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좌중에선 신이 원하신다!라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7]
교황 우르바노 2세
로마 제국 시기인 3세기경부터 레반트 일대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다수가 기독교도였다. 하지만 7세기 중반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슬람 팽창으로, 637년에 예루살렘도 이슬람 령이 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지역은 11세기까지 서아시아북아프리카를 잃는 등 그 영역이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왔다. 거기에 남부 유럽은 이슬람이 발아한 7세기부터, 미국의 바르바리 전쟁에 이어 프랑스알제리를 식민지배하는 19세기까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에게 약탈을 당한 기록이 있으며, 1200년 동안 납치된 사람의 숫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8]
  • 3. 힘의 외부 분출을 통한 내부적 평화 달성
    당시 서유럽은 농업기술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생산성이 형편없었으며, 지배자들은 인구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방법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고로 전쟁을 통해 잉여인구를 처리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인데... 이에 대해서 토머스 매든 교수와 자크 르 고프 교수의 의견을 따르면, 서유럽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원 운동에 힘입어 느리긴 하지만 식량 공급이 차츰 개선되고 있었으며, 전쟁 같은 대규모 학살을 통한 인구 감소 효과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황무지 개간으로 농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토지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급증했고, 지나친 전쟁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이를 막기 위한 "하느님의 평화" 운동과 "하느님의 휴전"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차라리 해외에 나가서 싸우라고 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해외로 나가서 싸우라는 소리가 아니라 싸우지 말라는 소리지만 어쨌건 우르바노 2세가 성지 탈환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에 이용한 건 사실이다.
  • 4. 교황청의 권력 확대,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청의 위세 증진 겸 동방 교회 압박
    흔히 동서 대분열로 말하는 기존 가톨릭-정교회간의 갈등이 해프닝에 가까웠던 1054년의 상호 파문으로 표면화, 쌍방의 총대주교(교황도 총대주교이므로)와 황제에게 파문을 날려대는 등 경쟁의식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노사의 굴욕으로 상징되는 교황-신성로마제국 황제간의 갈등은 한창 진행 중이어서, 교황 입장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세속군주들의 권위를 누를 만한 위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정교회권의 상황이 곤란해져서 동로마 제국이 종교적 명분을 들며 지원을 요청해오자, 교황은 이 상황을 세속 군주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과 권위를 높일 기회로 판단했다. 이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있던 교황의 연설에서 잘 드러나는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전까지 잘 써먹지 않던 '순교', '대사령', '구원' 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적극적으로 십자군 여론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순례자들의 경험담과 동로마 황제의 지원 요청으로 불씨 자체는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 황제는 1차 십자군 외에는 청한적도 없는 대규모 십자군 문제를 걱정하게 됨은 물론, 그 십자군 운동의 주체에서 객체로 밀려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9][10] 서방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도 십자군 문제를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교황의 권위 강화 시도는 대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5. 재산의 위탁 관리에 따른 교황청의 재산 증대
    당시 십자군 원정은 소요기간이 굉장히 길었으며,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을 거라고 예상한 교황사제들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산을 위탁받으면 그냥 자기네 것이 될 거라고 계산했었다. 실제로 교황청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지의 관리를 위탁받은 것은 사실이고, 당시 교황청은 서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관리 시스템이라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들은 영주들에 비해 효과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영주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떼어갈 지언정, 영지 자체를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황청이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두었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애초에 위탁만 했지 양도하겠다고는 안했으니. 그러나 영지라는게 경영하는 사람이 영민들이 견디지 못해 들고일어날 정도로 도를 넘은 착취를 하거나[11] 전염병이 돌지 않는 이상 세금 수입이 보장되는 물건이고 영지를 이용하여 돈 벌 방법은 많았으므로, 위탁하는 동안 교회는 짭잘한 세금 수입과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설사 위탁이 영주의 사망으로 해제된다 할지라도, 그동안 벌었던 돈이 어디가는건 아니었으므로 교황청의 재산은 증대되었다.
  • 6. 무장 순례 기원설
    말 그대로 십자군 원정이 '사악한 이교도들을 박멸하고 성지를 되찾는' 원정이 아니라 '성지 찍으러 가는데 가는 길 험난하니까 무장을 하고 성지순례를 했다'는 개념인데,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11세기 후반까지는 이슬람 칼리프들도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064~66년에는 7,000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대부분의 원정군이 유럽으로 돌아가버렸다"를 꼽는다. 교황과 교황의 의견에 찬성하는 군주들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고 아예 짱박고 눌러앉길 원했지만, 십자군의 대다수 원정군들은 교황의 뜻이 어찌되건 예루살렘 도착 후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찍고 돌아가는 일이 잦아서 예루살렘 왕국이나 여러 십자군 국가의 군주들은 십자군들을 성지에 말뚝 박게 하려고 온갖 수를 써댔다.

2.2. 기타 원정 동기

  • 1.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는 대사(大赦)를 획득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성지 탈환의 성전에 참여하면 교황청에서 대사를 준다고 홍보했다. 그래서 1차 십자군의 경우 유달리 부랑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적으로는 교황청의 선언에 열성적으로 반응한 수도자들이 이것을 자극했다. 특히 은자 피에르의 화려한 말빨에 의해서 우르바노 2세가 계획한 1차 십자군보다 몇 달 빠르게 민중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 뒤에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해성사의 보속을 없애주는 '대사'를 행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 2. 당시 유럽은 장자 상속제였으며, 차남 이하로는 권력이나 재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지를 얻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참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중세 연구 결과에서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는데, 당시 십자군에 참가했던 기사들의 목록을 면밀히 추적해보면 대개 당시에 세력깨나 있다는 영주들이었다. 당시 영주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튀르크와 싸워본 적이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은 3,000km의 원정길을 땅 좀 얻자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낮다. 당시 영주들은 자기 차남들에게 나눠줄 땅이 정 필요하면 그냥 옆동네의 기독교 영주들과 싸운 경우가 많았다.
  • 3. 성지와 성인들의 묘에 대한 환상이 지원 동기로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을 떠나는 셈. 애초에 성배탐색이라는 모티브 자체가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서 (진품 여부는 상관없이) 성십자가와 성창 등 대단히 귀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이를 당대 시인들과 신부들이 미화해 모험담으로 만들면서 성지순례+성유물 획득이라는 성배탐색의 모티브가 생겨난 것이다. 아서 왕 전설 같은 대표적인 성배탐색 문학은 10세기~11세기까지만 해도 성배 탐색 같은 요소가 없이 그냥 전쟁 무용담이었는데, 이후로 수많은 모험담들이 추가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 4. 순수한 신앙으로 일어난 귀족들도 있었다. 주 동기의 1번인 성지 회복보다도 더 순수하게, 오로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행한 일이니 어떤 의미론 영광스러운 자들. 실제로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예루살렘 입성 때 수만이나 되었던 십자군 병력들은 예루살렘 탈환 후 성지에서 예배 좀 드리고 마지막 파티마의 공격까지 막고 나서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수천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남은 십자군 영주들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무진장 고생했을 정도였다. 이런 사람들은 가톨릭은 물론, 적인 이슬람도 칭송했다. 허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많은 토지와 재산을 헌납하거나 처분했기에, 전쟁 후에는 몰락해 버리기 일수였다. 한마디로 교황청에 가진 돈을 모두 털리고 사지로 내몰렸던 것이다.

