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2:02:43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만화2. 시오노 나나미의 책
2.1. 개요2.2. 평가2.3. 비판

1. 김태권만화

원래 길찾기에서 단행본이 나왔을땐 '십자군 이야기'였으나, 비아북을 통해 개정판이 나오면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고할 것.

2. 시오노 나나미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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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로마인 이야기에 이어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탈고한 이후 새로 쓰기 시작한 시리즈물이다. 전체 시리즈는 3+1권[1]으로 구성될 예정이며 한국에는 1권이 2011년 7월 7일에 정식 번역출간되었다.

2.2. 평가

십자군을 바라보는 시각이 김태권의 만화와 제목은 같은데 시각은 정 반대다,

시오노의 책은 친서구, 반동로마[2] 쪽에 상당히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다루는 주제에 고증 오류도 상당하며 제멋대로인 추측은 로마인 이야기에서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역사서로는 불쏘시개니까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보려면 재미로나 보자. 고증 오류는 꽤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시오노 나나미 항목에 적혀 있으니 참고.

그예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 보에몽은 난폭한 찌질이인데 나쁜남자를 좋아하는 시오노의 집필 성향에 따라, 십자군 이야기는 황제의 요구도 쿨하게 넘어가는 대인배로 묘사된다. 또한 비열한 찌질이로 나오는 탕크레드는 그야말로 시오노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완벽한 인품의 기사로 서술한다. 그리고 레몽은...

몽골의 등장을 설명할 때 지도에서 한반도가 몽골의 영토에 포함되게 그려졌는데, 다른 나라들 역시 몽골 제국의 영토를 그릴 때 고려도 포함시킨다. 칸국에 조공을 바쳤던 러시아 공국들 역시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식민지나 속령, 괴뢰국으로 보는 듯 하다. 사실 한국에서 고려사에 대한 학계의 동향을 보면 90년대 이전까지는 '고려가 몽골의 식민지였다니 그게 무슨 소리임...?!!' 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식민지...라고...볼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 정도로 바뀌었다.

2.3. 비판

시오노의 다른 저서처럼 이 책도 [3]도 여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해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까고, 십자군을 띄워준다.'''

《십자군 이야기》 초두에서는 중세 국가들을 현대 국가들의 단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임의로 프랑스인,독일인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행동을 자주 보인다. 예를 들어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현대 국가 개념으로 생각하면 확연히 벨기에[4] 출신에 가까운데 신성로마제국령 사람이니 독일인이라고 한다던가(...)[5] 신성로마제국령이니 독일인이라고 한다면 당시 프랑스 동부(프로방스 포함)지역이나 이탈리아 사람은 전부 독일인이어야 한다.

리처드 1세 또한 영국인에 가깝다는 식의 서술을 많이 하고 《십자군 이야기》 말미에서는 리처드가 자란 곳이 프랑스였기에 프랑스인들이 은근히 프랑스인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다고 까는데 사실 리처드가 영국에 애착이 없었고 본질적으로 남프랑스인이라는 주장은 영국 역사학자들이 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 중에서는 프랑스스페인을 주로 깐다. 프랑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단순하다는 점에서, 스페인은 모든 면에서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반 동로마 제국 역사관에 기초해서, 행동보다 말이나 앞서는 인간들이라고 깐다. 사실 그리스 인에 대한 비판은 너무 많이 하다보니 거의 인종차별 직전에 도달했다.

그리스 역사가들이 '적군(거의 대부분 오스만 제국군이다)' 의 수를 너무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여러번 써먹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시오노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중세, 르네상스 시대 연대기 작가라면 민족 불문하고 어느 정도 공통되는 점이다. 당연히 아군의 승리를 과대평가하고, 적군의 승리는 과소평가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끊이지 않는데, 타란토 공작 보에몽 1세가 야망쩔고 애초에 십자군 원정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 질을 악질적으로 까내리는가 하면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 관해서는 스스로가 설정하다시피 한 성격을 가지고 끝까지 그 관점에서 서술한다.

