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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세(近世)는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시기 구분에 있어 에도 시대를 특정하기 위해 조어한 개념이다. 이것은 용례에 따라 초기 근대(Early modern period)와 동일시되기도 한다('범례' 문단 참고).2. 범례
- 한국사에서는 한때 한우근과 한영우 등 중심으로 조선 시대를 근세로 구분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이후 고려와 조선을 왕조를 중심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대세이다.[1][2] 애초에 고대-중세-근대 3분법 자체가 유럽사를 설명하기 위한 도식이고, 동아시아 세계에는 이를 일률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본에서 일본사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인 근세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3][4]
- 영어 및 독일어를 비롯한 게르만권에서는 16~18세기를 '초기 근대(Early Modern Age/Frühe Neuzeit)'라고 부르는 반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 라틴권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전 시기를 그냥 '근대(moderne)'로, 그 이후를 그냥 '현대(contemporaine)'로 구분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대중적으로는 편의상 이 시기도 근세로 부르지만 적어도 서양사학계에서는 서구권의 명칭을 따라 근대 초기로 부르는 편이다.
- 이 문서에서는 16~18세기 아시아권을 서술하고, 유럽사의 16~18세기는 초기 근대 문서에서 서술하도록 한다.
3. 어원
역사학적으로 '근세'라는 명칭이 시대 개념으로 도입된 것은 1903년 출간된 쿄토 대학의 우치다 긴조(内田銀蔵)의 책인 일본 근세사(日本近世史)를 시작점으로 한다. 우치다는 에도 시대를 봉건제의 완성으로 파악하면서, 그러면서도 근대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시기이자 성숙의 시기로 파악하였다. 이 구분은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쇼쿠호 시대는 중세와 근세의 과도기로 평가된다.[5]이 구분을 중국사에 적용한 것이 쿄토 대학의 나이토 코난이다. 나이토는 '당송 변혁론'을 주장하면서, 당에서 송으로의 전환기 중국을 시대의 전환이라할 만한 변혁이 일어난 시기로 파악했다. 이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에게로 이어져 송을 근세로 파악하는 '쿄토학파'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마에다 나오노리와 니시지마 사다오를 중심으로 한 '도쿄학파'[6]는 송 이전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송부터를 중세로 파악하였고, 이를 '중국사 시대 구분 논쟁'이라고 한다.[7]
한국의 경우 한우근과 한영우 같은 일부 서울대 학자들이 조선을 근세로 구분하기도 하나,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이래 고려와 조선은 왕조를 중심으로 구분하거나, 양자를 아예 중세로 파악하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경향이다.[8] 한국 서양사학계에서도 16~18세기 유럽사를 '근세'로, 그 이후 시대를 '최근세' 혹은 '근대'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21세기에 들어 적어도 역사학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관행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그러나 초기 근대라는 용어보다는 근세가 좀 더 언어적 측면에서 경제적이고, 기존의 관성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근세라는 용어가 여전히 활발히 쓰인다. 근대와 현대를 묶어 근현대라 부르듯이 중세와 초기 근대=근세를 묶어 중근세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근세란 표현이 초기 근대의 동의어로서 쓰이는 이유 중 하나인데, 초기 근대를 근대의 초창기로서 보는 관점의 표현 외에도 (현대를 근대의 연장선으로 보듯이) 중세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의 표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4. 특징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기가 종식되고 통일왕조의 형태를 성숙하게 운영해 나가는 시기이며 이는 중앙과 지방세력, 이민족과 한족이 비교적 균형있게 정계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성행한 성리학과 과거제, 은(銀)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의 운영이 이를 뒷받침해준다.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계급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는 시기였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비록 지배계층의 위치는 유지했지만, 중앙정부와 민간(특히 부를 이룩한 부농이나 거상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막부와 지방세력, 성장하는 상인들의 상호 견제는 나중에 근대 일본이 탄생하는 데 기본적인 틀이 되어주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들은 강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남용하면 바로 신권의 견제로 이어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인 반정이나 조선시대의 사관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왕이어도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영역이 존재했던 것이다.[9]
중동 및 이슬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유의미한 시대 구분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압바스 칼리프가 분권화의 압력에 사실상으로 해체되고 그런 대로 잘 짜진 법률 체계와 종교 및 민간 부분을 관료제로 포섭하면서 주변 지역을 왕성하게 정복하는 국가들이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 시기를 이전의 '중간 시대'와 구분해 '화약 제국의 시대'로 파악한 것이다. 그 나라들이 바로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10]
그렇다고 오스만 제국은 튀르키예, 사파비 왕조는 이란, 무굴 제국은 인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선 곤란하다. 물론 오스만과 사파비 왕조와 무굴 제국이 현대 튀르키예, 이란, 인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국들인 것은 맞는다. 특히 튀르키예의 경우는 아예 직계 국가니까. 하지만 오스만 제국만 해도 제국 내 40%가 비무슬림이었고, 튀르크인 비율은 더욱 적었으며, 제국의 관료들과 장교들 대부분은 발칸의 데브시르메로 징집된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이었다.[11] 사파비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에 기반한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사파비 왕조의 기반은 현재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튀르크인[12]이었고, 지금도 이란 인구는 약 30%가 튀르크인이다.