3. 교전 세력

3.1. 십자군 국가

파일:untitledhheh.png

Crusader states :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라고 부른다.
파일:1204년의 강역.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4px-Ordensland1410.png

3.2. 소속 기사단

3.3. 주요 인물

기독교 세력

이슬람 세력

4. 십자군의 원정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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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십자군의 원정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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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198년 이전 원정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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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1292년 이후 원정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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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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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향

파일:Last_Crusader.jpg
카를 프리드리히 레싱, <마지막 십자군의 귀환>, 1835

7.1. 교회의 권위 약화

프랑스 카페 왕조는 십자군을 후원하고 이를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적극 활용하면서 13세기에 이르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세속 권력의 영향력이 성장했고, 교황은 이전의 권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세계사 교양서나 교과서에서는 흔히 '중세말 십자군의 패배와 흑사병으로 교황의 권위가 추락했다'고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지만, 이는 십자군 왕 프로파간다에 진심이었던 카페 왕조의 권위가 오히려 중세 후기에 절정에 달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7.2. 장원의 해체

10세기 이후 유럽의 기후가 눈에 띄게 온난해졌다. 때마침 몇 가지 혁신적인 농업 기술이 도입되어 삼포식 윤작 체계가 널리 보급되었고, 개선된 마구는 말과 소를 이용한 쟁기질과 운송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으며, 개울마다 방앗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황무지 개간으로 새로운 마을과 도시들이 생겨났고, 도시 주민들은 국왕에게 세금과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나면서 장원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영주는 농노에게 부역과 현물 대신 화폐를 지대로 받았는데, 때로는 돈을 받고 농노를 해방하여 주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은 이러한 수 세기에 걸친 경제적 번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중간 과정에 가까웠지만, 교과서에서는 흔히 중세 상업의 발달을 십자군 전쟁과 연관지어서 설명한다.

7.3. 전후 국제 정세

십자군은 동방의 문물이 서방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서방의 문물이 중동으로 전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서유럽과 중동 지역의 무역로가 뚫리면서 지중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윤이 컸고 중동식 성곽 건축을 본 유럽의 제후들은 앞다투어 장점을 포용해 자신들의 성을 개량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중무장한 기사에 크게 패배한 초창기 중동의 이슬람 군주들은 서유럽식 중장기병과 갑옷, 투석기, 기타 장비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다.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처럼 내부의 충돌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7.3.1. 키예프 루스의 쇠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루스(러시아)의 공국들은 구심점을 잃고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루스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북방 십자군이 발트해 연안에 다우가바강 교역로를 봉쇄하고,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에 상권을 완전 장악해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키예프 공국을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키예프 공국은 휘청거리고 여타 루스 공국들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25]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이렇게 분열 상태에 빠졌던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은 제대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그대로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7.3.2. 이탈리아·헝가리의 이득

반면에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 그리고 헝가리 왕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는 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헝가리 왕국은 비잔틴의 속령에서 풀려, 은화를 개발할 겸 수도사 율리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쳐서 우랄 산맥 근처의 헝가리 주민을 만날수 있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반면에 헝가리도 5차 십자군 전쟁에 합류하게 된다.

7.3.3. 이슬람권에 대한 충격

이슬람 세계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보다는 동시에 일어난 몽골 제국의 침략과 칼리파 시해, 압바스 칼리프조의 멸망이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리상 중요한 3대 성지 중 하나고, 당시 이슬람 세계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던 이집트가 예루살렘 국왕의 봉신국으로 추락한 것은 매우 심각한 위기였다. 하지만 결국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측의 승리로 끝난 반면,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이슬람권이 피해를 복구하는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어떻게 보면 완전히 복구하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근대 이슬람권 신학자 및 역사가들은 몽골 침략자들을 진지하게 적그리스도의 무리, 야주즈와 마주즈(성경에 나오는 곡과 마곡) 정도로까지 생각했던 반면, 십자군은 그냥 흔한 불신자 야만인 정도로 취급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들을 그냥 다 파랑기(프랑크)라고 불렀지 이들을 따로 종교적인 명칭으로 지칭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십자군이 이슬람권에 미친 영향 중에서 중요하지만 자주 간과되는 부분은 소수 종파에 미친 영향이다. 이스마일파가 세운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몰락하고, 살라흐 앗 딘은 파티마 조를 전복하면서 파티마 왕조의 국영 대학교였던 알 아즈하르 대학을 이스마일파 학교에서 순니파 근본주의 마드라사로 재편하였다. 이스마일파는 순니파에 비해 종교적 금기가 적고 특히 철학과 과학 관련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은 종파였는데.[26] 이스마일파의 헤게모니가 십자군 전쟁의 결과 중동/북아프리카에서 무너지면서 아랍어권의 과학과 수학, 철학과 의학 연구는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27]

7.3.4. 동로마 제국의 쇠퇴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았지만, 십자군의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다. 무엇보다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 년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7.3.5. 에티오피아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 제국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28] 한편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정교회 사제들을 초청해 회담을 나누고 순례세금을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이 시기 에티오피아는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웨뎀 아라드 황제가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7.4. 몽골 제국의 영향

한편 몽골 제국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된 몽골 제국 중 하나인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파를 믿었던 몇몇 몽골 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이 밀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7.5. 동방과의 교류

십자군 원정은 지중해와 동방 무역의 중계로를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해상 공화국들은 십자군 전쟁 동안 지중해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유럽은 비단, 향신료, 약초, 도자기 등의 동방산 상품에 대한 접근이 확대되었으며, 동방 물품의 수입은 유럽 사회의 소비 구조와 사치품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고대시대 수준의 괴철로를 사용해서 연철을 만들고 연철을 침탄해서 적은 양의 강철을 얻었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고로가, 아마도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값싼 철제 연장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주철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고로에서 생산된 선철을 탈탄해서 연철이나 강철로 만드는 정련로도 서기 1200년경에 도입되거나 발명되며, 이후 수력 풀무질까지 발명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독일 등지는 철강업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게 된다.

그런데 고로만 넘어가고 강철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초강법은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29] 단, 초강법은 근현대 제철과는 다른, 철강의 질이 아니라 양을 늘려주는데 의의가 있는 방법이고 철강의 질 자체는 오히려 단조보다 떨어지기에[30] 중국에서도 질좋은 고급무기는 초강법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단조를 써서 만들었다. 반대로 연장이나 일상용품은 연철이나 주철로 만들어도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고로만 도입되고 초강법이 도입되지 않은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거기다 전쟁중에 접한 다마스쿠스 강으로 생산된 무기에 서양은 충격을 받았으며 다마스쿠스 강이 재료의 차이가 아닌 특수한 제조법이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인들은 다마스쿠스 강을 만들기 위한 열정으로 철에 수천 수만번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열처리 스프링강을 완성 이를 이용한 태엽, 플레이트 아머, 기계식 시계, 플린트락, 아바레스트같은 발명을 이루었으며 결국에는 동양과 서양의 기술력 차이를 불러왔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8. 유대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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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정화'의 일환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유대인들을 그린 회화.

십자군 전쟁은 당시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종교적 광기로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 민중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12세기와 13세기 초까지 빈번히 일아났다.