물론 레몽 드 생 질이 다소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오노 본인이 언급하듯 레콩키스타에도 참전했던 베테랑이며 당시 최대 세력으로 얼마든지 최고사령관의 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실제로 중간에 스스로의 뻘짓으로 실각하기 전까지는 보에몽을 제외한 다수의 제후들이 그의 병력과 함께 행동하며 그와 군사행동을 함께 했음을 생각하면 레몽이 보에몽에게 열등감 같은 것을 느꼈다는 식의 추측은 분명 문제가 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경우도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인물이었으면서 왜 교황이 주장하는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을까 하는 문제에 관해서 "지금까지 황제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자신을 위해서는 뭔가 한 것이 없으니" 참전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한 편 그것을 그의 아이덴티티로 삼고 그를 바탕으로 그의 행동을 해석한다. 고드프루아가 왜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체로 그의 신앙심을 꼽는 편이다. 후에 예루살렘 국왕이 아니라 성묘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나 레몽의 이기심에 질린 제후들이 곧은 성품과 예루살렘을 향해 직진하는 그에게 모인 것으로 볼 때.
또한 이 두 개의 탑이 안티오키아 공격에 필요하다기보다 공략 후 방어에 도움이 되는 곳에...(생략)...다시 말해 보에몬드(보에몽)는 영국인들이 운반해온 다량의 목재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활용한 것이다. 제후들은 이것을 알아챘을까? 고드프루아는 설령 간파했을지라도 잠자코 있었을 것이다.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는 타인의 야망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툴루즈 백작 레몽은 어떨까. 그것을 알아챌 만큼, 이 프랑스인은 영리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말 다했다. 뿐만 아니라 저 목재로 지은 탑이 라 마호메리에인데 이는 엄밀히 말해 시오노가 마음대로 해석한 점령 후 방어로 더 적합한 요새가 아니라 다리 건너 문(Bridge Gate)을 봉쇄하고 항만으로부터 오는 보급행렬을 엄호하기 위해 지어진 공격용 요새다. 만약 점령 후 수비용이라면 점령 후 케르부가의 접근 소식을 들은 십자군이 최초의 교전 직후 왜 도로 그것을 불살라 부쉈겠는가? 플랑드르의 로베르가 사흘 정도 요새를 지키고 있다가 틈을 보아 불을 지르고 다시 안티오크 성 안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보에몽이 안티오크 내부에 배신자를 만들어 두고는 있었으나 라 마호메리에는 툴루즈 백작 레몽이 꿰차고 앉았다. 레몽의 목적은 도시의 선점이었고. 두 번째 탑 탕크레드의 탑 역시 문의 봉쇄가 목적이었으며 탕크레드가 그 탑의 수비를 맡은 것도 보에몽이 신뢰하고 마음대로 탑을 지어서가 아니라 제후회의 끝에 돈을 받기로 하고 지킨 것이다.

세상에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성 수비에 더 적합한 요새를 지을 만큼 멍청한 지휘관은 없다. 무엇보다 십자군은 당시에 그 정도로 여유롭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공성전에 관해서는 영주간 분쟁으로 이골이 난 유럽 군대다. 레몽과 다른 제후들은 멍청해서 보에몽이 멋대로 구는 것을 보고만 있었겠는가?[6]

고드프루아에 관해서도 그는 전형적인 기사이자 뛰어난 전사이긴 했으되 본인이 전반적인 전략과 전술을 조율하며 싸운 경험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그에 관한 기록들은 전반적으로 열여섯에 어엿한 전사로 싸웠다든가 어느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웠다든가 공성탑 위에서 직접 쇠뇌를 들고 싸웠다든가 하는 언급뿐이다. 따라서 보에몽이 마음대로 탑을 지었다면 오히려 그것을 간파했을 것은 툴루즈 백작 레몽이며 고드프루아가 눈지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일 가능성 높은 것은 아버지 정복왕 윌리엄 따라 여기저기 전쟁터를 전전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커토즈다.

심지어는 인물 혼동도 눈에 띄는데 도릴레움 전투 당시 보에몽과 스크럼을 짜고 버텼던 인물은 플랑드르의 로베르가 아니라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다.