무굴 제국도 인도에 있었지만 공식 문서는 이슬람 세계의 학술 용어인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고, 창건자인 바부르는 튀르크화된 몽골계였으며 지배층 가운데에는 튀르크인이 많았다. 세 국가 모두 페르시아화된 튀르크인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였지만, 각자의 제국을 통치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선택한 종파와 문화에 따라 수니파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문화를 이슬람화한 오스만 제국, 유일한 시아파 교법 국가로서 페르시아 문화를 선택한 사파비조, 그리고 인도 방면으로 내려가 페르시아 문화와 인도 문화의 조화를 추구한 무굴 제국으로 갈라졌다. 전근대 국가가 바로 뒤의 근대 국민 국가로 이어졌던 것은 국가적 강역이 지리적인 격리로 인해 일찍부터 엄격히 분리된 동아시아에서는 익숙한 일이지만, 이 동네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아니, 사실 이런 측면에서는 동아시아가 세계사적으로 예외적인 경우라 봐야 한다.
5. 근세의 상징들
5.1. 한국
성리학 이념이 정착되면서 중앙집권 관료국가를 건설하였으며 강한 공권력을 내세워 근대에 등장하게 될 대중문화와 화폐경제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한국사 동안에는 상당히 안정된 왕권을 구비했던 시기이다. 본 시대에는 아무리 강한 왕권을 가진 왕이었다 해도 권한행사에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민생 안정이나 관료제를 통한 치안 유지 등이다.- 양반: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은 정치인을 배출하는 공무원 관료 집단들이었다. 양반은 봉건 귀족들처럼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혈통으로 세습되지 아니했다. 조선 양반의 “혈통” 상 신분은 “양인”이었지, 그 외 권리와 혜택들은 사대부라는 공무원/관료 직책에 따라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주-소작농은 민간인들의 계약일 뿐이지 소작농이라고 혈통으로 세습되는 신분은 아니다. 그리고 지주=양반은 더욱 아니다. 자작농인 농민도 많았으며, 그에 따라 부를 축적하는 부농도 볼 수 있었다.) 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귀족 계층은 직위를 세습하였으나 조선 건국 이후로 국가의 중앙 집권화로 인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양반 사대부들은 과거제나 능력으로 선발된 전통적인 관료주의 의 상징이다. 음서제가 있어도 요직에 못 앉히며, 그 개념이나 과정에 있어서 삼국과 고려의 귀족과는 달랐다.
- 주막: 현대 사극에 등장하는 주막은 조선후기 화폐경제의 발달로 같이 등장, 보편화된다. 이전 시대는 드물었다.
- 포수
- 판소리
- 수원화성: 왕의 특명하에 계획적으로 건설한 요새이다. 서양의 건축 서적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으며, 근세의 상징인 벽돌과 포진지, 무엇보다 성을 제작하는 과정이 들어간 서적과 동원된 근로자들의 임금내역까지 기술되었다. 이 문헌만 있으면 화성이 소실되어도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정도. 수원화성은 명목상으로만 군사시설이고 본질은 왕권 강화와 소상공인의 육성이라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민화
- 지도: 조선 시대 이후 지도의 제작이 활발하기 시작했다.
- 엽전
- 곰방대: 현대에는 궐련, 전자담배가 있으면 근대에는 시가가 있었고, 그 이전인 근세에는 이것이 있었다. 곰방대는 동아시아식 일종의 파이프 담배이다.
- 암행어사: 관료제가 자리잡은 근세의 상징. 일본의 미토 고몬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 환도: 냉병기와 화약 무기가 공존하던 한국 근세 전쟁사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의 환도는 기본적으로 활이나 총과 같은 무기의 보조 무기로 사용되기 위해 띠돈 형식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착용하였다.
- 훈민정음: 오늘날 한글의 옛 이름.
- 하멜 표류기: 중국에 동방견문록이 있으면 조선에는 이 서적이 있다. 서양인이 전통시대 한국을 방문하여 집필한 책이다.