민중 십자군 때에는 주로 독일 (쾰른, 마인츠 등지)에서 학살이 집중되었고 2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3차 십자군 시에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겹친 잉글랜드요크, 런던 등지에서 수백명이 화형당하였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단 자살로 소멸하는 경우가 많았다.[31] 13세기 초, 제5차와 6차 십자군 때에 재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주모자들이 처형당하는 벌을 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은 기본적으로 유대인을 제국의 신민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이렇다보니, 현대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에게도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달가운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조지 워커 부시가 크루세이더라고 미군을 십자군인양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한 것을 이야기하자, 부시 측근 유태인 정치인들도 그런 명칭은 좀 삼가달라고 충고하며 미국 내 유태인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9. 실패 원인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수복하며 주변에 십자군 국가까지 대거 설립했던 1차, 그리고 전투는 없었지만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양도받은 6차 정도만이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32] 나머지 원정은 크고 작은 실패로 마무리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통적인 이유가 몇 가지 존재한다.
  • 1. 보급 문제와 동로마 제국과의 불화
    서유럽 지역에서 중동 예루살렘까지 보급로를 확보한다는 건 당시 경제, 기술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거대한 십자군은 필연적으로 동유럽 지역과 동로마 지역을 지나면서 숱한 약탈을 벌이고 다녔고, 이는 지역 민심이 이반되고 특히 동로마 궁정의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1, 2, 3차 십자군은 보급 문제와 통행 문제로 헝가리 왕국 및 동로마 제국과 지속적으로 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의 통행을 보장해 줄 헝가리 왕국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십자군의 현지 보급과 해상 이동 수단을 마련해줄 유일한 존재인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니 원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십자군 자체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으로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황제는 동로마를 도울 지원 병력을 원했지 성전을 부르짖으며 몰려드는 통제불능 집단을 바란 게 아니었다.

    게다가 1차 십자군이 출발하기 전에 은자 피에르라는 자가 수만 군중을 선동하여 성지로 진군해오면서 헝가리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하다 분노한 헝가리군에 격퇴된 일로 인해서, 1차 십자군의 고드푸르아는 헝가리 왕국에 자기 동생을 인질로 보내고 나서야 통행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는 4차 십자군으로 가면 헝가리는 자다르를 십자군에 탈취당하고 동로마는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해 중앙 정부가 일시 붕괴되는 최악의 형태까지 가게 된다.[33]

    십자군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넘어가서도 지속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다. 이슬람 세력권에 들었지만 이전까지 동로마 영토였던 장소에는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다수 거주했는데 십자군은 물자 보급과 전리품 획득을 이유로 약탈을 벌여, 겨우 수복한 영토의 민심과 경제력을 크게 망가뜨려놓은 것이다.[34] 결국 동로마 제국와 십자군 사이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2차 십자군 때는 독일왕 콘라트 3세가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달하였으나 황제 마누일 1세와의 충돌 끝에 제국의 교외 지역을 약탈, 이들의 행패에 질린 황제가 함대를 움직여 이들을 아나톨리아로 치워버리는 일도 있었으니 원정이 성공으로 끝나는 게 이상한 지경이었다.
  • 2.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계통
    1차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주창으로 유럽국가의 내로라하는 유력 제후들이 참가했다.(어디까지나 왕이 아닌 대영주들) 총사령관으로 따지자면 구원을 요청한 동로마의 알렉시오스 1세나 우르바노였겠지만 우르바노는 교황이기에 제외[35], 위치상 동로마의 황제인 알렉시오스가 총사령관 역할을 해야 했지만 알렉시오스는 수도를 떠나 멀리까지 동행하기를 거부했다. 거기에다 십자군 원정 도중 여러 불미스러운 일[36][37]이 생기며 십자군과 관계가 조금씩 틀어졌다.

    안티오키아 공략전에서는 레몽과 보에몽이 서로 대립했다. 레몽은 전략적으로 겨울이 오기 전에 공략해야 한다는 속전속결을 주장했으나,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으려고 했던 보에몽으로선 레몽의 주장이 성공할 땐 이후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기 힘들 것 같아 반대했다. 실제로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십자군은 지쳐 있었고, 이 탓에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도 성지를 단기간에 함락시킬수 없다 생각해서 보에몽의 주장에 동의하고 성을 포위하였으나 장기전에 들어서자 식량난에 시달리고 만다. 그나마 성공했던 1차에서도 이랬으니, 이후의 십자군들 역시 지도자들끼리 싸우는 일이 많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러한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사실 1160년대까지만 해도 십자군 국가들이 빠르든 느리든 결국에는 지중해 동부를 재패할 것으로 예견되었다. 십자군의 적들인 파티마조 이집트나 시리아 튀르크 군벌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다. 1167년에는 아모리 1세가 카이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칼리프에게서 막대한 액수의 조공을 뜯어냈으며 사실상 이집트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쿠르드인 전사 살라딘이 삼촌인 시르쿠, 아모리 1세, 누르 앗 딘 등의 거물들이 연달아 사망하는 틈을 노려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더니 결국 십자군 국가들에게는 최대의 악몽인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38]까지 얼떨결에 달성해버렸다. 낙관적인 전망에 안심하고 있었던 기독교 세력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물론 살라딘이 나타났다고 바로 통합된 건 아니고 살라딘 이전에도 장기누르 앗 딘이 빌드업을 착실히 쌓아두고 있었다. 여러 우연과 필연이 겹친 결과 살라딘이 통합을 이뤄낼 수 있었고 결국 십자군은 성지를 빼앗기고 이후로도 성지를 찾지 못하다가 1291년이 되면 완전히 레반트에서 축출된다.[39] 그 이후 십자군 잔존세력은 키프로스 왕국으로 이어지며 구호기사단은 키프로스 왕국 몰락 이후에도 로도스 섬과 몰타 섬으로 이동하며 이슬람 세력에 지속적으로 항거했다. 성전기사단은 아크레 함락 이후 얼마 안가 해산되며 튜튼 기사단은 아예 북유럽 발트 지역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북방 십자군의 주축이 된다.

10. 평가

10.1. 미화의 시대

전쟁이 끝난 후 기독교 세계에서는 기사도적인 일화로 인해 영웅서사시처럼 미화되어 낭만적인 영웅담으로 전해졌다. 성전에 참가한 사람은 크게 존경 받았고 성지순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꿈이었으므로 기독교 세계가 이 전쟁을 완전히 잊어버린것은 아니다. 또 오스만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은 유럽국가들에게 보편적이었으므로 십자군 전쟁은 중세 이후로도 계속 유럽인들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실제로 포르투갈의 국왕 세바스티앙 1세는 십자군을 동경해 북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신성동맹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계획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전까지는 이슬람권에선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일단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었고, 곧이어 터진 몽골 제국의 침략이 이슬람 세계에 훨씬 더 깊은 상흔을 입혔으므로 십자군에 대한 기억이 상대적으로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40] 근대 계몽주의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중세의 암울한 역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은 재조명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을 이긴 유럽 국가들이 중동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위에 '영향' 항목에 나온 대로 명분을 위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렇게 중동 침략을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로 차용하자 이슬람 측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등 영웅을 재발굴해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십자군 전쟁은 순식간에 역사의 화두로 떠올랐다.

한편 이 십자군 이미지는 서방세계의 여러 근현대 전쟁에서 다양한 선전으로 가공되기도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아이젠하워 유럽연합군 최고 사령관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두고 연합군 군인들을 '십자군'이라고 지칭하며, 나치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키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독소전쟁을 두고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불어 21세기에는 이라크 전쟁을 두고 조지 워커 부시가 십자군을 가리키는 크루세이더라는 이름을 쓰던 것도 문제였다. 결국 결과도 십자군 전쟁 꼬락서니가 났지만. 미국에서도 이 말에 유태계 정치가들이 매우 언짢아했는데 십자군은 십자군 전쟁 당시, 종파가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유태인들도 마구 학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민중 십자군 항목을 봐도 십자군이 억울한 유태인을 죽여놓고 되려 적반하장으로 유태인이 그리스도인 죽였다고 소문내며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 집단 학살을 일으키게 했다. 동로마와 중동에 살던 정교회의 기독교인들 역시 이단이라며 십자군한테 학살당했다. 그러다보니 정교회는 "이슬람보다 더 악랄한 놈들"이라며 십자군을 증오할 정도. 이렇게 서구권은 십자군 전쟁을 잘난 듯이 종교 드립을 쓰거나 이렇게 멋지듯이 썼다.