뿐만 아니라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흉갑이네 뭐네 하며 플레이트를 언급하는데 체인 위에 플레이트를 걸치는 트랜지셔널 아머는 아무리 빨라도 이보다 두 세기쯤은 뒤에 등장한다.

십자군 이야기 2권 에서는 예루살렘에서의 프랑크인의 풍습을 설명하는데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 ibn Munqidh)의 회상록을 주로 가져오는데 사실 이븐 문키드의 기록은 일종의 농담 문학으로 쓰여진 것으로 진지한 사료로 쓰일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완전히 뻥이 아니라면 엄청나게 과장했을 거라는 게 학계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 '프랑크 남자들은 질투심이 전혀 없는 듯 자신들의 여인들을 완전히 풀어놓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몇개의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데(아내의 침대에서 외간남자가 같이 잔다던가) 실상 중세 유럽에서는 남편이 여자나 외간남자의 모가지를 몸통에서 떼놓았을 법한 행동들이다.

마누일 1세와 그의 제국도 깐다. 예를 들어 '동로마 제국의 국력은 지나가던 십자군이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무너뜨릴수 있을 정도로 약했다.' 라던지 (...)[7]

거기다가 십자군의 크나큰 병크라고 할 수 있는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콘스탄티노플 대겁탈을 성지 순례자들이 더 안전하게 성지순례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부정적인 평가는 20세기 이전의 것이고 알비 십자군은 왜 십자군으로 불리냐는 개드립을 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알비파(카타리파)는 정교회랑 비교를 불허하는 아예 마니교, 배화교급의 이신론을 믿는 이단 중의 상이단이었다. 정교회랑 비교하면 작가의 소양이 의심될 지경.

카티리파의 사상적 기반은 기본적으로 영=정신적인 것을 선한 것, 육=물질적인 것을 악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였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공인 이전,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기독교 주류와 처절한 투쟁을 벌여왔던(...) 기독교의 대표적인 이단적 사조였다. 말하자면 고대 말기~중세 내내 기독교 주류와 피터지게 싸워왔던 이단중의 이단, 이단 끝판왕의 신학관을 계승한 이상 (중세의 종교관에 따르면) 애초에 카타리파와 가톨릭 사이에는 화해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 주요 공의회의 결정사항에 대부분 동의하면서 '난 너희가 정말 싫지만 너희가 보편교회라는걸 부정하지는 않겠어!' 정도의 사이였던 가톨릭-정교회의 관계와 비교할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일단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과 교황의 영향력을 배재하려는 남프랑스 영주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카타리파 자신의 교리 역시 번식(자손생산)을 위한 성행위를 '악'으로 규정하여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유지하는 등 당시 사회에서 도저히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 아예 현대적 관점으로 재평가하자면 그들이 종교적으로 뭘 믿건 그건 그들의 종교적 자유이니 남이 침해해서는 안 될 일이겠지만, 그런 식이면 십자군 전쟁 전체가 괜히 종교를 내세워 남의 땅에 쳐들어간 일이니 십자군 전쟁 전체가 부정적으로 재평가되어야지 4차 십자군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게 웃기는 일일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 알비 십자군이 비판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신의 이름을 내세워 저지른 온갖 끔찍한 만행들'을 들어 알비 십자군은 십자군도 아니라고 비판한다면 다른 십자군 역시 온갖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는 마찬가지였고, 특히 4차 십자군이 당대 최대의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옹호할 방법이 없다. 이 문제 역시 또 시오노답게 사료나 역사관을 교묘하게 취사선택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띄워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뭐 모 야겜같이 애매하게 미화된 형태로 어설프게 접한 사람들이라면 '하긴 같은 기독교권을 공격한 십자군은 4차 십자군 말고 알비 십자군도 있지...' 식으로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역사에 제대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최소한 당대 기준으로는 이 둘이 비교할만한 사례가 아님을 알 수밖에 없는 것.