- 연행사, 조선 통신사: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두 사절단이다. 각각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소중화사상에 얽메여 오랑캐라고 무시한 조선인들이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면서 자기보다 발달된 문명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는 건 공통점. 즉, 이 시대는 중화사상 중심의 세계관이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들이 활동했던 17~19세기는 동아시아사를 통틀어 가장 번영하고 안정된 시기였다. 참고로 조선후기는 조선전기와 달리 고생한 기록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5.2. 중국
중국사에서의 근세는 송~청대 아편전쟁 이전까지이다. 다만 중세를 어떻게 보느냐가 학자마다 매우 갈리기 때문에, 근세의 시작은 송나라일수도, 명나라일수도, 청나라일수도 있다.[13] 주목할 만한 점은 기존 시대와는 달리 송대 이르러서부터는 춘추 전국시대나 5호 16국 시대, 5대 10국과 같은 장기적인 권력의 공백이 나타나지 않고 바로바로 통일 왕조로 교체되어 나갔다. 이에 대한 비결은 송나라 때 이룩했던 문치주의와 서민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송원명청 왕조를 거치면서 한족과 이민족들은 번갈아 중원의 주인이 되었고 이는 중국사의 권력 이동 과정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유동적으로 공유되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14] 즉 중국 고대사가 열국의 혼란과 통일 왕조의 등장. 중세사가 호한의 대립과 분열과 재통합이라면 근세사는 호한의 통일 왕조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 송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문치주의는 이후 중국사에서 더 이상 거대 혼란기를 볼 수 없던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을 필두로 한 이 사상은 이후 한국과 일본의 중앙 집권화에 영향을 끼친다. 비슷한 시기 유럽이 종교를 내치고 국왕이 친정을 선포했듯이, 동북 아시아는 비대해진 중세 불교계의 정치 참여를 제한시키고 유교를 기반으로 한 관료 사회를 완성하였다.
- 변발
- 두정갑
- 정화의 함대: 서양의 대항해시대(콜럼버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 서양 선교사: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동서양 문물 교류가 유명하다.
- 은화
- 관료제: 송나라부터 근세로 평가되는 이유는 관료제에 의한 안정을 들 수 있다. 포청천의 배경이 송대인 이유 중 하나.
- 조총, 홍이포: 총포와 더불어 전장에서 활약한 화약 병기.둘 모두 유럽에서 도입되어 전쟁사를 바꿔놓았다. 명대까지 고전하곤 했던 유목민족과의 전투에서 확실히 우위를 점하게 된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창궐하여 중원을 위협했던 시대는 청대에 이르러 일망타진 된다.
- 중국 4대기서: 송나라 때 연극에서 시작하여 문학으로 정착되었다. 역사서에서 출발했지만 여기에 서민들의 욕구가 반영되어 창작된 중국 대중 문화의 시초격이다. 중국 4대 기서의 종류로는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로 나열되지만 금병매 대신에 홍루몽이 들어가기도 한다.
- 베이징: 원나라, 명나라 이래로 현재까지 중국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의 서울과 더불어 행정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 도시이다.
- 경극: 한국에는 판소리, 일본에는 가부키가 있으면 중국에는 경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연극 모두 근세 서민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무형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5.3. 일본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열도는 사실상 열국 시대나 다름 없었다. 일본 원주민들과의 사투, 해적과 도적의 창궐, 다이묘들의 잦은 반란 등으로 성숙한 치안과 중앙 집권이 보장되지 못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시대 이르러 전란이 종결되고 성리학 이념을 내세워 전례없는 태평성대를 완성시킨다. 에도 막부는 중국의 송나라와 더불어 동북아 역사에서 화폐 경제와 서민 문화가 발달된 시기로 꼽히고 있다.- 일본도: 촌마개에 검 두자루를 차고 있는 흔한 사무라이의 모습은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로부터 정립되었다. 대중매체로 인해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무라이들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활약했던 전국시대, 남북조 시대, 겐페이 전쟁 시기에는 사실 일본도보다는 창이나 활이 더 실용적인 무기였다. 칼은 보조무기 혹은 예장용이라고 봐도 될 정도. 전란이 종결된 에도 시대에 들어서 일본도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 맥락에 변한 상위 계급의 상징이다. 에도시대의 일본도는 계급의 상징이었을 뿐 그만큼 부시 계급이 무력을 휘두르는 일은 엄하게 통제되었다.