한편 걸프 전쟁으로 시작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에 서방세계의 다국적군이 중동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또 벌이고 있다!"라고 호도하며 언플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밑의 이해타산적 재평가와 맞물려서 '테러와의 전쟁'은 핑계고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실제로는 석유를 노리고 중동을 침략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0.2. 비판 및 격하의 시대

식민지 시대가 저문 이후,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하느님의 뜻이란 이름하에 벌어진 종교적 광기의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Memory and Reconciliation: The Church and the Faults of the Past)>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 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 전쟁을 교회의 잘못으로 거론하며 용서를 구했다. 1년 후 2001년, 교황은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과 학살 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9.11 테러가 터진 이후엔 미국과 서방에서 "무슬림들이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 적대하는가?"라는 의문이 던져졌고 이에 서방-이슬람 관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이 이루어졌는데 십자군 전쟁이 서방-이슬람 관계 악화의 첫 타자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것이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류의 저서와 "관대한 이슬람" 떡밥이다.[41]

한국에서도 반기독교에 편승한 여론 때문에 기독교[42]가 벌인 전쟁이라면서 비난하는 일이 많고, 인식도 나쁜 편이다. 다만 이슬라모포비아, 호모포비아 성향의 사람들이 보수 기독교인들을 '십자군'이라고 부르며 왜곡된 옹호를 하는 경우가 일부 있다. 미국에 정착한 조찬선 목사는 '기독교 죄악사'라는 저서에서 십자군 전쟁을 "예수님 얼굴에 똥칠한, 기독교 최악의 광란'이라고 비판했다.[43]

프리드리히 니체십자군을 고등한 해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다만 니체는 반기독교, 반종교 성향이 강한 사람이며 역사학자도 아니란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10.3.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십자군 전쟁을 이해타산[44]으로 일어난 것으로 봤으면 봤지,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보지는 않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학계에서는 십자군 전쟁은 명분과는 한참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45] 딱히 새로운 해석이랄 것도 없다.

우선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 운운하기 전에 맨 처음으로 성전 드립을 쳤던 것은 서유럽도 이슬람도 아닌 동로마의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로마를 침공해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털어먹고 성십자가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신흥세력으로 일어났고, '종교적 동기'에 의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털어먹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서 프랑스로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막기 위해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해야 했다. 여기서 십자군만 똑 떼어내어서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미친 짓이네'라고 할 이유가 없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기독교 vs 이슬람' 전쟁이 아니었고 조금만 파고들면 기독교인끼리도, 무슬림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이다. 예를 들면 정교회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선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십자군들도 동로마가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투르크와 협상으로 뒤통수 친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같은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기도 하여 십자군이 펄쩍 뛰기도 했다.[46] 그 유명한 민중십자군의 헝가리 공격이나 4차 십자군의 자라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엿먹였다는 얘기다.

한편 이슬람 세계에서는 기독교 세계가 내분하는 것 보고 열심히 자극받아 자기들도 시아파, 수니파,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나중에는 몽골계로 막 나누어져 서로 잘 싸웠다. 특히 이슬람 내부의 민족, 종파 간의 분쟁은 기독교의 분쟁보다 더 심했다.[47] 기독교 측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정치적 계기가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이었다면, 이슬람 쪽에서는 아바스조 치하든, 우마이야조 치하든 예전의 안정된 통합 칼리파 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내부적인 '성서의 백성' 전통에 따라 적당히 돈만 받고 성지 인근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알아서 살게 내비두던 걸 중동 세계가 시아파 파티마조와 튀르크계 수니파인 셀주크 제국으로 양분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의 군벌들이 예루살렘을 번갈아가며 지배하면서 기존의 기독교도, 유대인들과 유지하던 첨예한 관계가 깨져 유럽의 귀에 들어갈 만큼 무슬림 군주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기들끼리 싸워댔고 배신과 뒷치기도 흔했으며 시리아에선 아예 영주들이 반대 세력 없애겠다고 줄줄이 예루살렘 왕국에 동맹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고 십자군 전쟁을 아주 잘못 본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훨씬 더 복잡, 다양한 뒷배경과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듯이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 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 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식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의 발굴과 이분법적 시각의 분쇄로, 매든은 저런 낡은 사관은 이제 학계에서 이미 박살났다고 단언하는 입장까지 취하고 있다.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야만성 운운하면서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학살, 예루살렘 학살, 마라트 안 누만 식인 사태 등이 거론되었지만 이런 행위를 십자군만 하지도 않았고 십자군 역시 관용을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십자군이 정복한 아르메니아, 에데사 지역이 무슬림 영토였나면 그것도 아니고 거긴 정교도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 군대 역시 장기바이바르스는 다른 이슬람 종파들을 대상으로 허구한 날 학살과 약탈을 벌여 같은 무슬림들에게 악당으로 증오받았다.[48] 이런 건 무시하는 것을 악질적 취사선택과 허수아비 찌르기라고 한다.

십자군 전쟁은 그냥 규모가 크고 전장이 달랐을 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전쟁이다. 십자군의 광기로 지목되는 성전 드립, 학살과 약탈은 이슬람이고 동로마고 십자군이고 가리지 않고 지난 수천 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이며 그 이후에도 행해진 일인데 마치 십자군만 특별했던 것처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중세사회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자는 주장이다. 과거에는 십자군 전쟁을 19세기 제국주의를 보는 시각으로 해석하거나 20세기의 종교적 감수성에서 해석하는 시대착오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 시기와 그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전쟁과 크게 다를것도 없던 십자군 전쟁만이 유독 (다른 전쟁들과 구분되는) 광신으로 빚어진 참극으로 주목받아왔다.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보다 동시대 다른 전쟁들과 비교연구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전쟁이 빈번했던 중세 유럽사의 많은 전쟁들과 규모는 다를지언정 비슷한 양상을 보였으며, 실은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십자군 전쟁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는 사실 모든 역사적 사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관련 역사학자, 문필가, 대중매체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 고민, 세계관에 따라 해석 되었다. 서유럽 세계 전반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주의가 몰아 칠 때는 비이성적인 광신으로 인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삽질로 평가했고, 그 이후 제국주의뽕을 쫙 빨아먹고 다른 문명과 인종을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로 깔아뭉갤 때는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현대 사회에 들어 서구중심주의가 강력하게 도전받고, 이에 대한 대항마로 옥시덴탈리즘적 관점이 유행할 때는 다시 악랄한 유럽 제국주의의 시초로 보았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 기존의 서구중심주의의 대항마로 부상했던 옥시덴탈리즘적 관점도 이제 혁파 돼야할 낡은 관점이 되어버리고, 실증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이슬람권 내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면서 기독교 vs 이슬람 같은 듣기에는 빠방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단순화와 이분법적 관점 자체를 거부하고, 덤덤하게 후대의 관점에서 실제로 그 시대에 뛰며 먹고 살았던 개개인의 역사적 주체들의 (historical actors) 자발성을 (agency) 강조하는 현대의 시각이 부상한 것이다. 전공 분야에 대한 세분화가 깊게 진행되고, 역사적 사실 관계를 뭉떵그려 단순화하는 거대한 프레임 자체에 회의적인 현대 학계의 관점에서는 사실 11세기 부터 일러도 14세기, 관점에 따라 15세기, 16세기까지, 매번 이름만 '십자군'이란 상표를 걸었을 뿐이지 실제로 발생 동기, 목적, 관련 세력, 진행 방향 모두 판이하게 달랐던 300~400년에 걸쳐 터졌다가 수그러지기를 반복했던 현상을 '십자군 전쟁'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만 뭉떵거리고 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를 무리수로 본다.