굳이 따지자면 서구(유럽) 사회가 탈기독교화 된 20세기 이후의 역사관에서 4차 십자군에 대한 비판의 근거 중 '종교적 일탈과 배신'이 다소 약화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할수도 있긴 하겠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20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에 대한 관점 자체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19세기 이전의 역사관에서 동로마가 '저열제국'이라고까지 불리며 '망할만 해서 망했다', '망했다고 아쉬울 것도 없다' 는 평가가 주류였던 데 비해, 20세기 이후의 역사적 연구를 통해 동로마 제국이 누리던 문화적 성세와 번영이 재조명되면서 이것을 무너트린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에 대한 비판이나 한탄의 목소리도 함께 높아지고 있는 것. 요컨데, 이 역시 사료나 역사적 평가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취사선택하는 시오노적 편향의 한 예인 셈이다. 과연 베네치아빠 답이 없다


[1] 원래 구성될 3권에다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들어간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가 들어간다.[2]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반동로민+반기독교 사관을 피력했다.[3] 여담이지만 시오노의 책에서는 툭하면 '이에 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내가 전에 쓴 책을 읽으세요'라고 나온다. 과거에 쓴 내용을 장황하게 쓰고 싶지 않은 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마치 광고하는 것 같아 이야기의 맥이 끊기고 짜증난다. 다행히 《로마인 이야기》는 그러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생각해보면 '내가 전에 쓴 책' 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후에 로마 제국과 관련된 책을 또 쓴다면, '이에 관해서는 로마인 이야기 몇권을 읽으셔요' 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4] 왈론계 벨기에인[5] 벨기에의 경우 언어나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현대 국가 기준으로는 독일보다 프랑스에 더 가까운 면모를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 더구나 벨기에 남부 왈롱 지방이면 아예 프랑스어(벨기에식 프랑스어) 상용 지역인데다 제 2 언어는 프랑스어와 같은 오일제어(심하면 프랑스어의 왈롱 방언으로까지 취급받는)에 속하는 왈롱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써 현대에는 오히려 프랑스와의 통합 떡밥이 가끔 나오는 지역이다. 이런 케이스에 대해 '현대의 국가 개념을 함부로 중세 국가에 대입하지 말라' 는 소리가 나온다면 오히려 '이 인물을 함부로 프랑스계나 벨기에인으로 분류하지 말고, 당시 유럽의 주요한 정치체이던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을 충분히 감안하라'는 지적인 경우가 일반적인데... 시오노의 경우는 거꾸로 신성로마제국 영향권 출신자를 싸잡아 독일인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 이는 21세기 작가가 할법한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20세기 작가가 할만한 실수에 가깝다.[6] 애초에 공성탑이라는 이름처럼 탑은 성의 높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성전에서 공격측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이고, 수비측의 경우 성이 있으니까 공격자에 비하면 탑의 필요성이 덜할 수밖에 없다.(물론 무기의 위력으로 높이를 극복하기 힘들었던 냉병기 시대에는 탑은 어느 쪽이 가지던 좋은 도구였지만) 그런데 왜 굳이 탑을 두고 성을 공격하는데 쓰는게 아니라 성을 방어하는 무기라고 해석했는지 상당히 궁금해지는 부분.[7] 이당시 동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도 유럽에서 제일 강력했다. 더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애초에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서유럽 제후들과 알렉시오스 1세의 관계부터가 '내 종주권을 인정하고 나(와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라'고 갈구는 알렉 1세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티는 서유럽 제후&기사들의 버티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혼자 힘으로 이슬람 세력의 공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서유럽(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알렉시오스 1세 시대에도 '지나가던 십자군' 과 '동로마 제국' 간의 세력 우열은 명확하게 동로마의 우세였다는 것. 하물며 알렉시오스->요안니스->마누일의 3대를 거쳐 국력 수습에 성공한 마누일 1세 시절에는 더 말할 여지도 없다.(...) 시오노의 주장대로 '(마누일 1세 시기) 동로마 제국의 국력은 지나가던 십자군이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무너트릴 정도로 약했다'고 한다면 1차 십자군 당시의 십자군 군후들은 '지나가다 툭 치면 무너트릴 수 있는' 마누일 1세 시기보다 훨씬 약체였던 알렉시오스 1세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니 종주권을 인정하니 못하니 이상한 말씨름이나 벌이던 천하의 등신호구멍청이들이 되는 것이다.