- 난학
- 덴푸라
- 후미에: 에도 시대 기독교 신자를 박해했던 수단이다. 일본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기독교 신자가 나타나 세력을 키우는 등 공권력과 대립하는 장면이 보이면 거의 동북아의 근세사라고 보면 된다. 동시대 중국 청나라나 조선 후기에서도 기독교가 포교되고 교세가 성장하는 일은 형태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하게 발생했다.
- 은화
- 우키요에
- 가부키
- 다도
- 도자기
- 국학(일본)
- 카케코미
- 추신구라: 일본 에도 시대의 대의명분이나 보편도덕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연극이다. 에도 시대 막번체제의 시대상과 중앙정부의 권력, 대중문화가 모두 들어간 일본의 삼강행실도라고 할 수 있다.
- 미토 고몬: 일본판 암행어사. 부패한 관리들을 처단하는 이야기. 일본 사극의 단골 소재라고 할 수 있다.
[1] 단적으로 역사학보에서 2년 단위로 각 시대별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회고와 전망에서 한국사는 고대사/고려사/조선 전기/조선 후기/근대/현대로 나눠진다. 중국사는 여전히 송대에서 청대까지를 근세라고 표현하는 것과 대조적이다.[2] 7차 교육 과정 국사 교과서까지만 해도 근세, 근대 태동기 따위의 말이 사용되었으나 현행 2015 개정 한국사 교과서는 고대, 남북국, 고려, 조선, 개항기, 식민지 시대, 해방 이후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이는 2022 개정 교육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3] 고대-중세-근대 3분법이 동아시아사에 적용된 것은 일본에서 고대-중세-근대와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를 등치시키며 각 단계의 발전법칙을 도식화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던 것이 그 원인인데, 그 본고장인 일본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점차 의문시되고 있다.[4] 중국사 분야에서는 더해서, 한국에서는 중국사 학회인 선진진한사학회와 위진수당사학회가 중국고대사학회로 통합되었다가 일부 회원들의 문제 제기로 중국고중세사학회로 이름이 변경된 사례가 있다. 이는 여전히 중국사에도 고대-중세-근세-근대 구분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초창기 중국고대사학회로 출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위진수당을 중세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5] 한편 영어권에서 에도 시대는 그냥 Early Modern Japan이다. 혹은 Tokugawa Japan과 같은 표현도 사용한다.[6] 마르크스주의 성향이 강한 '역사학연구회'를 거점으로 하고 있어 역연파라고도 한다.[7] 중국사 시대 구분 논쟁은 1970년대 이후 일본사학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적 역사 발전론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면서 그 명맥이 끊겼다.[8] 신편 한국사, 시민의 한국사 등이 그러하다.[9] 조선시대의 시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초기와 중기의 분기점은 연산군의 재위기간이었다. 연산군은 왕권을 무리하게 남용하다가 신권에 의해 퇴위된 조선시대 첫 사례이다. 현재, 중종반정이 발생한 이후가 조선중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실재로 지방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세는 조선후기 숙종대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숙종 재위 이후에는 강력한 왕권으로 다시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게 됐다.[10] 다만 화약 제국 개념은 학계에서 사실상 사장되었다.[11] 제국 초창기에는 '지배층 = 튀르크인'이라는 공식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는 제국의 지배층에서 튀르크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서히 감소하고, 쉴레이만 1세 시대가 되면서 튀르크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다만 이것은 인종적인 이야기지, 공용어는 여전히 페르시아어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오스만 터키어였고, 지금 튀르키예인을 튀르키예에 사는 튀르키예어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함을 생각해보면 이들도 어찌보면 튀르키예인으로도 볼수 있다.[12] 이들을 일컬어 키질바시(Qizilbash, '붉은 머리')라 한다.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아바스 1세 때까지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다.[13] 중국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고, 서민 문화가 성장한 북송은 근세로 보고 당나라 말기까지(보다 현대적인 시각) 혹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가 재건된 명나라대까지를 중세의 끝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사의 후한-삼국-서진 교체기, 당-송 교체기, 명-청 교체기, 아편전쟁 전후 시기를 중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시기로 보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유파에 따라 후한-삼국-서진 교체기부터 당-송 교체기까지를 중세로 보는가 하면, 당-송 교체기부터 명-청 교체기까지를 중세로 보기도 하며, 후한-삼국-서진 교체기부터 명-청 교체기까지, 혹은 후한-삼국-서진 교체기부터 아편전쟁 전후 시기까지를 중세로 간주하기도 한다.[14] 송나라 이전의 중국사를 공부해보면 알겠지만 가지각색의 왕조들과 지방 정권의 할거 등으로 인해 국가명 외우는데도 매우 벅찬 수준이다. 통일 왕조들마저도 단명하거나 장수한 왕조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간에 한번 계통이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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