임용한도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은 어마어마한 논란을 낳았는데, 세 가지는 말씀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첫째,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것, 정의의 전쟁이라 불린 것, 십자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한참 뒤의 주장이고) 그 뒤에 악용해 먹으면서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둘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 우리가 앞으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하겠지만, 앞으로 나올 전쟁사의 절반은 중동이 끼어있어요. 중동은 위치상 세계문명의 교차로라구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의 패러다임이 계속 사용 되는 거에요. 한쪽은 성전으로, 한쪽은 우리가 당했는데 또 당한다는 식으로. 그러니 분노는 재생산되고, 여기에 대한 악용과 반감도 같이 커지고. (중략)
그리고 중세로 돌아와보면 좀 더 복합적인 일이 얽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속죄한다고 성지 탈환한다고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게 말이 되냐. 그래서 표면 그대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침략 전쟁이었다." 또는 "종교적 광신에 의해 이교도들을 다 죽이라 그랬다."고 말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인들을) 짐승으로 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셋째, 돈 때문에 일어났다? 돈 때문에 간 사람도 많아요. 왜냐면 중세 사회는요, 30~40%가 극빈층이었어요. 그래서 어디에서 뭐가 났다고 하면 다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기사들도 돈을 벌러 갔느냐? (그건 아닌 게) 자기 전 재산을 팔고간 기사들도 수두룩해요. 70년대까지 만해도 가장 유력한 가설이 상속을 못 받은 차자(次子)들이 봉건제는 장자에게만 세습이 되니까 상습 못 받은 사람들이 돈 벌러 갔다 이랬는데, 후에 자료를 확인해 보니까 상속 못 받으면 둘째는 거지가 되냐고. 둘째라도 어쨌든 귀족인데. 형네 얹혀서 살면 되지 왜 거기까지 가느냐고. 그리고 당시에는 거기까지 가는 데 2년 정도 생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자기 땅 팔고 가고, 요즘 말로 하면 대부 받아서 평생을 갚아요. 물론 돈을 벌러 간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37부 십자군 원정 1부.영상 13분 11초부터.

11.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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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타

  •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처음으로 커피를 접하는 계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럽에 전파됐을 때 커피를 이교도들이나 먹는 거라며 폄하하고 기피했지만 그럼에도 한번 커피를 맛본 사람들로 인해 커피는 묻히지 않았고, 결국은 훗날 유럽에서도 커피는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 오늘날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을 흔하게 쓰고 있으나, 정작 십자군 전쟁 당시 중동의 무슬림들은 십자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십자군을 가리키는 아랍어 단어인 '알 크루사다'는 무려 19세기에 가서야 등장한 말이고, 당시의 중동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프랑크족'이나 '로마군'이라고 불렀다. 십자군이 로마 즉 동로마가 고용한 용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십자군 전쟁 당시 그리스인들이 라틴인 학살을 일으킬 정도로 서유럽인을 야만인으로 멸시했던 것처럼, 서유럽인들도 그리스인들을 이교도라며 홀대하고 음해하거나 (특히나 동로마의 라틴인 학살 이후엔) 악마의 자식이라고 부르며 산채로 불태워서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사마 이븐 문끼드 저서에서도 십자군들은 그리스인들을 악마나 마귀 취급해 기름을 끼얺고 불태워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현대까지 내려와 서유럽에서는 그리스인 죽이기 날이 따로 있을 정도로 그리스인들을 은근히 차별한다.
  •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의 군사 전술은 중무장 기사와 보병이 협력하여 전열을 유지하며 적에게 돌진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이슬람 군대는 가벼운 갑옷을 착용한 기병 중심으로, 기동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전술을 사용해 십자군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도 하였다. 십자군의 기병 전술은 이슬람 군대의 기동성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특히 열악한 기후나 낯선 지형에서는 이슬람군의 유연한 전술이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기습 공격에 취약했고, 장기전으로 이어질수록 보급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 십자군 전쟁은 거대한 경제적 자원이 필요했던 만큼, 각국의 군주와 귀족들은 다양한 재정적 방법을 동원하였다. 많은 기사와 귀족들이 참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지를 매각하거나 임대해 비용을 충당했으며, 특히 가톨릭 교회는 성지 탈환을 위한 자금 모집에 적극 나섰다. 교회는 십자군 자금 조달을 위해 헌금 모금, 헌금 면제, 특별 헌금 제도 등을 운영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확대하였다. 십자군 참여는 막대한 비용 부담을 수반했기 때문에 부유한 귀족층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이후 유럽 귀족 사회의 권력 재편에도 영향을 미쳤다.
  • 십자군 전쟁 당시 여러 아랍 왕조들을 섬기는 관리로 일하면서 자신이 직접 십자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도 여러 번 참가했던 아랍의 작가인 우사마 이븐 문끼드는 그의 저서인 성찰의 서에서 동로마의 십자군을 말이 없고 조용하며 딱딱한 성격의 용병들로 여겼지만, 그래도 십자군을 완전히 무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그들 중 일부 기사들과 친분을 맺어 형제라고 부를 정도까지 사이가 좋기도 했고[49], 십자군 특유의 '조용하고 과묵한 강한 수도자'이미지와 사용하는 우수한 무기들 특히 투석기의 강력한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사마의 저서는 2018년 국내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된 상태이다.# 또한 십자군은 이미지와 달리 정직하고 말이없는 조용한 수도자였으며, 오히려 난폭하고 사나운 야만인으로 여겼던건 십자군이 아닌 근처 민속종교를 믿고있었던 문맹민족이거나 가톨릭을 믿지 않았던 하류층 출신 서유럽인, 또는 노예들이였다.
  • 십자군은 문신을 하고 다녔고, 이슬람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고 한다. 당시 십자군 전쟁때 중동에 주둔한 십자군들은 머리를 짧게 깎으나 턱수염을 절대로 깎지 않았다고 한다.
  • 십자군 원정 동안 유럽 군대는 낮은 위생 수준으로 인해 다양한 전염병에 시달렸다. 특히, 위생 관념이 부족하고 장기간에 걸친 행군과 열악한 환경에서의 생활은 각종 질병을 야기하였다. 반면, 이슬람 쪽에서는 기초적인 의학 지식과 위생 관리 체계가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어,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서 이슬람 의료 체계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십자군 중 일부는 이슬람의 약초 치료법이나 감염 예방법을 경험하였으며, 전쟁을 통해 이러한 의료 지식이 유럽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 십자군에 참전한 군인과 평민들은 귀향 후 심리적 충격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장기간의 전쟁과 성지에서의 고된 생활, 이국 문화와의 충돌, 전우와 친족의 상실 등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로 인해 일부 귀족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하거나 참회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전역에 걸쳐 종교적 열정과 회개 운동이 확산되었다.
  • 십자군 전쟁의 와중인 1146년 4월부터 1147년 6월 사이에 익명의 저자가 작성한 프랑스 십자군의 노래인 "기사들이여, 당신은 확실한 보호를 받고 있다(Cheval‎ier, mult estes guariz)"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Deus ad unturnei pris
    entre Enfern e Pareïs,
    si mande trestuz ses amis
    ki lui volent guarantor
    qu'il ne li seient fallliz.
    Le Filz Deus al Creatur
    a Rohais estre ad mis un jorn.
    La serunt salf li pecceür!
    하느님께서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토너먼트를 마련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기꺼이 그분의 뜻을 지지하는 모든 친구들에게
    그분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요구하고 계신다.
    창조주 하느님의 아들이
    에데사에 머무를 날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중국의 웹사이트인 바이두에서 십자군과 송나라의 군사력을 두고 비교한 게시물이 올라왔는데, 작성자는 십자군과 송군의 전투력과 보급 능력 및 전투 의지 등을 여러 부분에서 비교하면서 "송군보다 십자군이 여러 면에서 군사적 능력이 더 뛰어났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번역.

13. 참고 자료

  •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민 말루프 저, 김이선 역, 아침이슬 발행, 2002년)
    아랍인의 관점에서 서술하여 그쪽 입장에서 본 전쟁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사씬이라든지 아랍의 분열과 이슬람도 투르크와 아랍인의 대립이나 종파 문제를 다루면서 아랍 측 문제점도 좀 이야기하고 있기에 무조건 십자군은 침략자, 이슬람군은 정의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은이 아민 말루프는 국내에서 정발된 <마니>라는 소설을 썼는데 말루프 자신이 레바논 태생 마론파 출신[50]이지만 마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51]을 넣기도 했다. 그리고, 종교 연구도 하면서 데바닷타[52]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에서 데바닷타에 대하여 "좀 좋은 면도 있다"고 봤으나, "광신적인 한계로 가서 스스로 파멸하니 안타깝다"고 결국 결말이나 그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문에서 패자이기에 더더욱 기록에서 불리하게, 왜곡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쓸 정도로 다양한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소설을 쓰며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종종 이 책이 "아랍인 짱이라능, 십자군 악마새퀴"라고 무슬림이 씹는 책이라고 터무니없이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책도 안 읽어본 거다. 참고로 다나카 요시키 소설 아르슬란 전기에서도 후기에서 이 책을 잠깐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편향된 관점이나 사실관계 왜곡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많은 편이다.
  • 서유럽의 의학에 대해 다룬 우사마 이븐 문끼드의 기록 중 부정적인 사례만 인용하고, 바로 뒤에 나오는 긍정적인 사례는 생략하고 언급조차 안한다.
  • 1187년 하틴 전투에서의 살라딘의 승리는 자세히 묘사하지만 10년 전 몽기사르 전투에서의 참패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십자군의 승리로 끝난 아르수프 전투와 야파 전투도 과감하게 생략했다.
  • 4차 십자군에 대한 설명에서 베네치아인들이 처음부터 동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은 누적되어 온 기독교 진영의 상호 갈등과 여러 우연이 겹쳐 빚어진 참극에 가깝다.
  •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 등 십자군이 저지른 잔학행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만 무슬림이 저지른 학살은 최소한으로만 다룬다. 예를 들어 살라딘이 파티마조의 수단인 근위대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서 항복을 받아낸 뒤 약속을 어기고 전부 학살한 사건을 깔끔하게 생략했다. 방식이 좀 교묘할 뿐 이슬람을 실제보다 미화하고 십자군을 악마화한다는 평가가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서적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십자군을 라틴인이라 칭하기보다 프랑크인이라 칭했는데, 기사의 중장갑과 서유럽 군대의 우수한 장비에 놀랐지만 가장 걱정스럽게 여긴 것은 뜻 밖에도 '법률과 행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슬람 학자가 말하길 "이슬람 세계는 대부분의 법률적 행정적 사안이 에미르의 독단으로 행해졌으나, 십자군들은 영주의 의견이 크더라도 '법률에 의거해' 처벌을 정한다"는 점과 "정확한 토지분배로 현지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학자는 "십자군의 군대보다, 이러한 법률과 행정제도가 이슬람의 진정한 적이 될 것"이라며 걱정했다. 로마법과 행정제도가 지금 인류의 법체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53]
  • 토머스 매든의 <십자군>
    십자군을 다룬 국내에 번역된 학술서로는 사실상 이 책이 마지막이다. 번역된 시점에서 국내에 들어온 최신논의를 담고 있으며 가장 정확하고 방대한 양을 자랑하지만 그대로 Concise History라 매우 간략하다. 입문용으로는 훌륭하나, 방대한 사건을 짧게 요약하였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당시의 복잡한 정치역학과 문화, 군사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김태권이 이 책을 "서구우월주의자의 망상"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도 비슷한 오류를 벌여 비판받았다. 사실 토마스 매든의 저술에 대해서는 여러 서구 학자들도 비판하고 있는데,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십자군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현재의 이념이나 종교와 관계가 크고[54], 매든 역시 십자군에 대해 특정한 견해(비판적인 입장에서 보면 편향적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전문 학술서이지만, 이 책만 읽고 절대적인 사실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55] 참고로 토머스 매든은 책의 끝부분에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거론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세계가 유럽의 위협에 눌려 수세에 몰렸다고 주장하는 반면 토머스 매든은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며 오히려 십자군 전쟁 이후에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으로 십자군 전쟁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져서 유럽이야말로 이렇게 부흥한 이슬람 세력의 위협에 시달렸다고 반박하고 있다.
  • <동방의 부름: 십자군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피터 프랭코판 저/ 이종인 역/ 책과함께/ 2018년 12월 옥스퍼드대학 비잔티움연구센터 소장이자 동대학 우스터칼리지 선임 특별연구원이며 비잔티움 역사 전공자로서 11~12세기의 비잔티움제국, 서유럽, 이슬람 세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왔고, 비잔티움(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네가 12세기에 쓴 역사서 『알렉시아스Alexiad』를 직접 번역한 피터 프랭코판이 쓴 책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라서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는 내용도 많은데, 우선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킨 계기가 이전까지의 통설인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가 셀주크 투르크에게 당한 패배 때문이 아니라 1090년대에 들어서 소아시아 반도로 몰려온 투르크족 군벌들을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했다. 다루는 범위는 민중 십자군에서 1차 십자군까지라 좁지만, 내용은 굉장히 깊이가 있는 편이다. 다만 이 책에도 약간의 흠은 있는데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세계사 지식이 부족했는지 16세기 멕시코의 아즈텍이 스페인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물인 옥수수를 십자군 보급 함대가 싣고 왔다고 적었는가 하면 민중 십자군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투르크군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었다고 적었는데 총검이란 무기 자체가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에 그 이전인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 때에는 당연히 총검도 없었고 그런 총검을 이용한 무술인 총검술 자체도 없었다. 아마 번역자가 활쏘기 연습을 총검술 연습이라고 잘못 번역했다.
  •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김능우, 박용진 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2020년 7월 아랍 전문가와 유럽사 전문가가 공동으로 중요한 사료를 선정해서 번역한 책이다. 사료를 직접 번역해서 실어 놓았으므로 좀 갈피가 안 잡힐 수도 있지만,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에게 유용할 듯. 특히 쉽게 접하기 어려운 아랍 사료들이 많이 실려 있다.
  • <이슬람 진영의 대 십자군 전쟁> 김능우 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2016년 12월 전 도서의 공동저자가 쓴 책으로, 역시 아랍 현지에서 찾아낸 사료들을 번역해서 실어 놓은 책이다.

그 외에는 W. B. 바틀릿의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와 시공사가 내놓은 조르주 타트의 <십자군 전쟁 성지탈환의 시나리오>가 있다. 바틀릿의 책은 절판이라 구하기 힘든 건 둘째치고 비전공자의 한계가 많이 드러난다는 의견이 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시오노 나나미가 쓴 십자군 이야기도 있는데, 둘 다 그다지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만한 서적은 되지 못한다.

결국 십자군 전쟁에 대해 최근 20여 년간 역사학계가 내놓은 새롭고 풍부한 연구성과를 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영어를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영어 서적 중 유명한 책으로는 Thomas Asbridge의 <The Crusades: The Authoritative History of the War for the Holy Land> 등이 있다. 정말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면 라틴어나 중세 아랍어 등 당시의 언어들은 기본으로 공부해야겠지만.

14. 영토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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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 1차 십자군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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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년: 십자군 국가의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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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년경, 십자군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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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년: 2차 십자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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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5년: 에데사 백국의 멸망과 2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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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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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년: 리처드 2세의 3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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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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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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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프리드리히 2세의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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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 예루살렘 상실과 몽골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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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년: 알레포 상실과 9차 십자군.
[1] 이베리아반도 남부가 이슬람권인 이유는 알 안달루스, 레콩키스타 참조.[2] 교회 라틴어로 '엑스페디치오 사크라', 곧 성전, 성스러운 원정(Holy Expedition)이라 불렸다.[3] 아나톨리아의 상실은 동로마 제국에게 이전의 영토 상실보다 큰 위험으로 다가왔다. 지도상으로 보이는 아나톨리아 내륙은 대부분 생산성이 낮고 건조 고원지대지만 해안 인근에는 면적에 비해 농업생산력이 매우 높은 평야 지대가 있었다. 신병모집의 근거지이자 곡창지대였던 넓은 해당 지역들의 상실은 동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크나큰 경제적/군사적 손실이었고, 아나톨리아의 지정학적 위치 역시 매우 중요했다.[4] 작은 규모로는 7차~8차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9차까지 정의하는 경우도 있으나, 8차와 9차를 묶어 8차까지라 보는 경우도 있다.[5] 서유럽 가톨릭의 어그로가 이 일로 엄청나게 끌려버렸다.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1차 십자군 원정 때도 십자군 지휘관들이 파티마의 사신들에게 이 일을 끄집어내 격렬히 항의할 정도로 두고두고 씹혔다.[6] 여담이지만, 현재 IS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악행에 대한 변명으로 흔히 내세우는 '예전에 십자군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짓에 대한 보복이다'라는 논리가, 오히려 그들이 그리도 싫어하는 십자군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을 뿐,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7] Robert the Monk's account of Urban's speech, Urban II: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Five versions of the Speech (available as part of the Internet Medieval Sourcebook)[8]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무슬림 해적이 가장 극성이던 시대는 오히려 십자군 시대 (12~13세기) 이후였다는 것. 바르바리 해적 문서 참고. 다만 9세기 이후 이탈리아 일대에 안정이 찾아오며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의 도시 공화국들이 해군을 육성하여 이슬람 해적을 격파하고 현재 튀니지 일대를 약탈,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거대 무역 세력으로 성장,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된다.[9] 예외로 마누일 1세는 독자적으로 십자군을 외치며 영향권 내의 기독교국과 연합 원정에 나섰으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패하면서 그 시도가 좌절되었다.[10] 실제로 동로마 황제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군 원정대를 민병대/용병대 정도의 수준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앞서 말한 주도권 다툼 차원에서 볼 때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동로마 황제의 헛된 희망사항과는 달리 서유럽은 1차부터 쟁쟁한 대영주들이 연합체를 꾸려오더니, 3차부터는 쟁쟁한 강대국 국왕은 물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참전하는 등 규모로 보나 권위로 보나 쇠퇴기에 접어든 동로마 황제가 함부로 비벼볼 수 없는 엄청난 거물들이 참전하며 되려 동로마의 등골을 빼먹고 걱정만 늘리는 발암물질이 되어버렸다.[11] 다만 착취가 적당했던 건 그나마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같은 민족이고 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던 서유럽과 한정이고, 동유럽과 러시아에서는 흑사병 이후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12] 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이 프로이센 공국이 독일을 통일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직접적인 전신은 아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은 신성 로마 제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다. 프로이센 공국에서는 프로이센이라는 이름만 빌려왔는데 명목상 독일 왕국에 속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을 칭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하는 독일왕과 동격이 되는 문제가 있어 제국 외부에 있던 프로이센의 이름을 빌려 왕을 칭한 것이다. 독일 제국의 황실이었던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가장 중요했던 곳은 수도 베를린과 중요 위성도시 포츠담이 있는 브란덴부르크였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이 나 위기에 처하면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나 똑바로 지키고 동프로이센을 포기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로 동프로이센은 비중이 없었다.[13] Adhemar de Monteil, ? ~ 1098. 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 교황 특사였으며, 1차 십자군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안티오키아 공방전 이후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14] Sigurd I, 1089 ~ 1130. 노르웨이의 왕. 1차 십자군 직후 군대를 이끌고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시구르 1세와 휘하 십자군의 행적은 노르웨이 십자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15] 프랑스어로는 샤를 당주. 시칠리아 왕국 국왕으로 루이 9세의 막내동생.[16] Raymond de Saint-Gilles(Raymond IV de Toulouse), 1052 ~ 1105. 프로방스영주. 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돈이 많고,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오만하고 고압적인 성격으로 인해 인기가 없었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 초대 국왕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부용의 고드프루아에게 빼았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질의 레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서약을 했던 여러 십자군 영주들 중 유일하게 서약을 준수했던 영주이다. 트리폴리 백국의 초대 백작이다.[17] Bonifacio del Monferrato, 1150 ~ 1207. 4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4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인 엔리코 단돌로가 다른 후보(플랑드르의 보두앵)를 밀었고, 결국 황제 즉위에 실패했다. 보니파치오는 제노바 공화국과 연결고리가 있었고 영지가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8] Geoffroi de Villehardouin, 1160 ~ 1212. 4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4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연대기 작가이다. 하층 귀족 출신의 기사로, 4차 십자군에 참가하기 전에는 프랑스 상파뉴의 군사령관이었다. 당시 상파뉴의 영주는 백작 티보 3세였는데, 티보가 1199년에 주최한 마상 시합에서 조프루아는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티보 3세가 4차 십자군의 초기 지도자였으므로, 조프루아도 그를 따라서 십자군에 참가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4차 십자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으며 라틴 제국이 건국된 후 라틴 제국의 군사령관을 지냈다. 황제 보두앵 1세(플랑드르의 보두앵)가 불가리아에게 포로로 잡힌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뛰어난 지휘와 전략, 전술로 아군을 큰 피해없이 퇴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207년부터 4차 십자군의 원정 전 과정을 담은 프랑스어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연대기의 제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Conquete de Constantinople)'으로, 그 문체와 형식은 중세 프랑스 역사 기록의 선구로 여겨진다. 조프루아가 모델로 삼아 모방할 만한 프랑스어 저작이 그 이전에는 없었으므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는다. 조프루아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프랑스어 산문역사를 쓴 연대기 작가였다. 조프루아는 1209년에 아카이아 공작이 되었고, 얼마 후 죽었다. 조프루아의 자식들은 1218년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였다.[19] I. Kılıç Arslan, 1080 ~ 1107. 룸 술탄국술탄. 민중 십자군을 몰살시킨 인물이다.[20] Imād al-Dīn Zankī, 1085 ~ 1146. 셀주크 제국장군. 모술알레포총독이며, 장기 왕조의 창시자이다. 십자군에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맞선 최초의 이슬람 무장이다. 그는 1144년에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였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원정의 계기가 되었다.[21] نور الدين(Noradinus), 1118 ~ 1174. 이마드 앗딘 장기의 아들. 장기 왕조의 2대 술탄이다.[22] 말리크 알 카밀 나시르 앗딘 알 말리 무함마드(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 1180 ~ 1238. 아이유브 왕조의 5대 술탄으로, 살라딘의 동생인 알아딜의 장남이다. 아버지 알아딜이 1218년에 아이유브군이 다마에타에서 5차 십자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 발작을 일으켜 얼마 후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술탄에 즉위하였다. 이후 총력을 기울여 5차 십자군에 대항하였고, 끝내 적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알레포다마스커스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되었고, 때마침 1228년에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6차 십자군이 침공해왔다. 6차 십자군과 싸울 여유가 없던 알카밀과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프리드리히 2세는 서로 싸바싸바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팔고 샀다. 이후 내부 분열을 수습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예루살렘을 팔아치운 것 때문에 무슬림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23] Kürboğa. 1차 십자군 당시 모술의 영주였다.[24] Yağısıyan, ? ~ 1098. 1차 십자군 당시 안티오키아의 총독.[25] 이러한 상권 이동과 함께 폴로브치인들의 침입과 내전으로 타격을 입어 쇠퇴하고 말았다.[26] 대표적인 사례로 이븐 시나가 이스마일파이다.[27] 여기서 이슬람권이 아닌 아랍어권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는, 상술한대로 페르시아어권 이슬람 지역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28]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흑인 기사는 이걸 의식한 듯하다. 다만 유럽 국가들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나 교류는 크지 않았다고 보인다.[29] 중국은 이미 한나라 시대부터 사용하던 기술이였는데, 서양은 산업혁명 시기에야 발견한다. 이도 식민지인 인도가 사용하던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30] 탄소를 고르게 분포하는건 좋은데 문제는 탄소의 양 자체의 조절이 어렵다.[31] 이때 광경들을 묘사한 기록들을 보면 굉장히 참혹한데, 부모가 먼저 자녀들을 칼로 찔러 죽인 다음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이는 식으로 끝이났다.[32] 사자심왕 리처드의 활약이 돋보였던 3차 원정은 결과적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나 협상을 통해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순례를 인정받긴 했다.[33] 그래서인지 4차 십자군 이후로도 이 두 세력은 십자군을 불신하며 이들의 원정에 어떠한 협력도 하지 않았다.[34] 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점령하고 서유럽 군대의 관례에 따라 약탈을 벌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니케아는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로 룸 술탄국에 점령만 당했지 시민 대다수는 동로마인들이었고 상실한 영토를 수복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생각이었던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의 니케아 약탈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것. 황제는 니케아 수비대와 몰래 협상을 벌여 도시를 포기하는 대신 수비대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니케아를 접수하고 십자군의 약탈을 막았다. 그런데 십자군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하며 불만을 토해냈다.[35] 다만 주교들을 파견하였다.[36] 알렉시오스는 고드푸르아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으며, 여기에 고드푸르아가 반항하자 심플하게 보급을 끊어버렸다. 격분한 고드푸르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를 약탈한다.[37] 동로마 제국이 니케아를 선점했을 당시에도,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보상이 약탈 전리품보다 약하고 이교도와 협상을 벌인데다가 십자군이 거의 함락해둔 도시를 강탈했다며 불만을 터트렸다.[38] 토양염화와 유목세력의 확장으로 쇠퇴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대신해 이슬람 세계 최대의 부국이 된 이집트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초원 말박이 용병 인력시장인 시리아의 결합.[39] 물론 십자군을 완전히 축출한 건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아닌 맘루크 왕조였다.[40] 비유하자면 로마인이 한니발 이전에 국가적 위협으로 피로스가 있었음을 잊어버린 것과 비슷하다.[41] 서구 미디어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가 마치 무작정 폭력을 숭상하는 종교인 것처럼 왜곡된 것은 맞으나, 여전히 이슬람교 자체가 굉장히 경직된 율법 위주로 돌아가는 종교인 것도 반박하기 힘든 사실이다.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의 추태로 갈수록 이슬람이 원래의 좋은 점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42] 정확히는 가톨릭이 벌인 학살극이지만.[43] 조찬선 목사는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의 필리핀 원주민 학살도 십자군에 비유하며 비판했다.[44] 사실상 대부분의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났다.[45] 이미 '십자군의 탈선'인 4차 십자군이 아주 똑똑히 그 진상을 보여준 바 있다.[46] 서열상 알렉시오스가 위고 동로마가 신성 로마 제국을 황제 책봉을 해준 일이 있기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 조공 책봉처럼 절대적이지 않았다.[47] 지금도 이슬람 세계의 민족, 종파간의 분쟁은 다른 종교들보다 극심하다.[48] 다만 이슬람 측에서 관대함을 대표하는 건 살라흐 앗 딘이었지,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이슬람 다른 종파에게도 악랄하기로 악명이 자자하였고 십자군을 까고 십자군 전쟁을 종교적인 미친 전쟁이라고 미치도록 비난하던 근현대 서구 역사가들도 살라흐 앗 딘을 '관대한 이슬람 대왕'이라고 찬양하던 것과 달리 이 둘은 '십자군과 종교가 다르다 뿐 똑같은 학살자'라고 비난했었다. 이들이라고 무조건 '이슬람은 죄다 관대하다능~ 기독교는 악마색히'라고 한 게 아니다.[49] 이 십자군 기사는 우사마한테 자기 아들이 서유럽의 본국으로 가서 기사 수업을 받을 예정인데, 우사마의 아들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까지 했다. 그러자 우사마는 자기 아들이 프랑크인들의 나라로 가는 것은 감옥에 가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여겨서 "내 어머니가 내 아들, 즉 손자를 무척 아끼시기 때문에 보낼 수 없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고 그 십자군 기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어머니의 말에 따르라고 동의하였다.[50] 프랑스에서 거주 중.[51] 다만 비난도 했지만 서문에서는 다양한 종교 장점을 넣으며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52] 국내에도 정발.[53] 사실 로마는 그 웅대한 규모에 비해 과학적 발전이나 철학적 발전은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하지만 법률과 건축, 그리고 군사 면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냈다. 법률의 경우 대륙과 영미권, 제3세계, 심지어 사회주의권까지 모두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4] 그래서 '지금 내가 서구 유럽인이고 가톨릭, 개신교인인데, 과거에 십자군이 없었다면 나는 유라비아에 사는 이슬람교도였겠지? 그건 안 되지!'라는 인과관계가 거꾸로된 논리로 십자군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자기의 종교나 민족정체성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일은 한국을 포함하여 어디서나 흔한 일인데,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감성에 가깝다. 정작 과거사가 바뀌었으면 지금 자신의 민족, 종교 정체성도 바뀌었을 것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 못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탐라국이 독립국으로 남은 세상이 있다면, 지금처럼 한반도에 복속된 역사를 상상하면서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제주도민은 농담이 아닌 이상 독립투쟁을 벌이지 않는다.[55] 매든의 입장은 자학사관 비판론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